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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 에 대한 세계각국의 평가
"홍명보선수는 한국의 기형적인 축구시스템이 낳은 기형아이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저런 선수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94년 월드컵 이탈리아의 해설자
"한국이 예선 탈락 한것은 결코 한국 축구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차범근감독은 홍명보 같은 유능한 선수를 몰라봐 그를 공격수로 쓰지 안았기 때문이다.
-98년 비쇼베츠 감독
"만약 홍명보 황선홍이 유럽, 남미 선수 였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펠레
“홍명보가 만일 지금 다시 축구를 시작한다면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유럽에서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 인터내셔널해럴드트리뷴(IHT)의 칼럼니스트 랍 휴스
"마치 두명의 말디니가 서있는 것 같군요."
-세계 올스타 경기에서 말디니와 함께 수비를 조율하는 홍명보를 보고 이탈리아 해설자
"나폴리를 떠나 유벤투스로 가게된 치로 페라라의 자리를 홍명보선수로 메우고 싶었는데 안타깝다."
-94년 홍명보 선수 영입에 5년간 실패한 나폴리 구단주
"J 리그에서 어떻게 해서든 결과를 남기겠다."
-홍명보 선수가 처음 J 리그 가서...일본 취재진의 최고 연봉을 받은 것을 알고 있냐는 질문에
(결과:가시와 레이솔 나비스코컵 우승및 종합3위. 그 다음해 종합 2위.
한국인최초로 J-LEAGUE에서 주장. 이 때 일본에서는 유럽선수도 아니고 한국선수를
그렇게 비싸게 데리고 오는 것에 대해 반감이 컸다는군요. 이것도 조금 빈정거리는 투로 질문했답니다.)
"홍명보선수를 귀화시키자.
나카다와 홍명보를 주축으로 팀을 운영하면 월드컵에서 4강이상 이룰수 있다."
-일본의 축구해설자 (처음 J-리그 갔을 때 나카타와 같은 팀에 있었다죠..)
-장래 J리그의 감독이 될 생각은?
"일본의 팀은 인솔하고 싶지 않다. 나의 영혼은 항상 한국에 있다."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감동한 멘트입니다.
일본에서 주장으로 뛰면서 하위권 팀을 우승까지 이끌자 일본 신문에서는
그런 가능성까지 점치고 그랬나봐요. 근데 이 대답때문에 엄청 배신감 느꼈다네요...
그당시 이 기사때문에 일본인들한테 한국으로 가라고 욕두 많이 먹었데요.)
나카타가 본 홍명보
"그는 세계최고 레벨의 선수다. 아시아에서는 비슷한 선수조차 찾을 수가 없다.
(벨마래 시절) 나조차도 그의 말을 따르며 볼을 찼다. (그가 아시아를 벗어난선수
인것이 분명하기에) 아쉽다. 더 큰 무대로 갈수 있었다"
- 월드컵 직전의 인터뷰 중에서
94년 한국 vs 독일 전 홍명보 골 을 본후 루디펠러 전 감독
" 한국에 홍명보 같은 선수가 있는지 미처 몰랐다.
한국이 만약 아시아 가 아닌 유럽 이라면 피파랭킹 1위는 당연이 한국이였을 것이다."
"이번에도 일본에게 지면 차라리 축구화를 벗겠다."
-일본과 평가전을 위해 소속팀(가시와)에서 국대로 떠나는 홍명보에게
경기 결과가 어떻게 될거 같냐는 질문을 한 일본 취재진에게
(이 대답에 일본 취재진들이 다들 놀랐다는군요...역쉬 멋집니다.
이때가 일본에게 연패를 당하고 처음으로 가지는 평가전이었죠...결국 이겼습니다.
93년 일본에게 진후에도 "다시 일본에게 진다면 축구화를 벗겠다"는 말을 했던 적이 있어요.
그후 홍명보가 있었을때는 한번도 진적이 없었지요.)
"골대를 지키고 있다 보면 앞에 선 등번호 20이 얼마나 크게 보이는지 모른다."
-가시와의 골키퍼 미나미...홍명보 선수가 오면서 수비가 비약적으로 안정되었다면서..
(98년 가시와레이솔 => 경기당 실점율 1.7점 그런 하위권팀
99년 가시와레이솔 => 경기당 실점률 0.8점(홍명보입단후) 수치만 봐도 그의 효과는 명명백백)
"오늘 홍명보 선수 완전히 부심이네요."
-2001년 수원에서 열린 대륙간컵(호주와의 경기)을 중계하던 해설자
경기장 분위기에 얼어서 스크린쪽 부심은 반칙도 가려내지 못하고
상대방이 거칠게 나오자 우리 선수들을 자제시키면서 반칙이 나올때마다
주심에게 일일이 찾아가 반칙내용을 지적하고.. 퇴장까지 얻어내는 홍명보를 보며....
