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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정원 스크랩 실상사, 그 아름다운 꽃을 보셨나요? /김이담
연초록 추천 0 조회 87 08.08.10 16: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실상사, 그 아름다운 꽃을 보셨나요?

 

  김이담

 

 

구슬이 구르는 소리를 내며 흐르는 실개천. 멀리 지리산이 치마폭을 드리우고 서 있다.

    한낮의 열기가 감자 삶는 솥 같다. 풀잎도 모두 어깨가 처져버렸다. 이런 때 한줄기 바람의 맛이란 청량음료쯤으로 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즐겁다. 몇 년 전부터 가고 싶었던 실상사로 간다. 실상사(實相寺), 천년의 바람을 휘감고 서 있는 절! 본 모습을 본다는 절! 나는 한껏 기대에 부푼다. 간간히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클까 속을 비우려 하지만 그마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오랜만의 외출인 탓도 있으리라. 생활에 찌들려 한동안 꼼짝도 못하고 지냈다. 모두 버리고 떠나보자 마음먹고 문득 떠오른 곳이 실상사다. 그러나 정작 실상사 가는 길을 모른다. 다만 지리산 어느 근처에 있다는 막연한 짐작을 할뿐이다.

 

    고려 말 이인로가 무신들의 횡포를 벗어나 바랑망태 덜렁 메고 청학동을 찾던 그 길에 지난 춘향골 남원의 그 길을 내가 밟고 간다. 이인로는 그 길을 지나며 일찍이 중국 남북조시대의 도연명 시인이 남긴 무릉도원에 비유한 바 있다. 무릉도원이라! 모든 사람이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나른다는 곳! 이백 수를 넘어도 젊음을 유지한다는 땅! 그 곳이 바로 여기라고 이인로는 말했다. 과연 그렇다. 철철철 흘러내리는 짓푸른 산이 그렇고 그 이마를 밟고 건너가는 구름이 그렇고 그 구름을 비추어 구슬 구르는 소리를 내는 계곡물이 그렇게 내 눈 앞에 영화의 장면처럼 흘러간다.

 

    뱀사골을 향해 한참을 지나도 푯말 하나 보이지 않는다. 거의 지리산 자락에 다다를 무렵 갈색의 이정표가 폭양에 이마를 빛내고 있다.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삼거리에서 어느 길일까 갈팡질팡 망설이다가 우회전을 했다. 이내 길을 잃고 말았다. 사람의 일이란 로버트 푸르스트의 시구처럼 잠시잠깐의 선택에 길이 갈린다. 하지만 옳은 길이라 선택했다 하더라도 또 다른 어려움과 후회와 슬픔은 남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슬픔은 모래알 같아서 털어내도 털어내도 주머니에 조금은 남는 것, 그 슬픔이 마르면 영롱한 추억으로 모래알처럼 반짝이기도 하는 법 아닐까.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나와 그 길을 접어들어 갔다. 비포장도로다. 울퉁불퉁 자갈길의 안내를 받으며 기어가듯 하천변을 내닫는다. 들녘에 대나무 숲이 보인다. 아! 섬처럼 떠있는 저기다!

 

 

    3 개의 벅수. 벅수는 처음엔 10리 마다 세워놓은 이정표였다 한다.  마침내 그것은 시간을 흐름에 따라 우리 선조들의 신앙이 되었다. 지금은 휘발성 강한 기름처럼 기도의 대상도 이정표도 증발해 버리고 옛날을 알려주는 하나의 사물로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입구에는 민속자료로 지정된 부리부리한 코를 가진 석장승이 우스꽝스럽게 서 있었다. 여기서는 석장승을 '벅수'라고 부른다고 한다. 장승에 새겨진 명문으로 보아 영조 초년(1725년)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모두 4개였다 한다. 그런데 1936년 일제강점기 수탈이 심했을 때 홍수로 물난리까지 겹쳐 그 중 1개가 떠내려가고 지금 3개가 남았는데 그중 둘은 길을 두고 서로 마주 바라보고 있고 하나는 외따로 계곡 건너에 서 있다. 이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의 마음 면면에 어려움을 종교적 의식으로 극복하는 힘을 지녔음을 알겠다. 이 지방 사람들이 저마다의 슬픔과 기쁨과 눈물과 고난을 얼마나 이 벅수에게 빌며 매달리고 구원을 청하고 하소연을 하였을까 싶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유난스레 코가 큰 그 벅수를 나는 오래 바라보았다. 3개의 벅수가 비슷한 모습을 한 모습에서 이 장승을 만든이가 같은 사람은 아니었을까? 원래 장승은 동네 어귀마다 잡귀를 쫓는 액막이의 역할을 겸한 것이었다. 그런데 큰 귀와 눈과 코가 무섭기는 커녕 웃음을 띠게 함은 우리 민족의 해학적 기질을 볼 수 있는 다른 표현이리라.

