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공원 삼의사묘에 잠든 구파 백정기白貞基의사를 아는가?
3.1절이나 8.15 광복절에 언론사 기자들의 전화가 자주 온다. 친일파들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데, 그때마다 찬 난감하다. 물론 친일파들의 잘못된 일들을 사람들에게 일라는 것도 좋지만, 이 땅을 사랑해서 목숨을 걸고 온몸과 마음을 바친 자랑스런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 효창공원에 백범 김구선생의 묘소가 있고, 그 아래에 삼의사三義士 묘가 있다. 헤이그 밀사사건의 주역 이봉창과 홍구공원의 주역 윤봉길, 그리고 육삼정 사건의 주역 백정기, 그 옆에 빈 묘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은 뒤 모시기 위해 준비된 묘소로 그곳에 삼의사 묘역을 만든 사람이 백범 김구선생이었다.
1946년 7월 6일 10시 효창공원에 오만 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당시 서울 거주 인구 30 만명 인데, 세 사람의 뒤늦은 장례행렬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봉창, 윤봉길과 함께 삼의사묘에 잠들어 있는 백정기(1896~1934년) 의 호는 구파鷗波로,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나 정읍시 영원면에서 자랐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동냥으로 한문 공부를 하고, 19세에 큰 뜻을 품고 상경해 식견과 견문을 넓히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과 전단傳單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항일운동을 선도하였다. 그 후 동지들과 경인京仁간의 일본 군사시설 파괴를 공작하다가 경찰에 구금되었으나 본적지와 행적을 속여 방면되었다. 그리고 각지를 잠행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여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 일본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일에 전력하였다. 1924년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고 도쿄에 갔으나 실패, 1925년 상하이로 가서 무정부주의자 연맹에 가입하고 농민운동에 투신하였다.
아나키즘anarchism은 그리스어 ‘아나르코스anarchos’에서 나온 말인데, ‘없다an’와 ‘지배자arche’의 합성어로 글자 그대로 ‘지배자가 없다’는 뜻이다. 즉 ‘자유와 평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런데 1902년 일본의 한 대학생이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해서 한자 문화권에서는 ‘정부가 없는 혼돈 상태’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아나키즘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자유연합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알카에다’ 같은 폭력 집단 정도로 생각하는데, 아나키즘은 평등을 추구하면서 집단이기주의를 용인하지 않고 자기희생적 이타심을 요구하며 극한적 대립보다는 상호공존, 즉 공공의 선을 추구한다.
당시 백정기와 함께 아나키스트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이회영과 《조선상고사》를 지은 민족사학자 신채호,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유자명, 엄형순, 오면직 등이었다. 이 중 이회영은 소론의 명문거족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약 40만 원(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수백억 원)의 재산을 다 팔아서 만주로 이주한 사람이고 그의 동생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이다.
그들이 아나키즘을 택했던 것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아나키즘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 하나의 원인은 백범 김구의 글 때문이기도 하다. 김구가 상하이에 있던 독립운동 세력의 여러 갈래를 기술하면서 “이 밖에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 이정규 두 형제와 유자명 등은 상하이, 톈진 등지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의 맹장들이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가 그런 글을 쓴 것은 김구 자신이 상하이 시절 아나키즘 세력과 경쟁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김구의 이 글로 상하이 시절 민족주의, 공산주의 세력과 함께 아나키즘이 주요한 독립운동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백정기를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은 1932년 상하이에서 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 이를 흑색공포단BTP으로 개칭하고 조직을 강화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해 4월 29일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일본군이 상하이 점령 전승 축하식 겸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기념식을 열기로 하자 폭탄을 투척하여 그들을 저승으로 보내겠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출입증을 기다리는 사이에 김구의 도움을 받은 윤봉길의 거사로 백정기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들의 운명은 엇갈리고 말았다.
1933년 3월 5일 세상에서 제일 진기한 제비뽑기가 있었다. 1933년 3월 17일, 상하이 훙커우의 육삼정에서 중국 주재 일본 대사 아리요시有吉가 중국의 군벌들과 회합을 갖기 위해 모인다는 기밀을 알고 그들을 암살하기 위해 폭판을 던지는데, 그 역할을 서로 맡겠다고 하자 여덟 명이 제비뽑기를 한 것이다.
성공하면 윤봉길의사처럼 죽는 것이고, 실패하면, 사형이나 무기에 가까운 실형을 받아야 하는데 서로 그 역할을 맡겠다는 것 얼마나 진기한 일인가. 제비를 열 개를 만들었고, 한 개에만 ‘유有’를 써넣었는데, 그 ‘유’자를 백정기가 뽑은 것이다.
그리고 그날, 이강훈과 함께 단행하기로 하고 육삼정에서 가까운 송강춘에 모였다. 그러나 기다리던 일본 동지 오키는 나타나지 않았고 음식점 종업원으로 변장한 일본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체념한 백정기는 껄껄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놈들 참 빠르기도 하구나. 한 발만 늦었어도 너희 놈들과 우리가 모두 한 불길 속에 휩싸였을 건데.”
백정기는 일본의 나가사키로 이송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상고를 포기한 백정기는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5월 22일에 옥사하였다. 그때 백정기의 나이 만 40세였다.
그가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져 온다. 한 번은 그의 동료들이 돈이 없어 굶주리고 있자 내가 먹을 것을 많이 가져오겠다고 나가서 푸줏간 주인에게 ‘나중에 값겠다’고 말한 뒤, 고기와 만두를 한 아름 안고 돌아온 이야기.
김두봉의 집에 가보니 어린아이들이 옷을 못 입고 떨고 있자. 두루마기만 빼놓고 옷을 다 벗어주어 폐결핵에 걸린 이야기, 강동에서 상해까지 수만 리를 걸어왔던 이야기 등 영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이야기들을 남기고 간 사람이 구파 백정기였다.
적지(敵地)인 일본에 묻혀있던 그의 유해는 1946년 7월 6일 이봉창(李奉昌)․윤봉길 두 의사의 유해와 함께 조국에 봉환(奉還)되어 효창공원에 안장(安葬)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고 그가 자랐던 정읍시 영원면에 기념관이 세워졌다.
중간 지대인 아나키스트였기 때문에 백범 김구계열과 김일성 계열에서도 등한시했던 사람들, 신채호 선생이나 백정기 의사들을 지역에서조차 잘 알지 못하고 있으니, 누군가 뜻 있는 사람이 구파 백정기를 소재로 영화나 다큐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교감으로 삼게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2021년 1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