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 짬뽕, 탕수육”을 읽고
딸내미가 “짜장, 짬뽕, 탕수육”이란 책을 가지고 와서는 독후감을 쓰라고 한다. 자기도 쓰고, 엄마도 쓰고, 아빠도 독후감을 써야 여름방학 숙제가 된다고 한다. 몇 장 되지도 않은 책장에 그림이 대부분인 내용은 1~2분정도 되는 분량이었다. 중화요리 집 “종민” 이란 아이가 전학을 가서 다른 학교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었다.
자장면! 가슴 아리도록 서러운 시절의 음식! 이 음식을 먹을 때면 언제나 떠오르는 나의 추억! 누나 같은 나의 고모 얼굴!
내가 자장면을 먹어본 것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당시 “고전읽기”라는 대회가 있어서 담임선생님을 따라 창원초등학교에 가서 시험을 보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점심때가 되어 마산의 어느 중화요리 식당에 들어갔다.
그 기서 “고모”를 만났다. 나는 친 고모는 없다. 부친이 유일한 형님이 있었으나 한국전쟁에서 전사하셨기 때문에 나에게는 친가 쪽으로는 종조할아버지 다음으로 당숙이 가장 가깝다. 내가 고모라 부르는 분은 실제는 당고모가 되는 것이나, 당시에는 촌수는 알 수 없는 나이라 나에게는 그냥 고모인 셈이다. 그 식당에서 서빙을 하는 고모를 선생님이 다른 데를 쳐다보는 틈을 타서 고모라고 소리 낮춰 불렀다. 고모는 들었으나 눈짓만으로 알았다는 표시를 하고 자기 일을 계속하였다. 단무지도 가져오고, 새까만 자장면도 가져왔다.
난 태어나서 새까만 음식은 처음 보는 것이라 젓가락을 들고 가만히 있으니 선생님께서 “자장면 싫으냐?” 하고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당시에 어린아이들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인 자장면을 제자에게 대접한 셈인데 그 제자는 생전 구경도 하지 못한 음식을... 그것도 새까만 음식을... “어...아인데요” “그럼 먹어” “아...” 그리고 젓가락을 만지작 거리고 앉아있는데 선생님께서 자장면을 젓가락으로 휘휘 젖어서 드시는 모습을 보고 나도 따라서 젓가락으로 자장면을 휘적휘적 비벼서 먹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심심산골이기도 하지만 넉넉한 마을은 아닌 곳이다. 시제 때나 먹는 돼지고기 맛을 알 리가 없고 자장면이 맛있는 음식인줄은 더더욱 모를 것이며 새까만 음식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었다. 일년 내내 보리밥에 된장하고 김치만 먹는 산골생활 이지만 나는 모친을 따라 “신 마산” 시장나들이를 자주 하였기 때문에 색깔이 하얀 “마산국수”는 자주 먹어보았으나 새까만 국수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마도 우리모친도 자장면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알았다면 감이고 쌀이며 되는대로 지고 시장나들이를 같이 하는 아들내미한테 사주지 않았을 리가 만무하다. 내가 국수를 맛있게 먹을 때면 언제나 한 그릇 더 먹으라고 하였었다. 당시 나는 식사량이 적었고 처음 보는 음식이라 서툰 데다 새까만 자장 속에 섞여 있는 고기나 양파를 먹어야 되는 것인지 남겨야 하는 것인지 몰라 면만 골라서 먹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자장면이 입에 안 맞나 보네” 하시면서 계산대로 가시고 나서, 고모가 다가 와서는 내손에다 10환짜리 동전(당시 일원) 하나를 쥐어 주고 가셨다. 물론 그날 저녁에 고모 만났던 얘기랑 자장면 얘기를 모친한데 하였고 왕고모님이 데리고 있던 고모를 그 식당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였을 것이라고 들을 수 있었다.
고모는 본래 막내 종조부님의 큰 따님이었으나 종조부님 살림이 넉넉지 못하여 우리 집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나보다 여덟 살 많은 고모를 따라 들로 산으로 같이 다녔기 때문에 우리친구들은 당연히 내 누나라고 알고 있었다. 누나가 없는 내가 많이 따르기도 하였지만 가난한 살림이 사람을 가깝게 한 격이라 할까...
