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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생이 교직된 서정의 메아리
-박헌오 시조집『국수』에 붙여
유 준 호(시조시인)
Ⅰ. 여는 말
이번에 박헌오 시인이 9번째로 시조집 『국수』을 상재한다. 우선 축하를 드린다. 시인은 1949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당진군 순성면에서 어린 시절을 지내고 1963년 이후 대전에 뿌리를 내리고 이곳에서 학업을 마치고 대전시청에 근무하면서 시조를 익혀 이에 정진하면서 문학에 대한 애정을 남달리 발휘하여 시청 내에서도 문화예술계 일을 도맡아 하며 문화체육국장, 대전시 공무원연수원장 등을 지내고 대전동구부구청장으로 와서는 대전문학관 설립에 앞장서 그 실무를 맡아 일하고, 정년퇴직 후 대전문학관 초대관장으로 그 기초를 다져 대전문학의 요람을 만들었다. 1987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문학 추천으로 시조단에 등단하여 35년간 시력(詩歷)을 쌓으면서 전국한밭시조백일장을 주관하기 위하여 대전시조시인협회를 창립하고 오늘날까지도 전국한밭시조백일장을 이끌어오고 있는 중견시인이다. 그 동안 시조집으로「하늘이 들고 나온 노란 시집」등 8권과 시조 이론서 「현대시조 창작」을 상재하였다.「충남시인협회상, 대전문학상, 한국시조협회 작품상, 하이트진로문학상, 한밭시조문학상 등을 받았으며, 충남시인협회 부회장, 대전문인협회 수석부회장, 대전시조시인협회장 등을 지내고, 현재는 한국시조협회 이사장으로 시조문학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본디 시조는 어떤 유정물(有情物)과 무정물(無情物)의 존재 안에 있는 무늬나 형상, 속성 등을 시어로 불러내 정해진 율격으로 틀에 어울리게 형상화하는 작업의 산물이다. 따라서 시인은 이 유·무정물을 인간 본연의 순수한 눈으로 보고 이를 시적 안목으로 여과(濾過)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시조는 안정된 형식과 가락에 맞춰 써내야 하는데 이 때 그 속에 특유의 무늬로 채색하는 과정을 거치면 보다 아름다운 시조가 된다. 시조는 어떤 사물을 바라보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어디에도 존재하는 보편적 공감을 자아내는 비현실적 모습을 연출하는 이미지의 공간이다. 특히 시조는 우리 민족 얼이 흐르는 유구한 한민족 가락의 유산(遺産)이다. 그런데 요즘 눈길을 끄는 시적 표현방법으로 시조에 ‘낯설기 기법’이란 것이 시도되고 있다. 이것이 성공하면 독자에게 한없는 신선감을 주지만 자칫 지나쳐 그것이 폭력적인 언어 질서로 나타나 이미지의 간극을 메울 수 없으면 오히려 돌이키기 어려운 작품의 훼손(毁損)을 초래(招來)한다. 지나치지 않는 시적 기교를 사용하여 이를 실현해야 한다. 시조 작품에서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대부분 명사를 통해서 하고, 전달방법을 역동적으로 새로움을 느끼게 하려면 동사나 형용사를 잘 활용해서 한다. 이런 면을 고려하면서 박 시인의 작품을 살펴보려 한다.
Ⅱ. 펴는 말
여승당 뒷마당에
달빛이 서성이고
종각에선 목어(木魚)가
군침 꿀꺽 삼키는데
동백꽃
선홍빛 초경(初經)
그 향내에 풍경(風磬)운다.
-동학사 월야
‘월야(月夜)’하면 고요하고 교교(皎皎)한 밤으로 하얀 달빛이 무명천처럼 깔려 있는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특히 달빛이 내린 곳이 절 마당이고 보면 더욱 한적한 감흥을 풍기게 된다. 동학사는 계룡산 밑자락에 위치한 절로 고려 말에 지어진 고찰(古刹)이다. 일반 사찰과 달리 여승(女僧)들만 기거하며 불도에 정진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비구니수련도량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동학사 도량을‘여승당’이라고 하였다. 그 뒷마당에 달빛이 찾아와 주변을 서성대고 있다. 달빛도 불심에 젖어 스님과 함께 심신을 수련하고 싶어 그리 할까. 때마침 종각에 매달린 잉어 모양의 나무 북(鼓)인 목어(木魚)는 불심의 맛을 그리워하는지 ‘군침 꿀꺽 삼키는데’ 앞 뜨락에 동백꽃은‘선홍빛 초경’처럼 붉게 피어 바람결에 향기 실어 풍기니, 풍경(風磬)도 이에 감흥(感興)하여 뗑그렁 울리고 있다. 한 폭의 동양화 같다. 달빛이 마당에 내려 비치는 모습을‘서성이고’라고 표현하고, 목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군침을 꿀꺽 삼킨’다고 역동적인 시어로 표현하여 정적(靜的)인 분위기에 동적(動的)인 사물의 모습을 교묘히 배합시켜 표현함으로써 시적 표현미를 보여주고 있다. ‘선홍빛 초경(初經)’이란 표현은 특히 신선하다.
울밖에 꽃 심으면
우리 동네 복 온다고
짬짬이 꽃 가꾸고
길을 쓸던 어머니
모인 복
못 누리시더니
꽃이 되어 서계시다
-어머니의 꽃길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을 표현한 사모시조(思慕時調)이다. 집 주변을 가꾸고 아름답게 꾸미며 비질을 하며 내 가정을 넘어 스스로가 사는 고장에 복이 깃들기를 기원하던 심성 깊은 어머니 모습을 초 중장에 놓고 종장에 기원하시던 복(福)을 제대로 누리시지 못하고 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승을 떠나신 어머니라고 하여 어머니를‘꽃’으로 환유(換喩)하고 있다. 세상에 그리운 것이 한 둘이겠느냐마는 그 중에도 가장 그리운 존재, 마음이 쓰이는 존재는 어머니보다 더한 존재는 없다. 그래서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우주이고 생의 고향이기에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의 존재이다. 제목 “어머니의 꽃길”이란 말은 어머니가 사시었던 아름다운 인생 길, 향기 나는 삶의 길이란 뜻으로 쓰였다. 그리고 ‘복’이란 말은 소박하고 순수한 때 묻지 않은 꿈이며 소망의 뜻으로 파악된다. 어렵지 않은 일상적 시어로 애틋한 모정을 표출해 보인 작품이다.
초승달 그네 타고
산마루 넘어온다.
갔다가 올 때마다
둥글어져 안으려니
그네는
잡히지 않고
그리움만 발 구른다.