 

  조금 걷자 실상사가 연꽃 위에 피어난다. 실상사란 어떤 절인가? 통일신라 말기 우리의 불교는 교종 중심이었다. 교종이란 결국 교리를 중심으로 이어가는 종파인데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출발된다. 그러나 시간에 따라 권력과 유착한 종교의 폐해는 정도를 더해 갔고 글공부를 한 상류층의 종교였다. 이를 타파한 신흥 사상이 도입되는데 이것의 하나가 선종이었다.

 

    영화 제목에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 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달마와 맥을 같이하는 종파라 할 수 있다. 석가시대 이후 500년 즈음, 인도에 달마라는 스님이 있었는 데 그는 갈댓잎을 타고 중국으로 건너와 여기저기를 배회하다가 바위굴에 들어가 9년 변벽을 한 후 제자들을 길러내는 데 그후 수제자에게 자신이 쓰던 발우와 가사를 주고는 입적을 하였다 한다. 이후 6대째 혜능 스님까지 이어지는데 그 후에도 마조도일 등 많은 스님들이 배출되어 배출되어 중국 불교의 큰 준령을 이루어 나간다. 그 마조도일의 제자인 서당지장선사의 문하에서 홍척증각대사는 선법을 익히게 된다.

 

  선종은 서양의 종교개혁과는 조금 다르다. 교종의 낡은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한 것으로만 보면 종교개혁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불교의 산맥이 너무 높고 커서 그 중 한쪽만을 선택되어 오던 것에서 또다른 산을 발견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본래 있었던 부처님 수행법 중 한가지 방편일 뿐인데 후학들이 지식의 남용을 해오던 것에서의 전환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새롭고 참신한 발상이었다.  그것은 깊은 선정에 들면 누구든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 구원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이다. 

 

    그것은 교리를 배워 A와 B를 가려내는 분별의 태도에서 직관의 힘으로 A와 B를 함께 아우르는 정신세계이며 무지한 백성도 최고의 경지인 부처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이 되었다.

 

    이런 사상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와 특별한 인간만이 누리던 불교의 세계가 민중의 실천적 종교로 떠오른 것은 구산선문 최초의 가람인 실상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알 수 없는 내용을 외우기만 했던 절망에서 새로운 빛이 피어나도록 한 이는 홍척증각이었다. 선의 이치를 터득한 홍척은 남악인 지리산 자락에 산문을 여니 그 절이 바로 실상사다.

 

   연잎 위에 핀 꽃, 실상사! 들어가는 초입부터 연밭이다. 아직 봉우리만을 맺은 흰빛의 세상 너머 아담한 절 한 채 피어있다.

 

 

   실상사엔 일주문이 없다. 곧바로 사천왕문을 통과해야한다.

   사천왕이란 무엇인가?

   옛날 인도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을 수미산이라 보고 그 정상에 도리천(?利天)이라 불리는 세계인 33천이 있고 그 산의 중턱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세계가 있다 여겼다 한다. 도리천의 우두머리를 제석천(인드라)이라 하고 아래 4개의 세상을 관장하는 이들이 사천왕이라는 것이다. 동방의 지국천왕(持國天王)은 비올라와도 같은 악기를 연주하고 남방의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무시무시한 칼을 금방이라도 휘두를 것 같다. 서방은 광목천왕(廣目天王)은 검은 얼굴에 한손엔 용을 틀켜쥐고 다른 손엔 그 용의 여의주를 빼앗아 들고 있으며, 북방을 관장하는 다문천왕은 창을 굳게 들고 다른 손엔 불탑을 높이 들고 있다. 한문으로 번역한 사천왕의 이름을 보면 그들이 누구인지 짐작이 간다. 지국천왕은 세상을 지키고 지닌 왕, 증장천왕은 아무리 오랜 시간속의 죄업도 다 아는 왕, 광목천왕은 세상을 다 보는 왕, 다문천왕은 세상의 소리를 다 들어 아는 왕이 아닌가 싶다. 모두가 탱글탱글한 눈망로 우리를 내려다 본다. 이들은 제석천의 명을 받아 사방을 다니면서 사람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보고한다는 것이다. 본래 사천왕은 특별한 형상이 없었는데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무시무시한 장군의 모습을 띠고 악귀들을 짓밟는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절의 입구에 배치하여 사람들에게 경각심과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고 자신과 사찰을 돌아보게 한 것이다. 그런데 다 비슷비슷한 듯 보이지만 사천왕의 모습도 절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있다. 

