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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3년 5월 10일 토요정례법회 ○
"원불교를 만나서"
청년 10단 박은정 교우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반가운 얼굴이죠? ^.^
" 윤효근 예비교무님 "
너무 환영해 주셔서, 내가 언제 이렇게 환영받았나 싶다.
나를 모르시는 분이 있을까싶어 소개하자면,
서울에 시험준비하러 왔다가 출가서원을 세워서 여기 안암교당에서 1년 반동안 간사 생활을 하다가
올해 영산선학대학교로 편입하여 공부하고 있다.
오늘 오게 된 이유는, 석가탄신일이 주말과 연휴가 끼어 실습을 오게 되었는데
학교에 있을 때 청년회 자랑을 많이 하였으므로 가고 싶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 가장 공부심 신심 공심이 깊으신 분 두 분을 모시고 왔다.
잠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두 분 다 모스크바 교당에서 간사생활 하신 분이다.
여기 한국분은 장혜암 교우님.
옆 분은 원신영 예비교무님이시다.
"장혜안 예비교무님" 출가 감상담
법명: 장혜안
속명: 장동재
세종대학교 경제무역과 중퇴- 경기대 스타니슬랍스키 연기원 졸업-러시아 슈우킨 연극대학 졸업
세종대에 다니던 중 연극반 활동을 하다가 ‘어떻게 하면 발성을 잘 할 수 있을까?’ 고민 중
국선도 사범과정으로 산에서 수련하다 잠시 내려온 졸업 선배에게 단전호흡에 대해 배워 관심 갖다가
대학 졸업후 ‘무엇을 위해 살다가 죽기전에야 후회하지 말고, 현재를 행복하게 사는 것이 가장 보람있는 삶이겠다,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자.’는 생각으로 연극으로 전향했고,
연극을 하면서 배우에게 필요한 몸과 호흡을 배우기 위해
국선도 사범이 된 선배의 도장에서 2년여를 기거하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졸업후 극단 미추에 입단해서 연극을 2편하고, 러시아 슈우킨 연극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단 1명뿐이던 ‘무대동작’이라는 분야에 소질을 살려
교수를 겸임해서 생활문제를 해결하며 내가 좋아하는 연극을 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러시아에 갔다가,
통역에 문제가 생겨 통역선생님을 구하러 수소문해서 그 선생님이 다니신다는 원불교 모스크바 교당에 갔습니다.
어찌어찌 하여 그 곳에서 요가(국선도) 지도를 하였고,
법회를 참석하면서 설교말씀이 너무 좋고, 교당에만 가면 너무 해맑게 웃는 자신을 보면서
‘내가 진짜로 이것을 좋아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연극과 출가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다가, 이번생은 연극을 한다. 라고 결정을 지었습니다.
원래 갈등은 오래 하지만 한번 확실히 결정한 것은 안 바꾸는 성격인데, 이상하게도 다시 또 갈등이 이어졌고
교무님의 권유로, 석사를 할 것인가, 새로운 길을 갈 것인가를 결정하러 한국에 들어오는 길에
삼동원 훈련을 나면서, 우산님의 법설을 듣고 확실히 출가를 결정했습니다.
출가후 모스크바 교당에서 1년간 간사를 하고 영산선학대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을 하였습니다.
"원신영 예비 교무님" 출가 감상담
법명 : 원신영
속명 : 미하일 아브데예프
러시아 국립대학 화학과 졸업, 연구원 근무 - 3년동안 러시아-한국어 교재 편찬 - 정전 러시아어 번역작업 수행
- 모스크바 교당 간사 2년 근무
반갑습니다.
태어나서 30 년 동안 헤매다가 결국 길을 찾고 이 자리까지 와서 출가감상담을 하고자 하는 원신영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는 모스크바 교당에서 2년 동안 간사를 하고 영산으로 왔으니 출가한지 3년째가 됩니다.
