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는 다른 절과는 달리 참 묘한 위치에 터를 잡았다. 대부분 산속에 있는 것에 비해 실상사는 지리산의 품에 있으되 산과 마주 앉은 형세를 하고 있다. 동으로 천왕봉을 모시고 남으로 반야봉을 직선을 이루며 서로는 심원 달궁, 북으론 덕유산맥의 수청산의 크고 작은 산들을 병풍처럼 둘러친 자리, 만수천과 뱀사골 계곡물이 서로 만나 얼싸안는 들판에 있다. 풍수지리적으로만 본다면 그리 좋은 자리는 아닌듯 싶다. 홍수가 심하면 자칫 범람하는 급류에 휩쓸릴 것도 같은 위치에서 천년을 견디어 온 것이 신기하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唐)에서 유학한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지장 스님의 문하에서 선법을 익힌 뒤 귀국하여 선정처를 찾아 2년여를 주유하다가 자신의 고향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에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고 나중에는 태자 선광(宣光 )과 함께 스스로 귀의하였다 하니 증각대사의 명성이 어떠했는지도 짐작이 갈 듯하다. 이후 증각은 많은 제자를 길러내며 선풍을 일으켰는데 이를 실상학파(實相學派)라 한단다. 2대 수철화상과 편운(片雲) 스님이 가르친 제자들이 전국 여덟군데에 절을 세우는데 이를 구산선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흥성함은 고려를 거치면서 더해 갔는데 조선에 이르러 물난리가 아닌 불난리로 세 차례나 전소되는 수난을 겪게 된다. 세조 때(1468년)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당시 왜구에 의해 불탔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화재로 승려들은 숙종 5년(1680년)까지 200년 동안 말사인 백장암에 기거했다 하며 이때 절터엔 철불, 석탑, 석등만이 남아 비바람을 맞고 시간을 견디어 왔다. 그 후 숙종년간에 300여 명의 수행스님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를 하여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하였다. 순조 21년(1821년)에는 의암대사가 두번째 중건을 하였고 고종 21년(1884년) 월종대사가 세번째 중건을 하여 오늘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다. 세번째 중창건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년(1882년)에 어떤 사람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한탓이라 한다. 그러고 보면 실상사는 참, 모진 세월에 죽음과 부활을 묵언으로 보여주고 있다.
6.25때에는 빨치산의 소굴이었던 지리산 덕에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도깨비처럼 들끓는 도가니가 되었었는데 용캐도 절만은 무사히 살아남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위에서도 언급한 있지만 실상사는 일본과의 악연도 간직하고 있는 절이다. 정유재란 당시 왜구에 의해
전소되었다는 주장이 전해오는데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정면으로 천왕봉을 마
주하고 있다. 천왕봉 아래 법계사가 있거 그 일직선상에 일본의 후지산이 놓여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실
상사 가람은 모두 동쪽을 바라보도록 배치하여 일본과 대치된 형국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절에서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말
이 전해 오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구전되고 있다 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보광전 내의
범종에는 일본지도가 새겨져 스님들이 예불을 할 때마다 힘껏 일본열도를 두드려 이제 열본열도가 호카이
도와 규슈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고 나머지는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한다. 얼마나 왜구에게 당했으면 범종
에 일본을 그려넣고 두들기는 것으로 원한을 풀었을까. 지금도 그것은 유효하리라. 호시탐탐 독도를 노리
고 역사를 왜곡하여 자기들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이 그것이리라. 범종아 울어라. 더 크게 두들겨 맞고
울어라. 동해 멀리까지 네 음성 들리도록!
약사전(藥師殿)
약 사 전 현 판
약사전 내 약사여래불 철제여래좌상 보물 41호
실상사에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보물이 참 많은 절이다. 국보급에서 지방문화재까지 열 손가락으로 꼽지를 못
한다. 그 중 삼층석탑은 서로 마주보고 쌍둥이로 서 있는데 불국사의 석가탑을 닯았다. 이탑은 신라말기 절을 지
으면서 함께 세운 신라 전형의 탑이라 한다. 높이가 대략 5.4M로 받침부가 비교적 커서 균형감이 덜하나 지붕돌
의 아랫면은 수평을 이루 반면 윗면은 하늘을 향해 치켜 올려져 경쾌한 맛을 준다. 그런데 서쪽탑은 상륜부를 잃
었으나 동쪽탑은 아주 신통하게도 그 원형을 거의 잃지 않았다. 이것은 불국사의 탑의 꼭대기 부분이 사라져 복
원할 수 없었을 때 이 탑을 모델로 제작하여 올려다 하니 그 중요성이 더하다는 생각이 든다.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왔으나 중국의 탑이나 집들은 멋과 맛이 없다. 크기만 클뿐 우리의 미감을 따라 잡을 수가 없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것 아닌가. 그 중 백미는 신라와 백제의 탑이다. 오래오래 바라봐도 주변과 잘 어울려 흐트러짐
이 없다. 참, 좋다.
