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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도 고성중학교 총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갯바람
연재 <고성한벌>20회 / 갯바람(3회 조영남/둔전리)
일제시대 진도의 정신문화와 예술
1. 개요
19세기 후반 고종의 즉위와 함께 이미 식민제국주의 파고가 구체화 되고 일본의 조선침략이 노골화 되던 시기에 진도는 실권자 대원군에 의해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나 7년 만에 다시 군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이미 일제가 개화파들을 파고들어 갑오개혁 내각을 지배하면서 조선식민체제를 구축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런 배경에서 세워진 겨레주권의 대한제국도 결국 일제의 힘과 조정에 의해 지배되고 끝내 막을 내리고 나라는 일본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도호부시절 이후 진도의 정치 군사 행정 권력은 점 점 크게 축소 약화 된 가운데 조선총독부 지배하에 들어갔다. 조선의 정치 군사 행정 경제 등 모든 권력을 거머쥔 일제는 조선을 영원한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우리겨레 정신문화적 정체성마저 송두리째 파괴하기 위해 각 가지로 조직적인 획책을 썼다. 먼저 겨레의 웅혼한 역사를 날조하여 반도식민사관을 세웠다. 내선일체를 내세워 신사참배와 성씨개명을 강요했다. 조선이 개국과 더불어 국시인 유교유학으로 국민을 의식화하기 위한 국민교육으로 성균관과 그 산하에 전국적으로 향교를 세워 유학을 가르친 것처럼 일본은 즉시 조선식민교육을 위해 전국에 “근대정신의 선진 신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국민학교”를 세웠다. 겨레의 말 과 글을 폐쇄하고 일본의 말과 글을 삶의 모든 자리에 세운다는 것은 겨레의 혼까지 말살하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는 이미 16세기로부터 모든 식민주의 제국들이 두고 쓰는 식민통치 기본정책이자 전략이었다.
그런 조선총독부가 진도를 개조해 나갈 때 기본적으로 모든 자리가 국가적으로 같은 상황에서 정작 진도가 그에 어떻게 대처하며 자신을 펼쳐나갔을까? 뜻밖에도 놀라운 자리였다. 과거 진도는 국방제일요새인 군사의 섬이요 반외세 자주투혼의 섬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방향을 급선회하여 가장 풍요롭고 화려한 문화예술을 만개시킨 섬이 된 것이다. 가히 겨레와 나라를 대표하는. 그런 자리에서 진도가 “예술의 본향이요 산실”이라는 명칭이 일제시대에 공식화 되었다. 그 과정과 동인이 어디에 있는 무엇일까? 1) 민요민속의 창무악극 2)서화 붓 예술 분야이다. 반면 붓 예술 중 3) 문학은 쇠퇴하고 말았다.
2. 진도 민요민속 창무악극 (民謠民俗 唱舞樂劇)
뜻밖에도 일제시대에 진도의 기층민중의 삶터에서 자연발생 한 민요민속의 창무악극이 새로운 시대를 만나 비로소 꽃을 피우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남사당패 등 유랑극단들이 더러 있었지만 새로운 직업형태로 발전한 자리가 아니다. 개화기의 근대사회로 들어선 시대바람을 타고 비로소 기나긴 역사에서 이미 유전자 체질로 굳힌 진도사람들의 예술적 끼가 춤추기 시작했다. 그 가장 큰 자리가 신분이 무너진 세상에서 자신의 예술적 역량으로 오히려 환호 박수갈채를 받으며 그로써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오늘의 연예계 스타가 되는 자유롭고 화려한 길이었다. 그 첫 단계가 곧 직업화 된 유랑창극단이었다. 진도 자체에서야 선대로부터 모두가 다 아는 자리 “상놈”이지만 서울 등 섬 밖에 나서면 오히려 스타들이 되곤 한다. 붓 예술들과는 현실적으로 당장 차원이 다른 그런 자신들의 밑자리에서 진도의 창무악극은 비로소 스스로 기쁨과 즐거움에 넘쳐 자신의 모든 끼를 발산하고 만개시켰다. 그들에게도 나라를 잃은 슬픔과 비애가 어찌 없었을까만, 붓들처럼 그런 자리에서 유랑하며 춤춘 자리는 아니다. 그로써 진도의 국악팀들이 우울한 시대에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을 휩쓸며 겨레 모두의 가슴을 위로하며 새로운 꿈의 활기찬 세계로 이끌었다. 일본과 중국에서까지 조선국창 하면 진도가 된 것이다.
그 분야 진도 지도자들은 그들의 신청을 중심으로 모든 민중의 무대에 올릴 통일된 공연을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진도아리랑 가사부터 기본을 통일하여 정립하고, 작곡도 새롭게 하고, 일본에 건너가 한국 최초로 유성기판으로 제작하여 전국에 보급시켰다. 오늘에 한국국악계의 최고 명인으로 이미 공인된 박종기씨가 당시 대금연주와 작곡의 명인이요, 남도창과 판소리 등에서 국창이 박옥진 등이다.
그러한 창악분야도 일본 본국까지 휩쓸었거니와 정작 진도 창무악극의 진수가 터지는 자리는 유랑극단의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온갖 재담과 익살의 쪽구질 방정이 창극으로 즉석에서 엮어지고 연출되는 비정형화 자유로운 그 자리야말로 가장 진도 적이고 넘치는 실제들이기 때문이다. 심봉사가 심청이를 공양미 삼백 석에 팔고 나서 터뜨리는 신세타령, 서울 맹인잔치에 뺑덕어멈과 함께 가며 몰래 따라 나선 조리중놈과 뺑덕어멈이 놀아나는 자리에서 펼치는 심봉사의 즉흥연기 등 희비가 급전하고 뒤섞이는 그 한자리에 함께 울고 뱃살 움켜쥐고 웃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내용과 구성이 곧 진도 삶의 실제 현실인 상가 밤샘마당에서 극단의 비극 씻김굿과 극단의 희극 다시래기가 함께 펼쳐지고, 다음날 마지막 산길에서도 같은 구성으로 펼쳐지는 진도만가이기 때문이다.