올해 35 살인데 주변에 종교를 믿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무신논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만 있으니까
10년 전이여도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1995 년도에 제가 모스크바 국립대학 화학과 4학년에 다녔는데
주말에 동기 친구들과 같이 마시는 술을 줄일 겸 일요일과 토요일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
‘무슨 외국어라도 배우기 시작할까?’ 생각했습니다.
그 때 저에게 동시에 20개 외국어를 취미로 배우는 친구가 있었는데
친구의 중국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동해서 저도 어떤 동양 언어 하나를 배워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에게 그 말을 하니까 친구가 저에게 “어떤 동양 언어를 배워보고 싶냐” 고 했습니다.
저는 “중국어든 일본어든 한국어든 그것이 그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제 친구는 뭐가 똑같으냐고, 얼마나 서로 다른 언어들인데. 라고 하면서
저에게 동양 언어의 차이점에 대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저보고 “만약 정말 상관없으면 너는 차라리 한국어를 배워라. 한국어는 한문이 없으니까”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한국어 공부를 할 수 있냐고 하니까
“모스크바에 원불교 모임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일요일 마다 배우고 싶은 사람들한테 무료로 한국어를 가르쳐 준다.” 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 종교인들이구나, 근데 만약 자기 종교를 믿으라 하면 어떻게 해?” 라고 하니,
제 친구는 “기독교에서 믿으라고 하는 거지 불교는 안 그래.
그리고 만약 종교를 권해도 그만 다니면 되지 않냐?”라고 말해서, 저는 한국어 배울 수 있는 생각에 너무 좋았습니다.
“언제부터 배울 수 있는데?” “내일 수업이 있으니까 내일 같이 가면 되지.”라고 친구가 약속을 해주고, 잠을 잤습니다.
저희가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다음 날 아침 8시에는 제가 뻘떡 일어나서 친구를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일요일이지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머리도 아프지만 일어나야 하는 불쌍한 제 친구는
욕하면서 그 날 어쩔수 없이 저를 모스크바 원불교가 운영하는 “원광” 한글학교에 데리고 왔습니다.
그날 한국어 수업을 듣고 일주일에 한번밖에 없다고 해서 섭섭해서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보충수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혹시 없냐고 물어봤더니
유학생이었던 한국어 선생님은 자기가 사는 기숙사로 오면 수업을 따로 받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수업 끝나고 바로 그 날 기숙사에 갔는데 저희가 오니까 다른 한국 유학생들도 많이 왔습니다.
그 날 한국말을 처음으로 그렇게 많이 들렀습니다.
밤에 집으로 와서 잠자려고 하는데 머릿속에서는 잠자고 있었던 것이 깨어난 것처럼 계속 외국어가 들렸습니다.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저에게는 그것이 한국어라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때부터 한국어 공부를 욕심껏 열심히 배웠습니다.
한국어를 하고 싶었고 모든 게 다 너무 좋았습니다.
원불교에서 종교를 권하지도 않고, 한국어를 배우는 거도 좋고,
한국음식도 맛있고 한국 사람들도 좋고 말하자면 만고땡 이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다른 일 미루고 한국어수업은 꼭 들었습니다.
나중에 화학과 졸업하고 박사과정에 입학한 이유도 제가 모스크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대학교 졸업하면 고향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고향으로 가면 원불교 한글학교가 없으니까 모스크바에 계속 남기 위해서 박사 과정에 입학했던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3년 동안 한국어 공부를 하다가
1998 년에 아는 사람이 생일 선물로 헤르만 헤쎄의 “시드하르타 가우타마”라는 책을 주었습니다.
기억들하시지요?
정 종 교수님께서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소설선전을 하셨는데
바로 그 책을 제가 읽고 난 뒤에 감동을 해서 불교 신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다니는 한글학교에 원불교가 있었으니 입교원서를 썼는데,
그때에 원불교하고 전통불교가 서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불교니까 입교를 했습니다.