   사실 마음이란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다섯가지 감각기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절입구에는 눈으로 보고 마음을 정화토록 배치한 것이 바로 사천왕상이라 여겨진다. 

 

  사천왕문에서 바라보니 한눈에 환한 절마당이 들어온다. 화엄의 세계란 바로 이것이리라. 마음의 어둠에서 단번에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한 송이 꽃 같은 세상, 이것이 화엄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샘 솟는다.    

 

 

 배롱나무가 마당 한켠에서 제 몸에 불을 당겨 다비식을 하고 있다. 그 다비식으로 절간은 환한 꽃밭이 되어 있다.

 

     실상사는 다른 절과는 달리 참 묘한 위치에 터를 잡았다. 대부분 산속에 있는 것에 비해 실상사는 지리산의 품에 있으되 산과 마주 앉은 형세를 하고 있다. 동으로 천왕봉을 모시고 남으로 반야봉을 직선을 이루며 서로는 심원 달궁, 북으론 덕유산맥의 수청산의 크고 작은 산들을 병풍처럼 둘러친 자리, 만수천과 뱀사골 계곡물이 서로 만나 얼싸안는 들판에 있다. 풍수지리적으로만 본다면 그리 좋은 자리는 아닌듯 싶다. 홍수가 심하면 자칫 범람하는 급류에 휩쓸릴 것도 같은 위치에서 천년을 견디어 온 것이 신기하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唐)에서 유학한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지장 스님의 문하에서 선법을 익힌 뒤 귀국하여 선정처를 찾아 2년여를 주유하다가 자신의 고향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에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고 나중에는 태자 선광(宣光 )과 함께 스스로 귀의하였다 하니 증각대사의 명성이 어떠했는지도 짐작이 갈 듯하다. 이후 증각은 많은 제자를 길러내며 선풍을 일으켰는데 이를 실상학파(實相學派)라 한단다. 2대 수철화상과 편운(片雲) 스님이 가르친 제자들이 전국 여덟군데에 절을 세우는데 이를 구산선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흥성함은 고려를 거치면서 더해 갔는데 조선에 이르러 물난리가 아닌 불난리로 세 차례나 전소되는 수난을 겪게 된다. 세조 때(1468년)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당시 왜구에 의해 불탔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화재로 승려들은 숙종 5년(1680년)까지 200년 동안 말사인 백장암에 기거했다 하며 이때 절터엔 철불, 석탑, 석등만이 남아 비바람을 맞고 시간을 견디어 왔다. 그 후 숙종년간에 300여 명의 수행스님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를 하여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하였다. 순조 21년(1821년)에는 의암대사가 두번째 중건을 하였고 고종 21년(1884년) 월종대사가 세번째 중건을 하여 오늘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다. 세번째 중창건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년(1882년)에 어떤 사람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한탓이라 한다. 그러고 보면 실상사는 참, 모진 세월에 죽음과 부활을 묵언으로 보여주고 있다.

 

   6.25때에는 빨치산의 소굴이었던 지리산 덕에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도깨비처럼 들끓는 도가니가 되었었는데 용캐도 절만은 무사히 살아남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위에서도 언급한 있지만 실상사는 일본과의 악연도 간직하고 있는 절이다. 정유재란 당시 왜구에 의해

 

전소되었다는 주장이 전해오는데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정면으로 천왕봉을 마

 

하고 있다.  천왕봉 아래 법계사가 있거 그 일직선상에 일본의 후지산이 놓여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실

 

상사 가람은 모두 동쪽을 바라보도록 배치하여 일본과 대치된 형국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절에서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말

 

이 전해 오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구전되고 있다 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보광전 내의

 

범종에는 일본지도가 새겨져 스님들이 예불을 할 때마다 힘껏 일본열도를 두드려 이제 열본열도가 호카이

 

도와 규슈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고 나머지는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한다. 얼마나 왜구에게 당했으면 범종

 

에 일본을 그려넣고 두들기는 것으로 원한을 풀었을까. 지금도 그것은 유효하리라. 호시탐탐 독도를 노리

 

고 역사를 왜곡하여 자기들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이 그것이리라. 범종아 울어라. 더 크게 두들겨 맞고

 

울어라. 동해 멀리까지 네 음성 들리도록!

