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꽃이 피면
가시내야
북한 가시내야
너에게 첫 입맞춤을 주랴
햇살도 곱디고운
조선 청보리 햇살 거두어다
바람도 실하디 실한
남도 산머루 바람 거두어다
너의 속살 고운 치마폭에 널어놓고
돌산머리 애장처
아메리카나 소비에트나
팔푼 얼간패 좀 보라고
앵두꽃이 피면
가시내야
북한 가시내야
너에게 오천년 조선 머스마의
까치동 첫사랑을 주랴.
통일의 꽃
연변 삼꽃거리 두만강 식당에는
아름다운 달력 하나 붙어 있지
정월에서 동지섣달 일년 낸내
원추리처럼 한 가시내 이쁘게 피어 있지
서글한 눈매 가냘픈 옷고름
조선족이라면 누구든 연인이고자 했지
스물한 살 빛나는 조선 가시내
허름한 운동화 한 켤레로
그리운 조국의 절반 끌어안았지
진달래 핀 천지에서 나리꽃 핀 백록담까지
첫사랑 조국을 순정으로 끌어안았지
연변 삼꽃거리 두만강 식당에는
아름다운 달력하나 붙어 있지
철망차에 실려가면서도
원추리처럼 화안하게 웃는
일년 열두 달 지지 않는 통일의 꽃 피어 있지.
서울 세노야
오 년 만의 연락에도
시 쓰는 동무들 모이지 않아
깊게 술 마신 밤
어기어차 노 저어 상도동 산 1번지
강형철네 포구로 간다
휘몰이 밤물길 젓고 또 저어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마지막 물굽이
자주달개비꽃 빼어 닮은 형철이 각시는
술상보러 새로 두시 밤물길 눈 비비며 가는데
세노야
멸치잡이 그물 온밤내 던져봐도
멸치꼬랑지만한 금빛 시 한 줄 서울의
가을바다에 걸리지 않고
세노야
달은 떠서 산 넘어 가는데
우리 갈 길 아득하고
눈 오는 밤
사랑을 위해 절망의 뼈를 깎는 사람들의 밤은 아름답습니
다 고통을 위해 죽음 근처에서 어둠의 독배를 홀로 들이키는
사람들의 춤은 뜨겁습니다 당신에 대한 긴 기다림의 끝이 보
이지 않는 동안 우리들은 세상 도처에서 버려진 자의 쓸쓸한
잔을 들었습니다 몰매 맞은 이웃을 외면하고 무릎꺾인 선구
자의 수난을 매도했습니다 빈곤에 전 형제의 노동 위에 무지
개 아파트를 세우고 내 아내와 내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만
장미꽃 적금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그날을 기다렸습
다 중앙 집중식 난방 시스템의 행복 속에 불갈비를 뜯으
며 새로 산 땅 값이 오르는 이야기로 긴 밤을 눈뜨고 새웠습
니다 눈은 내리고 바람은 불고 약속의 그날은 끝끝내 찾아오
지 않았습니다
들국화
사랑의 날들이
올 듯 말 듯
기다려온 꿈들이
필 듯 말 듯
그래도 가슴속에 남은
당신의 말 한마디
하루종일 울다가
무릎걸음으로 걸어간
절벽 끝에서
당신은 하얗게 웃고
오래 된 인간의 추억 하나가
한 팔로 그 절벽에
끝끝내 매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종점
학교를 졸업한 지 십오 년 만에
우리들은 처음 모였다
다다미방에 덧니가 드러난
게이샤의 사진이 걸린 정종집은
진눈깨비 속에서도 북적대고
술 한잔을 서로 돌리며
우리들은 잃어버린 우리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증권회사 차장이 된 영철이는
하룻밤 50만 원이라는 여자 탤런트 이야기를 하고
청소 시간이면 도맡아 청소를 하던 수영이는
검사가 되어 영감님 하는 호칭과 함께
술잔을 받았다
한 달에 기백만 원 봉급을 받는
성형외과 전문의가 된 형근이는
돈을 아싸리 벌기 위해 성남 어딘가에 개업을 하고
그 놈이 골마리를 잡으며 직접 설명하는
여자들의 별난 수술에 우리들은 마냥 낄낄거렸다
바이올닌을 하던 형수는
제너럴모터스의 지분이 50%인 자동차 회사 과장이 되어
노조의 불순성과 구사대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여당 국회의원 비서가 된 성모는
그 와중에서도 내 정치 성향을 떠보았다
그날 밤 쓰레기가 된 별들이
충장로 3가의 밤하늘을 덮었다
구더기와 시궁창과 온갖 찰거머리의 불빛들이
우리들 추억의 창가에 방뇨를 했다
이제 삶은 끝나고 죽음이 시작되었다
진눈깨비가 소리치는 하늘 한쪽에서
내려온 누군가의 억센 손 하나가
우리들의 더러운 술상을 뒤엎었다.