원서를 쓸 때는 입교하는 동기를 썼어야 되는데 같이 입교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고려인 분이었습니다.
불교가 조상들의 믿으셨던 신앙이니까 불교를 믿고 싶다고 쓰셨고
저는 생각해봤는데 “조상들의 신앙도 아닌데, 왜 입교를 하지?”하고
불교사상이 저의 세계관에 맞으니까 입교한다고 썼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됐을 때에
모스크바에 주 교무님으로 계셨던 초타원 백상원 교무님께서 한 번 와서 같이 이야기를 하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초대를 받으니까 기분이 아주 좋았고, 교무님이 직접 불러주신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교무님들이 빌려 사셨던 아파트로 갔습니다. (그때에는 교당 건물이 아직 없었습니다.)
백상원 교무님께서 저에게 “신영이를 3년 동안 살펴봤는데 우리 교무님들하고 정서가 맞다.
박사과정 졸업하면 우리랑 같이 교무님 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 교무님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교무님의 말씀 내용이 약간 황당했지만 왠지 교무하자는 말씀을 들으니까 기분이 좋았고
그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교무님께 조심해서 생각해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무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그것이 가능한 대안으로 생각했고
교무님의 재안에 대해서 아는 한국친구들에게 자랑했습니다.
친구들이 물론 비웃고 까까중, 땡중이라고 많이 놀렸습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니까 “좋기는 뭐가 좋아? 뭘 이렇게 좋아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가해서 속세를 떠난다는 것이 멋있어 보였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것이 저하고 안 어울리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고,
행복하게 잘 사는 제 세상을 여의기가 아까웠고, 세상에서 얻고 싶은 것들도 많았습니다. 교
무님께 많이 죄송했는데 한 번 용기를 내서
“생각을 많이 해보았는데, 제가 출가를 못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무님이 걱정 말고 다 괜찮다고 하셨지만 제 느낌엔 저하고 원불교 사이에 뭔가 끊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날 집에 가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낼 때,
입교한 날 기념품으로 받은 목탁 모양의 열쇠고리에서 목탁이 빠져서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것도 제게 무서운 상징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한국어를 배우러 계속 다니고 원불교 일을 도와드렸습니다.
2000년도에 백상원 교무님께서 모스크바 교당 건물을 구입하시고 미국으로 가셨는데
모스크바교당 주 교무님은 전도연 교무님께서 되셨습니다.
그때에 주 러시아 한국 대사관에서 러시아어로 배우는 한국어 교재를 편찬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그 작업을 전도연 교무님께서 맡으셨는데 러시아어에 대한 부분은 저에게 도와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연구소에 취직해서 연구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저에게는 마음으로 어려운 방황하는 시절이었습니다.
또한 원불교하고도 꽤 멀어졌으니 전도연 교무님이 도와 달라고 하신 부탁을 기쁘게 받았습니다.
연구실에서 퇴근하고 바로 교당에 와서 저녁때에 교재 작업하고
잠은 교당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교무님들하고 같이 좌선한 다음에 출근했습니다.
한국어교재 초급, 중급, 고급의 3권을 4년 동안 쓰고 있었는데 그 동안 교당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아팠던 제 마음을 고쳐주시고 힘들 때마다 제 고민을 풀어주시는 교무님들이 항상 옆에 계셨습니다.
한국어 교재를 쓰면서 한국어 실력도 느니까 원광한국학교의 한국어교사도 하게 되고
한국노래 배우는 노래교실도 맡고, 법회 때는 설교를 러시아어로 통역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열심히 함께 놀았는데 이제는 교당 일을 하느라고 바빠서 못 만나는 친구들을 어쩌다가 만났을 때,
친구들이 “원광학교가 뭐가 그렇게 좋길래 거기만 계속 있는 거냐?”고 물으면,
저는“거기서는 나에게 밥도 주고 사랑도 준다” 대답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내 친구는 “참 뜻이 깊고 간단한 원리다!
