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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할미꽃당신 원문보기 글쓴이: 빙혼서생
고구려 백제 멸망 원인
우선 고구려의 멸망에 관한 것입니다.
첫 번째에서 세 번째 부분은 전쟁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넷째와 다섯째 부분은 고구려의 당시 정치적 상황을 다룬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연개소문의 독재 정치 때문에 고구려가 망한 것으로 인식하시는데
실제 주요 원인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1차와 2차 고당전쟁을 겪으면서 고구려 경제가 붕괴되면서
그로 인한 국론분열이 남건형제의 군사 쿠테타로 이어졌을 뿐입니다.
만약 남생이 그 군사 쿠테타에서 죽었던지 아니면 남건이 쿠테타를 10년만 늦게 일으켰어도 고구려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백제 멸망은 글이 하나인데 제가 백제 쪽은 그리 자세히 공부한 것이 아니라서
글 분량도 그리 많진 않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백제가 약해서 진 것도 아니요,
의자왕이 방탕하느니, 멍청하느니 하는 근거 미약한 소리가 아닙니다.
백제는 순전히 방심해서 망했습니다.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만 영유한 백제이지만 전국에 있는 총병력이 15만에 이르던 강국입니다. 의자왕 초기에는 신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니 병력은 이보다 더 많을 것이라 상정됩니다.
그러나 글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백제는 방심해서 망했습니다.
1차 고당 전쟁의 승패에 큰 역할을 했던 설연타가 불과 1년 후인 646년 6월에 돌연히 멸망당합니다. 641년 때에는 단독으로 20만 대군을 동원해 당나라와 일전을 벌일 정도로
배짱 좋았는데 참 이상하더군요. 고당 전쟁의 빈틈을 노리고 공격하다가 오히려 1년도 안 되어서 당나라에 멸망하다니 도대체 어떤 멍청이가 군대를 지휘했길래? 그리고 그 시간에 연개소문은 뭐했나? 그런 강력한 동맹국을 날로 말아먹을 수 있는겨?
그래서 그런 의문을 갖고 몇 가지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몇 가지 자료를 찾아보니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대략 이런 추측이 가능했습니다.
630년 동돌궐 멸망에 힘을 합쳤지만 641년의 양국 전쟁으로 사이가 안 좋아진 상황에
645년 고당전쟁이 일어나서 당태종은 수십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설연타 진주가한은 당태종에게 사신을 보내서 이렇게 말하죠~
"고구려 원정 도와줘~?'
하니 당태종이
"웃기지 마! 뒷통수 때리려는거 다 알어! 오면 주우~거!"
그러자 진주가한이
"에이~진짜로~"
하면서 약을 올리는데 당태종은 그래도 꿈쩍도 안합니다.
이때 진주가한이 언제 이세민에게 사신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사신을 보낸 기록과
고구려 전선에서의 전황을 볼 때 다음과 같이 추정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주가한은 고구려 원정에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당에 2번이나 알렸습니다. 기록에는 처음 원정에 참여하고 싶다고 알렸을 때 이세민은 진주가한이 당의 후방을 공격할 의사가 있다고 판단하고 공격해 볼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오히려 설연타를 도발했지요. 그러자 진주가한은 이에 사죄하고 진심으로 고구려를 공격하겠다는 의사를 이세민에게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이세민은 이를 받아들이질 않았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진주가한이 처음부터 당의 후방을 공격할 의사가 있었다는 것과
이에 대해 이세민은 후방공격에 대해서 준비를 하였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눈치챈 설연타는 당 후방공격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진주가한은 당에 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 원정을 돕겠다는 핑계로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설연타의 후방 공격에 대해서 당이 대비를 했음을 알고 있음에도 진주가한은 또 다시 당에 대한 공격의사를 밝힌 겁니다.
이것은 고구려 전선에서 당이 점차 불리해져 감을 설연타에서 알아채고는 그 틈을 노려야 한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당이 대비를 하지 않았다면 사신 보내고 자시고 그냥 공격하면 되지 뭣 하러 그런 바보짓을 하겠습니까?
어쨌거나 그렇다면 진주가한이 첫 번째로 사신을 보내 이세민이 이에 대한 답변을 한 것은
일부 군대가 철수 한 것으로 추정되는 7월 14일(이 부분은 좀 있다가 얘기합니다.)
혹은 15일 이후이고, 두 번째 사신을 보낸 시점은 2차 주필산 전투에서 고정의군을 상대하면서 시간만 소모한 당군이 안시성을 공격할 수 있게 된 8월 초 이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록에는 사신을 보낸 시점이 주필산 전투 후 연개소문이 설연타의 동맹을 제안했다는 것으로 봐서 그 이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설연타에 사신을 최초로 보낸 것과 마지막으로 보낸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게다가 주필산 전투 후 정확히 언제 보낸 것인지도 애매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황상 연개소문이 주필산 전투 이후 불리해진 다음에야 설연타에 사신을 보냈었을까? 어느 정도 수완 있는 전략가라면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최대한 동맹세력을 만들어 적을 포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연개소문이 무능하지 않다면 설연타에 대한 군사동맹을 전쟁 발발 이전에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다고 봐야 하겠죠.
