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5 (수) 경기도 여주시 남한강변을 따라서 천년고찰 신륵사도 둘러보고 여주 세종 5일장에서
시골 삶도 느끼고 맛난 장터국밥에 여러 부침에 시원한 여주쌀막걸리로 목도 축이고 트레킹을
하면서 건강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요즘 경강선 전철 개통으로 여주까지 싶게 갈수 있어 오늘은 판교역에서 경강선 전철로 여주에 도착후
시내버스로 신륵사입구에 도착해서 문예단지를 둘러보며 도자기와 넓은 잔디숲과 공원도 잘 조성되어
신륵사에 도착후 트레킹을 할 일정입니다.
신륵사 문예단지공원의 멋진 풍경을~~~
공원엔 인공연못엔 시원한 분수대도 있고 잠시 데크길을 걷고 물레방아도 있어서 추억의 포토를 담고서~~~
신륵사 일주문을 들어서며~~~
ㅎㅎㅎ 가을이라 가을꽃으로 단장된 코끼리가 있어 잠시 동심으로 찰각후~~~
불이문을 들어서며~~~
신륵사 사찰을 둘러보며~~~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
극락보전으로 불자에 대한 불공을 드리고 있네요.
구룡루와 모등 사찰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와 주변의 나무들에 조경작업을 하고 있네요.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에서~~~
강원도 태백시 금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한반도의 등줄기 산맥인 태백산맥의 서사면을 지나면서 많은 지류들이 합류되고, 충청북도를 경유하여 경기도로 흘러간다. 강원도에서는 평창·정선·영월·횡성·원주를, 충청북도 북동부에서는 제천·단양·괴산·음성·충주를, 경기도 남동부에서는 여주·이천·양평·광주를 지난다.
황폳돛배 유람선이 지나가는데 나도 배를 타고 싶었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다음 기회로 돌리고~~~
절의 동쪽 강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경내의 서쪽 언덕에는 부도 2기가 있다. 삼층석탑은 나옹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고, 부도는 원래 조사당 뒤쪽에 있던 것을 1966년 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나 누구의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남한강물 위에 뜬 삼층석탑에서 똥폼 한 장 부탁하고~~~~ㅋ
강변 정자에서 잠시 남한강을 배경으로 사진 한장 만들고~~~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塼]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신륵사 경내를 둘러보고 남한강변을 따라서 여강길( 4코스)를 여주 시내쪽으로 본격적인 트레킹을 출발~~~
신륵사를 시작으로 세종대왕릉역 까지 총 12.4km 거리의 코스다. 신륵사는 마암으로 유래된 것으로 치수와 관련이 있는 유명한 사찰이며, 신륵사 앞으로는 조선시대 4대 나루였던 조포나루터가 있다. 조선 제4대왕 세종, 조선 제17대왕 효종의 왕릉을 보며 역사속 현장으로 빠져들고, 남한강 여주의 청정 농산물을 판매하는 여주5일장에 들려 사람사는 이야기에 빠져보기에 좋다.
여주 남한강 출렁다리 조감도
경기 여주시는 남한강을 가로지르는 출렁다리를 2023년 10월 완공할 계획이라고 9일 밝혔다. 사진은 '남한강 출렁다리' 조감도.입니다.
신륵사관광지 인근에 설치되는 이 출렁다리는 남한강으로 단절된 신륵사관광지(천송동)와 금은모래관광지구(상동)를 총연장 515m(폭 2.5m)로 잇는 현수교다.
왼쪽엔 편백나무숲도 있고 예전보다 조경과 잔디를 잘 조성하고 있네요.
신륵사문예단지 뒷길을 지나면서~~~~
여주박물관을 현대식 건물로 전시관과 영화상영관도 있어 관람하기로 하고 ~~~
여주엔 많은 선비들이 배출된 묘소에서 수집한 여러 종류의 석물들이 전시되어 잠시 사진을 담고서~~~
박물관입구 광장이 분수대엔 시원한 물줄기가 솟아오르고 멋진 보호수가 운치있게 반기네요.