밥만 주고 사랑은 안 줘서 안 되고 사랑만 주고 밥은 안 줘서는 안 되는데 밥도 사랑도 주면 누구나 거기만 있고 싶게 되겠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어 교재를 쓸 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때때로
“한국어 교재를 출판했는데 너는 그 일에 대해서 얼마나 받았냐? 한가한 시간 없이 일만 하는데 돈을 받아야지”
라고 말하면 저는 그 사람들에게 왜 제가 공짜로 도와드리고 있는 지를 설명을 못 했습니다.
우리 부모님도 그런 말을 하셨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니까 한국어 교재와 교당에서 통역하는 것 덕분에 제 한국어 실력이 많이 늘었고
또 교당에 살면서 일과를 지키다보니까 제 모습이 달라진 것을 보고
돈이 아니고도 저에게 다른 이익이 있으니까 친한 사람들이 저에게 돈 받으라는 이야기를 더 이상 안 했고
잘 모르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해도 저는 대답할 말이 있었습니다.
가끔씩 교당에서 일이 없으면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뭐 하니? 11시인데 아직도 자고 있다고? 일해야지! 사람은 공짜로라도 일해야 돼!”
그때는 이제 우리 부모님도 제가 교당하고 가까이 지내면 그것이 저에게 좋은 영향만 준다는 것을 느끼셨기 때문에
봉사하는 것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셨습니다.
사회생활하면서 가끔씩 ‘만약 내가 24살 때 출가를 했다면 이러지 않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또, 때로는 가까운 사람들하고 서로 갈등이나 오해가 있거나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잘못을 해서 더 이상 서로 못 보게 되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다 나를 외면해도
내 부모님과 더불어 전도연 교무님은 나를 버리지 않겠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 취직을 해서 생활이 좋아지니까, 오히려 가난한 학생시절보다 더 마음의 약점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월급을 받았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살게 됐고, 어떻게 살라는 남의 의견을 안 들어도 되었지만,
오히려 내 인생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때로는 제가 전에 벌었던 복을 지금 생각 없이 낭비하고 있지만
나중에 저에게 어떤 아주 중요한 일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복이 없어서 그 일을 못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은 일하는 것도 재미있고, 외국도 나갈 수 있었는데, 계속 전공으로 일하면 내 인생이 분명히 편안하겠지만
앞길이 어떻게 될지 뻔히 보였기 때문에 언젠가에 지루할 것 같았습니다.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싶었습니다.
또한 제 인생에 전도연교무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 모든 것이 나중에 저에게 이익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끔씩 교무님께 조심스럽게 출가를 왜 하셨냐고 물었고,
세간 생활 장단점과 출가 생활 장단점이 뭐가 있는지 여쭈어보았습니다.
출가 나이 한계는 몇 살인지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교무님은 만 서른이상 안 받아준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제가 만 스물 아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빌려서 혼자살고 있던 집이 있었지만,
일주일에 3일 이상을 교당에서 안 자면 불안할 정도로 원불교 중독이 심했습니다.
또, 그때 한국어 교재 작업 끝나고 정전 번역 작업을 시작했는데,
우리 번역팀은 저와 교무님을 포함한 다섯명으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초타원 백상원교무님께서 계실때부터 정전 번역을 주도할 사람으로 다른 분을 지목한 상태였습니다.
그때 제 생각엔 한국어 실력은 내가 더 좋다고 생각해서 질투심이 많이 있었습니다.
교무님께도 그 말씀을 드렸더니
“주도할 사람은 누가 지목한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일을 할 때 드러나는 것이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분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기 위해서 한가한 시간 날 때마다 그 일만 할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하다보니 ‘내가 전문적으로 번역해야 좋은 번역이 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만약 그렇게 되면 그분도 나를 따라 올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소심하기 때문에 전무출신에 대한 발심은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모스크바 교당을 나온 지 2년 된 한 교우가 방학때 한국에서 마음공부 훈련받고 모스크바로 돌아 왔습니다.
