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명장으로써 자는 여해, 시호 충무이다. 서울 출생.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에 보직, 이듬해 발포 수군만호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 ·훈련원 참군을 지내고 1586년 사복시주부를 거쳐 조산보 만호 때는 호인의 침입을 막지 못한 데 대해 정죄하려 하자 그 원인이 첨병을 거절한 데 있다 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끝내 주장하다 중형은 면했으나 백의종군의 길에 올랐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이 되고, 1589년(선조 22) 선전관 ·정읍 현감 등 미관말직만을 지내다가 1591년(선조 24)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 ·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같은 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승진,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적선 30여 척을 격파하고 이어 사천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 적선 13척을 분쇄한 것을 비롯하여 당포에서 20척, 당항포에서 100여 척을 각각 격파하여, 자헌대부에 승품되고 7월 한산도에서 적선 70척을 무찔러 한산대첩의 큰 무공을 세웠다.
이어 정헌대부에 오르고 다시 가토 요시아키의 수군을 안골포(安骨浦:창원군 웅천면)에서 격파하고 9월 적군의 근거지 부산에 쳐들어가 100여 척을 부수었다.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격파, 남해안 일대의 적 수군을 완전히 일소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하자 죽도에 진을 옮기고, 장문포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막아 왜군의 작전에 큰 타격을 가하였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확충 ·난민구제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였다.
이에 앞서 명 ·일 간의 강화회담이 깨어지자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 때 원균이 참패하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어,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부수었다.
다음해 고금도로 진을 옮겨 철수하는 적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의 수군과 연합작전을 펴, 적군을 기습하여 혼전중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왜란중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민족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고 또한 격퇴함으로써 한국 민족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인물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시조 ·한시 등 여러 편의 작품을 남겼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이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이 추증, 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장지는 아산의 어라산이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에 있고 충무의 충렬사, 여수의 충민사, 아산의 현충사 등에 배향되었다.
이 중 현충사는 성역화되어 전시관 등을 건립, 그의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저서에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