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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아브라함을 호랑이 사냥꾼으로 택하여 호랑이를 잡으려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장면이다. 천하 만민 중에 노아가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헤아린 것처럼 또다시 천하 만민 중에 아브라함 한 사람만이 온전하게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시간으로 아브라함을 수십 년 살펴보신 다음 아브라함의 씨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정화시키기로 계획하셨다.
아브라함을 택하신 하나님은 속히 본토를 떠나 지시할 땅으로 가라하셨다. 본토라는 것은 고향이 아니라 현재 사는 곳을 말하는 것이고 본향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우리 영혼의 고향이다. 그리고 고향이란 우리의 육신이 태어난 장소를 말한다.
친척과 아비를 떠나라 하신 것은 아브라함을 제외한 모든 자들이 우상 속에서 살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해서 그들과 분리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곁에서 떠나라 하신 것이다.
우상을 믿는 자들과 함께 있으면 초신자 아브라함이 온전한 믿음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주위를 모두 물리치시기 위한 것이다. 예수를 안 믿던 자가 예수를 믿게 되면 친구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먹는 것이 바뀌고 말하는 것이 바뀌고 사는 방법이 바뀐다.
예수가 택한 제자들도 믿지 않는 부모형제를 떠났고 재산까지 버리며 예수를 따랐기에 삶이 바뀌어 만나는 사람들도 모두 바뀌게 되었다. 이런 성정을 하나님께서 살펴 인정하시고 사도로 만드신 것이다.
(막10:28)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신 것은 어떤 목적지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말씀을 해주시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목적지도 없이 떠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5절에 보니까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지시를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면부지의 땅으로 가라는데도 불안한 기색도 없이 불평불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순종을 하는 아브라함이다. 이런 성정이 아브라함의 장점이고 이 장점이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이끌어 하나님의 벗으로 만들었을 것이고(사41:8) 하늘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이라 불리게 만들었을 것이다.(눅16:24)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 한사람을 택했으니까 너를 시작으로 네 자식과 후손들을 통해 복을 주며 자손들을 번창 하게 하여 큰 민족을 만들어 복된 세상을 만드시겠다고 언약을 하셨다. 그러므로 너는 택한 민족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될 것이고 이것은 세상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 하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에서부터 시작하셨다. 아담 하나를 만드셨고 노아 한 사람을 택하셨고 아브라함 한 사람을 택하여 이스라엘을 만드셨다.
욥기에 나오는 수아 사람 빌닷이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욥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무엇이든 작은 것이 크게 되고 어느 것이든 처음이 있다.
따라서 작은 것을 업신여기거나 처음을 소홀히 하면 큰 것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과가 좋지 않다는 말씀이다. 해서 예수는 소자를 업신여기지 말라 하셨다.
(마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소자란 개개인을 말하는 것이고 저희 천사들이란 개개인을 보호하며 관찰하는 천사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아시는 것은 개개인을 살피는 천사들의 보고로 알 수 있다는 것이 된다. 해서 밤 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 아니겠는가! 쉽게 말하자면 개개인의 수호천사들이 졸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며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리로다.
이것을 나쁜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시켜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천국에는 우리를 심판할 것을 기록한 책이 있다. 이 책을 생명책이라 한다.
(계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이 책을 생명책이라 했다. 이 책에 기록된 자만이 심판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고 생명책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자들은 심판도 없이 그대로 지옥행이라 했다.
(계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천국을 갈 수 있는 기준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라 했다.
(계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모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모든 것을 지키며 살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지만 이스라엘백성들의 용서를 구하고자 스스로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워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출32:32-33)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조건이나 환경은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1. 10대조 조상들과 동시대에 살았다.
2. 조상들에게서 직접 하나님에 관하여 들을 수 있었다.
3. 다른 조상들은 세상 적으로 살았으나 아브라함은 조상들의 말을 듣고 스스로 하나님을 찾았다.
4. 마음을 다하는 끈질김, 즉 인내가 있었다.