이미 설연타와 당의 관계는 641년의 전쟁으로 틀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이 주필산 전투 후에 사신을 보내 설연타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는 기록은 시간만 끌고 있는 설연타에 대한 마지막 외교 압박에 불과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더욱이 전운이 감도는 설연타와 당 사이서 진주가한이 두 번째 사신을 보낸 사실과 9월 임신일에 사망했다는 것은 두 사건 간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만약 두 번째 사신이 간 시간과 진주가한의 사망 시기사이의 공백이 길었다면 설연타가 그 사이에 점점 불리해져 가는 당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되죠. 따라서
두 번째 사신이 도착한 시기는 빨라도 7월 말에서 8월 초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거 같습니다.
참 아까 말한 645년 7월 14일 이후의 당군 철수는 이렇습니다.
7월 13일에 당군은 일부 군대가 퇴각할 때 전사자의 시체를 가지고 가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일부 군대가 퇴각 할 때 함께 귀환하라는 의미는 당군이 13일 이전의 군사회의에서 어떤 모종의 이유 때문에 일부 병력을 철수시켜야만 했다는 얘기겠지요? 그 모종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시기 설연타의 공격 가능성 때문에 위협을 느낀 당군의 판단인 때문인 듯합니다.
다시 말하면 연개소문이 설연타와 동맹을 맺으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때 이런 판단을 내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면 이 시기 연개소문 자신이 직접 움직여 당의 본토를 공격했을 가능성도 있을 거 같구요. 기록에 그 퇴각하는 군대가 언제 퇴각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분명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전사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이들을 일부 군대가 퇴각할 때 같이 운반하라는 말은 조만간 수일 이내에 있을 일부 군대의 퇴각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겠죠? 사실 몇 주일이나 몇 달 이후에 있을 일을 두고 미리 퇴각을 결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대총관급 장수인 양홍례가 1차 주필산 전투 후에 정주의 행재소에서 후방을 맡고 있는 태자 이치를 보좌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볼 때 상당수의 병력이 이 모종의 이유 때문에 후방으로 빠져나가야 했다는 것입니다. 1차 주필산 전투가 끝이 난 후 당군의 사정은 꼭 좋은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점점 깊은 수렁 속으로 빨려가 듯 점차 요동전선에서 빼도 박도 할 수 없이 불리해져 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10만에 가까운 대군을 휘하에 거느릴 수 있는 대총관급 장수인 양홍례가 가야할 정도의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퇴각의 이유와 시기가 설연타와 분명히 관계가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요?
어찌 되었든 그런 설연타의 도발 때문에 당군의 일부가 퇴각하는 시점에서
9월의 어느 갑자기 설연타 진주가한이 죽었습니다. 하필 그때!
갑작스러운 진주가한의 죽음, 분명 이상한 사실입니다. 자연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왜 하필 그때일까? 사망원인이 노환이나 병이었다면 진주가한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정권을 유지하며 당을 도발해 전쟁을 유발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전쟁준비는 이미 완료되어 있었고 남은 것은 시기를 가늠하는 것뿐이었지요. 설연타 전체에 당나라와 전쟁을 한다는 사실이 기정사실화 되어 있던
그 시점에 갑작스러운 진주가한의 죽음은 설연타의 당나라 침공에 대한 열기에 찬물을 끼얹을 만한 사건인데도 그 다음 대인 다미가한은 즉위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당을 공격했습니다.
즉위하는 과정에서 다미가한인 발작과 예망 사이에 왕위를 놓고 암투가 있었던 만큼 다미가한은 즉위한 이후에도 어느 정도 대비가 되어 있는 당을 공격하기보다 내실을 기함이 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미가한이 당과의 전쟁을 불사했지요.
단순히 다미가한의 성격이 이익에 편승하고 성급했기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설명하기 힘든 무모함입니다. 이미 전대 진주가한만 하더라도 당에 대한 공격에 대해 고ㆍ당 전쟁의 추이를 보아가며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차였죠. 게다가 이에 대해 당 태종 이세민은 일부 군대를 철수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대비도 어느 정도 해둔 상황에서 아무리 빨라봐야 10월 이후에야 공격을 시작한 다미가한이 성공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다미가한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실제로 고구려 원정에서 퇴각한 당군 주력이 설연타 방어에 즉각 나섬으로써 다미가한의 야망은 좌절되었습니다. 과연 다미가한이 즉위하자마자 당과 전쟁을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진주가한의 돌연사와 다미가한의 이해할 수 없는 당나라 원정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잠깐 삼천포로 샜는데,,,다시 돌아갑니다. 설연타가 645년 10월 초 즈음에 쳐들어갔다고 가정하고 12월에 패한 뒤의 기사를 보면 2가지 전투 기사가 자치통감에 보입니다. 646년 6월 기사에 고구려 원정을 갔던 장군들인 계필하력, 아사나사이,이도종,집실사력,장검,설만철, 등의 장군들이 설연타를 공격했다는 것,,,이때는 대치국면인거 같습니다. 왜냐면 이후 이겼다,,졌다는 내용이 없으니까요.
그런 균형 중에,,,고작 교위 벼슬의 우문법이라는 작자가 말갈과 오라호의 군대를 규합해
설연타 아파설의 군대를 공격하자 패했고,,,설연타 전체가 큰 혼란을 겪었다고 되었습니다.