저 남태평양 발리섬 같은 곳에서도 더러 이와 유사한 내용의 민속이 있지만 정작 진도처럼 극단의 비극과 극단의 희극이 변화무쌍하게 하나로 어우러지고 극적전환을 보여주는 경우는 전 인류사회에서 오직 진도뿐이다. 때문에 당시 나라를 빼앗긴 시절에 전 겨레의 가슴 정리와 가장 일치하여 가장 넘치고 활기찬 민중예술로써 그 극단현장들이 겨레의 곡비(哭婢)와 신명 한마당 굿판의 어릿광대가 되어준 자리였다. 그 자리들은 장악공연무대예술보다 훨씬 민중들과 밀착된 현상에서 비로소 “진도, 진도”하게 되었다.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진도의 그 유전자가 어디에서 형성된 것일까? 말할 필요도 없이 기나긴 삶의 역사에 있다. 고조선 삼한시대로부터 찬란한 농경문화와 국제교역의 해상문화를 눈부시게 꽃피운 보배섬 인진도의 영화 그리고 왜구, 몽고, 일본, 후금(청) 등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처참한 집단죽음의 터에서 거듭거듭 다시 서는 그 영욕이 함께 하고 교체 되는 자리에서 정화 승화 발전된 독자적이고 특별한 꽃이다. 그러나 정작 민속학자들과 국악전문가들은 그 진도의 유전자(특질)는 인정하면서 왜 그러한 지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진도는 그렇게 특별하다고만 말한다.
3. 진도의 남화(南畵)
오늘의 국전과 같은 일제시대 선전(鮮展)에서 의제 허백련과 남농 허건 등이 특선을 하는 등 진도의 남화가 한국화단을 휩쓸었다. 조선시대의 남화 북화를 총 망라하여 당시 겨레 동양화의 주축이 곧 진도였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추사에 의해 출발한 조선의 문인화(남화)가 운림산방 소치에 의해 완성되고 그 맥이 미산을 거쳐 계속 진도화가들에게 눈부시게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붓 예술은 정신문화적으로 민요민속 예술과는 차원이 다른 자리에서 더 큰 겨레 자존으로 달리기에 가장 좋은 자리였다. 그 또한 일본 압제와 그리고 누구나 그 붓을 들 수 있는 새 시대 앞에서 가장 자존적이고 활기찬 길이 된 결과였다. 더불어 그 붓 예술도 근대화 바람 앞에 점 점 직업화 상품화 되는 시대가 개진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당초 소치의 시서화로 출발하고 만개한 문인화로서의 남화는 그 또한 시대의 바람 앞에서 스스로 변화했다. 한문의 시대가 한글시대로 -겨레의 말과 글을 겨레 정체성으로 강조하고 나선 시대 - 전환되는 자리에서 정작 한시를 자유자제로 창작할 만한 화가들이 급격하게 줄었다. 그림은 그렸으나 자작한시를 화제로 쓸 수 없는 화가들이 점 점 늘었다. 북화라면 상관없으나, 남화를 표방하기 위해선 그 화폭의 화제를 한시를 지울 수 있는 붓들에게 의뢰하거나, 과거 유명하고 좋은 시들을 모아 화제로 사용하는 화제첩에서 자신에게 맞는 고전한시나 글귀들을 자신의 화제로 베껴 쓰는 시대가 된 것이다. 진도 남화작가들에게서 그 분기점이 아무래도 남농 이전과 이후일 것이다. 그로써 진도의 문인화는 새 시대 앞에서 시를 잃고 서화 반쪽으로서의 남화의 맥을 이은 것이다. 또 그런 자리가 일제의 탄압 앞에서 그들 자신이 피해가기에 더 좋은 자리이기도 했다. 당초 겨레 붓의 시들이 무엇을 대상으로 그리든 시대와 사회를 가장 강하게 반영하는 자리, 진도의 남화는 이미 그 본질을 떠난 자리였다. 때문에 그림으로써 일제의 눈총을 받을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잘한다, 잘한다.”는 말만 들을 뿐. 진도의 창무악극이 민중의 마당에 꽃피운 반면, 진도의 남화는 문화예술 적으로 좀 더 고급화된 계층사회에서 눈부시게 꽃피웠다.
4. 진도의 서예(書藝)
모두가 기본적으로 남화인 자리에서 진도의 붓은 새로운 세계를 개척 발전시켰다. 한중일 동양삼국의 붓은 이미 예로부터 서(書)의 독립적인 자리를 발전시켜왔다. 붓(筆)은 학문(學問)과 문예(文藝)의 기본인 자리에서 서(書)가 가장 큰 기초 곧 학문과 문예 정신의 법(法)이자 길(道)이었다. 문자를 그토록 눈부신 예술의 경지로 발전시킨 예가 서양사회엔 없다. 명구나 시 한구를 각자의 독자적인 필치와 서체로 써 놓은 앞에서 느끼는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동양사회 사람들만의 특별한 자리이다. 그 붓을 중국은 서법(書法)이라, 일본은 서도(書道)라 하고, 우리는 그 두 자리를 자유롭게 혼용했다.
그런 자리에서 유배 온 무정에게서 붓을 배운 소전 손재형이 남화일색의 진도에서 서법 서도의 길만을 줄기차게 달렸다. 그리고 예술원 회장시절 겨레 자존의 붓을 중국 및 일본의 붓과 구별하기 위해 그동안 간직했던 자리를 총회의 만장일치로 <서예(書藝)>로 결정하였다. 서법(書法), 서도(書道)의 차원을 넘어선 자리에서 한글서체까지 개발하며 당대 한중일 삼국의 최고 서예가가 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추사의 <세한도>를 일곱 번 찾아가 찾아온 분이기도 하다.