아브라함의 이런 성정이 유대인들에게 전해졌기에 지금 전세계적으로 경제권을 쥐고 좌지우지 흔드는 유대민족이 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은 아브라함 한 사람의 씨로 인해 뿌리가 내려진 민족이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덧붙여 하시는 말씀이 너를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복을 줄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내려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라 하셨다.
이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믿는 자는 천국에 갈 것이고 믿지 않는 자는 지옥으로 갈 것이란 말씀이다. 복을 주신다고 해서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복으로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의 복은 영원히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세상 복은 믿음을 보시고 부수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를 통하여 여호와라는 나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게 할 것이니 너의 말을 믿고 여호와하나님을 받아들여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의 복을 내려 천국으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어떤 복(福)인가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순종했다는 것이다. 롯은 아브라함의 형 하란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롯의 작은 아버지가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을 때 롯은 함께해서는 안 되는 자였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롯을 떼어 놓지 못하고 데리고 갔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까지 롯을 데려갔을까?
인간에게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말이 있다.
아브라함이 보기엔 롯이 너무 불쌍한 것이다. 자신이 지른 불에 형이 타죽었기 때문에 어린 롯은 불시에 고아가 돼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따라나서는 롯에게 연민의 정을 끊을 수 없어 롯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라고 했다. 이때 아버지 데라는 142세였다. 아버지 데라가 205세에 죽었다고 했으니 아브라함은 아버지와 생이별을 한 것이다.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은 아버지 데라가 죽은 것이 먼저 기록되어 있어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하란을 떠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착각하지 마시라.
(창12: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벌어들인 자신에게 속했던 모든 재물을 가지고 떠났다.
아버지의 재물과 어떻게 분리해서 관리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재물과 하인들까지 함께 떠났다고 하니 결혼한 아브라함은 하란에 와서는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도 아버지의 재물과 자신의 재물관리를 따로따로 한 것 같다.
왜냐하면 하란에서 모은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떠났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르에서는 아버지 밑에서 일하며 자신의 재산을 따로 두지 않았는데 하란에 와서는 아버지의 재산과 자신의 재산을 따로 관리했기 때문에 서로의 재산을 쉽게 구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재물은 우상숭배로 인하여 벌어들인 재물일 것이다. 해서 하나님은 이런 재물을 기뻐하지 않으시므로 후에 기근을 만나 모두 써버리게 하신다.
어찌하든 아브라함은 살던 곳에서 아비와 생이별을 하고 마침내 호랑이 굴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후에 다윗이 통치하던 이스라엘의 넓은 땅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제 가나안이라는 호랑이를 때려잡아야 된다. 과연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들을 제압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오히려 왕따 당하며 고생고생 하다가 쫓겨나지는 않을까?
앞으로 전개되는 아브라함의 일대기가 기대된다.
(창12: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그 땅을 통과했다고 해서 가나안 땅을 지나쳐 다른 지역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아니다. 세겜은 이스라엘의 역사적으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나안지역이었다. 세겜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던 곳을 떠나 처음 정착하여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곳이다. 때문에 그곳의 옛날과 지금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세겜의 뜻은 어깨, 또는 목덜미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부위는 사람의 중요한 부분인데 이런 뜻을 가지게 된 이유는 세겜이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삿9:7)에 있어 언덕의 등성이처럼 생겼고 강우량이 적당하고 물이 많아 곡식과 포도, 무화과나무, 감람나무 등 과일을 경작하기에 좋았고 목축하기 좋은 풀밭도 많았다(창37:12-13).
