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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Great POW Escapes
사진 : 윈스턴 처칠l (오른쪽) 보어전쟁 당시 포로들과
by 스테픈 윌킨슨
사람들은 탈주를 무척 좋아한다. 민간 사회에서 탈주한 범죄자가 존경받기도 한다. 전쟁포로나 교도소 수감자나 자유를 찾으려 탈주하는 것은 같다고 하겠지만, 전쟁포로에게 수용소 탈출은 결국 그들의 ‘job’이다. 포로수용소 탈출도 군인의 책무 중 하나다.
진정한 전사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 탈주한다. 어떤 탈주는 실패했지만 전설이다. 1983년 [대탈주]란 영화는 독일군 3호 수용소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 그러나 결과는 영화와 다르다. 76명이 탈주했다가 73명이 다시 잡혔고, 그중 50명이 잔인하게 총살되었다.
이 탈주에 픽션도 많지만, 시베리아에서 6,400km를 탈주한 독일군 포로도 있긴 했다. 고비사막과 히말라야를 넘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꼭 군인의 책무나 자유를 찾기 위함만은 아니다. 포로생활의 구타, 배고픔, 고독, 처형 가능성 때문에 탈출하는 인간적인 이유도 있다.
그런 악조건에서 탈주를 시도하는 것이 뭐 잃을 것이 있나.
1. Libby Prison
남북전쟁 당시, 남군은 북군 포로를 장교와 병사로 분리해서 다른 감옥에 넣었다. 장교들이 병사들을 선동할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 예가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의 대형 북군 장교 감옥, 리비 프리슨이었다. 위관장교에서 대령까지 1,200명의 지적인 장교들을 수용했다. (장군도 한 명 있었다) 이 북군 장교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사, 법률가, 교수, 공학자 등등 고학력자들이었고, 이들은 탈출 기술도 예술이었다.
1864년 초, 활발하게 진행하던 남과 북의 포로 교환이 단절된다. 포로 교환을 기대하고 편하게 생각하던 리비 감옥 수감자들은 정신을 차렸다. 이제, 나가는 방법을 진지하게 생각한다.
리비 감옥의 ‘리비’는 1881년 그 건물을 지은 루더 리비의 이름을 딴 것이다. 1840년대에 창고로 지었다가 남군이 창문들을 막고 내부 칸막이를 설치해 포로수용소도 만들었고, 본디 창고로 만들어서 보초가 몇 명 필요 없었다.
북군 장교 포로들은 57일 동안 교대로 터널 네 개를 팠는데, 세 개는 중간에 장애물로 막혀서 하나만 남았다. 4호 터널은 담배 보관소 밑을 통과해서 팠고, 감옥을 밑으로 가로질러 리치몬드 거리까지 이어지게 팠다.
1864년 2월 9일 밤, 북군 장교 109명이 자신들의 청색 외투에 흙을 문질러 색깔을 바꾸고, 2~3명 무리로 나뉘어 기어서 리치몬드 거리로 탈출했다. (남군 병사들이 북군의 코트를 입고 다니는 건 허다했다. 남군 코트보다 좋았기 때문이다.)
북군 장교 99명이 북군 전선으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까지 역사상 최대 포로 탈출이었다.
탈출 성공의 원인은 보초들의 기량 부족이 한몫했다. 수용소(창고) 밖의 보초들은 한쪽 방향으로만 걸어다녔고, 넓게 돌아서 걸으니 보초들이 돌아오는 시간이 일정하고 오래 걸렸다. 그 틈을 보고 포로들이 전략을 결정했다.
보초들이 터널 위치에서 멀어지는 시간 동안 포로 4~5명이 열심히 파고, 돌아오면 중단했다 다시 파기를 반복했다.
2. Winnie the POW
우린 그가 총을 쥔 게릴라 전사라고 상상하기 힘들다. 2차대전부터 1950년대까지 언론에 그렇게도 많이 등장한, 브랜디를 사랑하고 체인스모커였으며 토실토실한 윈스턴 처칠 말이다.