이토록 진도의 창무악극과 서화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자리에서 서울과 전국을 넘어 일본과 중국에까지 명성을 높이며 크게 발전함으로써 비로소 진도는 명실상부한 <예술의 본산과 산실>로써 자타가 공인하는 <예향>으로 확고하게 자리하게 되었다.
5. 진도의 시문(詩文)
시(詩) 서(書) 화(畵) 붓 예술에서 그 정신의 중추는 말할 것 없는 시문(詩文)! 일제의 칼날감시를 집중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서화에서 한국을 대표하고 그 길이 열려있었기 때문인지 일제시대에 겨레에게 이름을 크게 떨친 문인이 진도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도도하고 분명했던 진도의 문맥이 그토록 외압 앞에 단 번에 끊길 수는 없는 일. 진도가 어떤 곳인가. 끊임없는 겨레전사에서 특히 고려가 몽고에게 무릎을 꿇었을 때 겨레 자주주권으로 분연히 일어서 오룡국을 세우고 모두가 죽음으로 마칠 때까지 몽고와 싸운 진도가 아닌가. 칼날에서도 그렇거늘 하물며 겨레정신과 역사중추인 붓의 자리에서야. 고려-조선 천년 동안 가장 위대한 겨레 문신 붓대들이 끊임없이 유배 와 <벽파정> 정시를 비롯하여 헤아릴 수 없는 시문으로 진도의 정신과 삶과 역사를 새긴 곳이 아닌가. 그러한 역사혈맥이 까짓 일본에게 잠시 땅을 빼앗겼다고 해서 숨거나 죽을 린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나는 확신했다. 대단했을 것이나 “신문학”이라는 시대와 그 자리에 초점을 맞추어 겨레역사와 문학사를 정리했기 때문에 모두 흩어져 오늘의 잡초무덤들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끝내 그 중심들을 찾았을 때 가장 고귀하고 찬란한 겨레정신들이 무덤을 박차고 오늘의 역사등경 위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가슴 벅찬 감동 앞에 실로 나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고고학자들이 허허 벌과 산비탈이나 물가에서 수천 년 전 사람들의 삶터를 발견하고 깨진 기왓장, 빗살무늬 질그릇, 돌도끼 하나를 추켜들고 어찌할 줄 모르는 그 기쁨도 크거니와 하물며 가장 절박한 시대의 삶과 역사의 생생한 숨결 언어들의 진정한 금빛 보석들을 손에 쥐었을 때라야. 그 중심들을 우선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진도 유배역사의 끝자리 붓들
2) 무정 정만조와 진도
3) 진도시사
4) 목포시사
5) 송학당 출신 문사들의 석치정시사와 석치정10경
1) 진도 유배역사의 끝자리 붓들
1894년(고종31)은 동학연합농민군이 공주와 장흥 전투에서 정부군과 일본군에게 패퇴하여 일제히 진도로 들어와서 최후까지 싸우다 모두 처형 된 해이다.
그 2년 뒤인 1896년(고종33)은 이미 일제가 조정하는 친일내각이 개화개혁을 추진한 갑오경장의 막바지로서 대한제국 선언(1897년)을 앞둔 해이다. 곧 전국적인 지방행정개편에 의해 면집강제가 실시되어 도호부에서 군으로 다시 환원된(고종10) 진도군이 17개면으로 조정된 해이다.
이 시기 곧 고종시대가 대한제국 광무시대로 그리고 일제통치로 이어지던 이 시기가 바로 고려중기 - 현재 확인된 바로는 1122년 이영이 최초 유배자 -로부터 진도로 끊임없이 이어진 유배의 끝자리였다. 국가정책에 대한 반기와 항일투사들이 가장 많았던 시대로서 당시 문학적으로 가장 위대한 두 인물이 진도 금갑도로 유배 온 무정 정만조와 안국선이다. 그들 모두는 이미 고려시대로부터 가장 도도한 겨레 붓대들의 집중 정시산실인 벽파정과 그 시문들을 겨레역사와 함께 가슴에 가장 크게 새기고 그 길을 자신들의 영원한 사표로 굳게 새긴 인물들이다. 그리고 결국 그 길 진도에 들어선 것이다. 그렇게 나라가 이미 일본 앞에 스러지는 날 가장 위대하고 찬란한 겨레정신과 역사의 본향섬 진도에 들어설 때 그 붓대 가슴들에 파도치는 나루터 겨레역사 시정이 어떠했으랴. 충분히 짐작되고 남는다.
2) 무정 정만조(茂亭 鄭萬朝)와 진도
갑오개혁 끝자리 해 1896년 이른 봄(2-3월쯤) 무정 정만조가 진도의 금갑도로 유배 왔다. 무정은 조선의 최후 최고 대유학자요 시문 특히 반려문에 뛰어난 문객이었다. 진도에서 12년을 살고 다시 대한제국 조정의 부름을 받고 1907년 한양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므로 대한제국이 서기 1년 전에 유배 와서 대한제국이 일제에게 넘어가기 3년 전인 끝자리에서야 돌아갔으니, 나라와 겨레가 일본 앞에 처참하게 무너지던 12년을 진도에서 진도 사람들과 함께 한 것이다.
고려-조선 천년의 진도유배사에서 분명코 대미를 찬란하게 장식한 무정이야 여러 가지 면에서 가장 위대하고 감동스러운 유배인물이다. 진도 유배사에서 가장 긴 19년을 살며 조선성리학에 새로운 금자탑을 세우고 돌아간 소재 노수신(蘇齎 盧守愼)의 그 학문성과를 제외하곤 다른 모든 면에서 당연코 무정이 최고이다. 소재는 비록 인생중심부를 19년이나 유배로 보냈지만 선조 즉위와 함께 개혁정치로 다시 부름을 받고 돌아가 영상에까지 오른 영광을 누렸지만, 무정은 나라를 잃는 비운 속에서 평생을 좌절 절망과 고독으로 새 시대 바람 앞에서 정작 자신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만을 고뇌하며 열정을 다 쏟고 끝자리에서 “친일 반민족자”라는 오명만을 겨레역사에 새기고 만 가장 뜨겁고 가장 불운한 붓이다.