-그네
달은 원형심상으로 아름다움, 모성, 꿈 등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그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초승달은 내일을 기대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열어주는 희망의 달이다. 차츰 차츰 밝기와 크기를 늘려 한한 세상, 밝은 내일을 보여주다가 희망이 가득한 보름달로 그 절정을 보여주고 차츰 차츰 크기와 밝기를 줄여가다가 희미한 그믐달로 서산마루를 넘어가는 아쉬움이 되기도 한다. 이를 원용한 시조가 이 작품이다. 추억이 서린 마을 앞 오래된 둥구나무 휘청한 가지에는 일상 그네가 매어 있기 마련인데 그 가지 사이로 매일 달은 떠올라 밤마다 온 동네를 비춘다. 달은 동네 주민이라도 된 양 그네를 타고 산마루를 넘어온다. 떠오를 때마다 보름달을 향해 모양이 둥그러지는데 이를 품에 품어보려 잡아보지만 잡히지 않아 허전한 가슴엔 그리움만 쌓여 발을 동동 구른다. 달에 대한 애잔한 마음을 그네로 대유(代喩)하여 표현하고 있다. 동쪽에서 나뭇가지 그네를 타고 출발하여 떠오른 달은 지상에 머물음도 없이 휙 지나 서쪽 나뭇가지로 날아가 허무하게 떠나버리고 만다. 그리움과 함께 안타까움이 배어 있는 시조이다. ‘달’을 그네 타는 유정물(有情物)로, ‘그리움’을 ‘발을 동동 구른다.’고 하여 무형물을 유형물로 표현한 점이 새롭게 느껴진다. 이 작품에서의 시상은 천지를 관통하고 있다.
돋보기 닦아가며
읽어주던 세상 얘기
보청기 매만지며 들려주던 워낭 소리
몽땅 다 맡겨두고는 찾아가지 않는다.
어느덧 내 눈에도
근사하게 맞는 안경
주인이 떠났으니 대신 쓰다 물려줄까
내 것이 따로 없으니 빌려보는 세상이다.
-세상 빌려 살기
만상은 이 세상에 올 때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데 올 때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빈손으로 와서 세상 것을 잠기 빌려 살다가 갈 때는 빌려 쓴 것, 가지고 누리던 것 다 벗어놓고 빈 몸으로 간다. 그래서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하는 존재라 표현한다. 사계절은 순환구조로 자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인생도 네 토막의 사계(四季)를 가지고 있다. 소년기를 봄이라 한다면 청년기는 여름이요, 장년기는 가을이고 노년기는 겨울에 해당한다. 새싹처럼 자라나 꽃을 피우고, 성장하면서 가지를 뻗어 열매를 매달고, 매단 열매를 익혀 씨를 만들고 차츰 기운이 쇠하여 낙엽처럼 지는 것이 계절의 흐름과 같다고 하여 비유하는 말이다. 이 작품은 인생의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에서의 상황을 표현한 작품이다. 첫수는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는 노인장이 돋보기에 사느라 낀 먼지와 김을 닦아내며 인간으로 살아온 해묵은 이야기를 읽어주시고,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매만지며 소 방울 소리(우령(牛鈴)인‘워낭소리’로 소박하게 특별한 삶의 욕심을 가지지 않고 살아온 인생역정을 들려주시더니 이제는 삶의 마지막 선물인 양 ‘돋보기’하나 남겨두고 이승을 떠난 노인장의 모습을 시화하였고, 둘째 수에서는 이 작품의 제목이 된 ‘세상 빌려 살기’의 표상으로 돋보기를 통하여 자신의 삶의 여정도 겨울이 가까워오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어느새 돋보기를 빌려 쓸 만큼 눈이 침침하여 이제 이를 빌려 쓰다가 자기도 이 노인장처럼 ‘내 것이 따로 없으니’이를 후세 누군가에 빌려주겠다고 하고 있다. 작품의 밑바탕엔 씁쓸한 인생의 비감과 허무감이 얼비쳐 있다.
탄생의 뒷자리는 모두가 껍질이다
그립단 말 뿐이지 돌아오지 않는 고향
한여름 다 태우는 곡조
앙상한 현금(弦琴)이다.
달랠 수 없는 울음 눈물 마른 껍질이다
검버섯 긁어주며 날 새우는 노부부
어느새 찬바람 매미
곡을 바꿔 부른다.
-매미껍질
매미가 변태할 때 벗은 허물인 매미 껍질은 선퇴[蟬退]라고 하여 두드러기, 열병, 소아 경련 따위에 한방약으로 쓰인다. 여름철 나무에 보면 둥치에, 가지에 매달린 빈 껍질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매미껍질이다. 매미는 애벌레로 나무 속, 땅속에서 2, 3년 동안 살다가 나와 몇 번의 허물을 벗고 매미로 태어나는데 입은 가늘고 단단한 대롱 모양이다. 이 대롱을 나무에 박고 진을 빨아먹으며 산다. 매미를 누군가는 한여름 교향악단이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여름철 산천을 아름다운 곡조(曲調)로 수놓는 곤충이 매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매미 울음소리를 맑고 밝은 소리로 청아하게 표현하지 않고 다분히 애상적(哀傷的)으로 표형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껍질이라는 쓸쓸한 잔재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라 느껴진다. 그렇다 탄생의 뒷자리는 언제나 껍질이 남아 있다. 껍질은 탄생의 징표이며 모체이다. 그러나 사라지는 존재이다. 그래서 첫수에서 ‘탄생의 뒷자리는 모두가 껍질’로 이는 ‘돌아오지 않는 고향’이라고 은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마음이 허전하기에 그 울음소리마저 ‘앙상한 현금(弦琴)’이 되고 있다. 이런 정서는 둘째 수에로 이어지고 있다. 매미껍질에서 껍질이 된 노부부로 시상은 전이(轉移)되어 매미의 울음소리는 찬바람이 부는 인생의 눈물어린 곡조가 되고 있다. 여기서 껍질은 탄생의 징표요, 죽음의 그림자가 서린 영물(靈物)이 되고 있다.
세상에서 젤 좋은 달동네 개미나라
전깃불 안 켜고도 굽이굽이 환한 길
할머닌 아름다운 여왕
개미가족 거느린다.
새경을 안 따져도 행복하니 불평 없고
다이어트 안 해도 허리는 에스라인
즐거이 일 마친 귀로에
노을 융단 밟는다.
무주택 차별 없는 평화로운 동네에서
문 없이 살아가도 도둑 한번 들지 않고
보리밥 한 양푼이면
골목잔치 풍성하다.