 

  

약사전(藥師殿) 

 

약 사 전 현 판

 

  약사전 내 약사여래불 철제여래좌상 보물 41호

 

    실상사에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보물이 참 많은 절이다. 국보급에서 지방문화재까지 열 손가락으로 꼽지를 못

 

다. 그 중 삼층석탑은 서로 마주보고 쌍둥이로 서 있는데 불국사의 석가탑을 닯았다. 이탑은 신라말기 절을 지

 

면서 함께 세운 신라 전형의 탑이라 한다. 높이가 대략 5.4M로 받침부가 비교적 커서 균형감이 덜하나 지붕돌

 

의 아랫면은 수평을 이루 반면 윗면은 하늘을 향해 치켜 올려져 경쾌한 맛을 준다. 그런데 서쪽탑은 상륜부를 잃

 

었으나 동쪽탑은 아주 신통하게도 그 원형을 거의 잃지 않았다. 이것은 불국사의 탑의 꼭대기 부분이 사라져 복

 

원할 수 없었을 때 이 탑을 모델로 제작하여 올려다 하니 그 중요성이 더하다는 생각이 든다.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왔으나 중국의 탑이나 집들은 멋과 맛이 없다. 크기만 클뿐 우리의 미감을 따라 잡을 수가 없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것 아닌가. 그 중 백미는 신라와 백제의 탑이다. 오래오래 바라봐도 주변과 잘 어울려 흐트러짐

 

이 없다. 참, 좋다.

 

   

   약사전 안의 약사여래불은 제 2조 수철화상(秀澈和相)이 사천 근의 철을 모아 조성하는데 화재 후 숙종년간 침

 

허대사가 중창할 때까지 홀로 서 계셨다하는데 아무런 손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들녘에서도 민중들의 신앙의 대

 

상이 되어 민중을 이끌고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약사여래란 말 그대로 병든 자, 고통받는 자를 구원하는 부처님

 

이다. 여기 약사여래불을 자세히 보면 8등신의 석굴암 본존불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 물론 석굴암의 부처는 석불

 

이고 철불의 재료적 차이도 있지만 석굴암의 본존불은 옷주름이 흘러내리는 듯한데 비해 실상사 약사불은 U자형

 

이고 허리부분도 석굴암의 불상은 시원히 긴데 비해 이 불상은 잘룩하다. 그 규모는 대단히 커서 한눈에 전신이

 

들어차지 않는다. 이것은 8세기까지 이상주의의 표현양식에서 9세기 사실주의로의 이행과정에 속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철제불은 신라말기 선종이 흥행하면서 많이 조성되었는데 그 초기의 작품으로 미술사적 가치도 인

 

정받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불상은 종교를 떠나 그 시대의 예술품이다. 그 시대의 역사다. 왜냐하면 당시의 인간을

 

표현하고 마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약사전은 아마도 신라 때 세워진 것이 불타고 난 오랜 후에 침허대사 중창

 

때의 함께 세워진 건물로 보인다. 고색창연한 건물이 마치 하늘을 날아오르기 직전의 학의 날개 같다.

 

   

 

 쌍둥이 3층 석탑

 

   보물 35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등 역시 신라시대의 것으로 특

 

이한 점은  몸통이 장고형으로 잘룩하고 지붕 역시 작은 원형을 이룬 점이 다른 석탑과는 다르다고 한다. 받침과

 

기둥, 몸체의 곳곳에 연꽃무늬를 새겨넣어 아름다움을 더했으며 8면을 지닌 몸체에는 각 면마다 창을 내어 온세상

 

을 부처의 불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함도 참 인상적인데 앞에 놓인 닿같이 생긴 돌은 기도하는 사람

 

의 모습 같기도 하고 흐트러지는 마음을 망망대해를 떠가는 배의 불빛을 잡아 두려는 닿같기도 하여 흥미를 더했

 

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석등에 불을 당기는 계단이라 한다. 몇 개의 계단 중 하나가 남아 현대미술을 보는 것은

 

상상을 주고 있다. 8개의 창문에는 문을 달아 놓았던 흔적이 있다. 문의 돌저귀를 달기 위한 구멍이 남아 있으니

 

실용성과 종교적 철학을 결합하여 예술적 혼을 구현한 우리 선조들의 정신에 아득히 감전되는 듯하다. 그런데 어

 

찌 천년을 지낸 저것이 저리도 깨끗하단 말인가. 불난리를 세 번이나 만난 석등이 바로 어제 장인의 손에서 태어

 

난 듯하니 더 귀하게 여겨진다. 