갑오개혁 끝자리 1896년 새해를 맞아 무정은 궁궐야간당직 때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불현듯 들이닥친 군졸들에게 끌려가 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아무 이유도 없이 80여 일인가 투옥되었다가 진도 금갑도 유배형을 받고 한양성을 떠났다. 가족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서소문을 지나며 돌아보는 한성 “삼각산아 잘 있거라. 한강수야 다시 보자.” 병자호란 때 전범으로 요동 심양성으로 끌려가며 한성을 돌아보던 조선의 붓들이 새로웠다. 잔설이 희긋희긋한 삼각산과 어느 새 풀잎들이 푸르른 들녘 국토, 아무리 생각해도 임금께 신임과 사랑을 독차지 하는 자신에 대한 내각들의 시기질투 미움뿐 아무 죄가 없는 자신이 머지 않아 다시 돌아올 그날의 기러기 붉은 발자국(홍조)을 길에 하나 둘 찍어 남기며 떠난다.
인천에 닿으니 자신처럼 떠나는 무수한 유배 붓들. 그 만남들이 왜 그토록 새로울까. 화력의 바퀴로 빠르게 달리는 처음 보는 큰 화륜선에 모두 올라 남쪽으로 남쪽으로 떠나는 황해바다 뱃길에 수많은 초록빛 침묵의 섬과 섬들. 군산 - 목포-우목도(우이도)-울돌목 우수영-진도-금갑도로 들어오는 바닷길. 목포에 모두를 내려놓고 화륜선은 인천으로 돌아가고, 목포에서 다시 먼 섬들로 떠나야 할 철새들은 다시 삼삼오오 나뉘어 전라남도 서남해에 흩어져 있는 절해고도들로 흩어진다. 소흑산 우목도(우이도), 대흑산도, 또 이름 모를 섬, 진도 금갑도, 추자도, 제주도 등등으로. 무정은 추자도로 떠나는 벗과 마지막 헤어지고 우수영에 내렸다. 충무공과 진도사람들이 피 흘려 싸워 승전고를 울렸던 명량의 세찬 물굽이 건너편 옥주성. 개 짓는 소리조차 없는 자신의 그 고도가 텅 빈 듯 너무 쓸쓸하고 초라하다. 비로소 울돌목 세찬 물길 건너 자신을 섬에 내려놓고 호송나졸들이 돌아갈 때 그동안 그토록 고깝잖게 긴 뱃길 풍랑을 함께한 그들과도 헤어짐이 왜 그리도 연민의 가슴을 붙들까. 옥주 땅에 내리자 비로소 진도관리들에게 인계되고 그들의 안내를 받아 다시 섬 남쪽 금갑진 금갑포에서 다시 배를 타고 자신의 고도 금갑도에 내렸다. 그리고 탱자울타리로 울을 치고 거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작고 초라한 집에 들어섰다. 그의 진도유배 시문집 <은파유필(恩波濡筆)>은 이렇게 소상하게 출발한다.
무정의 진도 유배생활 12년은 초기 금갑도(접도) 유폐시절, 좀 더 자유로워진 중기 본도 운림동 <무정학당> 시절, 목포까지 더욱 자유롭게 나다닌 말기 진도읍 <자유당> 시절로 나뉜다.
무정은 진도에서 12년을 살고 1907년 대한제국 조정의 부름을 다시 받고 경성으로 되돌아갔다. 그 12년은 초기 금갑도 유패시절, 진도 본도로 나와 조금 더 자유롭게 소치님의 운림산방에 무정학당(茂亭學堂)을 열고 가르친 운림동시절, 그리고 읍으로 들어와 <자유당 自有堂>에서 밀려드는 수많은 후학들을 제자로 삼아 가르치는 한편 당시 손병익씨 집에 <반궁강원 泮宮講院>을 열어 진도향교와 사림의 유학 선비들과 학문에 대해 자유토론을 펼치던 유배말기로 나뉜다.
무정의 유배생활이 남다르고 특별했던 것은 그가 유별나게 진도의 자연, 역사, 인물, 문화와 예술, 민속과 주민들 등 모든 것을 다 사랑한 자리이다. 그래서 자신의 높은 신분을 버리고 들녘사람들과 한자리 하고, 주민들마저 천하게 여기는 예인들과도 술잔을 주고받으며 벗하고, 그들이 자신을 위해 펼치는 예악을 즐기고 보답할 길이 없어 더할 수 없는 감사의 정리로 장시를 써서 바쳤다. 그리고 자신이 궁내당직 때 채포된 때로부터 금갑도에 이른 모든 과정으로부터 진도에서 주민들과 함께 한 그 모든 자리를 시로 읊어 유배문집 <은파유필>을 남겼다. 문학에 있어서도 그런 자리가 없거니와 향토사자료로써도 그보다 큰 보물이 없다. <은파유필>은 상하권이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하권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상권에 수록된 시가 197수로서 그 마지막이 진도읍 호산도읍(湖山都邑)의 아름다움을 읊은 <자유당10경> 이다. 더불어 조선의 최고 유학자로서 조선유학이 나라를 망친 유아 독선주의 그 이기이원 주리 성리학을 버리고 소동파와 소재와 같은 이기일원의 자리에서 유불선이 하나인 진정한 겨레정신의 길을 달린 점이다. 또 그런 자리에서 비록 외세에 의해 밀려온 자리지만 새로운 시대변화 앞에서 눈을 먼저 뜨고 앞서 그 차원에서 새로운 학문과 교육의 길을 진도에서 몸소 직접 적극적으로 실천한 자리이다. 그리고 한양으로 돌아가서도 진도와 관계를 지속하며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을 겨레 지도자들로 세우기 위해 끝까지 열정을 쏟았다. 그로 결국 겨레와 나라를 빛낸 대표적인 제자가 의제 허백련 화백과 한중일 최고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다. 시문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를 세우기 위해 모의과거까지 주관하여 장원이 되고 모두가 인정했으나 이미 한시(漢詩) 한문(漢文) 시대가 끝나 그 뛰어난 제자를 국가 교육기관 성균관의 공직자로 세우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3) 진도시사(珍島詩社) 금갑도 동파정(東坡亭)과 운림산방 무정학당(茂亭學堂)
무정이 유배 오자 진도유림들이 일제히 금갑도로 찾아가 위로하며 함께 시로써 마음을 주고받았다. 그 첫 대면에서 무정은 진도문사들의 뛰어난 즉흥시작에 탄복했다. 역시 천년 유배역사와 겨레 유일무이한 정시산실인 유배나루터 벽파정의 정신이 오롯이 그대로 정착되고 그 혈맥이 남도 끝자리 섬에서 조용히 그리고 찬란하게 꽃피어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당장 그들 모두와 함께 진도시사 <백련사(白蓮社)>를 조직했다. 진도의 최초 문단이다. 유학자들이 하필 “하얀 연꽃” 이름으로 시사를 정한 것부터가 특별한 시정신을 잘 말하고 있는 자리이다.
