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에 만들어진 [남과 녀]는 20대의 젊은 감독 클로드 를루슈에게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겨주었죠. 이제는 60대의 대가가 된 클로드 를루슈 감독은 서늘한 지적 매력을 가진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와 프랑스의 국민 가수라고 불리는 파트리샤 카스를 캐스팅해서 다시, 남과 여의 사랑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부분기억상실증에 걸린 보석털이 전문 도둑과 재즈 가수. 그들이 먼 이국의 땅 아프리카의 모로코에서 만나 어떤 사랑을 펼치게 될까요? 레디스 앤 젠틀맨, 신사 숙녀 여러분,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레디스 앤 젠틀맨. 이 문장은 아마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 중 하나일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레디스 앤 젠틀맨. 그런데 이것은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타고 세계일주를 시도하는 배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레디스 앤 젠틀맨. 부분 기억 상실증을 앓고 있는 남자는 보석털이 전문 도둑입니다. 그는 자신이 세계에 진 빚을 갚으려면 세계일주를 해야 한다고 믿고 항해를 시작했다가 모로코까지 가게 되죠. 거기서 그는 자신처럼 역시 부분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재즈 가수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의 첫 부분은 보석상씬입니다. 유명 보석상에 들어간 경찰은 보석강도가 이곳에 들어올 것이라는 첩보가 입수되었다고 말합니다. 뒤이어 들어온 늙은 도둑. 경찰이 길 건너편에서 저격수와 대기하고 있으니 보석을 그대로 내주라는 지시대로 보석을 내주지만, 그 도둑은 정체는 곧 경찰이라고 신분을 밝히고 보석상을 찾아간 그 남자였습니다.
발렌틴은 이렇게 신출귀몰 변장술을 무기로 능수능란하게 보석을 털고 여자의 마음도 텁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좋은 차를 사고 호화롭게 생활하지만 죄책감이 고개를 듭니다. 자신이 다시 그 보석상을 찾아가 훔친 보석에 해당하는 거액의 돈을 지불하는 꿈을 꾸죠.
그래서 그는 배를 타고 전 세계를 일주하기로 결심합니다. 그것이 세상에 진 빚을 갚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 배의 이름이 레디스 앤 젠틀맨입니다. 그런데 클로드 를루슈 감독은 발렌틴의 화려한 보석털이 이야기 사이에, 아무런 설명 없이 노래하는 재즈 가수의 이야기를 삽입하고 있습니다.
여자 재즈 가수의 애인은 같은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트럼펫 주자. 그런데 그는 재즈 가수의 동료인 다른 흑인 재즈 가수와 밀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충격으로 그녀는 언뜻 언뜻 기억을 잃기 시작합니다. 무대에서 노래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무대를 내려와 버리죠. 그리고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재즈바의 사장은 모로코에 있는 한 호텔의 바를 소개해 줍니다.
이렇게 남과 여는, 각각 다른 사연으로 모로코로 향하게 됩니다. 모로코에 도착한 발렌틴은 자신이 어느 순간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갔다가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두 남녀가 만나기까지 영화는 먼 길을 걸어옵니다. 그런데 왜 기억상실증일까요? 기억이 없으면 모든게 새롭다고 등장인물을 통해서 감독은 발언하고 있습니다.
이 낡고 상처 투성이인 세계를 감독은 새로운 눈으로 보고 싶어 합니다. 그 새로움은 우리도 모르게 관습적으로 변해버린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우리의 과거를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세상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자 이제 감독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두 남녀를 등장시킨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인생의 후반부에 서 있는 감독은 지금까지의 익숙한 시선이 아닌, 다른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싶어 합니다.
영화의 후반부는 모로코를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파리의 아름다운 불빛에 비해 삭막하고 거치른 모로코의 풍광은 우리를 발가벗깁니다. 어떤 가식 없이 쏟아져 내려오는 원시의 햇빛, 그곳에서 발렌틴이 자신의 정체를 들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원시의 풍경 앞에서 자신의 본질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또 그렇게 만나게 된 두 남녀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역시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을 찾기 위해 성지를 향하는 여정도 혼자이고, 뜨겁게 보낸 밤을 기억하는 것도 두 사람 중 한 사람뿐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숙명적으로 혼자인 것일까요?
레디스 앤 젠틀맨, 이렇게 영화는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위선의 허울을 벗겨내고 그 본질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삶의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본질, 바로 사랑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레디스 앤 젠틀맨. 2002년 칸느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클로드 를루슈 감독의 이 영화는 우선 국내에도 많은 팬이 있으며 내한공연을 하기도 했던 파트리샤 카스의 영화 데뷔작으로서 화제를 모았습니다. [레디스 앤 젠틀맨] 속에는 이프 유 고우웨이, 고엽, 예스터데이 휀 아이 워스 영 등 파트리샤 카스의 노래 부르는 명장면들이 곳곳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노래들은 한결같이 삶의 쓸쓸함을 바닥에 깔고 있습니다. 레디스 앤 잰틀맨. 기억을 잃은 눈으로 세계를 봐도 왜 세계는 새롭게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왜 사랑은 여전히 두 사람이 아닌 혼자서만 가슴에 기억해야 하는 불평등한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