박물관 로비엔 멋진 강물 호수 같은 분위기를 낳게하는 소파와 테이블이 있어 잠시 음료수로 목을 축이며 풍경을 즐감도 하고~~
여주의 세종대왕과 효종대왕으에 다한 전시물과~~~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공부도 하고 영상도 보면서~~~
ㅎㅎㅎ 이사장과 인상이 비슷하네유~~~~ㅋ
이곳은 한글 훈민정음에 대한 전시관입니다.
남한강변에 현대식 여주도서관도 잘 조성되어 여주의 학생들도 공부도 하고 지식도 엳는 멋진 도서관이네요.
왼쪽 강변숲길을 트레킹하며 우정도 다지고~~~
맑은 가을하늘엔 뭉게구름이 두둥실 그림을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보며 여주교를 건너면 여주시내로 접어들지요.
여주교를 지나며 저 멀리 신륵사문화단지쪽의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 풍경을 담아 보면서~~~
저 밑의 데크길은 자전거길로 가고 우리는 강변길 로 트레킹을~~~
도로변엔 노란 가을국화꽃길도 걸어면서~~~
4대강 사업이 된지 10년이상의 세월이 흐르니 남한강변엔 어부집도 생기고 민물고기판매장도 있고
기가엔 메운탕과 맛집들도 즐비해 먹자길로 변화하고 있네요.
여주시청에서 길을 건너면 여주 세종 5일시장이 있답니다.
마침 5일이 장날이라 재래시장의 분위기를 느끼며 눈욕도 하면서~~~
ㅎㅎㅎ 세종 5일장엔 세종대왕도 장날 장보러 오셨소이???ㅋ
5일장터도 둘러보며 이곳 현지에서 생산되는 야채와 과일,곡식등등 눈도 즐겁구려~~~
ㅎㅎㅎ 장터선지국밥집이 운영되어 오늘은 장터국밥으로 만찬하기로~~~
선지국밥과 빈데덕 ,점병이,부침에에 옛날 분위기를 살려 양은주전자에 여주쌀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값도 착하고 구수하고 맛이 끝내주네요!!!
자~아 김사장/이사장 한잔 걱읍시다!!! 마시고 먹는게 남는겨유~~~~ㅋ
배도 두툼하니 다시 강변으로 트레킹하며 왕릉도 답사해 봅시다.
창공엔 구름이 그림을~~~강물도 푸른 물결과 조화를 이루며 저 멀리엔 용문산 자락도 펼쳐진 풍경이 그져~~감탄이라~~~
ㅎㅎㅎ 지리공부도 하면서 강바람을 맞으며 발길은 가벼이~~~
이다리는 내가 4대강 종주시 지났던 다리이네~~~ㅎㅎㅎ 오늘 다시 만나니 방가방가~~~
이곳에 사시는 분이 우리에게 이쪽으로 돌아가면 아주 좋다기에 산으로 둘러가지만 경치가 좋다기에~~~
왼쪽으로 올라사 산으로 가는 모양이네 가봅쎄유~~~~
아주 잘 조성한 공원도 있고~~~아주 좋아유~~~
여기가 세종산림욕장으로 호젓한 시간을 갖고져하는 분은 이곳이 딱이내유~~~
여주시의 자연환경과 역사문화, 산업을 낳은 근원이자, 미래 발전의 원동력이 될 남한강을 여주시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표현하였으며, 유유히 흐르고 있는 남한강에서 높이 날아오른다는 의미를 통해 발전하는 도시,
전망대에서 잠시 따끈한 커피 한잔 마시며 즐건 정담으로 오늘의 이모저모에 대한 화제로 브레이크타임을~~~
ㅋㅋㅋ
자~아 이젠 호젓한 오솔길을 내려가면 역사문화탐방을 해 봅시자~~~
이씨조선의 후예인 이사장님들/ 조상님을 잘 두시어 오늘날까지 왕의 후손으로 자랑스런 모습으로~~~ㅋ
효종대왕릉 영릉 재실을 둘러보고~~~
항상 매주 연구하고 리더이신 멋쟁이 김대장 아주 보기 좋소이다~~~아직 쓸만한겨~~~~???ㅋ
왕릉 경내의 단풍나무가 가을을 알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홍살문으로 들어서면서~~~
영릉(寧陵)효종,인선왕후)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무덤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동원상하릉으로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조선왕조 왕의 무덤배치에 하나의 전환기가 된 형태로 무덤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왕릉 바깥쪽으로 나지막한 담을 쌓았고, 봉분을 감싸고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돌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동자석(童子石)에는 십이방위 문자를 새겼다. 조선시대 왕릉의 형태를 보면 세조 때부터 병풍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있었으나, 성종의 무덤인 선릉(宣陵)부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석을 설치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영릉(寧陵)에서 다시 사라져 왕릉 배치에 있어 또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능에 갖추어진 석물은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쌍,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 장명등 1좌, 무인석·석마 각 1쌍이다. 