그에 힘입어 즉시 유배터 산마루 언덕(남망산 자락 - 원다리와 황모리 중 어느 쪽인지 아직 그 자리가 확인되 않음)에 즉시 정자를 짓고 무정이 몸소 자신이 좇는 최고 시혼인 소동파 - 당송팔대가 중 시와 문에 가장 뛰어났던 소식 -의 호로써 <동파정>이라 했다. 소동파는 당시 최고 유학자로서 유배자가 되어 그에게 백성의 침묵을 뜻하는 불교의 산문과 자연을 두루 자유하며 깊은 산곡의 세찬 물굽이 앞에서 비로소 무정설법을 깨치고 <오도송>을 남겨 그 시와 그의 실존이 불문에서 오히려 더 유명하다.
동파정이 생김으로써 진도문사들 만이 아니라 해남, 강진 등에서도 많은 붓들이 더욱 자주 많이 찾아와 동파정은 유배나루터 벽파정 이후 새로운 최대 정시산실이 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더할 수 없는 시혼의 날개로 기쁨을 누리고 나면 찾아오는 만큼 그때마다 떠나는 벗들, 무정에겐 <송객정(送客亭)>이요, 다시 산정에 홀로 남아 바람과 파도만 가득한 밤들을 지새우는 <풍만정(風滿亭)>이었다.
그 백련사 글벗들 진도유림이 당시 최고 유학자를 읍으로 모셔 진도 후생들을 가르치게 해야 한다는 진도의 전통을 들어 군수에 간곡한 요청을 하고 또 선대로부터 무정과 집안 간에 돈독한 사람이 부친의 명을 받고 무정을 돌보기 위해 군수를 자청하여 진도군수로 부임한 군수에 의해 무정은 비로소 본도로 나왔다. 무정은 읍으로 바로 들어서지 아니하고 조선의 문인화를 완성 만개하고 자신이 유배되기 4년 전에 떠난 조선조 시서화 삼절 소치님(소치 허련 1808-92년)의 운림동에 기거했다. 그리고 즉시 당시 미산이 지키고 있는 운림산방 문간 행랑채 쇠죽을 끓이는 부엌방에 <무정학당>을 열고 진도 후생들을 가르쳤다. 인근 마을들과 읍에서 어린 아동들로부터 더 많은 학생들이 배우러 왔다. 무정은 따뜻한 가슴으로 그들 모두를 제자로 삼고 마음을 다하여 열심히 가르치고, 비로소 추사의 개혁 혼이 소치의 붓끝으로 이어져 만개시킨 화려한 시와 서와 화폭들에 취하며 추사-초의선사-소치님과 동파거사와 한 자리하며 운림동 첨찰산 자연을 자유하였다. 이젠 배를 탈 필요도 없이 수시로 찾아오는 백련사 진도 글벗들 및 외부문사들과 함께 그 운림동 자연과 역사 시정들과 함께 술과 시로 쌍계사 사루에서 밤을 지새우는 소동파의 자유를 만끽하며 보냈다. 군수가 읍으로 초청할 때도 진도의 모든 글벗들과 함께 하겠다며 쌍계사에서 만나자 하고, 군수는 푸짐한 음식과 술을 가지고 찾아와 쌍계사에서 대접했다. 그 자리에서도 무정은 군수에게 시로써 한마디 선정 충고를 잊지 않았다. 모두 함께 들길과 산길을 걸으면서도 주고받은 그 모든 시들을 소실치 않고 다 모아 시집을 펴낸다면 아마도 어느 세상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인류사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넘치는 시집이 되리라. 그 더욱 그 자리 중심에 섰던 유배자 정만조의 뜨거운 실존을 모두 다시 보리라. 무정은 그렇게 본도로 나오고 자유로워짐으로써 후생들을 가르치는 시간이 아니면 단 한시도 멈춤이 없이 진도시사 문인들과 전 진도를 낱낱이 찾아다나며 그 모든 것을 시로 담아냈다. 그러한 당시 진도시사 문인들 이름이 낱낱이 은파유필에 나타난다. 그토록 무정의 유배가 나라가 스러져가는 날 진도시사 문인들에게 새로운 꿈을 눈부시게 펼쳐 진도문학의 꽃을 만개시켰다.