보어전쟁에서 처칠이 등장하는 것이 낯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처칠은 두 영국 신문의 전쟁 통신원으로 남아프리카에 간다. 뜨거운 더위를 견디는 것과 함께 위험에 대처할 마우저 피스톨을 휴대하고.
1899년 11월, 처칠은 영국 병사 120명과 함께 장갑 열차를 탔고, 달리던 열차는 철도에 돌로 된 장애물을 만났는데, 그건 무어인 몇백 명의 열차 매복이었다. 처칠은 마우저 권총을 열차에 놔둔 채 총알이 난무하는 속에서 장애물 치우는 걸 지휘하고 다친 사람을 도우려다 잡혔다.
보어인들은 처칠을 포함한 영국인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프레토리아 감옥 이틀째 밤, 처칠은 변소 울타리 위로 기어 올라가 어두운 감옥 앞뜰로 뛰어내려 탈출했다.
그러나 자유를 찾으려면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까지 약 500km였다. 처칠은 그날 밤에 화물열차를 타려 했으나, 동이 트자 철도에서 피했다. 경보가 전파되고, 모든 아프리카인이 처칠을 찾는다. “코를 통해서 (비음) 말하고 S 발음이 안 되는 영국인을 잡아라.”
처칠은 이틀 동안 걸어서 영국인 석탄 광산에서 은신했고, 마침내 화물열차를 숨어서 타고 포르투갈령 영토 안으로 들어간다. 화물열차에서 양모 아래 숨었는데 보어인 수색대에 발각되지 않았다.
처칠이 일단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에 도착하자, 19세기 서양 신문들은 그의 모험에 관해 대서특필한다. 그리고 이후 40년 동안, 처칠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국인이 된다.
( 주 : Winnie는 곰돌이 푸를 뜻하고, 처칠의 애칭이다.)
3. 홀츠마인덴의 Tunnelers
1918년 7월 24일 밤, 영국/호주군 장교 29명은 독일 홀츠마인덴(Holzminden) 포로수용소에서 터널을 파고 탈출했다. 콩밭 밑으로 해서 철조망 밖까지 판 터널은 길이 55m 높이 180cm. 터널은 탈출용으로 훌륭했다.
독일은 탈출 포로 19명을 다시 잡았지만, 10명은 영국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한다.
흙을 밖으로 퍼 나르며 13명이 9개월 동안 팠다. 3인 팀이 교대로 팠는데, 한 명이 파고 - 한 명은 흙을 나르고 - 한 명은 두 작업자가 살 수 있도록 터널을 향해 공기 펌프를 계속 펌프질했다. 이들은 탈출하는 날 밤까지 다른 포로들에게도 비밀로 숨겼다.
13명이 기어 나오는데 한 시간 걸렸고, 그때 자신의 운을 걸고 탈출하고 싶은 사람은 하라고 동료들에게 알렸다. 장교 550명 중 75명이 탈출 의사를 밝혔는데, 다시 16명이 기어 나오고 나서 잡석이 붕괴해 터널이 막힌다.
홀츠마인덴의 성공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 독일군은 탈출 가능성을 지붕으로 보았고, 그래서 막사 위쪽을 주로 감시했다. 또한 독일군의 오만하고 포악한 지휘관이 탈출을 조장했다. 바로 카를 니에메예르 대위. 포로들은 앙심을 품어 보복하고 싶어 했다.
홀츠마인덴 수용소는 독일 전역의 포로수용소 중 최악의 시설이었고, 터널을 파고 탈출한 연합군 포로들은 자유보다 소장에게 굴욕감을 주기 위해 탈출했다.
4. Catch Me If You Can
독일공군 프란츠 폰 베라 대위는 자만심에 찬 메사슈미트 Bf-109 조종사였다. 다른 조종사들이 개를 마스코트로 하는 동안, 폰 베라는 아기 사자를 키웠고, 신문 읽는 걸 아주 좋아했다. 영국/캐나다군 추적자를 회피하는 기술에 유능했으며, 자신의 나라와 자기 부대까지 복귀한 유일한 독일군 포로다.