왕비릉에는 곡장만 없을 뿐 다른 배치는 왕릉과 똑같이 구성되어 있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1619년(광해군 11) 5월 22일 태어나 1626년(인조 4)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로 8년간이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그 후 풀려 나와서 1646년(인조 23) 소현 세자가 변사하자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고 1649년(인조 27) 5월 13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즉위 후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화폐를 널리 보급하였다. 조선왕조가 당한 굴욕을 씻고자 청나라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일 재위 10년 만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경비가 있어서 더 이상 접근이 않된다기에 관람장소에서 잠시 휴식과 전경을 즐감하며~~~
고개길을 쉬엄쉬엄 걸어면 저 멀리 홍살문이~~~
영릉은 1446년 소헌왕후 사망 후 헌릉 서쪽 대모산(현 서초구 내곡동)에 동릉이실로 조영된 능이다. 우측 석실은 왕의 수릉으로 삼았다가 1450년 세종이 사망하자 합장해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 되었고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세종의 능은 조성될 때부터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주장 때문에 논란이 잦았다. 지관들이 강력하게 능 자리를 철회하자고 권했지만 세종은 "다른 곳에서 복지를 얻는다고 하지만 선영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는가?"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일단 세종의 고집대로 능을 조성했지만 세조 때 다시 강력한 천장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서거정이 "천장함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이면 되었지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며 반대해 옮기지 못했다.
결국 예종 1년(1469)에 천장했는데 그곳이 풍수지리상 최고의 길지 중 하나라는 현재의 영릉이다. 이때는 세조의 유언으로 병풍석과 석실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1) 으로 합장했다. 한편 구 영릉에 있던 석물들은 모두 그 자리에 묻었는데, 1973년 석상, 장명등, 망주석, 문·무인석, 세종대왕 신도비 등이 발굴되어 세종대왕기념관 앞뜰로 옮겨졌다.
여주 영릉(英陵)세종대왕)
능역의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신도를 따라 정자각에 이르게 된다. 정자각의 동쪽에는 수복방과 비각, 서쪽에는 수라간이 있다.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돌렸으며, 난간석을 바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으며, 앞에는 합장릉임을 알 수 있는 2개의 혼유석과 장명등을 놓고, 좌우에 망주석을 세웠다. 봉분 능침 주변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서로 엇바꾸어 좌우로 각각 두 쌍씩 여덟마리를 밖을 향하여 능을 수호하는 형상으로 배치하고, 봉분의 동·서·북 3방향에 곡담을 둘렀다. 봉분앞 한층 낮은 단에 문인석 2쌍과 무인석 2쌍을 세우고 문·무인석 뒤에는 각각 석마(石馬)를 배치하였다.
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왕으로 1418년부터 1450년 54세로 승하하실 때까지 32년간 재위하였다. 태조6년(1397년) 음력 4월10일(양력 5월15일) 조선조 제3대 임금이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태종8년 (1408년) 음력 2월11일(양력 3월17일)에 충녕군에 봉해지고, 같은 해 2월 16일(양력 3월22일) 우부대언 심온의 딸(소헌왕후 심씨)과 결혼하였다.
대왕은 우리나라 역대 군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민족의 원형을 이루었던 우리 민족은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 국토·언어·문화·민족정신을 공통으로 하는 완전한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세용대왕릉 답사를 마치고 시내버스정류장으로~~~
시내버스로 이동후 여주역에서 전철로 즐건 트레킹과 문화공부도 한 산행이었습니다.
산우회원님들 담 산행시 까지 좋은 나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