4) 진도읍 자유당(自有堂)과 반궁강원(泮宮講院)
진도군과 유림 및 무정이 가르치는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일제히 무정에게 진도읍으로 들어오기를 간청했다. 학생들이 점점 많아지고 대부분이 읍에서 운림동을 오갔기 때문이다. 그로 무정은 비로소 동외리 철마산 남벽 가막골에 터를 다지고 <자유당>이라 하고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생수가 200-3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바로 그 자리에 허백련도 있었고 어린 소년 손재형도 있었다. 그때 그 제자들에게 “의제”와 “소전”이라는 호를 내렸다. 그 자유당시절이야말로 무정 자신과 진도의 절정기였다.
어린 손자 재형을 가르치기 위해 당시 벽파나루터를 보호 관리하는 삼지원 무관총수였던 손병익씨가 무정을 크게 우대하여 사저로 모셔 별채를 내어주었다. 무정은 그곳에 즉시 진도 향교를 비롯한 모든 사림의 자유로운 유학토론장으로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유학강원 곧 공자님의 행단(杏亶)과 같은 <반궁강원>을 열었다. 바로 거기에서 진도유학은 당시 새로운 국제사조의 새로운 사상과 신지식들을 무정으로부터 배우고 눈뜨며 또 가탄 없이 서로가 사상과 학문토론을 전개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크게 발전했다. 곧 지식인들이 새로운 변화 앞에서 스스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어떻게 대처하고 후생들을 가르치고 나서야 할 것인가에 관해 진지한 열정 노력과 고민을 다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보다 본격적으로 진도의 모든 역사유적들을 낱낱이 찾아 나섰다. 금갑도 시절 폐허가 되어버린 금갑진에서 무수히 파도친 겨레와 진도역사와 주민들의 삶을 붙들고 낱낱이 시로 담아낸 것처럼, 고려자주 오룡국 궁성 용장성 터 가을 잡초무덤에서 그날에 스러진 그 모든 오룡국 군사들을 고려왕자로 느끼며 자신이 이미 진도 섬 어부와 농부들과 가장 다정한 벗임을 거듭 확인한다. 그 길에서 석현고개를 넘으며 정중부 칼날에 무참하게 부왕 의종과 함께 스러진 고려 기(祈)왕자를 어찌 생각지 않았으랴. 의종과 왕자가 스러지던 날 벽파정을 찾아와 그 비통한 역사 앞에 정시를 남기고 돌아간 당대 최고 정시 시인 김신윤의 시정에 무정도 뜨거운 눈물을 흘렸으리라.
무정에게 그 모든 역사주체는 곧 들녘사람들! 흥망성쇠 영욕이 수없이 교체되는 역사와 현실에서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모두가 일제히 일어서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는 신명 한마당 굿판잔치를 벌이는 활기찬 진도 섬사람들! 도대체 이런 세상이 그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이미 금갑도에서 충분히 보고 느꼈던 일, 명절날이면 글벗들과 남천교를 거닐고 넘치는 굿판 마당에 뛰어들어 그 기적만 같은 현실들의 강강술래로부터 넘치는 진도민요민속들을 낱낱이 다시 시로 담았다. 그 가슴이 얼마나 뜨겁고 감동적이었으면 진도 농부들이 가꾸는 모든 채소와 꽃과 열매와 약초들까지 낱낱이 40수의 시로 써냈으랴. 무정에게 진도읍이야말로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가장 아름다운 호산도시(湖山都市), 그 아름다움을 <자유당10경>으로 담았다. 굳이 10경으로 한 것은 분명코 소치님의 영원한 역사시혼 그 시문집 <운림잡저>의 첫 장 <운림동10경>의 시정신을 생각한 자리였을 것이다.
5) 목포시사(木浦詩社)와 유산정(儒山亭) 시대회(詩大會)
유배말년 진도음 <자유당>과 <반궁강원>시절은 무정에게 가장 자유로운 때, 과거 유배 길에 목포에 내렸을 때 과거 부친의 선정으로 이미 모두가 알고 우르르 몰려와 가족처럼 눈물들을 흘리며 따뜻하게 맞아준 목포시민들! 그 목포를 수시로 자유롭게 오갔다. 그리고 1905년 을사년에 드디어 일본이 국권을 빼앗으려고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자 무정은 비로소 모든 진도문사들과 의논하여 일제히 목포로 나갔다. 그리고 그때 이미 목포에 거주하는 남농 화백을 비롯한 진도문사들 및 목포문사들과 함께 <목포시사>를 창립시켰다. 그것은 사실 목포시사만이 아니었다. 목포를 중심으로 인근 무안군, 영암군, 강진군, 진도군 등이 모두 함께 참여하는 시사요 각 군마다 운영위원들을 선정하여 견고히 했다. 그 발단은 물론 무정과 진도문사들로서 1896년에 이미 창립한 진도시사로서, 당시 목포시사에서도 목포문인들 다음으로 숫자가 많는 것이 진도문인들이었다. 당시 목포시사창립에 진도의 원로인 미산과 손병익씨도 참여하였다. 실로 화려하고 방대한 호남 서남부 대시단(大詩壇)이었다.
무정은 목포 바닷가 그 산을 비로소 “유달산(儒達山)”이라 명명했다. 조선 정신의 창달을 모두 함께 꿈꾸는 목포시사 붓의 높은 정자(亭子)를 뜻했다. 조선 선비 붓들이 가장 사랑하고 그 뜻을 좇는 자리가 곧 정자로서 그것은 꼭 사람이 세운 정자만을 말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사방팔방이 확 트이고 모든 바람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곳이면 어디나 그곳이 곧 정자였다. 그리고 어느 땐가는 꼭 그곳에 실제 정자가 들어서곤 했다. 곧 모두에게 유달산처럼 우람하고 창끝 칼날로 아름답게 땅과 바다에 우뚝 선 최고의 자연정자가 없었다. 그로써 목포시사를 <청호유산시사(靑湖儒山詩社)>라 했다. 줄여서 <유산시사(儒山詩社)>라고도 했다.