1940년 9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격추되어 포로가 된 한 달 후, 걷는 운동을 하다가 다른 포로들과 함께 탈출했다. 영국군과 영국 경찰, 지역 방위군까지 6일 동안 피해 다니다 잡혔다. (탈출 4일 차에 지역방위군 두 명이 상의 깃을 움켜쥐고 잡았으나, 힘으로 물리치고 뛰어 도망쳤었다).
폰 베라의 탈출은 더욱 진지해져, 폰 베라와 독일 조종사 네 명은 한 달 동안 새로 들어간 수용소에서 터널을 팠고, 12월 밤에 탈출했다.
탈출한 폰 베라는 다른 조종사들과 헤어져, 다음 날 아침 영국 공군기지에서 발견된다. 기지에서 폰 베라는 해안사령부에 소속된 네덜란드 조종사라고 주장하며 - 전날 밤에 웰링턴 폭격기를 타고 작전하다 추락했고, 이제 자기 기지로 돌아가야 한다고 사람들을 속였다. 폰 베라는 허리케인 전투기 조종석에 앉았고, 엔진에 시동을 걸다가 두 번째로 다시 잡혔다.
이 문제아 젊은 독일인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영국은 폰 베라를 캐나다로 보냈고, 캐나다에서도 혹시나 몰라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수감하려 했다.
당시 배에서 내려 몬트리올에서 온타리오 포로수용소로 가는 열차를 탔는데, 폰 베라는 창문으로 탈출해서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로렌스강을 수영으로 건너 탈출하다 캐나다 경찰에게 잡혔다.
미국이 아직까지 (2차대전에 대해) 중립국 상태이던 1941년 초, 미국의 독일 대사관은 어떤 대회를 이유로 폰 베라를 불렀고, 외국인 범죄자 인도 조항으로 다시 캐나다로 돌려보내야 했다.
미국의 독일 대사관의 배경으로 뉴욕에 온 폰 베라는 맨해튼의 야간 유흥을 즐겼으며, 영웅적인 전투기 조종사 ‘폰 베라 남작’으로 유명세를 떨치며 몇 주간 놀았다. 그리고 또 탈출했다.
폰 베라는 위조 신분증으로 걸어서 멕시코로 넘어갔고, 파나마-페루-볼리비아–브라질–이탈리아-스페인으로 탈출해서 독일로 돌아간다. 폰 베라가 직접 목격한 영국군의 포로 심문기술과 교의는 아주 유용한 독일군 교범이 되었다.
5. 썰매 정찰
이름 폴센, 젊은 덴마크인. 세계에서 가장 작은 무장군의 최상위 높은 장교였다. 그는 그린란드 북동부 썰매 정찰대의 유일한 대위. 정찰대는 스칸디나비아인 15명으로, 개 썰매를 타고 그린란드 해안 800km를 정찰하고 감시하는 임무였다.
정찰대가 찾는 것은 독일군, 독일군은 이곳에 기상국을 설치해서 정보를 전파하려 한다. U-boat 작전과 소련으로 가는 화물 선단을 추적하는 독일공군 장거리 항공기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1943년 3월 23일, 침입자를 발견했다. 어쩌면, 그린란드 입장에서 침입자 그 이상이었다. 독일군이 정찰대를 발견해서 잠시 교전이 있었다. 독일군은 19명에 기관단총 수류탄으로 무장했지만, 썰매 정찰대 3인은 볼트 액션 사냥총이 전부였다.
폴센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기 시작했다. 영하 45도. 폴센은 개들, 썰매, 소총, 부츠, 겨울 장비와 식량을 모두 잃어버렸다. 젊은 덴마크인은 둘 중 하나였다. 연합군 기지까지 360m를 걸어서 복귀하느냐 항복하느냐. 독일군 상륙을 알리려면 어떻게든 걸어가는 것이 맞다.