-개미나라
개미의 숫자는 이 지상 온 인류보다 많고 지상을 어슬렁거리는 짐승의 숫자보다 많다고 한다. 어찌 보면 지구를 점령하고 있는 막강한 점령군인 셈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개미가 사는 굴을 개미왕국이라고 한다. 여왕개미가 있고, 일개미, 병정개미 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발상에서“개미나라”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을 쓴 듯하다. 그렇다면 첫수의 ‘개미가족’이란 시어는 ‘개미백성’이나 ‘개미국민’이 되어야 마땅할 것 같다. 이 개미나라에는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아 달빛을 켜들고 밤을 지내는 달동네 할머니 집 근처에 있는 개미굴이다. 거기에서 할머니는 아마도 ‘아름다운 여왕’이 아니라 ‘아름다운 여 황제’가 아닐까 한다. 몇 개의 개미나라를 거느리고 있을 성싶기 때문이다. 둘째 수는 일개미 모습을 형상화한 부분이다. 일개미를 일꾼으로 보고 일꾼은 대개 새경을 받고 일을 하는데 이 일개미는 새경은 얼마인지 받는지 안 받는지 따지지 않고 행복하게 불평 한 마디 없이 일을 하고 있다. 부지런히 일을 하다 보니 일부러 다이어트하지 않아도 날씬한 모습이 되고 허리도 자연스레 에스라인 되었다. 개미들이 즐겁게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노을이 붉은 융단이 되어 깔린다. 그것은 개미에겐 더없는 축복받는 삶이다. 셋째 수는 개미가 사는 개미나라 동네에는 무주택자도 평화롭고, 대문을 달지 않아도 도둑이 들지 않는 근심 걱정 없는 삶의 터전으로 쌀밥이나 기름진 고기반찬이 아닌‘보리밥 한 양푼’에도 온 개미동네는 풍성한 잔치를 벌이는 삶의 파라다이스가 전개 되는 곳이다. 가난하나 평화로운 세상이 이 개미나라이다. 재물을 끝없이 탐하는 인간들에게 삶의 본질을 일깨워주고 있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가슴에 불 지피고
무심을 다비(茶毘)한다
명예도 소유도 뼈마저 타는 연기
정과 한 자취도 없이 향 한 줄로 청산한다.
고승(高僧)도, 제왕도
다 이 길로 떠나갔다
가신 곳 궁금하면 향로 불 붙여보라
연기는 언제라도 와서 넋을 업고 떠난다.
한 해에 한번 자시는
한술 밥도 못 올리면
어둠에 묻힌 향로 혼자 울다 잠들겠지
배고픈 영혼의 연명 향 한 줄로 족하리라.
-향로를 꺼내며
향로(香爐)는 향나무를 쪼개 만든 향을 피우는 화로이다. 대개 제사(祭祀)를 지낼 때 피우기 때문에 향로에는 늘 죽은 이의 영혼이 연계되어 있다. 이 향불에는 근엄함과 청결함이 서려 있다. 이 작품은 “향로를 꺼내며” 이에 서린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는 고래(古來)를 두고 해결하고자하는 인간들의 영원한 숙제이다. 일반적으로 맨 처음 인간은 자연 속의 어떤 단백질에서 변이를 거듭하여 인간화하였고, 그 생명이 다하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이 어떤 신의 영역에 있다가 와서 어떤 신의 영역으로 회귀(回歸)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하늘을 그 근원지와 종착지로 지목하고 있다. 위 시조는 인간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 있어 이 우주 어디에 존재한다고 보고, 그 죽은 이를 기리고 추모하여 향을 피우고 제(祭)를 올리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 이 시조는 이런 생각에서 출발하였다. 죽으면 땅속이나 자연에 들어가 흙이나 연기가 되어 자연이 되는데 첫수는 불교식으로 알려진 다비의식(茶毘儀式)을 하는 것으로 생전의 명예와 재물에 대한 소유도 다 타는 연기 속에 날리고 살아생전의 정(情)과 한(恨)도 다 한 줄기 연기가 된다는 뜻을 말하고 있으며, 둘째 수에서는 아무리 살아 이름을 드날리며 권력을 누리던 고승도, 제왕도 다 향불의 연기가 넋만을 업고 저승길에 들어간다고 하고 있다. 이는 다분히 유교의식에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셋째 수는 한해 한번은 돌아가신 날을 택해 향을 사르며 제사를 올리는데 그마저 제수(祭需)가 없어 못 올리면 향불 혼자 애달아 울다가 잠에 든다고 하여 그 혼망(昏忘)함을 표현하여 보여주고 있다. 옛날에는 제사상에 올린 제수(祭需)거리가 없어 종이에 대추, 밤, 감, 배, 사과, 조기 등을 제수명을 적어 올려놓고 제사를 지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제사라는 게 본래 그 정성이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리라. 이 시조에서의 향불은 죽은 이의 혼을 불러내는 초혼(招魂)의식의 상징물이다.
휘감긴 천의무봉(天衣無縫)
흘림 치마 벗어질 듯
호리한 허리선에 내밀한 정 흘리며
살짝 쥔 손가락 끝에
우담바라(憂曇婆羅) 꽃피운다.
연꽃 위 엄지발로
들어 올린 사바세계
턱을 괸 얇은 팔뚝 무량 사유(思惟) 떠받치고
지긋이 바라보는 눈매
대자대비 넘쳐난다.
중생구제 진언(眞言)들을
묵음(默音)으로 이르시며
옷깃도 젖지 않고 난바다를 걸어와서
속진(俗塵)을 비우고 비워
가람(伽藍) 한 채 짓는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像)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반가(半跏)의 자세로 앉아서 왼손을 오른쪽 다리 위에 두고 오른쪽 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 채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대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의 불상이다. 마치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연상하게 하는 불상이다. 이 불상의 극치(極致)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다. 삼국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국보 제 78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그 빚어낸 솜씨가 정교하고 빼어나 마치 살아서 고뇌에 빠져 있는 양 생동감이 넘치고 아름다워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수작(秀作)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시조는 그런 사유상의 모습을 시조로 담아 선보이고 있다. 너무도 완벽한 것 같기에‘천의무봉’이란 찬사를 붙여 시조의 문을 열고 있다. 바람이 살랑 불면 사르르 흔들려 흘러내릴 듯한 치맛자락에 허리선은 호리호리하니 무슨 내밀한 정이 흐르는 듯하고, 살짝 꼬부려 볼에 댄 손가락 끝에선 불교 경전 속에서 말하는 천년에 한번 핀다는 상상의 꽃인 우담바라(優曇婆羅) 꽃을 피우고 있는 것만 같다. 거기다 연꽃무늬 발 디딤판을 눌러 디딘 발끝으로는 이 어지러운 사바세계(娑婆世界)를 정(淨)의 경지로 들어 올리고 있는 듯하고, 얄팍한 팔목으로는 끝없는 사유(思惟)의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지긋이 뜨고 속세를 바라보는 눈매에는 부처님의 대자대비가 흘러넘친다. 중생을 속세의 구렁텅이에서 참부처의 세상으로 구하려는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같은 참된 가르침을 묵언(默言)으로 깨우쳐주시며 옷깃 하나 젖지 않고 어지러운 속세의 바다를 건너와 속세를 어지럽히는 티끌을 다 지우고 이상적인 참된 삶을 인도(引導)하는 불도량(佛道場)을 짓고 있다고 하여 이 사유상이 곧 도량(道場)임을 표현하고 있다. 이 반가사유상은 불교의 총체상(總體相)이다.