이때의 오라호와 말갈의 무리는 당에 투항한 일부분일 뿐입니다. 이들의 군세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기껏해야 2~3만을 넘지 않겠죠. 그런데 이런 오합지졸을 이끌고 강대한 설연타군을 격파했다는 것은 언뜻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그 전투에서 졌다는 사실만으로
제 부가 놀라 혼란해졌다는 것은 믿기 힘듭니다. 이것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 설연타 군과 정치 수뇌부에 어떤 일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기록을 한 당나라에서는 전투 후에 비춰진 결과만 기록하였기 때문에 오라호와 말갈의 군대가 공격한 후 설연타에 몰아친 혼란의 바람을 인과관계로 연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일이라는 것은 당나라와는 큰 연관이 없음을 암시합니다. 더불어 이것은 고구려가 급속히 망해 가는 설연타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할 수 없었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 어떤 일이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자치통감』에서 1년 전 진주가한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하는 과정에서 다미가한은 계승권을 두고 경쟁자인 예망을 살해까지 해서 즉위합니다. 이것은 다미가한의 경쟁자인 예망이 가지고 있던 세력이 살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큰 규모였음을 나타내죠. 이에 대한 반작용이 큰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뒷수습을 하지 않고 다미가한은 바로 당을 공격하는 무모함을 보입니다.
내부의 혼란에 대한 다독거림 없이 당나라 공격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설연타 전체에 이 목표 하나만을 보게 했던 다미가한이 당나라 원정에 실패한 뒤 설연타 내부의 정치 수뇌부의 반응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추정컨대 대대적인 반 다미가한 세력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당나라에서 내분을 조장한 것이라면 그들의 기록에도 그에 대한 단서가 보였을 것이고 그 계획을 획책하고 실행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일들이 8개월 남짓한 시간에 가능하리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죠. 결국 진주가한이 사망할 당시부터 갈등의 불씨는 있었고 이것을 누르고 있던 당나라 정벌이 실패한 후 설연타 분열이라는 불길로 번진 것 같습니다.
『자치통감』에서는 다미가한이 성격이 급하고 편협하였기 때문에 진주가한 시절의 신하들을 시기하여 숙청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합니다. 실제로는 당과의 전쟁 이후에 일어난 불만세력의 숙청이었을 겁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불과 1년 전 당나라를 위협한 설연타가 고구려 원정에 실패로 인해 맥을 못 추던 당군에 의해 그리 쉽게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설연타 방어를 하던 당군이 설연타의 분열 소식을 듣고 설연타 원정으로 나섰던 것과는 달리 설연타와 직접적인 접촉을 하고 있지 않던 고구려에서는 전승의 기쁨과 전쟁으로 인해 손실된 피해를 회복하느라 설연타 쪽의 전황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어두웠죠. 설마 알고 있었다고 해도 남의 나라 국정에 감놔라 배놔라 할 수 없는 거고,,,,,
게다가 그 무시무시한 설연타가 설마 멸망하겠나,,했겠죠.
사실 6월 이전까지 설연타에 대해서 경계 혹은 방어를 하다가 뒤늦게야 공세로 전환된 당군이고,,,
그 이전까지는 대치국면이었던 와중에 그렇게 쉽게 무너질거라고 생각하기는 그 누구도 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결국 이것은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설연타 멸망이라는 급격한 상황변화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했던 원인이 되었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이것은 후에 연개소문이 당과는 달리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했던 이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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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년 10월 1차 고당전쟁 종결 이후 646년 6월의 설연타가 자체 내분으로 당과의 전쟁에서 어이 없이 멸망함으로써 고구려를 도와 당을 공격할 수 있는 유목세력은 사실상 사라집니다.
북방대륙에 남은 세력은 철륵의 여러 부족인데 650년대 말의 일부 철륵족의 당나라에 대한
반란 이외에는 계속 당나라에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설연타가 멸망하고 북방대륙이 당에 의해 석권되자 고구려를 지켜주던 완충지대인 요서 일대의 거란과 해라는 유목민족이 당의 압박으로 인해 하나 둘씩 당나라에 항복하거나 스스로 종속되었습니다.(자연적으로 그렇게 되었다기 보다는 당의 적극적인 거란 포섭 정책이 있었습니다.)
원래 이 요서일대는 고구려의 사주를 받거나 아니면 자체적으로 움직인 거란에 의해 중국세력이 보급기지를 둘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엽기적인 보급거리로 인해서 중국세력이 고구려로 함부로 쳐들어 올수 없게 하는 자연 방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연 방벽이 걷히게 되고 당의 힘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고구려는 한층 더 위험해 집니다. 일부 거란부족들은 아예 고구려에게 창칼을 들이밀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벌어진 660년 백제의 갑작스러운 멸망에 고구려는 요동전선에 신경 쓰고 있던 터라 발 빠르게 대처를 못하게 되죠. 결국 이 허점을 노린 당은 661년에 대규모 상륙전단을 출동시킵니다.
요동 전선에 막대한 전력을 투자했던 고구려는 의외의 한수에 막대한 피해를 입지요.
물론 이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수도 평양성에 있던 경제 기반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지요.
더 이상 전쟁을 할 여력이 없어집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강력한 지도자의 부재와 경제 혼란으로 고구려 국내는 반전파와 강경파의 국론 분열이 있었을 것입니다. 661년의 전쟁을 직접 참전했다가 계필하력에게 무참히 패한 남생은 당군의 위력을 피부로 느꼈었기 때문에 아마도 반전파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집권을 하여 당나라에 저자세로 나가게 되자 강경파는 예전 연개소문이 그러했던 것처럼 반발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결국 남생의 국내 순수를 틈타 강경파는 남건, 남산 형제를 부추겨 쿠테타를 일으키고
남생은 이들과 내전을 벌이게 됩니다. 이 내전에서 남생이 초반에는 크게 밀리지는 않았지만
전세가 조금씩 불리해지자 당에 구원요청을 했습니다.