(이 경기 다들 아시죠?? 우리나라 유럽에 줄줄이 5:0으로 패하고
사진 게시판에서는 멱살잡힌 홍명보 사진으로 유명했던 그 시절이랍니다.)
"4강 진출가능성은 적지만...불가능하진않다...프랑스가 우리를 5:0으로 이겼듯이
우리도 호주를 5:0으로 이길수 있다..그것이 축구다..
우리는 종료휘슬이 울리는 마지막순간까지 최선을 다할것이다."
-다시 5:0으로 지고 가진 인터뷰에서...선수와 감독을 비난하는 듯한 질문을 하는 취재진에게
( 이 멘트로 우리나라에는 비난이 줄고 모두들 희망을 품었지만..
지금은 월드컵 4강으로 다 보상 받았지만..)
수상경력
1992 Ι K리그 최우수선수(MVP), 베스트11 수비수 부문 선정
1994 Ι K리그 베스트11 수비수 부문 선정
1994 Ι AFC베스트 수비수
1994 Ι 세계올스타 선발 한국대표
1995 Ι K리그 베스트11 수비 부문 선정
1995 Ι 세계올스타 선발 한국대표
1996 Ι K리그 베스트11 미드필더 부문선정
1996 Ι K리그 인기상
1997 Ι 세계올스타 선발 한국대표
1998 Ι 세계올스타 선발 한국대표
1999 Ι 센츄리 클럽 등록
2002 Ι FIFA선수분과위원회 위원
1990 - 1994 - 1998 -2002 4회 연속 월드컵 출장
월드컵 브론즈슈 수상
2004-펠레가선정한 위대한100인의축구스타 (순위는 100명 모두 정하지 안았음)
차범근
77년 대통령배 축구대회(Park''s Cup).
말레이지아 전 1:5로 뒤지던 상황.
종료 5분 남겨놓고 4골의 소나기 골.
79년 프랑크 푸르트 입단
8월 당시 세계 최고 리그로 불리던 분데스리가 데뷔
데뷔전 상대는 도르트문트.
스타팅으로 75분까지 뜀.
어씨스트 기록.
최고권위 축구전문지 ''KICKER''紙 선정 주간 베스트11.
세번째 경기 슈투트가르트 전.
헤딩으로 승리 결정 골.
KICKER지 선정 이주일의 골.
네번째 경기 바이에른 뮌헨 전.
그라보스키 어씨스트로 선취골.
다섯번째 경기 최강호 보루시아MG 전.
한가운데 돌파에 이어 찬 공, 왼쪽 포스트 맞고 골.
선취골.
세경기 연속 골.
이날 KICKER지, 처음으로 <차붐>이라는 단어 씀.
9월 강호 함부르크 전.
페차이의 어씨스트를 받아 강슛.
그라보스키 센터링, 헤딩 슛.
30M 중거리 슛.
첫 해트트릭 기록.
11월 일본의 오데쿠라가 소속된 쾰른 전.
두 동양인의 대결로 관심 집중.
차 선취골, 결승골로 두골 기록.
오쿠데라 헛발질 7번.
차붐 대승.
프랑크푸르트 3:1로 승리.
일간스포츠 톱기사
<차범근 두골! 오쿠데라 누르다>
이때 부터 MBC 차범근 경기 녹화방송 시작. 매주 월요일 밤. 시청률 최고.
12월 UEFA 컵 출전.
첫번째 경기 레알 마드리드를 맞아 차, 선취골을 넣었으나 1:1 무승부
두번째 경기 AC밀란 전.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강슛.
포스트 맞고 튀어나왔으나, 골대 5초이상 흔들림. 특종 기사실림.
3:2로 프랑크 푸르트 승리.
80년 3월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 1차전.
당시 20세의 나이로 ''게르만의 혼''이라 불리던
로타 마테우스(90년 월드컵 MVP), 갈색 폭격기 ''차붐'' 전담마크 특명.
신문 <마테우스! 차붐을 막아라> 톱기사.
경기 마테우스의 완승. 차붐 속수무책.
2:3 패.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 2차전.
역시 마테우스 차붐 전담 마크.
이번엔 마테우스 속수 무책. 차붐 대활약.
우측사이드 마테우스 여유롭게 제치고 어씨스트. 1:0 프랑크푸르트 승리.
차붐, 이날의 선수.
원정팀 득점 우선권으로 프랑크푸르트 창단이후 첫 UEFA컵 우승.
