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선조와 사화, 붕당, 그리고 조선의 위기
조선시대 정치를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키워드는 ‘사화(士禍)’와
‘붕당(朋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세조의 계유정난 이래
기득권을 가진 기존 관료 집단인
훈구파가 조정을 좌우하고 있었는데,
15세기 말엽부터 훈구파를 비판하는
사림파(士林派)가 대두했고,
이후 양자의 충돌로 여러 차례 사화가 발생하여,
사림의 무수한 선비들이 옥사하였음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그 후 선조 대에 이르러 윤원형 같은 외척세력이 쇠퇴하자 사림이 다시 정계로 대거 진출하였는데,
사림 사이에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무리끼리 뭉쳐 상대방과 반목하게되니 이게 바로 붕당입니다.
선조 대에 김효원과 심의겸의 이조정랑
추천 문제로 생긴 양자의 반목으로 관료들이
동인과 서인이 갈린 이래
나아가 재야의 유생들까지 어느 한쪽을 지지해 결국 거의 모든 사림이 대를 이어가면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사림의 동서분당 이후 붕당은 계속 핵분열을
일으켜서 동인은 정여립 모반사건을 계기로
강경론을 주장한 남인(南人)과 온건론을
주장한 북인(北人)으로 갈리었습니다.
또한 서인(西人)은 나중에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리니 이와 같이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을 흔히 사색(四色)당파라 하였습니다.
붕당간의 대립은 지극히 배타적이었을 뿐더러
주로 복상(服喪) 문제, 세자책봉 문제 등
민생과는 관련이 없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즉, 치열한 붕당간의 대립은 영조, 정조 등의 탕평정책으로 다소 누그러졌지만,
19세기에는 세도정치로 발전해 망국의 길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붕당정치의 평가는
곧 서양의 정당정치에 비견될 장점이
상당히 있다는 긍정적 평가 역시 존재합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망국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폐해만 많은 이러한 긍정적 평가는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선조 즉위 이래 조선은 이와 같이 동인,
서인으로, 동인이 다시 남인, 북인으로 나뉜
붕당정치에 골몰하고 있었고,
역사의식과 통찰력이 없는 임금은 붕당을
이용해 왕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을 둘러싼 주변의 국제정세는
급격하게 위험한 형국으로 치닫고 있어,
아차 하다가는 백성은 몰살을 당하고
나라는 통째로 사라질 판이었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형국을 호랑이 앞의 토끼 신세인
조선만 정작 모르고 있었으니,
불쌍한 것은 오로지 백성이었습니다.
저들의 권력싸움에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의 생활은 점점 피폐 해진다.
국민의 대표가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고,
본인권력에 더 악착같이 집착하는 현실,
우린 늘 감시하고 있어야한다.
썩은콩인지, 건강한콩인지.
임진왜란, 병자호란앞에서 처참해지는건 백성들.
- 예고된 침략 -
정여립 사건으로 조정에 피바람이 불고,
붕당 정쟁으로 나라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지던 1590년경 명나라에서는
13대 황제 신종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세가 약화되고 있었던 반면 북방에서는
만주족 누루하치가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여
급격히 힘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전국시대가 오다 노부가나와 그를 계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에 의해
통일이 되었습니다.
히데요시는 100년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을 이루어냈다는 극도의 자신감에 더해,
끝없는 전쟁을 통한 최정예의 수십만 군대를 보유하였으니 이러한 자신감과 군대를 활용하고픈 욕구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다 언제든지 반기를 들 여지가 있는
영주들이 딴 생각을 못하도록 관심사를
외부로 돌릴 필요성도 있었을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수십만의
정예군대로 중국과 인도를 정복할 꿈을 꾸게 되고
그러기 위해 면저 조선을 침략해
빠르게 항복을 받은 후 조선의 도움을
얻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는 히데요시의 대착각이었습니다.
일본은 침략을 결정한 이후 많은 밀정을
조선에 들여보내 조선 지도를 제작하고,
조선의 사정과 지형,
인구와 물자 분포 등을 파악했지만,
최고위 수준에서의 정보가 부실하였습니다.
특히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의 국가 규모나
정치 방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조선을 힘으로 강하게 위협하면 국왕은
곧 항복할 것이고 왕이 항복하면 조선인은
일본의 충실한 신민이 될 것이니
조선인까지
합세해서 명나라를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조선은 일본 정세에 어두웠을 뿐만 아니라
일본을 조무래기로 취급하여 그 국력을
턱없이 낮추어 보는 것은 물론이고,
당시 일왕과 최고실력자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해,
최고 실력자 오다 노부가나의 죽음을 두고
“왜인들은 최근 자신들의 왕을 시해했으므로
이런 야만스러운 나라에 사절을 보내줄 수 없다"며 일본의 통신사 파견요청을 거절하기도 하였습니다.
어쨌든 조선을 겁주어 복속하려는 일본의 거듭된 통신사 파견 요청을 거절하던 조선은
일본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보고
드디어
황윤길을 정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하는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쟁은 더이상 인간이 인간일 수 없는 상태로
몰아가는 것 시대적 운명과 시대적 사명이
언제나 존재하기에 역사는 돌아가는것인가?
첫댓글 항상좋은글 잘보고 있 습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