 

 

   실상사는 구석구석이 아름답다. 어떤 절에 가면 경내 여기저기 어울리지 않는 석조물을 세우고 시주를 한 이들

 

의 이름을 빽빽히 적은 비석을 세워 돈을 과시하는 듯한 곳을 볼 수 있는데 실상사는 한 곳도 그런 곳이 없다. 꽃

 

풀 한 포기도 주변과 어울림을 맞추었다. 반드시 있어야할 자리에 있다는 듯 여백를 두어 이것이 저것을 방해하

 

지 않고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 마치 설치미술가가 이 절에 있는 듯 하다. 화장실 흙벽에 핀 봉숭아도 참 예술이

 

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이리라. 실상사를 주석하시는 스님들의 마음씀을 읽겠다. 같은 삶이라도 우리는 아

 

름답게 혹은 고운 눈을 뜨게 주변을 정리할 수는 없는 것인가. 내 삶의 돌아보게 한다. 허방에 매달려 미친 듯 달

 

리고 싸우고 돌아서면 지쳐쓰러져 잠드는 일상에 무슨 아름다움이 있겠는가 싶다. 

 

 

 지장전 앞의 다북솔

 

 흙벽에 핀 봉숭아 그 곳이 욕실이란다.

 

 흙벽집에 올린 수세미 두어 줄기가 창문에 아름다움을 더했다.

 

 뒤뜰의 빈 공간

 

 약사전 뒤뜰의 넓은 공간 돌담에 대나무와 나리꽃이 서로를 드러내 주고 있다.

 

 서쪽 석탑 옆엔 한 사람 겨우 들어갈 칠성각이 있는데 그를 배경으로 소나무 앞에 배롱나무, 모과나무 들이 서 있어 칠성각은 숲을 이루고 그 자체로 꽃처럼 피어난다.

 

 해우소 앞의 해바라기

 

 

 극락전 앞의 작은 연못. 수양버들이 큰 강변에 나와있는 느낌을 준다.

 

    전체적인 가람의 배치에서부터 작은 공간 하나하나가 인드라망생명운동을 실천하는 절답다는 생각이 든다. 실상사의 가람배치는 두 파트로 나뉘어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보광전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한 부도원이 그것이다. 보광전은 입구인 사천왕문과 약간 틀어져 배치되어 맞주보고 있다.  연못은 서남쪽으로 즉 사천왕문 그리 가깝게 느껴지지 않게 배치해 놓았고 보광전 앞 양쪽 적당한 위치에 3층 석탑이 있고 중앙에 석등이 있으며 동북쪽에 약사전과 지장전을 두었다. 그 반대쪽엔 요사체가 있어서 절 마당의 흙이 사천왕문을 들어서는 순간 여름의 뙤약볕에 환하게 시야를 트운다. 

 

    절대적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놓일자리에 놓여있는 것, 관계하는 이와 잘 어울리는 것 뭐,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위 사진은 무슨 사진 기술이 잇어 찍은 것이 아니다. 그냥 보이는대로 마구 눌러도 그림이 되는 곳, 그곳이 실상사라 말하고 싶다.

                                                          

   아주 작은 칠성각은 소나무 숲에 있다

 

   연못을 끼고 해우소 해바라기를 지나면 돌담사이로 물이 흘러나가는 수채가 있다. 그를 건너면 또 다리 연꽃밭이 나오고 또하나의 가람이 나오는데 이곳이 극락전이다. 극락전은 옛날엔 부도전이라 했다는데 여기에 실상사 창건주와 그 2대인 수철대사의 부도가 전해져오고 있어 실상사의 창건내력을 전해주고 있다. 이곳은 당초 절의 후원쯤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하나하나 손을 보아 두었다.

 

  

 극락전 과 극락전 옆의 요사체 '목탁'이란 현판 글씨가 단아하다. 