보이지도 않는 역병 괴물처럼 그려 놓고
코와 잎 막고 살라 손 안 닿게 떨어져라
살아도 죽은 듯 지내다
일어나야 산거다.
숨소리 거칠거나 체온이 올라가면
고려장 행 각오하고 인연 먼저 끊어둬라
눈물도 하늘에 맡기고
사잣밥도 굶고 간다.
노랑국화 꽂히면 세상에 나올 테고
하얀 국화 꽂히면 저승으로 떠날 테고
의술도 종교도 없이
코가 꿰인 운명이다.
-운명의 꽃송이
코로나 19 정국을 표현한 작품이다. 해를 두고 기승을 떨치는 못된 병마(病魔)로 온 지구촌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질병이다. 그 유행병 때문에 전 세계는 방역에 눈코 뜰 새가 없다. 모든 사람들을“운명의 꽃송이”라고 명명하여 이 작품을 썼다. 이 시대를 사는 이들은 아름다운 존재이지만 어떤 불가해(不可解)한 힘에 의하여 이 코로나 정국을 겪어야 하는 명(命)을 타고났다는 뜻으로 붙인 시제인 것 같다. 이 작품은 코로나를 대하는 방법과 수용하는 마음자세를 표현하고 있다. 코로나는 보이지 않는 역병(疫病)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괴물이다. 그러니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살아도 죽은 듯 마스크로 입과 코를 싸매어 그 놈의 접근을 막고 서로는 적당한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 그래야 목숨을 부지하여 살 수 있다. 이것이 첫수이다. 둘째 수는 이 질병에 침입 당했을 때를 표현한 부분으로 죽을 각오를 하고 모두와 인연도 끊고 혼자서 목숨을 하늘 뜻에 맡기고 지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참으로 처량한 처지가 됨을 표현하고 있다. 마치 ‘고려장’당한 듯이 지내라니 더없이 황당하고 황망하다. 셋째 수는 생사기로(生死岐路)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병마로 병상(病床)생활을 하다가 그 병상에 노란 국화가 꽂혀 있으면 병마를 물리쳤다는 신호이고, 흰 국화가 꽂혀 있으면 저승으로 떠났다는 신호이니 이 모두는 종교도 의술도 어찌할 수 없는 코 꿰여 사는 우리 인간들이라고 하여 운명론적 사고방식으로 이를 바라보고 있다. 흔히 타고난 팔자란 말을 하는데 이 역병에 걸려 생사가 갈리는 것도 무슨 무당의 점괘 같은 것인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 작품은 역병에 걸리지 않게 대처하는 법, 걸렸을 때의 대처법, 코로나 병동에서 일어나는 일을 순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얼마만큼의 비감(悲感)이 서려있는 작품이다.
산동네 밭이랑은 육자배기 오선지
옹이진 손마디에 녹두꽃 절로 피고
밭이랑 오르내리는
곡조 따라 노을 진다.
오선지 이랑마다 총총히 맺힌 음표
뻐꾸기 울어쌓는 산밭머리 달이 뜨면
오솔길 상모 돌리듯
빙빙 돌아 세월 간다.
철따라 파도치는 사랑바다 알록달록
피어린 알곡으로 알알이 여문 음계
온 산을 머리 이고 오는
내 어머니 아리랑아!
-산동네 밭이랑
어머니는 언제나 희생의 초상(肖像)인가 보다. 1960∼70년대 농촌 고향 동네의 산밭에서 어머니들이 머리에 수건 두르고 흐르는 땀을 씻으며 밭고랑에 쭈그리고 앉아 김을 매시던 정경이 불현듯 떠오른다. 작품 속에 은은히 밴 서정이 마음을 울린다. 이 시조는 은유가 많이 쓰였다. 산동네 산밭은 악보(樂譜)이고 밭이랑은 오선지가 되어 거기에 음표를 치고 음계를 올려 울리는 이는 어머니이다. 그 시적 발상이 참으로 참신하고 좋다. 이 시조에서 어머니는 농촌 생활의 악사(樂士)로 작사, 작곡가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작사 작곡해 내는 음악은 고급 오페라도 아니고 성악도, 유행가도 아니다. 느린 박자의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억양이 강하고 구성진 노래로 아낙네나 농부, 나무꾼들이 부르는 한이 섞인 소박한 소리인 육자배기이다.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콩밭을 매다보면 어머니 손마디에선 피부가 오돌오돌 부르터 녹두꽃 같이 부풀어 오르고 어느새 하루해도 저물어 노을이 진다. 오선지 같은 밭이랑에선 곡식들이 자라나 음표로 자리하고, 한여름 삶의 고달픔을 알리는 뻐꾸기가 애달픈 울음소리를 산밭머리에 쌓아 가면 달도 떠올라 또 하루를 상모 돌리듯 돌려 흐르는 세월을 재촉한다. 봄, 여름 철따라 알뜰히 가꾼 산밭은 어머니 사랑의 바다가 되어 가을엔 알곡들이 알알이 음계가 되어 익어간다. 어머니는 온산을 거느리고 사시는 민족 한의 상징이다. 우리민족을 누가 한이 서린 민족이라고 말을 했던가. 그것이 우리 가슴에 박혀 모든 생활에 이것이 흐르고 있을 줄 뉘 알았으리. 아리랑! 어머니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슴을 아리게 하는 우리 곡조이다. 이 말은 우리 모두의 가슴 속을 울리고 있다. 이 작품을 보면 산동네 밭이랑은 우리 어머니들의 삶의 터전이요, 한을 품은 우리 민족의 원초적 삶의 안식처인 것 같다.
눈썹에 맺힌 이슬 외로움이 천근(千斤)인데
울지 않는 섬이 있다 잠 안자는 섬이 있다
태양을 건져 올리랴
물질 어찌 멈추랴
삼 태극 휘장 달고 지킴이 된 화랑이다
호시탐탐 자맥질하는 왜구해적 쫒으랴
언제나 뜬눈으로 사는
문무대왕 현신이다
독도와의 짧은 만남 긴 여운을 끌고 간다.
스크루는 동아줄 틀어 울릉까지 이어 매면
남사당 줄타기 명인
부채 펴고 펄펄 뛸 걸.
섬의 나이 4백만 년 한결같은 청춘이니
망망대해 한가운데 금슬 좋은 남 섬 북 섬
단군(檀君)이 임명해 주신
불사불멸 성체이다.