교무님을 찾아서 교무님께 중요한 말씀드릴 것이 있다고 하면서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 사람이 없다고 한 곳에 조용히 제가 있었습니다. 그
래서 그 교우의 출가결정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저 사람이 할 수 있는데, 나라고 못하겠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무님께 다음날 “저도 출가하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고향으로 갔을때 이 사실을 어머니께 말씀드리니, 어머님은 제가 집에 있었던 4일동안 매일 우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진작에 모스크바에 니 집을 사고, 장가를 보내 버렸으면 니가 그렇게 이상한 짓을 못했을 텐데.”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은 직장에서 같이 일하는 분들께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알게 되었는데, 아직도 서류상 제 해고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교당에서 간사생활을 2년간 했습니다.
힘든 적도 있었고, 솔직히 ‘다 때려치고 나갈까?’ 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아무리 짜증나고 어려워도 내 자신이 조금씩 좋아지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또, 그만둔다면 원래 방황했던 상태로 돌아갈 뿐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임전무퇴입니다.
김제원 교무님 설법
오늘 초대법회 분위기이고 더욱 좋다.
감각적 음악과 문화를 넘어서서 그 안에 마음이 살아있고 대종사님에 대한 신심이 묻어있고 서원이 묻어있는,
그 사람의 노래는 가수의 노래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시간을 많이 하라고 하였다.
원신영 교무님께도 많이 하라고 하였다.
은정교우님부터 해서 4사람, 조금씩 코멘트하고 마치겠다.
그동안 교전을 통해서, 공부방과 법회와 단회를 통해서 법문이 법문으로만 남아있고,
때로는 내가 겪고 있는 고민들이나 공과 사의 문제, 마음공부의 내용에 있어서
오늘 은정교우님, 효근, 혜안, 신영 예비교무님들 말씀 들으면서 상당 부분 확신이 생기고
‘그게 맞다, 그게 정답인데’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우리 은정교우님
교무님 자녀분들을 원친회원이라고 한다.
원친회원 중에서 잘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은정 교우가 작년에 왔을 때는 어렸기 때문에
혜향 단장님이나 단원들이 상당히 도움을 준 것 같다.
우리가 살다보면 실수는 하게 되지 않은가 생각한다.
내가 엊그제 우연히 저녁때 TV를 보았는데 “이산”이 나오더라.
정조대왕은 가장 가까이에서 옆에서 받들어주는 신하가 있었다.
그 분이 홍국영이었다.
그 분이 결정적인 미끼 일까요. 무튼, 얽혀서 큰 실수를 하여 귀양을 가서 살다가 죽었다.
그것을 보면서, 귀양 가서도 당신이 하고자 하는 국가의 일에 책임을 지고 죽는 걸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수를 하는구나,
나도 실수를 한다.
아까 원신영 교무님도 출가 이야기를 듣고 번뇌가 있지 않았는가.
왠지 부담되고 멀어졌다.
그랬다가 번역해 달라, 교재 만들어 달라는 말에 동참하였는데, 우리의 마음이 참 좋았다.
신영 교우를 보면서 장점이랄까요.
그것이 뭐나면,
처음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생각이 왜 들었을까.
밤늦게 4시까지 술 먹었는데 아침에 깨워서까지 배우려는 마음
보충을 해서라도 배우고 싶다는 마음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배우려는 마음이다.
배우려는 마음속에 인격의 90%가 형성되고, 그 마음속에 불보살도 되는 것이다.
게으르지 않고 나태하지 않는가.
출가하는 사람을 보면 세 가지인 것 같다.
첫째는 본인에게 서원이 있어야 한다.
원신영 교우님 말고도, 전에 독일에서 오는 원법우 교우님 훈련 때에 뵌 분이 있다.
그 분은 자기가 한국 사람을 교화해서 원불교 온 사람 아닌가.