시사창립과 더불어 당장 봄가을로 매년 두 차례씩 <유산정시대회>를 개최하여 신인들을 발굴하고 스러져 가는 조선의 붓끝을 높이 세웠다. 그러자 그 정신이 급속히 전국으로 확대되어 서울, 경기 이남의 전역에서 조선의 붓들이 마치 과거시험장처럼 구름처럼 몰려와 대성시를 이루고, 꺼져 가던 조선의 붓 정신이 다시 불을 지폈다.
그렇게 무정이 진도시사문인들과 목포시사를 창립시키고 2년을 함께 한 후 1907년 비로소 다시 부름을 받고 돌아가 성균관에 복귀했다. 그리고 목포유산정시대회 때마다 직접 참여함으로써 그 열기는 더욱 크게 확산되었다. 그리고 결국 유달산에 <유산정 유산정>이 세워지고 그 날에도 내려왔다. 그러나 돌아간 지 3년 만에 대한제국은 끝내 무너지고 그 기본체제가 그대로 일제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12년 유배 후 복귀한 지 불과 3년 만에 끝내 스러지고 마는 국가. 그동안 자신이 유배된 시절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가족들과 국가 그리고 일제의 틈 속에 끼워버린 자신의 숙명과 그 고독을 홀로 가슴에 않고 얼마나 고뇌했으랴. 칼보다 강한 붓의 길이 얼마나 어렵고 비통한 자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으리라. 무정은 또 새로운 한 가닥 소망을 안고 옷을 벗지 않았다.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당시 조선의 최고 석학인 무정을 명륜당 총제로 세우고 이어서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임명하여 가르치게 했다. 당초 개화파로서 민씨 정권에 밀려났던 무정이 고종의 폐위와 함께 복귀되어 개혁의지를 불태웠을 일임에 분명하나 뛰어난 조선 학자를 이용한 일제에게 이용당한 것인지 아니면 자의였던지 일제가 주관하는 <조선사>를 편찬하면서 일제 쪽에서 조선사를 기술한 자리가 겨레 앞에 가장 큰 친일 반민족자로 낙인찍히고 만 자리이다.
6) 송학당 출신 문사들의 석치정시사(石峙亭詩社)와 석치정10경
군내면 송산리 송학당은 19세기 초 순조의 즉위 직후인 1803년(순조3)에 사회적 신분을 넘어 누구나 함께 배워야 한다는 송산리 사림의 도훈장 곽민효 선비를 비롯한 유학자들에 의해 마을 동계로 재원을 마련하여 세운 마을동계 학당이다. 그로 조도와 이웃 군들에서까지 새로운 꿈 앞에 모아든 유생들로 성시를 누렸다. 그렇게 90년의 역사를 지키던 시절 조선의 최고 유학자인 무정이 1896년에 진도로 유배 오고 <진도시사>을 세우자, 비로소 송학당은 새로운 전기를 맞아 활기를 띠었다. 당시 송학당 훈장을 지낸 송암 곽진권을 비롯하여 송학당 출신의 뛰어난 유학 문사들이 일제히 진도시사 회원이 되어 무정과 함께 했다. 당시 송학당은 상반의 신분을 넘어선 앞선 정신과 사상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완고한 진도읍 향교보다 오히려 활기차고 앞선 유학전당으로 성시를 누린 진도 실질적인 사림 학당이었다. 무정의 정신과도 일치했다. 그로써 목포시사를 창립할 때와 그 후 춘추시대회에도 줄곧 참여했다.
그러나 결국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제국주의 식민교육이 전 국민적으로 추진되어 1909년 진도읍에 진도국민학교가 세워지고 이어서 1923년 가까운 고성에 고성국민하교가 세워지자, 반 유교 탈 봉건사회를 갈망하던 국민 앞에 만민남녀평등 선진사회의 새 시대 새 교육이라는 자리에서 모두가 일제가 세운 학교로 몰려가 버렸다. 더 이상 배울 사람이 없으므로 가르칠 수가 없었다. 그렇잖아도 문을 닫힐 수밖에 없던 때 1933년 군내국민학교까지 세워지면서 송학당은 폐쇄 철거령 앞에 비로소 운명을 다했다. 130년의 눈부신 역사가 허무의 빈터가 되고 말았다.
그 비통하고 허무한 역사 앞에 송학당 출신의 스승들과 모든 문사들이 모두 모여 마지막 조선의 붓을 꽃피울 <석치정시사>를 창립했다. 마치 목포 유달산을 “유산정”이라 하고 목포 <청호유산시사>를 창립하던 때 처럼. 그 <석치정>은 진도 오룡국 용장궁성지를 에워싸고 있는 용잔산성 안에 있다. 용장리 선황산이 서북방향 오류리로 뻗은 자리 유교리 뒤쪽 산마루에 있는 우람한 바위언덕 <망바우>이다. 그곳에 오르면 명량해협과 마로해협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 몽고침략과 임진왜란 때 오루와 유교리 사람들이 적의 동태를 망보던 곳 그래서 일반 주민들이 “망바우”라 하고, 선비들은 “석치(石峙)”라 했다. 바위고개란 말이다. 과거엔 그 망바우로 고갯길이 있었기 때문이나.
송학당 출신 문사들이 30여명 모여 그 망바우 고갯마루에서 <석치정시사>를 창립하고 마치 정자를 돌로 깎아 세운 것 같은 그 석벽에 <석치정>이라 새겼다. 그곳은 진도가 겨레역사를 안고 가장 찬란하게 우뚝 서 오룡국을 세우고 치열하게 외적들과 싸우고, 가장 장렬하고 비통하게 스러진 역사의 터! 자연은 그 역사와 영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위를 둘러보는 그 아름다움은 다른 그 어느 곳이 따를 수 없는 곳이다. 특히 그곳 울돌목 나루터 벽파진의 정자 벽파정은 겨레 역사정신들이 끊임없이 이어진 유배정시로 고귀함과 슬픔을 더하는 곳..... 이미 나라가 스러진 지 20년을 넘어선 자리에서 겨레 붓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백성 앞에 고작 그것 밖에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욱 애처롭고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런 절망 앞에서 마다 겨레 붓들이 했던 것처럼 석치정10경을 정하고 그를 모두 붓으로 읊어 남겼다.