물론 당에서는 믿을 수가 없었기에 무시했지만 다시 사신을 보내자 666년 6월에 계필하력에게 군대를 주어 남생을 구원하게 했지요. 결국 고구려에 대대적인 내분을 기회로 당에서는 총 전력을 기울여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661년의 전쟁에서 막대한 전력을 소모한 당나라에서 자국의 힘만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지는 않았겠죠. 자치통감에는 667년의 계필하력이 이끌던 병력이 50만이라고 하니 총 병력은 100만에 육박했을 가능성이 큽니다.(물론 과장일 수도 있겠죠.)
참전자들 중에서는 돌궐이나 철륵 출신의 장수들이 많은데 아마도 당에 항복한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참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거란과 해에서도 많은 부대가 왔을 겁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고구려가 패하여 멸망한 근본적인 이유는 고구려의 국론이 분열되어 내분이 일어났기 때문이지 그 당시의 전세계가 고구려를 공격했기 때문이고만 보기는 힘듭니다.
만약 그렇다면 645년이나 661년의 전쟁에서 당이 그리 허무하게 패했을 리는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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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글을 쓰다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게 글을 쓴 것 같네요. 물론 님의 말대로 북방민족의 당 복속이 고구려에게 치명타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타격은 되지 못합니다.
646년 6월에 설연타의 어이없는 멸망으로 고구려를 도와 당을 협공할 수 있는 세력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당에 복속한 철륵의 제 부족이 차지하게 됩니다. 661년 당의 고구려 침공 이전과 당시에 몇 부족이 반란을 일으키다 진압된 것을 제외하면 이 지역의 상당수 유목기병들은 당의 고구려 원정에 큰 힘을 실어줍니다.
이전 수나라와의 전쟁과는 달리 야전에서 강한 모습을 보이는 유목기병의 활용은 당나라가 공성과 야전에서 고구려에게 우위를 점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유목기병이 모자란 머릿 숫자와 충분한 전력을 채워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의 힘으로도 645년과 661년의 요동방어막을 뚫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645년에는 보급로가 길어서 패했고 661년에는 요동방어막으로 침공했던 병력이 상대적으로 적어 역으로 전멸당하는 수모를 겪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661년 전쟁에서 고구려가 요동방어막에 전력을 치중하고 있다는 약점에 주목한 당이 주력을 평양성으로 상륙전단을 보냈습니다.
상륙 전단이 상륙한 것이 661년 7월 즈음인데(정확히 언제 상륙한 것인지는 알수 없습니다. 대략 7월 즈음인 것 같습니다.) 해상으로 침투한 전력중 9월에 계필하력이 이끄는 요동도행군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이듬해 1월에는 임아상이 이끄는 패강도행군, 방효태가 이끄는 옥저도행군이 전멸하며, 2월에는 소정방의 평양도행군이 신라군의 구원미를 보급받고 황급히 평양성에서 퇴각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 육상으로 오는 정명진이 이끄는 누방도행군은 아예 전투기록도 없고 소사업이 이끄는 부여도행군 역시 10월 이후 철륵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말도 안되는 명분을 가지고 요동전선에서 퇴각합니다.
전쟁 발발 7개월 동안 평양성이 당의 대군에 포위를 받고도 무사했고 요동방어막으로 침공한
2개 군 12만명 이상(행군 수가 11개 행군 정도로 추정)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병력을 역으로 전멸시키는데 성공합니다. 당시 고구려의 전력이 방어만 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큰 경제적 피해를 감수하는 한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668년 고구려 멸망 때는 조금 상황이 달라집니다. 대강 상황을 보면
666년 5월에 남생이 아들 연헌성을 보내 구원요청을 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대형 염유나 불덕을 보내서 구원요청을 했지만 당에서는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섣불리 나갈 수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증거지요. 지금 생각이지만 당에서는 고구려에서 내전이 빨리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당으로써도 고구려 정벌은 이제 상당히 껄끄러운 문제가 된 것입니다. 663년 8월에 고구려와의 전쟁을 멈추고자 하는 의지로 배만드는 공사를 철회한 것이 단적인 예죠.
그런데 665년 10월 즈음(염유와 불덕, 연헌성이 사신으로 갔던 시간과 자잘한 사건을 합쳐 나온 계산입니다.)에 연남건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665년 5월, 헌성이 당에 도착할 때까지 내전이 장기화 되자 당에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군대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고구려와의 전면전은 아니지요. 6월에 전투에 나선 계필하력의 군대는 어디까지나 국내성에서 현도성까지 밀려난 연남생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잘못 알고 계신 것이 이때의 전투는 엄밀히 말해서 고구려 원정의 시작은 아닙니다. 신성을 공격하기 위해 계필하력이 겨울을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9월에 계필하력이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당 고종이 연남생에게 현도군공의 작위를 내리고 이후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계필하력은 최소한 2월까지는 연남생과 함께 현도성 주변에 주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곳에서 전투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전면전의 성격은 띄지 않는다는 것이겠죠. 이것은 당에서도 워낙 급작스러운 전쟁이라 갑자기 막대한 전력을 투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쨋거나 이전에 요서지역에 있는 거란을 복속시킴으로써 보급로에 대한 습격우려를 최소화 했지만 그래도 대규모 보급기지를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현도성의 당 점령은 큰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보급기지의 획득만 아니라 연남생은 고구려의 각종 군사기밀은 물론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고구려가 지리적 이점을 통한 전략 수립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667년 2월에 이제 본격적으로 고구려 원정을 위한 원정군 편성이 시작됩니다. 신당서를 보면 이때 이세적이 신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되어 있는데 거리나 시간상 말이 안되는 것으로 봐서 계필하력이 칙명을 받고 현도성에서 출발하여 신성 주변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 후에 총사령관인 이세적의 공격으로 잘못 쓴게 아닌가 합니다. 어쨋거나 2월부터 발빠르게 시작된 고구려 원정은 667년 9월 신성 함락으로 큰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요동성도 아니고 건안성도 아닌 신성에 모든 전력을 투자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이는 역으로 동시에 3곳을 공격할 정도의 힘은 갖추지 못했다고 봐야 합니다.(요동성이나 건안성으로 병력을 보냈을 수도 있지만 원병을 보내지 못하게 하는 수준의 병력이었을 겁니다. 전투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지요. 아니면 보냈더라도 이를 압도할 만큼 막대한 전력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처참하게 패했으니 쪽팔려서 안적은 것이겠죠.)