자기는 껍데기만 독일 사람이지 완전 한국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인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연 내부에 서원이 있다.
서원과 인연이 얽혀서 그 안에 배우고자 하는 마음, 까닭 있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교보문고에서 교화에 희망을 얻었었다.
의외로 사람들이 구도에 대한 책들을 뒤적거리고 있더라이다.
여기에 앉아계시는 분들 중에서, 나 교당 아웃 사이더다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간절한 구도심이 있다.
나는 그 마음에 교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그 간절한 마음속에 구도심, 성품의 본래 고향을 찾아가려는 그 마음이 있지 않은가.
그것을 살아나기만 하면 어떤 경계도 경계가 아니다.
그런데 이 안에 욕심이 들어서면 서원의 마음은 작아져버리더라.
오히려 그 욕심을 크게 키워버리면 괜찮다.
그리고 배우고자 하는 열망, 지혜가 있어야 한다.
또한 인연 복(福)이 있어야 한다.
설사 본인이 무슨 계기를 통해서 쉬웠다, 잠시 멀어졌다 하더라도 인연이 있으면 결국은 다시 살아나더라.
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나이 50~60세 먹어서 찾아온 사람을 보면 다른 것이 아니라 어떤 인연이 얽혀져 있는 사람이더라.
이 생에서만 보면 나는 동양과 인연이 별로 없다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지금 외국 교화의 가장 핵심은
첫째는 번역서가 많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교당이 많이 지어지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언어가 없으면 공즉시색이다.
마음만 있다고 교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능수능란한 언어여야 한다.
외국에 투자하는 것은 예비 단계이며, 사실은 교포도 하면서 현지인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원신영 교무님에 대해서 전생에 인연 있는 사람이다.
우리 선진이 갔을 것이다.
대산종사님도 '나 미국 가서 나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내가 설교 30분하는 것보다 노래 2곡만 잘하면 그것이 더 효과 있다.
내가 인정한다.
그만큼 음악은 내면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다.
글을 쓰면은 의미, 생각 상상이 되지만
글로 쓴 것에 곡을 붙이면 가장 파워풀하다. 음악, 가장 중요하다.
웨이 앙상블, 괜히 하는 것이 아니다.
웨이 앙상블 같은 문화교화는
단순히 즐겁게 박수치고 놀자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법도 음악에 담아서 하면 훨씬 효과가 크다.
우리 은정교우는 음악을 하여도 원불교 음악을 위해서는 사회적인 것도 얻어야 한다.
원불교 공부는 쌍전이다. 열심히 하는 것이다.
적당히 하는 것은 쌍전이 아니다, 이것이 둘 다 하는 것이다.
은정 교우도 교화에 도움이 되는 음악을 하길 바란다.
아까 단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기분이 좋았다.
단장님, 중앙님, 단원들 속에서 커져야 한다.
원불교는 설교 위주 법회 운영이 아니다.
오히려 단회 위주일 수 있다.
본인 스스로 자력 수행을 하면서 타력을 병행해야 한다.
우리 은정 교우님이 바뀐 것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을 돈으로 따지면 얼마일까.
여러분들이 원불교 다녀서 손해 본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은정 교우도 이익이 많았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대종사님의 본의이다.
그런데 그 전 단계에서 고생이 있다.
사람들이 그것을 극복 못한다.
그런데 원불교 공부만 그러한가.
어느 집단에서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처음 습득할 때는 인내, 아픔과 눈물이 있다.
조그마한 가게만 하나 하더라도 눈물이 있다.
원불교 법이 문제여서 고생이 아니다. 또는 안 될 일이여서 고생이 아니다.
당연지사다.
아까 혜안 교우님도 보십시오.
나이가 걸리고, 부모님의 반대가 걸리고, 사심이 걸렸었다.
그런데 한 마음이 바뀌니 다 바뀐다.
한 마음만 내면 환경.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버린다.