석치정 10경(石峙亭10景)
1경 석치정운(石峙停雲) : 석치에 머문 구름
2경 선황출일(仙皇出日) : 선황산 일출
3경 금골낙조(金骨落照) : 금골산 낙조
4경 서강어화(西江漁火) : 둔전포만 밤 고기잡이 불빛
5경 죽등명월(竹嶝明月) : 용장산맥 죽등의 명월
6경 유교모연(柳橋暮煙) : 유교마을 저녁연기
7경 오류춘앵(五柳春鶯) : 오류마을 봄 꾀꼬리
8경 삼주추안(三洲秋雁) : 명량해협 삼주 가을 기러기 떼
9경 벽파귀범(碧波歸帆) : 벽파에 돌아오는 배
10경 옥산청설(玉山晴雪) : 울돌목 건너편 옥매산 갓 개인 눈
* 시문들은 다른 편에 게재함
석치정 문인들이 그곳에 정자를 세우려 했으나 그 작은 꿈도 이루지 못하고 떠났다. 그러나 당시 모든 기록과 석치정10경의 시들을 낱낱이 필사본으로 남겼다. 그리고 그로부터 70년의 세월이 지난 후 고군면이 그 바위고개에 <석치정>을 좋게 세웠다. 오늘에 그 망바우 고개 석치정에 올라서면 어찌 그날의 붓끝만 같을 수야 있을까만 석치정10경은 흐르는 자연과 역사와 그날의 석치정 문사들의 시심들을 안고 가슴 벅차게 아름답다. 그 붓들이야말로 겨레 전통 고전 한시들! 오직 한글만이 우리의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에게야 할 말이 없지만 진도에게는 어느 자리보다 고귀하고 찬란한 마지막 붙 끝 눈부신 시의 꽃들이다. 무정과 모두 함께 목포에 나가 세운 목포시사마저 흐지부지 되고 만 날에 그래도 진도의 붓끝 시는 살아 있었다. 일제시대에 진도가 오직 창무악극과 서화만을 찬란하게 꽃피우고 문학은 불모지였다고 한동안 의아스럽게 여겼던 부끄러움이 오히려 크다. 이미 모든 글이 한글로 바뀌는 시절 석치 붓들이 그 뛰어난 시문력(詩文力)으로써 마음만 먹었다면 한글 시문학을 어찌 함께 꽃피울 수 없었으랴만, 송학당 건물마저 철거되는 앞에서 그러고 싶은 마음은 아무도 없었으리라. 때문에 한글문학이 진도에서 태어나기까지는 최소한 그로부터 또 한 세대를 요할 수밖에 없었다.
또 석치정 시인들만 아니라 무정과 함께 진도시사를 세우고 또 목포에 나가 목포시사까지 서남부 호남의 최초 근대문단을 세워 전국으로 확산시킨 선두 주역인 진도시사 문인들은 무정마저 떠나고 이어서 나라까지 잃자 그 비통함을 시로 남겼다. 많았을 것임이 분명하나 현재까지 밝혀진 자리는 몇 안 된다. 대표적인 두 사람이 무정과 가장 가까워 붙어살다시피 하며 가장 시문에 뛰어났던 진도읍 강제 박진원(康齊 朴辰遠)과 오히려 그보다 앞섰다는 송산리 송학당 훈장 송암 곽진권(松庵 郭震權)이다. 강제는 끝내 나라가 망하자 벽파진에 나아가 그 무수한 유배시인들의 정시산실인 벽파정 기둥을 붙잡고 겨레의 슬픈 운명을 탄식했다. 그리고 송암은 고려 말 무주공도시절 진도호장으로 유배 와 다시 부름을 모두 내젓고 끝까지 진도를 지키고 떠난 당시 가흥현 오늘의 군내면 정자리 <압구정(狎鷗亭)>-유배자 조희직(曺希直)이 손수 지어 갈매기와 붓을 벗한 정자 - 을 찾아가 그날의 향교마저 들밭이 되고 만(교육이 끊긴) 쓸쓸한 빈터에서 그님을 다시 돌이키며 외로운 옥주성 낙조 슬픔을 읊었다. 더불어 1965년 목포시사 창립 60주년을 맞아 목포시사가 창립부터 남긴 시들로 펴낸 <목포풍아집(木浦風雅集)>엔 진도문사들의 시가 아주 많이 실려 있다. 그를 뛰어난 필체로 낱낱이 붓으로 써서 그를 활자로 만들어 펴낸 편집주간이 당시 목포상고 한문 선생님으로 재직하신, 진도 송산리 송학당 훈장으로 시문에선 송암보다 사실 훨씬 앞섰다고 하는 익운 이순묵(益雲 李純黙) 선생의 아드님이시다. 오늘엔 정작 목포에서 찾기가 오히려 어려운 그 <목포풍아집>을 익운 선생의 애제자요 제13대 마지막 송학당 훈장이셨던 호은 박문배(湖隱 朴文培) 선생의 장남이신 종일(種一)씨가 소유 보관해 왔다. 오늘에 그런 시집 한권의 가치는 다른 어떤 보물보다 크고 소중하며 고귀하다. 그 중 진도문사들의 시를 낱낱이 뽑고 있거니와 모두 조사 확인되고 정리 완역 되면 석치정 시인들의 유교 등과 모두 함께 묶어 당시 진도 문인들의 문집으로 펴낼 계획이다.
<다음 21회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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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도 고성중학교 총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갯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