물론 병사의 머리 숫자는 더 많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정예인가 아닌가 라는 문제겠죠. 원래 계획에도 없다가 고구려의 내분 때문에 갑자기 생긴 전쟁이기 때문에 정예인 부병 이외에도 많은 숫자의 징집병이 포힘되었을 것입니다. 내분만 아니었다면 고구려에서도 전력의 분산 없이 당을 막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여성 점령을 예로 드셨는데 이는 북방민족의 당 복속도 한 원인이 되지만 667년 9월의 신성점령이 아니었다면 당으로써는 엄두도 못냈을 것입니다. 당에서 초원을 이용할 수 있지만 고구려라고 이용 못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고구려에서도 북방 유목기병 못지 않은 기병 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부여성을 공격했다가는 역으로 고구려에 의해 보급로를 차단당할 우려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신성을 고사시키기 위해서 부여성을 먼저 공격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죠.
그리고 한가지 잘못 알고 계신 것이 35개군 얘기는 당태종이 아니라 당 고종이며 그때는 661년 전쟁이지 667년 전쟁이 아닙니다. 자치통감에는 667년 전쟁에서 계필하력이 이끌던 병력이 50만이라고 하는데 총 병력을 다 합치면 100만은 되겠지요. 이 병력 중에는 어중이 떠중이도 있을 것이고 북방 유목기병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력을 가지고도 요동방어막을 다 뚫지 못했고 그나마 전력을 다 투자해 신성과 부여성을 함락시키고서야 요동방어막을 무시하고 평양성으로 직행할 수 있었습니다. 평양성이 포위된 뒤에도 661년 전쟁에서처럼 더 버틸 수 있었지만 신성의 배반으로 인해 어이없이 함락되었습니다.
결국 북방 유목민족의 당 복속이 연쇄적으로 본다면 고구려 멸망의 한 원인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정적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랬다면 그 이전 전쟁에서 이미 요동방어막에 구멍이 났어야지요. 고구려의 국론 분열로 인한 내분이 아니었다면 현도성이 당으로 넘어가 보급기지가 되었을리는 없습니다. 유목기병은 이런 기회에 부응해 주는 역할에 불과합니다. 그 이전 전쟁에서도 보급로 문제 때문에 유목기병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물론 유목기병은 자체 보급이 됩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 해주는 당의 부병들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면 군인이 아닌 전사인 유목기병들은 뿔뿔히 흩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위에서 말한 요소 중에서 한가지라도 제대로 병행되지 않았다면 고구려의 멸망이 조금 더 늦춰질 수도 있을 거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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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야 여러가지로 복합적이지만 직접적인 이유는 연남건의 쿠테타가 적극적인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실 이거 때문에 고구려가 내전으로 돌입하게 된 것이죠. 단순히 권력욕 때문에 이런 쿠테타가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황을 보면 665년 10월 즈음에 벌어졌을 것으로 보이는(이건 제 추정입니다.) 연남건의 쿠테타는 642년의 연개소문의 혁명과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대치를 시켜보면 연남생=영류왕, 연남건=연개소문이라는 구도가 됩니다. 정치적 성향을 봐도 비슷한 면이 있죠.
연남생과 영류왕은 양 대전을 치른 후에 피폐된 고구려 경제를 우선적으로 살리는데 주력하기 위해 전쟁을 의도적으로 피하려는 면이 강합니다. 물론 이 이면에는 수나 당의 국력을 두려워하는 면도 없진 않겠죠. 특히 연남생의 경우 당나라 계필하력의 군대에 대패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는 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연개소문과 연남건은 대외 강경파적인 성격을 보입니다. 연남건이 정권을 잡은 뒤의 시간이 길지 않아서 사료가 거의 남지 않았긴 하지만 당에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상당히 강경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물론 연남생 정권의 성향을 봤을 때 그에 반대하는 것으로 충분히 증명되지만요.
이 두 시대 모두 전쟁으로 인한 피해 복구를 위해 당나라에 저자세를 취하며 기존의 정권 집권을 유지하려는 보수귀족세력과 전쟁이 없어진 뒤 공을 세우지 못하고 하위직에 머무르며 불만이쌓이는 소장파 장수들 간의 대립이 첨예한 시기입니다. 필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권력 욕심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보는 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혁명은 성공적으로 고구려 국론을 하나로 묶는데 성공했지만 연남건은 그러질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경제력 약화에 따른 국론 분열이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연개소문이 쿠테타를 일으킬 시점에 영류왕은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거의 만회한 시기였습니다. 시간도 2~30년 가량 흘러서 사실상 전쟁의 처참함을 경험한 세대는 물러나고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점차적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잡아가던 시기입니다.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어졌으니 그 다음 남은 일은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지요.