일월(日月)의 열병식에 파도는 무릎 꿇고
구름 화관 변신술로 하늘 밭 가꾸느니
만만세 대한(大韓)의 동해
융성하게 경작하자
흙 한 줌 돌 한 덩이도 보석같이 귀하시다
새 한 마리 나무 하나도 신과같이 거룩하다
독도는 바다의 성문(城門)이다
국호(國號) 문패 지키자.
오늘도 깊은 밤에 성좌(星座)를 거느리고
끝없이 둥근 해원 억만 단의 해류 엮어
하나로 평화로운 세상
영롱하게 매놓다
해동 조선 시점(始點)으로 띄워놓은 부표에서
하늘과 땅 합궁하고 국운(國運)이 발원하니
찬란한 새날의 빛을
땅 끝까지 보낸다.
푸른 옷 치렁대는 바다를 몸에 입고
길게 뻗은 팔 끝에 돌주먹 내보이니
보아라. 저 수평선 너머
일본열도 포복한다.
-독도 탐방기
유치환은 “울릉도”라는 시에서 울릉도를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애달픈 國土(국토)의 막내’라고 하였는데 정말로 동쪽 먼먼 심해선 밖에 점으로 쉼표처럼 떠 있는 외로운 돌섬이 바로 독도이다. 이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실질 지배 상황을 보더라도 틀림없는 우리 국토의 막둥이인데 이를 지각없는 일본인들은 자기네 섬이라고 생떼를 쓰며 우기며 덤벼들고 있다. 억지로 국토 분쟁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런 현실을 조국에 대한 깊은 애정과 국토에 대한 애틋한 정을 담아 아홉 수(首)로 표출해 보인 현실 참여적 작품이다. 의인화 기법으로 독도의 모습을 형상화하면서 우리의 각오를 다지고 있는 약간의 서사적 성격을 지닌 시조이다. 독도를 ‘울지 않는 섬’ ‘잠 안 자는 섬’ ‘화랑’ ‘문무대왕 현신’ ‘불사불멸 성체’ ‘바다의 성문’ ‘국호 문패’ ‘부표’등으로 은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독도는 천 근 외로움을 짊어지고 잠 안 자는 섬이 되어 우리나라에 맨 처음 돋는 해를 건져 올리며, 호시탐탐 자맥질로 기어드는 왜구들을 쫓아내느라 문무대왕 현신으로 살고 있다. 스크루 동아줄 풀어 울릉까지 이어 매면, 우리 남사당 전통 줄타기 기예 명인이 부채 펴들고 한 바탕 흥을 돋을 듯도 하다. 독도는 우리 민족의 조상인 단군이 이름지어준 영원불멸의 성체로 성스런 존재이니, 이를 우리는 만만세 융성하게 가꾸어야 하겠다. 독도는 보석 같이 귀한 존재로 그곳의 산천초목은 하나같이 거룩한 존재이다. 바다의 성문, 국호의 문패로 오늘도 천지만상을 거느리고 평화로운 세상이 영롱하게 빛나게 하고 싶다. 여기서 우리 국운이 발원하였으니 찬란한 그 새날의 빛을 이 지구 끝까지 보내어 만방을 환히 빛내며, 수천 년 다듬은 돌주먹을 다부지게 내보여 철부지로 응얼대는 일본 열도를 바싹 엎드려 기어 다니게 하고 싶다. 한껏 민족정기를 고취(鼓吹)하고 있는 작품이다.
㉠깊은 산 옹달샘에
알몸으로 노니는 달
한 바가지 떠올려도
또 하나 남아있다.
열 번을 떠올려 봐도
지울 수가 없는 얼굴
-달빛 뜨기
㉡이슥한 그믐밤에
거나해서 집 찾는데
어떤 놈이 가로막네.
이놈 봐라 맛 좀 볼래.
그 밤내
엎치락뒤치락
날 샜네 어~
몽당 빗자루
-도깨비 씨름
㉢배춧잎 먹고 있는
파란 벌레 지켜보다
서릿발 뽀얗게 핀
배춧잎을 바라본다.
식객은 어디로 갔나.
미워한 맘 걸린다.
-식객
위 작품들은 겪고 보았던 일상적인 일을 짤막한 서정으로 표현한 단시조인데 모두 의인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은 옹달샘에 뜬 달을 바가지로 떠올리며 느끼는 느낌을 표현한 작품으로 달을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 달은 잊을 수 없는 인물, 그리움이 배어 있는 어느 여인 아니면 소녀가 아닐까 상상하게 한다. 고적하면 심금(心琴)이 울림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깊은 산 옹달샘’이라고 하니 왁자지껄한 시중(市中)이나 동네 가운데가 아니라 한적하고 고요한 어느 깊은 골짜기로 연상된다. 이런 곳엔 곧잘 약수라 하여 지나는 등산객의 목마름을 달래주는 조그만 샘이 있고, 거기엔 으레 바가지가 한두 개 놓여있다. 여기가 바로 그와 같은 곳인 것 같다. 그 옹달샘에 달이 비쳐 있는 것이 달이 알몸으로 노니는 모양으로 보였다. 매우 육감적 표현이다. 이를 바가지로 떠올려 보려고 열 번을 시도 했지만 달은 떠지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떠 있다. 그 달은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얼굴로 살아 있는 그 모습이다. 애상적인 시감(詩感)이 나타난 작품이다.
㉡은 거나하게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는데 휘청거리며 오다보니 앞에 거치적거리는 놈이 있어‘이 놈 봐라 맛 좀 볼래!’하며 그 도깨비 놈을 붙잡고 한참을 서로 엎치락뒤치락 승강이를 벌이다 보니 어느새 날이 새고, 술 취한 얼떨떨한 정신을 차려 살펴보니 이게 웬일인가 괜히 다 닳은 몽당 빗자루를 붙잡고 그 짓을 한 것이다. 참으로 허랑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무슨 동화(童話) 속의 이야기 같은 도깨비 이야기를 시조로 환치(換置)하여 우리 앞에 보이고 있다. 저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술에 만취(滿醉)하다보면 걸음을 걸어도 앞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옆으로 비틀거리기만 하고 작은 돌멩이 하나도 건너가지 못하고 주춤거리기가 일쑤인데 아마 그런 경지에서 겪은 일을 시조로 만들어 놓은 성싶다.
㉢은 배춧잎에 붙어 배춧잎을 갉아먹는 배추벌레 이야기이다. 배추벌레가 갉아먹는 모습을 지켜보다보니 어느새 하얗게 서릿발이 내린 모습을 보게 되고 배춧잎에 있던 배추벌레는 간곳이 없다. 아까운 우리의 김장거리를 먹어치우는 배추벌레를 한없이 미워했는데 그 벌레가 어디로 사라지고 보니 그 벌레도 따지고 보면 식객(食客)인데 그리한 것을 못내 마음에 걸린다고 하고 있다. 식객(食客)은 예전에 세력 있는 집에 얹혀서 문객 노릇을 하며 밥을 얻어먹고 사는 처지에 있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인데 이 배추벌레를 식객이라고 하였다. 이 배추벌레 식객은 따지고 보면 불쌍한 존재이다. 그런데 배춧잎 식객을 왜 그리 미워했을까. 생명존중의식(生命尊重意識)이 실종된 것만 같음을 느끼고 있다. 위 시조는 각각 그리움, 허망함, 후회스러움을 시적 제재로 삼고 있다.