경기 후 신문 마테우스 인터뷰
"나는 아직 어리다. 하지만, 차는 현재 세계 최고 공격수이다."
79~80 시즌 득점 랭킹 7위 랭크.
세계 상승세 베스트 4 선정됨.
세계축구 베스트 11 선정됨.
연봉 독일에서 세번째 액수. 협상 타결.
독일 대표팀 감독 차붐 귀화 추진. 실패.
81시즌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겔스도프에게 육탄공격 받아 심한 부상.
프랑크푸르트 팬들 레버쿠젠까지 가서 겔스도프 살해 위협 소동. 경찰 출동.
부상이후 슬럼프. 이때도 역시 한국언론 차범근 씹기 발동.
KICKER지 이일로 <한심한 한국인들> 이라는 기사.
곧 슬럼프 회복.
83년 레버쿠젠으로 트레이드.
프랑크푸르트 팬들 울음바다.
85~86시즌 분데스리가 MVP !
득점 4위.
86년 한국대표팀 선수로 멕시코 월드컵 출전
88년 다시 UEFA컵 출동.
차붐 스페인 에스파뇰을 맞아 극적인 3:3 동점골 터뜨림.
5만 관중 차붐! 환호.
승부차기로 레버쿠젠 역시 팀 창단 이래 처음으로 UEFA컵 우승.
신문 톱기사
<지구 최고의 선수 ''차붐''>
KICKER지
<차붐, 팀 창단 첫 UEFA 우승 두번이나 이끌다,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의 영웅이자 분데스리가의 최고스타>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출장 최다골 기록 (아쉽게도 이기록은 최근몇년전에깨짐)
분데스리가 308경기 98골
당시-독일에서의 차범근은 최고의 용병으로 꼽혔습니다.
보루시아MG와의 시합당시..당시20살임에도 불구하고 게르만의 홈이라고 불렸던 마테우스가
차범근의 전담마크를 담당합니다...
막상.시합날-차범근은 날아다녔고..마테우스는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시합후 마테우스는 인터뷰에서 이렇게말합니다.
"나는아직 어리다, 그러나 차범근은 세계최고의 공격수다"
이렇게 자신의 패배인정과, 패배를 정당화시킵니다.
또.아시아에서 최초로 유럽진출한 선수가있죠 일본의 오데쿠라.
오데쿠라 그선수또한 독일.분데스리가에 진출합니다..
그리고 역시-차범근과 맞붙을기회가 있었구요..같은 아시아인이라는것으로 집중받기도했으나.
시합당시.차범근은 역시나 날아다녔고, 오데쿠라는 헛발질7번...
그리고 누구?인가가 말하기를..현재 분데스리가에서 평범한 마크방법으로
차범근을 마크할수있는 수비수는 아무도없다-라고 했었습니다.
그정도로 굉장한 공격력을 가졌던거죠...
그래서 프랑크푸르트시절..그팀의 주장이.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시합이 끝나고, 차붐의 몸을 봐라, 이것은 2차대전에 참가한 병사의 몸과 다를바없다-"
그정도로 집중마크를 당했던겁니다
그의 체력또한 어마어마했죠...현재 우리나라국대팀에 인간병기.차두리
한강변을 아버지와 끝에서 끝까지 달리기를 하는데...차범근은 저만치 앞에가있고,
차두리는 못쫓아가고 뒤에서 헥헥-대고있더군요..
차범근나이 38에 19살의 독일국가대표선수보다 체력이 월등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가 얼마나 몸관리를 잘했는지를 알수가있죠
또 어떤사람들은 차범근이 챔피언스리그를 진출못했다고 딴지를 거는데요
그당시의 UEFA컵은 지금보다 훨씬더 권위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챔피언스리그가 각나라리그1~3위가 진출을 하지만
그당시에는 무조건 1위만 올라가는것이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어쩌다 허접팀이 올라갈수도 있었고...
UEFA컵은 2위부터..몇?위까지 쭈루룩~진정.최강팀들과 자웅을 겨뤄야 했던거죠
한경기장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붐'을 연호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프랑크푸르트 소속당시 레버쿠젠과의 시합당시..레버쿠젠의 겔스도프라는 새끼가
뒤에서 찍어가지고 차붐을 못쓰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자 차붐광팬..칼들고 레버쿠젠에 그놈죽이러가는일까지 생깁니다
그리고 차붐이 레버쿠젠으로 옮기자.프랑크푸르트팬들은 눈물바다가 되기도 하구요..
86월드컵.에대해서도 말하겠습니다.
사람들이 86월드컵때 차범근이 골을 기록하지 못했다고...