그런 상황에서 왕이라는 작자가 외국에 저자세로 나옵니다. 뭐 소국이면 백성들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습니다만 고구려는 대국입니다. 자존심 문제를 떠나서 대국이 그렇게 약하게 나오면 주변국들이 우습게 아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정계를 주도하는 인사들이 이런 점을 모를리도 없고 백성들도 자존심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 힘든 문제입니다.
거기에 적국인 당의 국력은 점차적으로 강력해지고 고구려에 대한 적대 행동을 강화해가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키니 거국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연남건의 쿠테타는 그러질 못합니다. 우선은 662년 2월에야 2차 고당 전쟁이 종결되었기 때문에 경제를 회복할만한 시간적 여유가 되지 못했습니다. 3번에 따른 전쟁을 그대로 몸으로 부딧혔기 때문에 수십년간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사라졌지요. 대략 1세대의 인구가 초토화 된 상태에서 최소한 1세대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이상 사람들이 가지는 전쟁에 대한 혐오감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전 수나라와의 대전에서는 그나마 직접적인 대전을 고수 2차 전쟁 밖에는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좀 덜하지만 당나라와는 그런 대전을 2번이나 겪었고 고당 2차 전쟁 이전에는 계속적인 국지전으로 국경지대의 긴장상태가 수십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과연 사람들이 전쟁을 하고 싶어하겠습니까? 먹고 살기도 바쁜데 당나라 때려부수자 하면 과연 얼마나 동조를 하겠습니까? 이 당시 연남생 정권이 전쟁을 의도적으로 피할 수 밖에 없던 배경이 여기에 있습니다. 뭐,,수나라와의 대전 이후에 세력이 성장했던 수성적인 성향의 전통 보수귀족계층이 이때에도 연남생의 배후가 되었겠지요. 이들의 바램 때문이 아니더라도 고구려는 전쟁을 그만두어야 할 정도로 국력이 피폐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급한것은 고구려였기 때문에 연남생은 영류왕이 그랬던 것 처럼 상당히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가면서까지 당나라와 화친하려 했습니다. 태자를 663년의 봉선제사에 파견했던 것이 그것이죠.
때문에 연남건의 쿠테타는 일부 소장파 장수들이 연남생 정권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이를 연남건에게 부축여서 벌어진 것입니다. 단순히 연남건의 권력욕 때문이라고 보기만은 힘듭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명분이라고 해야겠죠. 지방 군대의 지휘관들 말입니다. 아무리 중앙에서 권력을 장악한다고 해도 지방에서 이를 따라주지 않는다면 헛수고일 뿐입니다.
결정적으로 영류왕은 쿠테타가 벌어진 뒤 바로 잡혀서 살해당했지만 연남생은 국내 순수중에 벌어졌기 때문에 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연남건의 실책 중하나가 바로 연남생을 평양성에서 죽이지 못하고 국내성으로 몸을 피할 시간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구심점의 유무가 승패의 주요 관건이었던 셈입니다. 때문에 국내지역에서 중앙에 반기를 들었던 연남생에게 상당 세력이 동조했던 것이구요. 만약 연남생이 평양성에서 영류왕이 살해당했던 것 처럼 그 역시 죽임을 당했다면 고구려 국내에 내분이 일어나는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기에 외부의 위험을 인식하기 힘들었다는 것도 쿠테타 실패의 이유가 됩니다. 연남생의 권력 장악으로 대당 화친정책을 펼치고 국력 소모가 심했던 당나라가 663년 8월에 전선 만들기를 중단할 정도로 전쟁 의지가 약화되었기 때문에 고구려 내에서 전쟁에 대한 위험을 642년 때 보다 훨씬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보통 국론을 모으는데 외부의 위협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연남건의 쿠테타는 시기를 잘 타질 못했습니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독재정권이 붕괴된 뒤에 벌어진 권려 괴리가 문제라기 보다는 경제력 약화로 인한 국론 분열이 가장 큰 원인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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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연개소문이나 고구려 멸망에 관한 글들을 보면 꼭 빠지지 않고 연개소문 정권의 독재성을 들고 나오곤 합니다. 그거 때문에 고구려가 망했다는 식으로 초점을 잡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저는 그런 글 볼때 마다 드는 생각이 '아니, 그 당시에 독재정권 아닌게 어딨어?' 였습니다. 사실 전제왕권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쉽게 얘기해서 왕의 독재정권이 아닌가요? 물론 연개소문은 왕은 아닙니다.
역대로 독재정권 한 사람 많았지만 멸망으로 결말지어진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정국의 이합집산이 일어날 때 적절한 인물이 나타나서 그런 혼란을 종결짓는다는 의미에서는 독재정권이 꼭 부정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면을 떠나서 과연 연개소문 정권이 정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독재 정권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삼국사기나 신,구당서 계열의 사서를 보면 연개소문이 정권을 휘어잡고 왕조차 함부로 못대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승자라고 할 수 있는 당의 일방적인 기록을 위주로 서술된 사료이기 때문에 정말로 그런 것인가에 대해서는 100% 확신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면 그 확신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맥 놓고 있어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구려의 기록이 없다면 제 3자가 쓴 단편적인 기록이나마 참고를 해봐야 겠지요. 그것이 아니면 왜곡을 한 기록이 있더라도 사실이 아닌 부분은 분명 윤색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어색한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일본서기 황극천황 2년 조에는 연개소문으로 추정되는 이리가수미가 왕을 포함, 이리거세사를 죽이고 동성인 도수류금류를 대신으로 내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의 대신은 대대로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도수류금류는 후에 15만 대군을 지휘한 대로 고정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병도는 동성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이리거세사와 도수류금류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하고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동성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동성이라는 표현은 같은 동부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라고 봐야 할 듯합니다.)
