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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는 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영석
200524 / 신령한 복으로(엡1:8-14)
한 부인이 생일을 사흘 앞둔 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꿈에 당신이 나에게 금목걸이를 선물하던데 이게 무슨 꿈일까요?"
남편은 대꾸하지 않고 넘어갔는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 또 그럽니다.
“어젯밤 꿈엔 당신이 알 굵은 진주 목걸이를 선물하던데 이 꿈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날도 남편은 대꾸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드디어 생일날 아침 아내가 또다시 꿈 얘길 합니다.
“꿈에 당신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하던데 이게 무슨 뜻 일라나?”
그러자 남편이 “기다려 봐요. 오늘 저녁이면 알게 되겠지."
그리고는 그날 저녁, 퇴근하는 남편 손에는 아내에게 줄 선물 꾸러미가 들려있었습니다.
한껏 기대하고 풀어 본 아내가 발견한 선물은 바로 "척척박사 꿈 해몽"이란 책이었습니다.
원하는 것이 한낱 꿈일 뿐이라면 얼마나 허무합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런 꿈 같은 일이 현실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언급되는 내용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선은 본문을 이해하려면 에베소서 2:8-9절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문맥상 에베소서 2:8절은 에베소서 1장 1절부터의 내용을 정리한 후에 내린 결론 같은 부분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선물로 주셨다는 내용입니다.
혹 여러분도 받으셨습니까? 무슨 선물이던가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행복하지가 않고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으며 작은 일에도 낙심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이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의 가치를 제대로 몰라 그렇습니다.
정작 하나님의 성도들이 복을 받았어도 받은 줄 모르며 심지어 그런 복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을 알고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복을 받는 사람에게는 당장의 고난이 문제가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시련과 고통이 크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난도 질병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되므로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이 신령한 복은 하늘로부터 오는 복입니다.
이 말은 신령한 복이 ‘땅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 등의 행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하는 뭔가를 얻기 위해 불교는 고행과 극기를 강조하고, 힌두교는 업보를 중히 여기며, 유대교는 율법에 연연하고, 천주교에서는 선행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복은 그런 것들로부터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만약 복이란 게 내가 잘해서 받는 것이라면 그건 이미 복이 아니라 상이 되고 맙니다. 잘했다고 상 주는 건 고맙지만 잘해서 상 받은 것이니 이미 내 영광이 앞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은 상이 아닙니다. 선물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홍길동이 학교 졸업식장에서 우등상을 탔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무슨 무슨 학교가 홍길동이에게 우등상 줬대.’ 그럽니까? 아니지요. 학교 이름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냥 ‘홍길동이가 학교에서 우등상을 탔대.’ 그럽니다. 관심의 대상이 상 주는 학교가 아니라 상 받는 홍길동에게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은 선물이 못됩니다.
간혹 성도도 뭔가를 잘해서 교회로부터 상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거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신령한 복은 행위를 통해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통해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한결같이 은혜스러워야 합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 신령한 복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사모하는 것들이 복이니 응답이니 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부터 받으려 하시기를 바랍니다.
2. 그럼 은혜는 어떻게 해야 받을까요?
공식처럼 딱 ‘이거다!’ 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은혜를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 자체가 이미 사이비이고 이단일 수 있습니다.
은혜는 본문 8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그 뜻의 비밀을 알려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게 은혜입니다. 그래서 비밀을 주신 하나님은 그 비밀을 푸는 열쇠도 함께 주셨습니다. 그 열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 10절 말씀에 기록되기를 구원의 비밀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복을 받는 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병든 몸과 마음은 어떻게 치료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떻게 우리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렇듯 신령한 복의 비밀은 예수로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문제가 풀리는 것은 그 이유가 ‘하나님의 경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경륜’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이코노미아’인데 사전적으로는 ‘관리, 경영, 행정’이라는 뜻이 있지만, 의미상으로는 '미리 설계한 것'이란 뜻입니다. 때문에 은혜가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의 설계도’를 그렇게 그리셨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풀 수 있도록…….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인생이 하나님의 설계도대로 재건축될 때, 본문 11절에 기록된 대로 우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이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생 재건축!’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입니다.
(한 번 따라하세요.) ‘인생 재건축을 하자.’
엉망진창이 된 인생이라도 재건축하면 달라집니다. 구제 불능의 인생일지라도 재건축하면 새롭게 됩니다.