헤브론에 살던 야곱의 아들들도 그곳까지 와서 양에게 풀을 먹일 정도로 모든 것이 풍부한 곳이었다(창37:12-15). 세겜은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고대의 성읍으로 야곱이 장막을 치고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 이스라엘(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명명한 곳이기도 하다.(창33:18-20) 그리고 이곳 세겜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인 그 땅의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디나의 오빠들이 분노하여 그들에게 복수를 하였는데 할례를 시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모두 쳐 죽이는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창34:1-31)
하나님은 이스라엘 여러 곳에 도피성을 만드셨는데 세겜도 그 중에 한 곳으로 지정된 곳이었다.(수20:1-7, 수21:21)
요셉은 모진 연단과 시험을 참고 이겨냄으로 애급의 총리가 되었다. 요셉은 형제와 자손들에게 유언하기를 히브리민족이 애급 땅을 떠나는 날이 올 때 자신의 뼈를 가지고 떠나라 하여(출13:19) 이들은 출 애급 할 때 요셉의 뼈를 가지고 나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백성들이 세겜에 장사하였다.(수24:32)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은 여룹바알의 여종에게서 난 첩의 아들이었다. 이가 자신의 형제 70인을 죽이고 왕이 된 곳이 세겜이다.(삿9:18)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아비멜렉의 잘못을 알고 그와 전쟁을 하였다. 계속패하다가 어느 날 망대 위에서 여인이 던진 맷돌 짝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이 깨져 죽었다.(삿9:50-55) 북 이스라엘의 역사에 세겜은 대단히 중요한 곳이다.
세겜은 사마리아와 근접해 있는 곳으로서 산지는 북쪽으로 이스르엘 평야가 있고, 남쪽으로는 여리고와 아얄론 골짜기가 경계를 하고 있다. 대략 남북으로 65Km 정도이고 동서로는 56Km 정도가 된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후 에브라임 지파와 므나셋 반지파기 살던 곳으로 북이스라엘이 BC 722년 앗수르에 멸망당한 후 앗수르의 식민정책과 민족 혼혈정책으로 북 이스라엘민족과 앗수르인들이 섞이게 되어 후에 사마리아인들이 생겨나는데, 유대인들로부터 혼혈인 사마리아인들이라고 불리며 이방인 차별을 받게 되는 지역이 바로 세겜과 사마리아 지역이다.
이스라엘의 4대 왕 르호보암과 갈라져 나온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수도를 처음 세겜에 세웠다가 후에 근처 사마리아로 옮겼다.
(왕상12:25)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사마리아 산지는 테라로사라는 석회암 지역으로 비옥한 토양과 일년에 약 6-700밀리 정도의 충분한 강우량으로 농사가 잘되는 곳이다. 사마리아 옆에 세겜이 있고 주변 산으로는 에발 산(940m),과 그리심 산(881m)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리심 산은 축복의 산이고 에발 산은 저주의 산이라는 것인데 이들이 마주보고 있다는 것이다.
(신11: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위 말씀에서 세겜의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말씀은 세겜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세겜이 복과 저주가 선포되는 중요한 종교 중심지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신27:4)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신27:12-13)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수8:30)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수8: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 대로 함이라.
(삿9:7) 혹이 요담에게 그 일을 고하매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로 가서 서서 소리를 높이 외쳐 그들에게 이르되 세겜 사람들아 나를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를 들으시리라.
이스라엘의 구약시대가 만들어지기 전인 애급의 종살이에서 출 애급 할 때에 하나님은 애급의 장자를 치시며 유월절(아빕월 14일)이라는 기념일을 만드셨다. 이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을 애급에서 빼내 자신의 백성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이스라엘백성들은 일년 된 수컷 어린양을 취하여 죽이고 우슬초 한 묶음에 어린양의 피를 찍어서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라야만 하였다.
천사가 그 피를 보고 애급의 장자를 죽일 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예수는 양 잡는 날 곧 유월절 바로 그 날에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다.(레23:5) 다음 날이 안식일이므로 아리마대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구하여 장사지냈다.(요19:31, 38)
지금도 유대인들은 매년 유월절 기간이 되면 이스라엘 북쪽에 사마리아인들이 모여 사는 그리심 산(축복의 산) 정상 부근에서는 사마리아인 유월절 행사가 성대하게 진행된다. 2011년에는 4월 18일 저녁 7시에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전세계에서 약 2,000명의 관광객들이 방문해서 직접 유월절 양 잡는 광경을 관람하기도 했다.