폴센은 걷기로 했다. 가던 길에 버려진 오두막을 만났고, 그 안에서 담요 조각과 옷, 얼어버린 콩, 사람이 끄는 썰매, 오래된 소총과 스키를 발견했다. 이 부실한 장비를 가지고 폴센은 시도했고, 중간에 그린란드인 단 한 명도 만나지 않고도 생존했다. 연합군 기지에 도달하는 데 11일 걸렸고, 아쉬운 결말을 본다. 대원 중 하나가 응급 무전기로 독일군 상륙을 이미 알린 것이다.
1944년 10월, 빠르게 회복한 폴센과 그린란드 북동부 썰매 정찰대는 다시 독일군에게 돌아가 싸웠다. 심지어 독일군 지휘관 중 하나를 잡았다. 이들은 미군에게 포로가 된다. 이때 연합군은 그 독일군 기상관측소를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한 그린란드 기상 지휘소로 사용했는데, 얇은 창문이었지만 생각보다 버틸만했다는 걸 경험한다.
6. No Picnic
펠리세 베누찌는 2차대전이 터질 때 에티오피아의 이탈리아 영사였다. 1941년, 영국은 펠리세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케냐의 감옥으로 보냈는데, 감옥은 해발 5.2km 케냐산(Mount Kenya)에 있었다. 그 아프리카에선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너무 크고 길도 없으며 생소한 이방인 서양인이었다.
보초가 허술해서 탈출은 가능했는데, 어쩌면 그것도 잠시였다. 진짜 보초는 사람이 아니었다.
베누찌는 이탈리아 지역 알프스에서 성장해서 산악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벌판으로 도망가면 산에서 멀리까지 보였고, 그래서 산을 넘어 탈출하면 못 잡을 걸로 생각하고, 매일 밥에서 식량을 축적한다.
베누찌는 공범 두 명을 포섭해서 6개월 넘게 천천히 동계장비와 식량, 얼음 도끼 비슷한 것, 수용소의 아이젠을 훔쳐 모았다.
[우리가 수용소를 떠나 14일이면 넘을 것이다] 수용소의 이탈리아 통역장교에게 편지를 남기고 1942년 1월 24일 탈주했다. 유대인 안식일까지 끼어 수용소는 4일간 아무런 추측을 못 했다.
그들에게 현상금 10실링이 걸렸고, 케냐산에 도착한 셋은 이제 케냐인들의 추적을 회피했다고 기뻐했다. 비무장 3인은 이제 숲으로 들어가며 등반의 위험에 몸을 맡긴다.
산을 오를수록 점차 추워졌고, 정상에 오르려면 훈련과 등반 기술이 필요했다. 침대 스프링을 묶고 있었던 의심스런 로프를 사용해 셋은 계속 올라간다.
갑작스런 눈보라가 셋을 두들겨 팼고, 트리오는 케냐산 세 봉우리 중 하나에 도달하는 데 실패했다. 트리오는 케냐산 제3위 봉우리에 이탈리아 국기를 게양했다. 그리고 셋은 다시 수용소로 돌아왔다.
탈옥에 관한 처벌로 독방 28일을 받았고, 이후 영국 소장은 7일을 감형해 줬는데, 그 이유는 “탈옥이 아니라 스포츠에 노력한 것도 같다.”
베누찌는 이 경험을 책으로 냈다. [No Picnic on Mount Kenya (1953)]. 그 책은 진지하게 케냐산을 오르려는 산악인들에게 아직도 참고되고 있다.
7. 태평양 오디세이
육군항공 데이몬 거스 중위나 육군 윌리엄 오스본 대위나 아무런 지식도 기술도 없이, 1942년 필리핀을 떠나 호주를 향해 59일 동안 5,149km를 항해했고, 전문 항해사도 어려운 일을 해냈다.