그렇게 차붐-차붐-해대더만...골도못넣었다고...씹어대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당시.우리나라가 만났던 나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불가리아를 제외하고는 이탈리아, 아르헨티나...영원한 세계축구강국들 아닙니까?
그리고 시합내내 전방에 나가있는 차범근에게 공이연결된적은 5번을 넘지못했습니다.
미드필더에서 완전히 밀려버린거죠, 차범근 하나만 잘한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예를들면 현재-세계최고의 윙-라이언 긱스..그또한 웨일즈의 사람이고..
웨일즈는 월드컵 구경도 못하고 있습니다...오래전...아주오래전..한번-진출한적은 있다고...
그리고 한가지 알아둬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차범근은 당시 발목부상중이었습니다.수술을 해야할 상황이었는데
월드컵때문에 월드컵후로 미루고.발목에는 붕대를 칭칭말고 시합에 참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비수를 끌고다니면서 공간을 만드는게 안보인다면...축구보지마십시오-
만약 차범근 활동당시...지금처럼 당연지사 월드컵 본선을 진출하는거라면..
분명 한번은 16강에 올라갈수있었을겁니다...안타까울따름.
독일에 차범근 활동당시 칼하인츠 루메니게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선수는 유럽의 펠레-라고 불렸었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펠레와는 시대의 차이도있기때문에
오히려..펠레보다 조금더-앞설거라고까지 평가받았습니다.
프랑크푸르트시절.감독은 차범근이 칼하인츠루메니게보다도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차범근...호나우두, 피구같은 선수들과 비교해서.절대 뒤지지않았을것으로 보입니다
우선...차범근이 득점한 골수가..그들에비해서 크게 많은게 아닌데요
그이유는 차범근은 전형적인 골게터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보다 더좋은 위치에 자기편 선수가 있다면...망설임없이 공을 보냈습니다-
즉-자신의 득점보다.팀의 승리를 위한 플레이를 했다는거죠
일본에 70년도정도? 그때 가마모토 구니시게 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선수의 실력...가히-엄청난 선수였습니다...
올림픽에서 혼자 7득점을 한것만 봐도 알수있죠
그런데 자기들만 잘난줄아는 그 일본놈들이 그 가마모토를 아시아 최고라고 부르는것은 주저합니다
그건 바로..한국에 차범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사람들은 차범근을 아시아의 호랑이-라고 부릅니다..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선수 차범근-그는 한국사람입니다(네이버지식in글 인용)
첫댓글 차붐과 홍명보... 같은 시대에 뛰었더라면....
왜 황선홍 코치는 빼셧나요-.- 섭섭.ㅋㅋㅋ
실력도 실력이지만 부상도 너무 많았기 때문아닐까 하는 저의 개인적인 생각..
공격수부문과 수비수부문으로 나누어서 최고 선수를 뽑았음..
솔직히 수비수 부문에서도 예전 분들 다 합치면, 홍코치가 최고라고 할 수 있을지 다소 의문입니다. 어르신들 중에는 김호, 김정남, 김호곤 이런 분들 더 높게 치시는 분들 꽤 있음. 물론 최근 10년 사이엔 의문의 여지 없이 홍코치지만.
저야 뭐 그분들 플레이를 당최 본 적이 없으니, 객관적으로 뭐라 말할 처지가 못 되네요-_-. 어르신들이 그러시면 그저 그러려니 할 뿐-_-; 하지만 나중에 20년 후에 제 자식이 자라서, "호나우도가 잘하긴 뭘 잘해."라고 하면 울화통 치밀어 오를 듯-_-
맞아요 우리 아버지도 김호 김정남 얘기 맨날 하세요-_-. 그리고 조광래도 최고의 미들이었다고-_-... 하긴 선수 은퇴 후 축협간부나 감독직을 하시다 오명을 쓰셔서 그렇지 그분들이 괜히 유명한 건 아니겠죠? 다들 선수로서는 당대에 한가닥 하셨던-_-..(대표적 인물: 이회택, 허정무, 조광래 등등)
그래. 뭐니뭐니해도 차범근이 최고다..우리나라 사람이 아님 어땠을까..
차붐짱!!! 차두리...제발 아버지 반만이라도 했으면...ㅠ.ㅠ 차두리 부담감 클듯..ㅋㅋㅋ 그래서 프랑크 프르트 갔구나.ㅋ
알럽 명보횽! 알럽 범근횽!
"만약 홍명보 황선홍이 유럽, 남미 선수 였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펠레 다른거는 다 보면서 감동 받았는데;; 실제로 펠레가 이랬나요 ``?
만약 그랬다면 명보횽 선홍횽이 어떻게 02 월드컵 성공했을까;;
차두리는 체력빼고 어머니를 많이 닮은듯.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