상처받고 병들어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이 재건축되면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내 인생 재건축’이 여러분의 믿음의 구체적인 목표가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셨기에 무엇을 원하고 믿든 믿음대로 다 되게 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업이 되었다’는 말도 많이들 헷갈려 하시는데, 쉽게 말하자면 “등기가 이전됐다.”는 뜻입니다.
집을 사고, 팔 때도 보면, 저 사람 집이 내 집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등기 이전입니다.
등기 이전이 끝나면 그때부터 그것은 내 것이 되게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때부터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소유 즉 천국의 모든 축복이 몽땅 여러분 앞으로 등기가 이전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물론 집을 등기 이전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대가를 지불해야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등기 이전은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3:24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값없이 얻은 등기이전.’ 이게 신령한 복입니다. 이 복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셨다는 말은 우리가 이 땅에서 그 복을 누릴 자격을 가지게 하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신령한 복 속에는 기쁨도 있고 치유도 있고 기적도 있습니다. 애통하던 인생이 형통케 될 줄로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기업이 되었다는 말에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천국 주소지로 등기 이전을 하셨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성도의 사는 주소지가 바뀐 것입니다.
이사야 43:1절 말씀에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는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것이라면 우린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까요?
찬송가 549장 3절을 보면 처음 시작과 마지막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러므로 우린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것이니 살리시든 죽이시든 하나님 맘대로 하세요.”라고!
그런데 하나님은 살리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어떤 경우에서든 저와 여러분을 살리시는 은혜로 역사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겐 이런 믿음의 배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과 이런 고백이 이제까지 저와 여러분에게 있던 모든 사탄을, 마귀를, 귀신을, 그리고 그것들이 가져온 시험과 고난과 질병을 몰아내고 또 물리쳐 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린 땅에 살지만, 하늘의 주민입니다. 그러므로 땅에서도 하늘의 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격 조건은 다름 아닌 ‘믿기만 하면’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세요. 등기 이전에서의 필수 요인은 양측이 최종 도장을 찍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를 천국으로 등기를 이전시키셨다는 확인 작업으로 13절에서처럼 성령의 인치심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성경대로라면 성령의 인치심이 있기까지는 3단계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첫째가 구원의 복음을 듣는 것이요. 둘째가 복음이 믿어지는 것이요. 셋째가 성령으로 인을 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본인이 어느 단계쯤에 계시는 것 같습니까?
내 귀에 복음의 말씀이 들려진다. 성경이 나를 위해 쓰인 것 같고, 설교가 내게 주시는 말씀 같다. 그러면 그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간혹 목사님 설교가 나를 지목해서 나 들으라고 나를 까는 설교만 한다며 시험 드는 성도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시험들 일이 아닙니다. 목사님 설교가 나를 향해서만 하는 설교라고 느껴지신다면 이는 틀림없는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유로 시험에 들거나 교회를 가네 마네하게 되면 결국엔 나만 손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은혜받을 기회를 스스로 박차버리는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말씀이 내 귀에 박혀 잊혀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성령의 인치심인 줄로 알아 회개를 하시든 소망을 가지시든,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신앙적으로 대처하고 믿음안에서 행동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권면을 드립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영적인 영역에서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게 되면 반드시 이를 방해하려는 사탄의 전략도 무척이나 다양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전략이 있습니다. 세상일에 분주하여 예배는 후순위요 세상에만 온통 마음을 빼앗기게 합니다. 세상일이 너무 재미있어도 말씀이 들리지 않게 됩니다. 몸을 피곤하게 만들어 예배 중에 딴짓하게 하거나 졸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이 퇴보할 수 있는 다양한 원인도 제공합니다. 사람이 미워지면 말씀이 안 들립니다. 설교 내용이 마음에 걸리는 것도 마귀의 전략일 수 있습니다. 안내 위원석 또는 찬양 대에 미운 사람이 서 있어도 예배에 방해를 받습니다. 예배실과 주변 환경, 괜히 주변 사람들로 인해 짜증이 날 때가 있습니다.
사탄은 이런 기회들을 틈타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귀가 심하게 방해할 정도로 성도에게 있어서 복음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간혹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면서 보고 믿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당연히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영적인 세계는 '보고'가 아니라 '들음'으로써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멘"하고 믿어지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자꾸 의심 가고, 내 마음이 문득문득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면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아멘 해놓고도 ‘그런데, 그러나’ 하는 식의 사족과 토를 달면 이미 은혜는 미뤄진 것입니다.
아멘은 아멘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래야 믿어지는 두 번째 단계가 가능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확인 작업인 성령의 인치심이 있게 됩니다.