약사전 안의 약사여래불은 제 2조 수철화상(秀澈和相)이 사천 근의 철을 모아 조성하는데 화재 후 숙종년간 침
허대사가 중창할 때까지 홀로 서 계셨다하는데 아무런 손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들녘에서도 민중들의 신앙의 대
상이 되어 민중을 이끌고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약사여래란 말 그대로 병든 자, 고통받는 자를 구원하는 부처님
이다. 여기 약사여래불을 자세히 보면 8등신의 석굴암 본존불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 물론 석굴암의 부처는 석불
이고 철불의 재료적 차이도 있지만 석굴암의 본존불은 옷주름이 흘러내리는 듯한데 비해 실상사 약사불은 U자형
이고 허리부분도 석굴암의 불상은 시원히 긴데 비해 이 불상은 잘룩하다. 그 규모는 대단히 커서 한눈에 전신이
들어차지 않는다. 이것은 8세기까지 이상주의의 표현양식에서 9세기 사실주의로의 이행과정에 속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철제불은 신라말기 선종이 흥행하면서 많이 조성되었는데 그 초기의 작품으로 미술사적 가치도 인
정받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불상은 종교를 떠나 그 시대의 예술품이다. 그 시대의 역사다. 왜냐하면 당시의 인간을
표현하고 마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약사전은 아마도 신라 때 세워진 것이 불타고 난 오랜 후에 침허대사 중창
때의 함께 세워진 건물로 보인다. 고색창연한 건물이 마치 하늘을 날아오르기 직전의 학의 날개 같다.
쌍둥이 3층 석탑
보물 35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등 역시 신라시대의 것으로 특
이한 점은 몸통이 장고형으로 잘룩하고 지붕 역시 작은 원형을 이룬 점이 다른 석탑과는 다르다고 한다. 받침과
기둥, 몸체의 곳곳에 연꽃무늬를 새겨넣어 아름다움을 더했으며 8면을 지닌 몸체에는 각 면마다 창을 내어 온세상
을 부처의 불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함도 참 인상적인데 앞에 놓인 닿같이 생긴 돌은 기도하는 사람
의 모습 같기도 하고 흐트러지는 마음을 망망대해를 떠가는 배의 불빛을 잡아 두려는 닿같기도 하여 흥미를 더했
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석등에 불을 당기는 계단이라 한다. 몇 개의 계단 중 하나가 남아 현대미술을 보는 것은
상상을 주고 있다. 8개의 창문에는 문을 달아 놓았던 흔적이 있다. 문의 돌저귀를 달기 위한 구멍이 남아 있으니
실용성과 종교적 철학을 결합하여 예술적 혼을 구현한 우리 선조들의 정신에 아득히 감전되는 듯하다. 그런데 어
찌 천년을 지낸 저것이 저리도 깨끗하단 말인가. 불난리를 세 번이나 만난 석등이 바로 어제 장인의 손에서 태어
난 듯하니 더 귀하게 여겨진다.
실상사는 구석구석이 아름답다. 어떤 절에 가면 경내 여기저기 어울리지 않는 석조물을 세우고 시주를 한 이들
의 이름을 빽빽히 적은 비석을 세워 돈을 과시하는 듯한 곳을 볼 수 있는데 실상사는 한 곳도 그런 곳이 없다. 꽃
풀 한 포기도 주변과 어울림을 맞추었다. 반드시 있어야할 자리에 있다는 듯 여백를 두어 이것이 저것을 방해하
지 않고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 마치 설치미술가가 이 절에 있는 듯 하다. 화장실 흙벽에 핀 봉숭아도 참 예술이
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이리라. 실상사를 주석하시는 스님들의 마음씀을 읽겠다. 같은 삶이라도 우리는 아
름답게 혹은 고운 눈을 뜨게 주변을 정리할 수는 없는 것인가. 내 삶의 돌아보게 한다. 허방에 매달려 미친 듯 달
리고 싸우고 돌아서면 지쳐쓰러져 잠드는 일상에 무슨 아름다움이 있겠는가 싶다.
지장전 앞의 다북솔
흙벽에 핀 봉숭아 그 곳이 욕실이란다.
흙벽집에 올린 수세미 두어 줄기가 창문에 아름다움을 더했다.
뒤뜰의 빈 공간
약사전 뒤뜰의 넓은 공간 돌담에 대나무와 나리꽃이 서로를 드러내 주고 있다.
서쪽 석탑 옆엔 한 사람 겨우 들어갈 칠성각이 있는데 그를 배경으로 소나무 앞에 배롱나무, 모과나무 들이 서 있어 칠성각은 숲을 이루고 그 자체로 꽃처럼 피어난다.
해우소 앞의 해바라기
극락전 앞의 작은 연못. 수양버들이 큰 강변에 나와있는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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