양수리 두물머리 한데 묶은 아리수
팔당댐 내리꽂는 끝없는 국수 가닥
칸칸이 잘라대는 대교(大橋)
밤을 날린 칼끝이다
서울 간 메밀국수 신기루에 매달렸다
빌딩의 창틀에서 새처럼 깃을 치다
냄비에 오체투지 하여
삶의 여한 삶는다.
깊어간 밤 강바람에 휘휘 말은 불빛들도
한 저범씩 건져 올려 주린 배를 채우니
아리수 구곡간장 돌아
주룩주룩 흘러간다.
-국수 2
‘양수리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이고, ‘아리수(阿利水)’는 한강의 옛 이름이다. 그 한강물이 팔당댐에 내리꽂히듯 흘러들어 국수가닥만 같이 댐의 수문을 빠져나오는데 수문 칸칸은 국수묶음을 자르는 칼끝 같다. 물을 국수로 환치하여 표현한 상상력이 매우 빼어나고 놀랍다. 물길은 메밀국수 가닥이 되어 흐르고 흘러 서울로 가 숲을 이룬 빌딩의 창틀에 새처럼 올라 앉아 깃을 치다가 냄비에 ‘오체투지’로 들어가 살아온 모두를 삶아 국수가 된다. 밤이 깊어지면 ‘강바람에 휘휘 말은 불빛’도 국수인 양 ‘한 저범씩 건져 올려 주린 배’를 채운다. 불빛도 강물도 국수가 되어 한강 굽이를 굽이굽이 돌아서 흘러간다. 시적 상상력의 폭이 넓고 활달하다. ‘칸칸이 잘라내는’ ‘밤을 날린 칼끝’ ‘새처럼 깃을 치다’ ‘주룩주룩 흘러간다.’등의 역동적 시어들이 이 작품에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그리고 ‘양수리 두물머리’ ‘아리수’ ‘메밀국수’ ‘한 저범 같은 시어로 인하여 전반적으로 향토적 정서를 짙게 느끼게 하고 있다.
간밤엔 잘 잤는지 새벽 문을 열어 본다
평생을 앓아 살며 참음으로 약을 삼고
선반에 얹어놓은 정(情) 홍시처럼 익었다
미움도 쓸고 닦아 무심한 뜰 가꿔놓고
퇴근을 기다리며 굴리던 묵주 한 줄
지문이 다 지워져도 순한 눈빛 빛났다
달빛 젖어 곱던 뜰 암탉처럼 품더니
홀로 겪은 산고(産苦)를 알이 알까 미운 사람
주름살 그어 간 사랑 갚지 못할 외상이다.
-아내의 문
부부란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따뜻한 정으로 서로 보듬어주고 아껴주는 것이며, 서로 더 잘 해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사이라고 한다. 사느라면 슬픈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어 슬퍼서 또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있는데 이 때 눈물의 무게를 서로의 눈빛으로 덜어주고 위무해주는 것이 부부라고 정의(定義)하고 있다. 위 작품 「아내의 문」은 남편의 입장에서 본 아내의 모습이며 남편의 심경을 표현해 보이고 있는 시조로 부부의 정의(定義)에 딱 알맞은 심성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아내를 참고 견디며 아름다운 정을 품고 희생을 하며 살아온 존재이다. 또한 아내는‘평생을 앓아 살며 참음으로 약을 삼고’살았다. 그래서‘간밤에 잘 잤는지’아내의 안위를 챙긴다. 아내가 남편과 가정에 쏟은 정은 홍시처럼 아롱아롱 빛나고 달콤하다. 아내는 때로 미움도 있었을 텐데 이를 다 쓸어내고 가정을 가꾸고,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목주(木珠)를 굴리며 지문이 다 닳도록 기원을 하는 간절한 눈빛이 빛났다. 자식들을 달빛 젖어 곱던 뜰에 암탉처럼 품고, 온갖 아픔을 홀로 겪으며 살아 지금은 그 사랑이 주름살로 그어졌다고 하여 허무하게 늙어버린 아내의 모습에 안타까운 심경을 표현하고 있다. 영원히 갚을 길 없는 아내의 사랑을 표출하여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선반에 얹어놓은 정 홍시처럼 익었다.’ ‘달빛 젖어 곱던 뜰’ ‘ 주름살 그어 간 사랑’같은 매우 시적인 표현이 이 작품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이마에 골진 세월 두둑 넘어 올라가면
몰라보게 늘어난 하얀 잡초 낯설다.
하나씩 뽑는 걸 보고 세월이 웃고 있다.
칠월의 산밭처럼 무성하던 사랑의 숲
둥지에서 깨어난 새 뿔뿔이 날아가니
뽑을 것 그조차 없어 소갈머리 훤하다.
뽑는 것 뽑히는 것 쳇바퀴 돌리는 것
보내놓고 기다리다 가물가물 꺼지는 정
모두 다 있어라 할 걸 홀로일 줄 몰랐네.
-뽑아내기∙1,
시간을 짊어지고 세월은 흐르고 인생도 흐른다. 우리가 잠을 자도 세월과 인생은 잠도 없이 흘러간다. 그러다 보니 젊은 날의 검은 머리는 빛깔이 바래어 희끗희끗해지기 십상이다. 이를 흔한 표현으로는 서리가 내렸다고들 비유하여 말하는데 이 작품에선 새로운 발상으로‘하얀 잡초’라고 은유하고 있다. 첫수에서 ‘이마에 골진 세월’이라고 한 이마에 그어지는 주름살의 ‘두둑’을 넘어 머리로 올라가 보면 몰라보게 흰 머리가 낯선 하얀 잡초로 자라나 뽑아내노라니 이를 가져다 준 세월은 그 헛된 짓을 비웃고 있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 수에서는 젊은 날 산밭에 풀처럼 무성하던 검은 머리숱을‘사랑의 숲’으로 묘사해 놓고 여기에 ‘둥지’틀어 돋아난 머리털이 빠짐을‘새’가 되어 ‘뿔뿔이 날아가니’뽑아낼 흰 머리털조차 없어 머릿속이 훤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 수에서는 매일 머리털을 뽑아내고, 머리털이 뽑혀나가는 일이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일과 같고, 이로 인해 그에 대한 정은 ‘가물가물’꺼지고 있다고 서운한 눈길로 후회스런 탄식을 홀로 자아내고 있다. 머리털을 통한 인생의 흐름을 순차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머리를 ‘산밭’으로, 세월의 고비를 ‘두둑’으로, 흰 머리를 ‘하얀 잡초’로 은유하여 표현하였다. 밭에 난 잡초는 뽑아내 제거해야 농사가 잘 되는데 어쩐 일로 이 머리산밭에 난 하얀 잡초는 뽑아내고 보니 소갈머리만 보인다. 자연과 인생은 꼭 닮지 않으니 이를 어쩐다. 오히려 정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고 보니 그냥 둘 걸 괜히 뽑아냈다고 때늦은 후회를 할 뿐이다.