만약 연개소문이 독재정권을 지향했다고 한다면 아무리 정치적성향이 비슷한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이 전면에 나서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얼굴마담 형식일 수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얼굴마담에게 고구려 총 병력의 반이나 3분의1에 해당하는 15만에 달하는 병력의 지휘권을 주지는 않지요. 그것도 국가 비상시기에 말입니다. 15만 대군을 이끌 역량이 있을 정도로 실력이 있는 사람에게 얼굴마담을 시킨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입니다. 이것은 고정의가 연개소문과는 다른, 일정한 실권을 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입니다.
또한 삼국사기를 보면 보장왕이 647년에 왕자 임무를 막리지에 임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연개소문이 왕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전권을 휘둘렀다면 자신이 세운 꼭두각시 왕이 힘을 기를 여지를 주지 말아야 함에도 왕자 임무는 막리지에 임명됩니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의 권력 세습이 문제가 됩니다. 권력 세습은 독재 정권이 부패화 되었을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유가 다 있습니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멸망에 이르는 순간까지의 정치제도를 보면 한가지 특이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관직의 세습성입니다.
모두루 묘지명(저는 이 묘의 주인이 모두루가 아닌 염모라고 생각합니다만,,,)을 보면 고구려 건국 초기부터 한 귀족가문의 권력 세습이 쭉 내려져 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적어도 이 묘지명이 나오는 장수왕 초기까지는 귀족 가문의 권력 세습성이 나타납니다. 이후 장수왕이 평양천도를 행하고 그에 따라 귀족가문의 전면적인 세력 개편이 이어지긴 했지만 안장왕 말기의 정치 혼란으로 원상복구됩니다. 결국 고구려 멸망까지 일정 가문의 권력세습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어느 시대나 나타나는 문벌 가문의 보편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음입니다. 고구려 말기의 각 귀족가문에 대한 자료를 모아보면 단순히 권력의 세습이 아니라 관직의 세습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삼국사기를 봐도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관직인 동부대인의 직위에 오르려고 하자 각 귀족들이 반대하여 이루지 못했기에 빌어가면서 까지 간신히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관직의 세습이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이것은 천남생 묘지명에서 누대로 막리지의 관등에 있었던 것을 감안 할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고자묘지명에서도 관직이 반드시 세습된 것은 아니지만 일정 이상의 관등과 직위를 세습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그 당시 연남생 3형제가 점차 권력을 세습해과는 과정은 고구려인에게 있어서 그리 큰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설사 그 세습했던 측면이 독재정권의 강화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독재정권의 경직성 때문에 고구려 지도층의 일부 분열의 여지를 줄 수는 있었지만 고구려가 멸망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미 연개소문 정권 이전부터 이런 불씨는 있었왔습니다. 굳이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터질 수 있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국가 말기현상 같은 망조라고 보기도 힘듭니다. 어느 시대나 좌익이 있다면 우익이 있기 마련이지요. 제가 보기에는 그것은 결과론적인 해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이전 시대에도 고구려가 멸망의 위기를 겪은 사실도 있지요. 내분에 의해 나라 전체가 두동강이 날뻔한 적도 있습니다. 일부 지도층의 국가적 배신도 없는 것이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멸망 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문제일 뿐입니다. 강도가 약했을 뿐 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고구려 700년 사직을 보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 시대에는 이를 헤쳐나갈 수 있었지만 668년에는 이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고구려가 멸망했던 것입니다. 좀 강도가 심했던 것이지 당시 고구려가 너무 오래되어 망쪼가 든다든지 아니면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망했다고 보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나름대로 그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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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에 관해서(인제야 백제가 나오네요)
백제의 마지막 병력이 불과 5천밖에 안됐다? 그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황산벌 전투에서 부여계백이 거느린 병력이 5천에 불과했을 뿐이죠, 그리고 그 전투에서 관등이 달솔이었던 부여계백이 5천을 거느렸었고 함께 출전한,,좌평 ##와 달솔 @@ 있는데(이름이 생각이,,ㅇㅅㅇ;;; 좌평이 상영이었던가? 거참,,) 뒤에서 말하겠지만 멸망 전의 백제 병력은 10~15만 정도 됩니다
전투지휘관이 아닐 가능성도 있지만 이들도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면 최소한 1만 5천에서 2만명 정도의 병력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상대하고 있던 신라의 5만 대군은 국경지대를 수비하는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동원 가능한 전 병력을 모았을 겁니다. 걔 중에는 훈련도 제대로 안된 민간인도 있을법 했겠죠. 오죽하면 국지전도 아니고 전면전에 화랑과 낭도를 내세울 생각까지 했겠습니까? (한가지 오해들 하시는 것은 화랑은 무력단체, 특수부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화랑은 산천 유랑과 자기 수련을 목적으로 하는 신관적인 모습이 더 강했고 이들 중 수행의 한 방편으로 무예를 익히거나 좀더 발전해서 전투에 참전하는 정도였을 분입니다. 세간에 전해지는 고구려의 조의 선인이 오히려 더 무력단체에 가깝지 않을까 싶군요. 뭐 그건 저만의 생각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신라가 약해서라기 보다 백제에게 하도 당해서 그런 결과라고 봐야겠죠. 신라가 백제를 멸망하구 부흥군 세력을 정리하고 난 뒤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에 당나라의 요청으로 신라는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평양까지 진격합니다. 과장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순 없지만 의자왕 즉위 전에 백제나 신라가 그 국력이 비등한 국가란 것을 상기한다면 신라의 5만 대군 운운, 혹은 20만 대군 운운이 완전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라는 겁니다. 뭐,,개인적으로 그 20만 대군은 뻥포가 아닐까 생각하긴 하지만,,백제 부흥군 정리하는데 들어가는 병력도 있을테니 말이죠. 한 10만이 좀 넘어가는 병력을 20만이라고 뻥포를 쳤을 수도,,
그리고 제가 계산하기로는 백제가 멸망 당시만 하더라도 국내에 산재한 병력 전부를 합하면 얼추 10만에서 15만 정도의 병력이 나옵니다. 기록에 5방에는 각기 10여개의 군이 있는데 각 군에는 방령 3명이 각기 1천명을 지휘한다,,란 기록이 있거든요. 그러면 50 X 3 X 1000= 15만이 됩니다.