풍경 1
배추꽃이 노오랗게 핀 황토밭을 바라보면 아름답다. 김병연
이란 왕조 시대의 시인은 이곳 무등산 기슭에서 삿갓을 베고
눈 속에 묻혀 죽었다. 그것은 관념이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본 일이 없는데 우리들은 그 자리에 삿갓을 씌운 돌비를 세
웠다. 그날 밤 젊은 수배 학생 하나가 이 황토밭을 쫓기다가
죽었다. 까맣게 부패한 얼굴 튀어오른 눈알은 컬러 사진이 되
어 터미너로가 지하철역에 깔리고 그날 밤 한 청원 경찰은 저수
지에서 가물치가 튀는 소리를 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정
확히 첨벙 하는 그 소리를. 그러나 사람들은 곧 잊을 것이다.
배추꽃이 지면 메꽃이 피고 메꽃이 지면 들국이 피고 들국이
지면 눈꽃이 피리라. 그리하여 몇 년 후쯤 한 수배 학생이 쫓
긴 저수지가에 그의 시신을 덮은 거적 밖으로 드러난 진흙
구두의 모양을 본뜬 이 세상 허망한 돌비 하나 세워지리라.
풍경 2
한 늙은 시인이자 목수가 아니 한 늙은 목사이자 소설가가
철조망을 걷어내고 철조망 아래 피어난 연꽃 한 송이를 보았
다. 그리고 그는 감옥으로 갔다. 스무 살 적 내가 다닌 시골
대학의 인도 철학 교수는 연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진흙
속에 피어나기 때문이라고 새로 핀 연잎들을 바라보며 이야
기했었다. 그 또한 감옥으로 갔다. 아아 관념이란 때때로 얼
마나 아름답고 순결할 수 있는 저항인가. 불굴의 땅 불구의
계절 불구의 신민들을 위하여 한 송이 진흙 연꽃을 물고 감
옥으로 날아가는 파랑새를 지켜본다는 일은.
문복근씨의 공기 통조림
내 친구 문복근씨와 대인동
대한극장에서 최인호 원작의 방화
"깊고 푸른 밤"을 보았지
그때가 1985년이었던가
낯익은 골목의 어둠조차 불안하고 섬뜩하던 그 시절
학원안정법을 안주삼아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문복근씨는
주인공 안성기가 미 연방 이민관리국 직원 앞에서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억지춘향으로 부르고
불법 체류를 묵인받는 장면 때문에
밤새 눈물을 흘렸었지
계집애처럼 눈이 예뻤던 그 친구
그가 기타 반주에 맞춰
김민기를 부를 때면 애인처럼
한 가슴에 그를 꼭 안아주고 싶었지
대우 좋은 미국 은행의 국내 지점에서
한 이 년 밥 빌어먹었지만
어느 날 자기 목구멍에서 자꾸만 노린내가 난다고
아니 노린내가 너무 사랑스럽다고 횡설수설하더니
어느 날은 문득 독일에 가야겠어
베를린에서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하라를
직접 들을 거야 중얼거리다가
자리를 벌떡 일어서더니 이내 풀이 죽어
그래도 난 이 땅이 좋아 너무
입술로 가만히 매만지더니
그 친구 그런 모습이 애인처럼 사랑스러웠는데
1987년이었던가
유동 삼거리 골목 안 낙지집에서
우리는 석간 기사 하나를 함께 보았지
미 대사관 앞의 장사진
대충 이런 제목이 눈에 들어오고
미국행 비자를 받기 위해 밤을 세워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의 황홀한 기다림을
기사는 감각적 대화체로 얘기하고 있었지
-- America에 왜 가나요?
거기 미국이 있으니까요
-- 미국이요?
아름다운 나라 말이에요
-- 아름다운 건 조국이 아닌가요?
조국이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어요
-- 이렇게 다 떠나면 누가 남나요?
그래도 많이 남아요
예를 들면 노동자요 농민이요
그리고 들쥐요
내 친구 문복근씨
석간을 마구 구겨 성냥알을 긋더니
문득 오늘 LA 소인이 찍힌
그의 엽서를 받는다
여보게 내 욕 많이 했제
오월이 또 오는데 그래 숨쉴 만한가
아짐씨도.
천 개의 접시를 닦고
자네의 들쥐.
시인 곽재구씨는 1954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등장한
그는 1983년 "사평역에서" 1985년 "전장포 아리랑" 1986년 "한국의
연인들"을 상자했다. 그는 이번 시집 "서울 세노야"에서 삶을 억압하는
핍박한 정치적 현실을 서정적으로 노래한다. 그의 현실 대응은 분노를
싸안으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힘찬 전망을 제시하며 그래서 외침의
시보다 핍진하고 뜨겁다.
[ 우루무치의 박물관에서
두 남녀가 나란히 누운 미이라를 보았다
삼천년의 세월을 지척에 두고
마른 두 손을 쥔 연인 정경이
감동적이었다.
한때는 시가 삶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바람, 햇살,
들판, 시장, 창녀, 무지개..., 모든
것들이 무작정 가슴을 들뜨게 했다.
세상은 오직 시를 위해 존재하다고도
생각했었다. 눈을 뜨는 순간에서 눈을
감는 순간까지 시는 밥이었으며
희망이었고 사랑이었으며 빛나는
광기였다
다시 내 삶이 내 시와 일치되는 그런
순간을 꿈꿀 수는 없는 것일까.
삼천년을 순간처럼 그렇게 지내온
미이라의 연인처럼 내 시가 내 삶과
그렇게 꼭 두 손을 잡을 수는 없을까.
가을이다. 긴 사막의 어둠 속으로 낙타
한 마리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