이 세상 꽃이 되어 향기 품고 살랬는데
여린 맘 줄줄 새고 꽃 빛을 다 잃으니
돌아본 눈물 꽃마저 불 속으로 들어간다.
불꽃도 꽃이려니 꽃길 밟고 떠나는 넋
누구나 살다 보면 마주치는 숙명의 길
내 가슴 벌써 타올라 눈물부터 앞선다.
또 하루 세상살이 덤으로 여기면서
켜켜이 쌓인 허물 헌 옷처럼 개어놓고
남겨둘 시편들이나 정갈하게 닦아보자
슬픔도 원망도 한갓 된 사치려니
죽음도 꽃이 되는 저 찬란한 깨우침
이아침 바람 한 숟갈 무심으로 공양한다.
-허물 거두기(화장터에서)
화장터에서 사람이 죽어 화장(火葬)되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인생을 회고하는 작품이다. 팽팽하던 살과 뼈 다 불속에 사르고 한줌 재가 되어 나오는 허무한 인생사를 통하여 부귀공명도 한갓 구름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꽃처럼 아름답고 곱게 살고 싶다. 그래서 꽃이 되어 향기 품고 살려했는데 그때의 그런 마음 다 사라지고 빛을 잃고 결국은 불속에 들어 불꽃이 되고 마는 것이 인간 숙명의 길이기에 눈물이 앞선다. 그것이 인생의 마지막 길이기에 하루하루의 삶을 덤으로 여기고 사느라 쌓인 허물을 헌옷처럼 개어놓고 어차피 시인으로 시를 쓰려 들어섰으니 시나 알뜰히 쓰며 살겠다고 하고 있다. 사실 이 세상을 살며 느끼는 슬픔도 원망도 알고 보면 사치이니 죽음이 불꽃이 되는 깨우침을 얻어 무심으로 세상을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하고 있다. 시제 『허물 거두기』는 이 세상 허접하게 산 삶을 거두고 죽음에 이르는 일을 은유하여 표현한 말이다. 운명론적 허무를 표현한 작품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 와서 머무르는 시간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백년 남짓이다.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구해먹고 불로장생하려 욕심을 부렸지만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영혼은 어디에서 머물러 있는지 모르지만 그 육신을 다 사라져 자취가 없다. 불로 가나 흙으로 가나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것은 다름이 없다. ‘바람 한 숟갈’은 시적 새로움을 추구한 구절이다.
정 담근 장독들이
별처럼 마주 본다.
둥근 달 휘청휘청
댓가지 타고 오면
할머니 대를 잡고서
신령님을 모신다.
떡시루 앉혀놓던
할머니가 안 보이자
대 뿌리 엉금엉금
부엌까지 찾아들어
푸른 날 푸른 취구(吹口)열고
옛 노래로 목을 푼다.
-대숲에서
대나무와 장독, 달빛은 고즈넉한 시골 초가에 등장하는 전형(典型)이다. 여기선 으레 할머니가 등장하고 장독대에 이른 새벽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백설기를 찐 떡시루를 얹어놓은 다음 전통신앙의 상징인 신령님께 기원(祈願)을 드리는 의식이 등장한다. 여기서‘대(竹)’는 강령술(降靈術)이 있는 신물(神物)로 무속인(巫俗人)이 점치거나 굿을 할 때 무구(巫具)인 신장대(神將-)가 되어 등장한다. 위 작품도 이런 데에 바탕을 두고 지어졌다. 장독이 별들처럼 서로 마주 보며 서 있는데 때마침 둥근 보름달이 댓가지 휘청거리는 틈을 타고 내려오는 밤에 할머니는 대나무를 신장대 삼아 잡고서 달님과 신령님을 불러 모시고 집안의 안녕과 자손들의 건강, 행복, 앞날이 환히 열리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 떡시루 앉혀놓고 빌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는지, 무슨 연고가 생겼는지 눈에 보이지 않자 대 뿌리가 엉금엉금 부엌으로까지 뻗어들어 젊고 싱싱하여 희망이 넘치던 날에 바람을 불어넣어 가락을 뽑아내던 대나무 구멍을 열어 그 옛날 피리소리, 나팔소리를 내며 목을 푼다. 지표를 누비며 뿌리를 뻗은 대나무가 지나간 날의 의미 있던 일들을 떠올려 회상의 정에 빠져있음을 말하고 있다. ‘장독’ ‘달’ ‘대나무’등을 활유법으로 역동화(力動化) 시켜 표현하고 있다.
박 넝쿨 올라가서 자리를 편 초가지붕
밤이면 달이 와서 어둠 열고 품어주니
어느새 달 닮은 박이 봉긋봉긋 커간다.
가슴 깊이 남아있는 짝꿍의 둥근 얼굴
그리움이 자라서 달덩이로 커 가는데
한번쯤 만나고 싶은 외로운 맘 만삭이다
-만삭
초가지붕의 박도 외로운 마음도 만삭이 된 시조이다. 하나는 채워짐, 자라남의 만삭이고, 다른 하나는 비워짐, 외로움의 만삭으로 시상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하나가 흐뭇함이라면 다른 하나는 어딘가 쓸쓸한 허전함이 있다. 박 넝쿨이 자라서 올라가는 것은 미래를 향해 자람을 말하는 매체이고, ‘달’은 희망을 열어주고 물적 변이를 일으키는 매체이다. 박꽃에서 박의 열매를 달이 자기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달이 없으면 박은 봉긋봉긋 달처럼 자라지 않을 수 있다. 박이 둥글게 자라는 것은 전적으로 달이 와서 ‘어둠을 열고 품어주니’달을 닮아 그렇게 자란 것이다. 아마도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 시절에 소녀 짝꿍도 박처럼 둥글 동글 예뻤던 모양이다. 가슴에 머릿속에 그림자로, 영상으로 남은 짝꿍의 그 둥근 얼굴이 못내 잊히지 않아 그리움이 달덩이로 커가고 언젠가는 한번쯤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런데 지금은 만나지 못하니 그녀를 그리는 외로운 마음이 가슴에 차올라 만삭이 되고 있다. 뭇 시인은 말과 글로 그림을 그리고, 그리움을 말과 그림으로 옮기는 사람이라고 하더니 그리움을 달덩이로 비유 묘사하여 그림처럼 표현하고 있다. 첫수에서는 달이 박으로 변이를 일으켰다면 둘째 수에서는 그리움이 달로 변이를 일으켰다. 시적 변이가 잘 이루어진 작품이다.