총 병력으로 따지자면 나당 연합군 18만에 비해 압도적으로 밀리는 형세는 아니었다는 겁니다. 만약 이정도 병력이 아니었다면 의자왕 시기에 한강유역까지 차지하던 신라를 멸망직전까지 몰아붙였다는 건 제대로 설명하기 힘든 겁니다. 그렇게 볼 경우 이정도의 병력에다 거기에 홈그라운드라는 지형적 우세도 고려한다면 백제가 분전했을 시 격퇴도 가능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단지 병력이 전국에 산재되어 있었고 그에 반면해 나당 연합군은 백제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급속히 전개했기에 병력이 모일 만한 시간도 부족해 중앙의 병력만 가지고 상대를 해야 했기에 그런 참패를 당한 겁니다. 당시의 수군은 주로 연안항해를 하던 터라 고구려를 통과해야만 백제로 올 수 있었고 백제 역시 당군의 대규모 수군 동원능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겠지만 그 힘의 투사가 고구려에게 될 것이라 예상을 했기 때문에 별다른 주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백제 공격 당시 당군은 연안항로가 아닌 황해 사단항로를 사용하는 엽기적인 행각으로
백제 조정을 경악시켰습니다. 이 엽기 행각은 2차 고당전쟁에서 또 한번 벌어집니다.(고대에는 항해술이 그리 발달하지 못해서 대규모 병력 수송은 연안항로를 사용합니다. 만일에 있을 기상변화로 인한 항로 이탈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함이죠.)
또한 작전상의 문제도 있었겠죠? 당나라쪽은 제가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13만 대군 전체가 수군이 아닌 수송병력이라고 해도 당시 수군은 근접 전투를 벌이는, 이른바 배만 타고 있는 육군의 개념이나 거진 다름 없었기 때문에 배위에서의 전투에 대한 적응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숫자의 차이를 메꾸기는 힘듭니다. 백제 수군이 아무리 많아본들 5만 이상이라고 보기는 힘들테고, 또한 한점에 집중되지도 않았을 테니 해상에서 그 병력을 막기란 사실상 불가능이죠. 거기에 백제가 당군의 침공 사실을 안 것은 당군이 신라 덕적도에 도착하여 신라군과 집결하고 나서도 한참 후였습니다. 바다에서 막기는 이미 글렀기 때문에 백강 하구를 막아야 하느니, 아니다. 백강을 거슬러 오게끔 해야 하느니 하는 논의를 했던 겁니다. 정보 부족으로 인한 어이없는 일이었죠.
더욱이 657년 1월에 백제 의자왕이 자기 자식들 41명에게 좌평의 직위를 주고 그에 걸맞는 식읍을 내려주어 다스리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에게 보좌할 병력 군사 1천명만 주어도 4만 1천명이 지방에 분산되어 있다는 얘깁니다. 실제로 그렇게 주진 않았겠지만 아마 중앙에서 지방에 대한 병력 보강을 하지 않았을까 싶군요. 중앙에서 급속히 전개할 기동병력이 얼마 없었던 겁니다.
결국 백제는 자만하다 어이없이 망했다는 겁니다.
ps: 일부 공부하시는 분들은 백제가 고구려 때와는 달리 13만 병력에 깨진 것을 두고 백제가 힘이 없었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 병력은 배를 타고 온 병력이라는 점을 유념해두시기 바랍니다. 현대 개념으로 보면 상륙전 개념으로 이것은 현대에서도 전무후무한 규모입니다. 단 한번 수송으로 13만 대군을 수송했기 때문이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첫 수송에서는 8만명인가 수송되었습니다. 어쨋거나 일반적으로 이정도의 병력이 배를 타고 오려면 100명 타는 배 기준으로 1300여척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동원된 배는 1900척이라고 삼국유사에서 전합니다. 16세기 말 세계 최강의 해군인 조선수군도 120명 타는 판옥선 숫자가 200척을 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당군은 한마디로 미친 짓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2차 고당전쟁에서 당군은 이보다 더 미친 짓거리를 합니다. 백제 멸망때의 배 숫자 3배를 동원해서 고구려 평양성을 향해 상륙전을 벌이죠. 그렇습니다. 전선 4~5천척을 동원합니다. 이 배 만드느라 당에서는 반란도 부지기수로 일어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