둘이 탄 배는 물이 새는 6m 근해 어선으로, 작은 디젤엔진이 있었고 - 연료로 코코넛 오일도 종종 사용했다. 항법 장비? 작은 나침반과 오래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극동 지도. 물과 식량? 직접 물고기를 잡던가 지나는 섬에서 얻어야 했다.
거스는 조종사였지만 1941년 12월 7일 필리핀에는 몰 수 있는 미군 비행기가 없었고, 즉석 보병이 되고 말았다.
바탄반도가 일본군에게 떨어지고, 거스는 악명 높은 죽음의 행진(Death March) 대열에 들어가 걷다가, 일본군 보초를 - 보초가 가지고 있던 대검으로 죽이고 탈출, 코레히도 요새를 향해 약 5km를 수영했다.
다시 코레히도 요새가 함락되자, 거스는 카누를 타고 내륙으로 도망친다. 중간에 카누가 침몰해서 수영으로 해안에 도달했고, 정신이 반 나간 상태에서 일본군 순시선이 거스 몸을 툭 치고 지나갔고, 일본군은 산 사람이 아니라 시체라고 생각하고 떠났다.
마법에 걸린 듯한 이 조종사는 결국 민도로섬으로 갔고, 거기서 다른 바탄의 탈출자 오스본을 만난다.
오스본은 대위고 거스는 중위였으나, 거스의 능력을 알아본 오스본은 2인조탈출 지휘관을 거스에게 맡겼다. 둘은 소형 어선들이 선착한 곳으로 가서 배를 골랐는데, 조잡하지만 나무를 뿌리부터 통째로 마스트로 세운 배를 택했다. 거기 밀가루 포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스는 이 배로 태풍 속을 항해하고, 일본 배와 일본 잠수함을 만났으며, 기총소사 공격을 받아 오스본 대위가 다쳤다.
그러다 어느 밤, 일본 순찰선의 검문을 받았는데, 순찰선은 이해할 수 없는 모스 코드로 등을 점멸했다. 거스는 고민 끝에 ‘반자이 니뽄!’을 응답으로 전등으로 점멸했다. Banzai Nihon!은 ‘Long Live Japan!’이란 뜻으로, 거스가 유일하게 아는 일본말, 그 응신을 받은 일본 순찰선은 가버렸다.
(주 : 조금 이해는 안 되네요. 거스가 일본 모스를 알았을까요? 하여간 일본군으로 착각한 듯.)
탈출에 성공한 거스는 다시 비행을 시작했으나,
1944년 영국에서 P-47 전투기 직강하 시험을 하다가 사망했다.
8. Longest Walk
1940년 5월, 독일군 공수부대 중령 코넬리우스 로스트는 독일군의 가장 놀라운 기습작전이었던 벨기에 에방에밀 요새 점령작전에서 낙하산 점프를 한 장교다.
1944년 중령은 러시아 깊은 곳에서 포로가 되었고, 시베리아 중노동 25형을 언도 받았으며, 게다가 천여 명의 독일군 포로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49년 10월, 수용소 의사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여, 이란까지 근 11,000km를 걸어서, 차를 얻어 타고, 열차도 타고 개 썰매도 타고 강에서 보트도 타며 갔다. 역사상 최장거리 [군인] 도피탈출 임무 기록이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테헤란에서 뮌헨까지 포함해 13,000km로 기록했다.)
이 기본적인 스토리는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들어도 상상만 할 뿐, 실제로 어떤 건지 체감하기 힘들다.
1950년대 초에 독일 작가 조셉 파우어는 큰돈을 주고 로스트를 인터뷰했고, 소설로 [As Far As My Feet Will Carry Me]를 썼다. 이 이야기는 독일의 패배 속에서 피어난 필사적인 승리로 독일 전역을 흔들었다.
