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
주님, 그리고
25년의 약속
1993년 7월,
나는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주님께 나 자신을 봉헌하고, 수도자로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의 삶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길로 흘러갔다.
1996년경,
나는 온몸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고,
겨우 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수도자로서
주님께 봉헌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정작 나는 내 몸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깊은 좌절과 절망에 빠졌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고,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때로는 삶 자체를 비관했고,
결국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부끄럽고
두려운 시간이지만,
당시의 나는 그만큼
절망 가운데 있었다.
몸의 고통뿐만 아니라
마음의 고통까지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께 마지막으로 매달렸다.
“주님, 다시 살게 해주십시오.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제 남은 삶을 주님의 도구로 살겠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님께 드린
간절한 약속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몸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몸과 마음에 남아 있던
상처와 고통은
여전히 나에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시간을 지나며
내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수도자로서의 삶을 내려놓고
새로운 길을 선택하였다.
그것은 주님을
떠나는 길이 아니라,
내가 주님께 드렸던 약속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길이라고 믿었다.
2001년, 11월
나는 울산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터전을 만들기로 했다.
나 자신이 장애로 인해
깊은 절망을 경험했기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말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의 불편함을 헤아리고,
작은 표정과 눈빛 하나에도
마음을 기울이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주며,
무엇보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길이 지금의 착한목자의 집으로 이어졌다.
지난 25년 동안 나는 수많은 어려움과 한계 속에서도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왔다.
시설을 운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었고,
인력과 운영의
어려움도 있었으며, 때로는 나 자신이 지치고
소진되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1990년대의
나를 떠올렸다.
온몸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나.
그리고 다시 일으켜 달라고
주님께 매달렸던 나.
그때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장애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먼저 생각한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 하면
함께 먹으러 가고,
바다가 보고 싶어 하면
바다로 데려가고,
카페에 가고 싶어 하면
함께 카페에 가고,
교육과 재활이 필요하면 좋은 프로그램을 찾아주고,
지역사회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경험을
계속 만들어주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주님께 드린 약속을
살아가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주님, 다시 살게 해주시면
당신의 도구로 살겠습니다.”
나는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2026년.
1996년 온몸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의지했던 내가
지금은 거의
건강을 회복했다고 느낀다.
직접 걷고, 사람들과 함께하고, 장애인들과 지역사회에 나가고, 여행도 하고,
다시 일상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나를
다시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주님께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고.
그리고 그 이유는
단순히 내가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내가 겪었던
절망을 통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게 하시고,
내가 받았던 고통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품게 하시고,
내가 다시 얻은 삶을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지금도 부족한 사람이다.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앞으로의 길이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는 한때 삶을 포기하려 했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살아가고 있다.
1996년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 주님께서
2026년의 나에게도 여전히 말씀하시는 것 같다.
“네가 다시 일어난 것은
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남은 삶도 주님의 도구로 살아가고 싶다.
장애인들의 곁에서,
그들의 작은 행복을
지켜주면서,
그들이 존중받고
사랑받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사람으로.
그리고 언젠가
이 길의 마지막에 섰을 때,
“주님, 제가 잘하지는 못했지만
당신께서 다시 살려주신 삶을
당신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나의 지난 삶은
실패와 고통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시 일으켜 세우신
주님의 은총과
그 은총에 응답하며 살아온
25년의 이야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