      

    이곳에 있는 홍척증각선사와 2조 수철화상의 부도와 부도비는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증각이란 이름은 홍척스님이 입적을 한 후 그를 기려 임금이 내린 시호이며 그를 '남한'이라고도 부른다. 증각선사의 부도를 '증각대사 응료탑(證覺大師凝寥塔)'이라 하고 수철화상 부도를 '수철화상능가보월탑(秀澈和相楞伽寶月塔)'이란 별칭으로 부른다. 그 탑과 비는 예술적 가치로 인정받아 응료탑은 보물 38호, 비석은 39호와 능가보월탑 33호 비는 34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응료탑비는 이제 볼 수 없고 그 받침인 받침돌만 만남 있다. 대부분 귀부는 거북이 몸에 용의 머리를 조각하는데 반해 이 비는 사실 그대로 거북이 머리를 한 것이 특이하다. 그도 아주 사실적으로 거북을 표현하여 놓았다.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는 일산 노릇을 하는 소나무 한 그루를 올려다보며 자연은 모두가 한 고리임을 실감한다.

      

 

 증각대사 응료탑비와 응료탑

 

        

 능가보월탑과 탑비 

      응료탑과 능가보월탑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응료탑은 여러개의 기단에 연꽃무늬를 새긴 받침에 8각의몸돌을 얹었는데 몸돌엔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기고 사천왕을 돋을 새김하여 지키게 하였으며 지붕은 목조건축의 처마선을 잘 조각하여 놓았다. 능가보월탑은 기단에 구름과 용무늬와 사자를 새겼으나 풍파에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힘들고 대체로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과 중앙에 문을 새기고 사천왕을 새긴 것은 같으나 지붕은 기와의 골과 수막새와 처마 밑의 석가래까지 좀더 정교한 조각품처럼 보인다.

 

   실상사는 천천히 걸으며 봐야할 것 같다. 발길에 닿는 자리가 모두 문화재요 미술품이니 그 내력을 알고보면 더 많이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며칠 묵으며 스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나 들으며 뒹굴고 싶다. 그것 또한 욕심일까? 욕심이기에 앞서 시간에 ?겨사는 나에겐 사치일 것이다. 발길을 돌려나오며 옛 영광의 시절의 절터 주춧돌 앞에 한 동안 서 있었다. 원래의 실상사가 얼마나 큰 산문이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있었으니 주춧돌이었다. 그 돌을 모아 두었으니 그 돌이 놓인 자리마다 기둥이 서 있었겠다.  저녁이 가까와 오는데 햇살의 열기는 식지 않고 마음은 훅훅 달아오른다.   

 

  나는 지금 눈에 보이는 그 작은 편편에만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것 아닌가?    

 

  중국의 선의 법맥은 달마(達磨)에서 혜가(慧可), 승찬(僧璨), 도신(道信), 홍인(弘忍), 혜능(慧能), 마조(馬祖), 남천(南泉), 조주(趙州)스님으로 이어진다. 그 마조의 이야기다.

 

  유식박식한 젊은 날의 마조가 남악산 반야사의 토굴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 회양스님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큰 스님, 좌선은 해서 뭐하시려구요?"

   "부처가 되려구......."

  슬그머니 일어나 회양스님은 기왓장을 하나 집어들고는 숫돌에 갈기 시작했다.  

   "기와는 갈아서 무엇에 쓰시려구요?"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 한다."

   어쩌구니가 없는 마조는 또 물었다.

    "기왓장을 잘 갈면 어찌 거울이 됩니까?"

    "기와를 갈아서 거울울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놈이 좌선을 해서 어찌 부처가 되겠단 것이냐?"

     "그럼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회양 스님이 대답한다.

     "소달구지에 비유해보자. 소달구지가 가지 않으면 회초리로 달구지를 치냐? 소를 치냐?"

    드디어 마조는 말문이 막혔다.

     "네가 좌선을 배우는 거냐? 좌불을 배우려는 거냐? 네가 만일 선을 배우겠다면 말해주마. 선(禪)이란 앉아 있는 것도 아니요, 누누워 있는 것도 아니다. 네가 만약 부처을 배우겠다면 말해주마. 부처란 정해진 모습이 있는 것도 아니다. 법(진리)이란 본래 고착된 형태가 아니요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며,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앉아서 부처가 되겠다구? 부처를 죽여야 되는 것이다. 도 닦는 모습에 집착하면 너는 결코 부처가 될 수 없다."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가지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말장난 같은 이 일화가 나를 절 밖으로 밀어났다.

  그것도 잠시 뿐 또 욕심을 내어 백장암을 생각해 낸다. 산문 밖에는 일주문 대신 들어갈 때 보지 못한 조그만 푯말이 걸려 있다.  아직도 햇살은 따갑다. 마을의 집들도 모두 꽃을 심었다. 나는 무엇에 ?기듯 내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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