독일 방송국이 TV 미니시리즈로 만들었고, 2001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코넬리우스 로스트가 아닌 클레멘스 포렐로 바꾸었다. 로스트는 서방으로 넘어오고 나서도 KGB 보복을 두려워해서 실명 공개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기 힘들었는데, 오늘날 여러 증거로 진실임이 증명되었다.
로스트는 1983년 사망했고, 시베리아에서 지뢰를 밟아 다친 부상의 병균 감염에 기인했다. 치료하지 못해 참고 지내다 중병이 되었다. 로스트는 사망했지만 그 자세한 얘기는 아직도 전한다.
9. Escape From Laos
디에터 뎅글러는 여섯 살이던 1944년 처음으로 생존기술을 익혔다. 자신이 살던 독일의 작은 마을 Black Forest village가 미군 전투기/폭격기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뎅글러의 어머니는 ‘너는 숲에서 혼자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하느니라’ 훈육했고, 뎅글러는 정말로 그렇게 배우며 익혔다.
뎅글러는 1957년 무일푼으로 미국으로 왔고, 위트 있고 침착한 성격 때문에 사람들 속에서 생존해 미국 시민이 된다. 이후 미 해군 비행훈련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조종사 자격(wing)을 취득했지만, 제트 전투기가 아닌 구형 프로펠러 A-1 Skyraider를 선택했다. 뎅글러 마음속에는 20년 전에 P-47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던 장면을 잊지 않고 있었다.
(주 : 디에터 뎅글러는 독일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 2차대전을 경험한 사람이다.)
당시 해군 조종사는 3주간의 도피/탈출 훈련을 수료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뎅글러는 아주 유명해졌다. 그 훈련에 헌신한 뎅글러는 해병대 교관들을 지속적으로 두들긴 유일한 교육생이었다.
뎅글러의 생존 기술은 1966년 첫 전투임무에서 격추되면서 빛을 발한다. 라오스에서 추락했고 하나도 다치지 않았지만 페테트 라오(라오스 공산당)에게 잠시 잡혔지만 탈출했고, 고문을 받은 뒤에 북베트남군 수용소로 인계되었다. 그 외딴 수용소에는 월남군과 미 육군 헬기 조종사 듀안 마틴, 또 다섯 명의 미군 항공 승무원이 있었다.
이들 일곱은 보초의 총을 가로채 여러 명을 사살하고 탈출, 뎅글러와 마틴은 한 조로 적 지역 어딘지도 모를 정글에서 도피한다. 마을 사람들이 마틴을 정글도로 난도질해 죽였고, 뎅글러는 23일 동안 채소와 벌레를 먹으며 기본적인 영양분을 취하며 버티다가, 지나가던 동료 A-1 스카이레이더에게 신호를 보낸다.
뎅글러 구조작전은 거의 실행되지 않을 뻔했다 : 이전에 비슷한 이유로 구조작전을 승인했다가 미군 승무원 한 명도 구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뎅글러는 북베트남 손에서 탈출한 유일한 미국인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사실 33명이 탈출했는데, 모두 비무장지대 남쪽 소용소나 (뎅글러럼) 라오스에서 탈출한 사람들이다.
뎅글러의 이야기는 약간의 픽션을 가미해 2007년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뎅글러 자신은 루게릭병으로 인한 황폐화로 사느니 - 2001년 2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뎅글러가 자살할 당시는 베트남 정글에서보다 몸이 비참해진 상태였다.
10. Maze Prison Escape
1983년 9월 25일, 북아일랜드 메이즈 교도소에서 아일랜드 혁명군(IRA) 38명이 탈출했다. 이 스토리 플롯이 영화 [Ocean’s 11]에 쓰였다.
메이즈 교도소는 그룹별로 차단되어 벽으로 둘러싸인 교도소로, 이 교도소 자체가 영국군 기지 안에 있었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군부대의 꼼꼼한 확인을 통과해야 했고, 분명한 정보를 바탕으로 심리적으로 준비하고 빡빡한 타이밍으로 시도해야 했으며, 특히나 확실하게 신분 증명을 회피할 무엇이 있어야 했다.