불자도 아니면서
절 마당 지켜 서서
삭발을 안 하고도
머리가 다 반짝이고
노스님 곁에 앉아서
떫은 얘기 우려낸다.
-모과
모과를 스님과 견주어 표현하고 있다. 모과란 이름은 열매의 생김새나 크기가 밭에서 나는 참외를 닮았다고 하여 나무에서 나는 참외라는 뜻으로 목과(木瓜)라 한데서 나왔다고 한다. 시인은 그 모과의 표면이 반질반질하고 매끈하여 스님의 두상(頭上)을 닮았다고 보고 불도(佛徒)와 견주어 표현한 것 같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와 같이 절간 마당에서 아침저녁 예불소리와 목탁소리를 들으며 자라 맺은 열매인 모과이니 아마도 부처의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을까. 조금은 불도(佛道)를 익히고 있을 법하다. 그래서 불도(佛徒)가 아니면서도 절 마당을 지키고 서서 열매를 맺었는데 삭발할 머리털이 없어 삭발은 안 했지만 그 모양이 스님의 삭발한 머리처럼 반짝인다고 표현하고 있다, 모과는 그 향기가 은은하고 독특하기에 방안에 놓으면 방안에 그윽한 향기가 진동하여 다들 머리맡에 두기를 좋아한다. 시조 속에 모과도 그런 사연으로 노스님 곁에 자리한 모양이다. 모과는 코에 대고 맡으면 향기가 그윽하지만 먹어보면 과육(果肉)에 떫은맛을 품고 있어 그 떫음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이를 ‘떫은 얘기’라고 하여 모과가 자라며 겪은 세상의 탐탁하지 못한 일들을 듣고 보고 한 것을 과육에 품고 있다가 그 세상에 널려 있는 귀 거슬리는 떫은 일들을 불심으로 구제(救濟)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노스님에게 말씀을 올리는 것만 같다.
숫돌에 알몸 갈아
핏발서는 눈초리
꽃망울 품에 안고
쓰러지는 한나절 풀
그래도 남은 한나절
다시 서서 풀꽃 핀다.
악연의 낫 한 자루
섬뜩하게 쫒아온다
순하게 쓰러졌다
원망 않고 일어선다.
언제나 잡초가 이긴다.
웃고 가는 홀씨 보라.
-낫과 풀
‘낫’앞에 무참히 희생당하는 ‘풀’의 모습을 그린 시조로 ‘낫’은 권력자, 무차별 폭력자,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를 상징한 말이고, ‘풀’은 힘없는 백성, 강자에 괴롭힘을 당하는 약자, 민초를 상징하는 말이다. 풀은 괴롭힘을 수용하고 희생을 감수하며, 강자를 오히려 원망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일으키는 끈질긴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노래한다는 면에서「허구한 날/ 베이고 밟혀/ 피 흘리며/ 쓰러져놓고/ 어쩌자고/ 저를 벤 낫을/ 향기로/ 감싸는지…」한 민병도의 “들풀”과 유사한 면이 있다. 낫이‘숫돌에 알몸 갈아 핏발서는 눈초리’로 풀의 목숨을 위협하지만 풀은 ‘꽃망울 품에 안고’ 낫의 예리한 눈초리 밑에 한나절은 쓰러져 있지만 낫이 사라진 나머지 한나절엔 다시 일어나 풀꽃을 피우며 새 생명을 이어간다는 내용이 첫수이고, 둘째 수는 풀은 목숨을 노리는 낫과는 악연(惡緣)이 있어 낫이 섬뜩하게 느껴지는데 그 낫이 풀의 뒤를 또 쫓는다. 그 때 또 순순히 낫날 아래 쓰러져 있다가 원망 한 마디 하지 않고 일어선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결국 약자가 강자를 이긴 것이다. 그 풀은 꽃을 피워 씨를 맺고 그 맺은 홀씨는 희망의 터전을 향해 웃으며 떠나간다. 이 시조는 많은 이로부터 사랑을 받을 만하다. 둘째 수 종장‘언제나 잡초가 이긴다.’는 역설적 표현으로 궁극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는 시구이다.
Ⅲ. 맺는 말
시조를 쓰는 문인은 일반 논리학이나 철학과 같이 타당한 논리나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상상의 세계 속에 자리하는 사물에 대한 서정이나 추리적 내용을 바탕으로 이를 말한다. 그래서 과학자와 다르다. 과학자는 당장의 현실과 사실적인 결과를 사전적 의미로 객관성을 중시하여 말하지만 문인, 문인 중에도 시나 시조를 쓰는 시인은 상상적 추리에 의해 산출되는 정신세계의 언어로 주관적인 서정세계를 말한다. 눈이 녹으면 어찌 되는가? 하고 과학자에게 물으면 대부분 물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인은 꽃이 핀다든지, 싹이 돋는다고 말한다. 즉 상상의 세계, 추리적 세계의 일을 말한다. 좋은 시조작품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많은 이들은 표현하는 내용을 평범한 단어보다는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함축된 감정을 처리해서 독자들이 아하! 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하여 기쁨을 전해 주는 것이라고 말들을 하고 있다. 박 시인은 작품을 일상생활 주변의 일이나 사물, 사건에서 찾아 이를 시적 담론으로 쓸어 담아 인간 삶에 접목하고 있다. 그리고 원형심상을 시적 제재로 하여 이를 인간화하는 과정도 보여주고 있다. 범신론적 세계관으로 무소유의 신념을 표현하고, 무정물의 유정물화를 활유법을 통하여 표현함으로서 작품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설적 표현으로 시적 진실을 토로하면서 활유법으로 시조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작품에 나타난 상상의 폭을 보면 매우 간극이 큼을 느낄 수 있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심상하지 않고 시적 상상력과 비유가 참신하여 놀라움을 주는 작품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비유의 간극이 멀수록 시조의 신선도도 높아진다고 하니 그의 장점이 되는 요소이다. 한 마디로 박 시인은 모든 시재를 자연과 일상에서 구하여 이를 인간과의 관계 속에 참신한 비유로 연계시켜 노래하고 있다. 앞으로 더욱 빛나는 시편들을 생산하여 우리 앞에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첫댓글 청사(靑沙)선생님의 주옥처럼 우아하고 귀한 평설을 읽고 크게 배웁니다.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축원드립니다. 김관형 拜上
주옥 같은 아름다운 시조에 가슴에 와 닿는 평설,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