경계가 경계가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아까 원신영 교우 보라.
낮에 직장 근무하고, 저녁에 번역 하였다.
그리고 아침에 좌선하였다.
나는 여기에 엄청난 대종사님의 은혜,
초타원님, 밀타원님, 전도연 교무님 등 많은 사람들의 은혜가 있었다.
전도연 교무님.
내가 너무 존경하는 교무님이다.
모스크바 법회 150명씩 온다. 거기에는 한국 사람 뿐 아니라 러시아인들도 온다.
원신영 교무님
러시아 최초의 본토 1호다. 러시아 종법사이다.
너무 고맙지 아니한가.
2주 전에 인도 델리에서 원현장 교무님이 전화 주셨다.
원성제 교무님, 형제가 모두 출가하였다.
브라만 계급에 의대를 다닌 사람, 아버지는 국무총리 같은 사람, 장관 정도의 레벨
그런데 출가하여 얼마나 잘하는가 모른다.
나는 너무나 좋은데 여러분은 별로인가.
대종사님 법이 미래 사회에 맞을 것인가 안 맞을 것인가.
나는 여기에 앉은 사람들 중에 한국을 살릴 사람, 장관도 나오고 국회의원도 나왔으면 좋겠다.
번역자, 외국 교화하는 사람도 나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까 내용 중에서 어머니께서 자식 못 이겨먹는다고 한다.
내가 불보살이 되겠다고 공적인 삶을 살겠다고 하였는데
아들이 하는 것에 대한 믿음, 보이지 않는 합력.
그것이 인연이다.
훈련 날 때 10일간 눈물 흘렸다고 하는데 그 눈물이 어떤 눈물이었겠는가.
고향을 만난 눈물이며 참회와 기쁨의 눈물 아닌가!
여러분 욕심을 취하면서 느끼는 재미.
그런 마음과 내 육신은 피곤하든 어쨌든 공중사를 할 때의 기쁨은 어떠한가.
정말 기쁘지 아니한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이며, 무슨 기쁨의 세계를 살 것인가.
석가모니께서도 왕으로 태어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던져버리시지 않으셨는가.
공적인 것을 외면하고, 사적인 것만 추구해 죽어서 무엇을 하나.
오늘도 서울대 병원 장례식장 갔다 왔다.
장례식장 가보라.
사람에 대한 평가는 죽고 나서 받아야 진짜다.
큰 일을 하는 사람은 그 당대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당대 많은 이들이 욕하였으며,
공자님께는 상가집 개 같다고 하였다.
큰 일을 하고 공적인 일을 하려면 초반에 나를 극복하는 강한 신념이나 목표가 있어야 하며,
스승에 대한 타력을 잡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확실한 의지가 갖추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당대의 시비에 연연하지 말라.
대 자리를 공부하였으니 작은 것을 보지 말고 크게 보았으면 한다.
그러면 큰 것 속에서는 작은 것도 다 들어가 있지 않겠는가.
그 속에 명예, 부 다 얻어진다.
일원상 공부한 사람은 크게 보는 사람이다.
큰 것 속에서 작은 것을 다 알아서 얻어지게 하는 원리가 큰 원리다.
이것이 원불교의 대포무외(大包無外)한 마음공부 아닌가 생각한다.
고재원 교우님 군입대
군에 입대해서도 사은의 은혜에 보답하고 원불교 공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첫댓글 우와~ 몸살로 쓰러지시면서까지 멋진 후기를! 은전교우님 감사 ^^
몸살이었다니.. 은전교우님, 고마워.. 깔끔하게 올려줘서...
감사합니다. 항상 이렇게 교당에서 법회보시는 내용을 정리해 주시니, 먼 미국 땅에서도 그 법열을 합께 느낄 수 있네요. ^^* 항상 많이 배우고, 많이 느끼고, 공부하고 갑니다. 샌프란시스코 교당 선중교무 합장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