이 교도소는 유럽의 모든 교도소보다 기술적으로 완벽해서 탈옥이 불가능한 교도소로 불렸고, 구획 별로 철저하게 분리되어 다른 간수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IRA 탈옥 모의자들은 보초들에게 친구처럼 대하기 시작했으며, 차와 비스킷을 가져올 때도 철저하게 공손하고 정중하게 대했다. 특히 H-Block 7의 간수들은 이렇게 아부하는 평상시의 수감자들에게 익숙해졌다.
H-7번 구획은 간수들 방이 중간에 있고 – 수감자 방들이 둘러싼 형태였는데, 통제력이 있다고 착각한 간수들이 간수 방을 떠날 때 문을 열어놓고 다녔다. 그곳은 공기 순환장치도 없는 밀폐된 방이고, 모의자들은 간수가 간수 방을 떠날 때를 기회로 삼았다.
간수들이 돌아왔을 때, IRA가 은밀히 반입해 준 권총 여섯 자루로 간수들을 압도하고, 모의자들은 예행연습대로 배우처럼 연기해 아주 효과적으로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 그 어느 간수도 이런 복종적인 죄수들이 자신들을 죽이거나 대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의자들은 간수들 복장을 벗겼고, 수감자들은 더 모여들었으며, 곧 독방 동을 완전히 장악하는 과정에서 – 아무 경보도 울리지 않았다.
탈옥 다음 단계는 감옥에 매일 식량과 보급품을 전달하는 box truck.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라서 보안요원이 아무도 나와 보지 않았다. 탈옥자들은 이 트럭에 바로 올라타 점거하면서 운전수를 제압해 발을 묶고, 한 명이 운전석 바로 아래 웅크려 권총을 장전해 겨눴다. 트럭에 수감자 37명이 탔다.
일부 간수들이 저항했고, 트럭이 정문을 통과할 때 보안원들이 자동차로 막아 지연되긴 했으나, 38명을 막기에는 서툴렀다. 즉각 트럭에서 내려 정문을 열고 달려서 탈옥한다.
이틀 안에 19명이 다시 잡혔지만, 비슷한 인원이 IRA 안전 가옥에 도달해 사라졌다. 마가렛 대처의 영국정부는 굴욕을 느꼈고, 아일랜드 대중은 영국이 IRA 단원들을 관대하게 풀어주는 것보다 더 만족해했다.
탈옥 과정에서 이 블록의 간수장은 이 탈옥에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간수 두 명이 총에 맞았다. 당일 잡힌 두 명은 교도소 근처 강에서 몸을 담그고 숨어 있다가 숨을 쉬러 올라왔다가 잡혔다. 영국이 대대적으로 수사/수색하자 RIA는 남은 탈옥자들에게 무장투쟁을 계속하던지 위조 신분으로 미국에 가는 선택권을 줬다.
1984년 12월에도 단독 탈옥자가 있었으나 영국군 SAS 매복을 받아 사망했고, 탈옥자 중 한 명은 영국 전국에 걸친 폭발사건 16회에 관여했다.
이 83년 탈옥자들은 : 1986년에 한 명이 SAS에게 죽었고, 같은 86년에 탈옥자 두 명이 네덜란드에서 다시 체포되었고, 87년에 또 한 명이 SAS에게 사살되었다. 그래도 11명이 남았었는데,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2000년이 되었을 때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에게 범죄인 인도 요청으로 아직도 안 잡힌 그때 탈옥자 세 명을 요구했다.
알고 보니 한 명은 결혼해 미국 시민으로 살고 있었고, 인도 요청으로 2009년 아일랜드로 인계된다. 2008년, 여전히 두 명은 오리무중이다.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은 메이즈 감옥 탈옥을
아직도 [Great Escape]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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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XlSAilXHRik&list=PLVEzrcxUUbwoWG6LouJA-wVQXOUv-24Z6&index=5
첫댓글 엄청난 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