고모에 대한 기억은 이뿐이 아니다 가난과 함께 연상되는 추억이지만, 내가 초등학교에도 가지전, 일곱 살 무렵 고모를 따라 면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에 구경을 갔다. 십리길이다.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승용차로 10여분이면 갈 수 있는 길이지만 내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도 비포장에 먼지가 펄펄 나는 자갈길이었다. 당시 기억으론 근 한나절이나 걸렸던 것 같다. 구경이라야 지금기준으로 보면 별것도 아니었다. 똑같은 노래를 “동네 4H 그룹별”로 노래하고 무용하는 것이 전부였다. 점심때가 되어, 가지고 온 도시락을 먹는데 고모가 싸온 도시락은 보리밥에 김치였고 고모친구들이 싸온 도시락은 오징어포 무침에 쌀밥이었다. 어떤 사람은 계란 프라이를 밥 위에 얹어 오기도 하였다. 꼬마는 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 밥 저 반찬을 다 먹은 기억이 난다. 고모가 얻었는지 친구 분들이 나누었는지 그것까지는 알 수없지만 나이가 들어 이일을 생각 할 때마다 우리 집이 가난하였다는 일로 각인된다.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야 유기농으로 지은 보리밥에 무공해 김치면 건강음식으로 모자람이 없으나 그 당시만으로 보면 가슴 쓰라린 추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고모나 모친을 따라 많이 나다닌 덕인지 비교적 우리고장의 길목을 내 친구들 보다는 세세히 알고 있었다. “마산 가는 길”이며 “중리, 함안”을 어떻게 가고.... 산을 넘어 가는 지름길까지...평생의 타향살이가 그때 이미 예견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딸내미 덕에 가본지 십년이 넘은 고향생각, 뵌 지가 십년이 넘은 고모생각 이 상념 저 생각에 더운 여름날의 밤이 깊다. 지금이 삼경이면 머리위에 은하수가 밝게 빛날 것이다. 유난히 맑은 하늘이 있는 곳! 서쪽을 보고 앉은 나의 고향집은 더운 여름날엔 방안까지 햇살이 들고 검은 진흙으로 마름질을 한 마루는 발바닥이 뜨거워 올라서지를 못해 여름동안은 감나무 밑 평상에서 대부분의 일이 이루어진다. 밥 먹고... 뒹굴고... 자기도 하고... 그 고향이 꿈속에 나타나면 지금도 놀라서 일어난다. 가난한 고향이 날 따라 붙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자장면은 동양철학이 깃든 음식이다. 정작중국에는 우리나라 자장면이 없다고 한다. 그 음식이 중국의 것이던 우리 것이던 동양의 음식이다. 동양의 사상에는 조화를 중히 여긴다.
하얀 면에 검은 자장을 얹어먹는 자장면은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음식인지도 모른다. 가정의 화목을 도모하기 위한 자리에 자장면을 먹어보는 여유로움은 어떨지?
가난한 사람에게는 꿈의 음식이었다. 지금은 그 자장면이 옛날처럼 인기 있는 음식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도 꾸준한 사랑을 받는 음식인 것만은 틀림없다. 고운추억을 가져다준 자장면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요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첫댓글 그려, 참 아련한 추억이 있는 음식이 자장면이지. 아니 짜장면...외로움을 불러오는 가을 바람이 슬슬 불기 시작하니 고모보러 함 오제? 고전읽기라..그때 단테 신곡에서 지옥. 연옥. 천국 구경을 하였고, 춘향전에서 이도령 춘향이가 첫날밤 치루던 사랑가 기억도 나네. 그 때 경시대회차 마산도 처음 가 보았지. 돌아보면 시절 그리운데, 근데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아.
추석이 가까워 졌습니다. 들에는 벼가 익어갑니다. 감도 익었습니다. 밤도 익어갑니다. 즐거운 추석이 옵니다. 옛날교과서 한구절이 생각나는데 꼭 친구 농장풍경같아서....
친구는 나보다 일찍 자장면을 먹은 것 같은데. 고등학교 졸업 후에 먹은 것으로 기억되네. 아이들이 어릴 때엔 자장면 외식을 한 기억도 나는구만.
고성보다 풍족한 마을은 아닌데 마산이 가깝다 보니 쪼매 빨리 먹어본 것 같다.
김해 한림국민학교 다니다가 6학년 학기 초에 마산 가포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고전읽기 대표로 공부는 안 하고 숙직실에서 책만 보아 신곡, 삼국유사, 조웅전임진록 세 권을 달달 외웠지요. 마산 시대회에서 1등을 해서 가포국민학교 생기고 이 십 수년만에 뭔 대회서 1등 한 게 처음이라 담임선생은 내게 크레용과 공책을 사주고 완월인지 월영인지로 전근되고 나는 도대회에 나가 2등을 했지요. 회원동 마산동중에 입했는데 당시 학생버스비가 5원이었고 중국집 짜장과 우동이 보통 20원이었는데 동중 앞 딱 한 집이 10원이었어요. 찐빵은 10원에 12개를 주었고요. 친구 소개로 처음 먹어 본 그 짜장 때문에 이틀을 가포까지 걸어 갔지요
기억력 조타..
대통령고향과 지척간이라 봉하바위 정기를 받았나 보네요. 20원이면 큰 돈이었네요. 당시에 1원으로 풀빵 3개를 샀던기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