현재 세겜과 그리심 산에 세워진 기념교회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이곳에 전통적인 우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야곱의 우물이다. 구약성경에는 언급이 없지만 요한복음은 야곱이 자기 후손을 위하여 파 놓은 우물로 야곱과 그의 가족이 마신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요4:3-14) 이 우물가에서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주시리라 말씀하셨다.
야곱의 우물은 깊이가 약 50m나 되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계속 솟아나는 생명수 같은 생명의 샘이다. 이곳에 주후 380년 처음으로 야곱의 우물교회가 세워졌다. 그 후 1187년 십자군에 의해서도 교회가 세워졌었고 이 기초위에 1908년 러시아정교회가 현재의 교회건축을 시작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후 그리스 정교회에서 공사를 인수해 재개 되었으나 재정난으로 지붕 없는 미완의 교회가 되었다.
90여년이 지난 1995년 공사를 다시 시작해 2005년 현재의 교회로 완성되었다.
교회건축 시작 100여년 만이다. 1979년 야곱의 우물교회 신부님이 한 이스라엘 정착민에 의해 도끼로 잔인하게 살해된 슬픈 역사도 가지고 있다. 유대인의 조상 야곱의 우물을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후 우물을 사진 찍는 것을 절대 금지하고 있다. 혹시 유대인이 사진을 보면 또다시 자극될지 모를 우려 때문이다.
기억해야 될 것은 주님께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신 곳이 바로 이 우물가에서였다(요4:24).
현재는 요르단서안의 팔레스틴 지역에서 가장 큰 아랍인들의 도시로서 아랍민족의 중심지 같은 곳이 되었다. 때문에 유대인과 아랍인들과의 갈등이 가장 심한 곳 중에 하나가 이 세겜 이기도 하다.
1948년 독립 당시에는 요르단에 속해있었으나 1967년 6일 전쟁이후 이스라엘 점령지가 되어 무장한 이스라엘군의 삼엄한 경계아래 오늘에 이르렀고 최근 이스라엘 정부가 세겜으로 들어가는 검문소(전에는 세겜을 들어가려면 삼엄한 이스라엘 군 검문소가 있어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고, 검문소 앞에서 차를 내려 검사를 받은 후 세겜에서 다시 현지인 차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를 철수 시키는 바람에 요즈음은 전에 비해 상당히 자유로워 져 세겜을 바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세겜은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으로 예루살렘에서 60번 도로를 타고 가는데, 피스갓 제브라라는 유대인 지역을 지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검문소를 통과하여 계속 북쪽으로 가야 한다. 가면서 벧엘과 실로를 지나 북쪽으로 약 64킬로를 가는데 약 1시간 반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
(창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떠나 처음 정착하여 제사를 드린 곳이 세겜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네 자손들에게 주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기쁨과 두려움을 가지고 간절하게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알고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제사문제다.
제사하니까 돌아가신 부모 영정이나 지방 써놓고 그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절하는 것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산자에게 드리는 제사지 죽은 자에게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죽은 자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다. 때문에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시다. 구약의 모든 제사들을 보면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렸지 조상에게 드리지 않았다. 죽은 자는 제사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라고 직접 말씀하셨다.
(마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제사는 산자에게 지내는 것이지 죽은 자에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성경의 모든 제사는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지낸 의식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세겜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신다고 하시지 않고 자손에게 주신다 하였다. 후에 아브라함 자손들은 이 땅을 차지하며 이곳에서 살았다. 위의 지도를 보면 므낫세 지파가 세겜 땅을 분할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창12: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래 지도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세겜에서 남쪽 예루살렘 쪽으로 좀더 가까이 이동한 것을 알 수 있다. 서쪽은 벧엘이고 동쪽은 아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벧엘과 아이의 중간지점에 도착하여 단을 쌓았다는 것이 된다.
아마 이때는 이곳의 지명이 없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가는 곳마다 도착해서 처음 한 일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요즘말로 하자면 주일성수(主日聖守)를 한 아브라함이다. 주일성수란 일주일에 한번 하나님께 예를 갖추는 것이 아니다. 매일 같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뜻에 따라 사는 마음이 주일성수를 하는 것이다.