‘인친다’는 것은 도장을 찍는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성령의 인치심이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루어진 등기 이전의 일들이 확실함을 그리고 진짜임을 보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때 인침 곧 도장을 찍는 것은 "소유"를 의미합니다.
고대 왕들은 인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고대인들은 자신의 물건이나 보물에 인장을 찍어 자신의 소유임을 확인했습니다. 말이나 소, 양의 엉덩이에 불도장을 찍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같은 이치로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인치셨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 곧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는 사탄의 소유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는 지옥의 백성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둘째. 도장을 찍는 것은 "권위"를 상징합니다.
계약서를 쓸 때나 서류를 결재할 때면 도장을 찍거나 서명을 합니다. 거기엔 도장 찍는 사람의 권위가 위임됩니다. 특별히 고대 임금의 도장은 확실한 권위가 있었습니다. 국가의 원수가 도장을 찍으면 국가적 권위가 생깁니다.
그렇듯 하나님이 성령으로 내게 인을 치셨다면 거기에는 하늘의 권위와 약속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확인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권위로 하늘 복이 내 것이 되었음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도장은 "보증"을 의미합니다.
이때 "보증"이란 말은 헬라어로 '알라본"입니다. “담보물, 보증금, 선수금”이란 뜻이 있고, “미리 맛본다, 미리 가져온다. 가불한다” 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자동차를 구매할 때면 보통은 보증금, 선수금만 주고 나머지는 월부로 갚기로 하고 차를 가져옵니다. 아직 갚아야 할 돈이 많은데도 선수금과 계약서만으로도 그 차는 내 차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낸 선수금, 인도금이 '알라본'입니다.
이렇듯 아직은 아니지만 성령의 알라본은 이미 성령님께서 내 구원의 인도금, 선수금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장차 받을 구원과 신령한 복은 이미 내 것이 된 것입니다.
또한 ‘미리 맛보는 것’이 ‘알라본’입니다. 음식물을 사기 전에 시식 코너에서 미리 맛보고 결정하는 것처럼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해주는 이 땅에서의 ‘천국 시식과 시음’이 바로 ‘알라본’입니다.
다른 용례를 보자면, 직장에서 ‘가불’할 때가 있듯이 알라본은 천국 축복 즉 신령한 복의 가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이 가불이지 세상이 주는 가불과는 달리 천국 가불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이기에 갚지 않아도 되는 가불입니다.
이상의 내용이 알라본 즉 보증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는 이 보증 사역을 성령님이 해 주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사탄의 끊임없는 유혹과 공격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전 유행가 중에 ‘가시나무 새’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가사로 시작됩니다.
사실 우리 속엔 없어야 할 ‘내가’ 얼마나 많은지요?
조금만 어려워도 걱정 근심의 내가 튀어나옵니다. 조금만 맘에 안 들어도 분노와 혈기의 내가 튀어나옵니다. 때론 절망의 내가, 비겁한 내가, 교만한 내가 튀어나오곤 합니다.
그렇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린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사에 예수님 아닌 내가 튀어나오는 한, 우린 은혜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시험만 깊어질 뿐입니다.
이젠 내 안에 오직 예수님만 계시게 하는 신앙을 훈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많이 어려워도 예수님이 튀어나오게 해야 합니다. 맘에 안 들어도 예수님이 고백 되어야 합니다.
모나미 153 볼펜에 얽힌 간증을 기억하시나요? ‘153’이라 함은 요한복음 21장에서 밤새 고기잡이에 허탕 친 베드로가 이튿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시도했을 때 잡은 물고기의 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의 말씀 앞에서 그는 생각했습니다. "실패한 원인은 돈이 없었음도 아니요, 경영을 잘못해서도 아니고, 운이 나빠서도 아니다, 단지 내가 예수님 없이 했기 때문이었다."고.
이런 깨달음을 얻은 그가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사업을 시작해서 얻은 기적이 바로 모나미 153 볼펜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과연 그런 기적과 복이 그에게만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내게도 허락된 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뭐든 내가 예수님과 함께 다시 할 수만 있다면 신령한 복을 나도 받게 될 것입니다. 내 인생이 재건축되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통해 인치심 곧 보증의 도장을 찍어 주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날들 동안 필요할 때마다, 믿고 기도할 때마다, "그래 너는 네 것이니라."며 ‘축복의 도장’을 찍어 주실 것입니다. 그것도 지금 당장부터 해서 영원토록 그리해 주실 줄로 믿으셔서, 이미 주셨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령한 복이 내게도 있기를 위해 늘 기도하고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