벧엘은 성경에서 예루살렘 다음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곳이다.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로 보면 벧엘에는 그 이웃 아이 성이 망한 후 주전 21세기부터 사람이 살아왔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벧엘과 아이 중간 지점이라고 하니 이 두 곳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벧엘의 뜻은 하나님의 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벧엘은 예루살렘의 북쪽으로 19km 정도이고 세겜에서 보면 남쪽으로 약50~60km다. 실로에서는 남방 29km 정도, 아이에서는 서편 약 3km 지점의 동산 같은 곳으로 물이 맑고 좋아 동네에 깨끗하고 좋은 물을 풍성하게 공급하여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아왔다.
이곳은 우물 네 개에서 나오는 물로 반석을 판 저수지에 담아 사용했다고 한다. 벧엘은 라기스 보다 먼저 이스라엘에게 점령되었는데 본래 이곳의 이름은 루스였다.
벧엘은 정말 사연이 많은 곳이기에 성경에서 벧엘이라는 이름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다.
1. 야곱이 에서를 피하여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는 길에 꿈에 하나님의 역사를 본 후"벧엘"이라고 이름 지었다(창28:10-19)
2. 야곱의 일행이 세겜에서 디나의 일로 난리를 피운 후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로 가서 단을 쌓으라고 하셨다. 이에 야곱은 자신이 거느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방 신상을 버리고 몸을 정결하게 하며 의복도 깨끗한 옷을 입을 것을 명하였다. 가족과 하인들 모두는 이 명에 따라 이방신상과 귀에 있는 고리를 빼서 야곱에게 주었고 야곱은 이것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다.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하였다.(창35:1-7)
3. 주전 14세기에 베냐민에게 망했다(삿18:22).
4. 에브라임에게 망함(대상7:28).
5. 길갈에 있던 법궤를 이곳으로 옮겨왔다(삿20:18).
6. 백성들의 정신 문제를 고문해 주기 위하여 늙은 선지자 사무엘이 해 마다 이곳을 순행했다 (삼상7:16).
7. 여로보암(주전922-901)이 예루살렘에 대항하여 이곳에 성소를 지었다 (왕상25-33).
8. 예후의 제도에도 그 금송아지는 건드리지 않았다(왕하10:29).
9. 아모스는 벧엘의 제단에 대하여 무서운 비난을 퍼부었다.(암3:14, 암4:4) 그리고 벧엘의 제단을 찾지 말라 하였다(암5:5)
10. 벧엘에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있는 곳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신학교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금송아지 제단에 대하여 말 한마디조차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기이한 일이다. 어째서 침묵하였을까?(왕하2:1-3). 바알 선지자 450 명을 죽인 엘리야가(왕상18:21-40) 금송아지 제단에 대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엘리야 선지자는 남 유다 아사 왕, 북
이스라엘은 아합 왕 때의 사람이다. 아사 왕은 요시야 왕의 12대 선조다)
벧엘에 있던 금송아지제단은 먼 훗날 요시야 왕이 부숴버렸다. 요시야 왕은 바알 신당을 정리하면서 석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렸고 금송아지 우상은 빻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왕하23:14-15) 금송아지를 부수어 가루로 만들었다는 것은 모세 때에도 있었다. 요시야 왕이 이렇게 한 이유는 율법 책을 발견한 후에(왕하22:8-11) 그 율법을 듣고 회개와 함께 자신의 옷을 찢는 고통과 아픔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왕이 이방신들을 정리하면서 금송아지 우상을 그냥 두었을 리가 없다. 모세가 금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어 버린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출32:20)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아이의 뜻은 폐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벧엘의 동남쪽으로 3km 지점에 있어 가나안의 요새(要塞)지였다. 여호수아는 이성을 쳤으나 아간의 범죄로 실패하고 아간을 징벌한 후 두 번째 쳐서 점령하였다(수7:2-5, 8:1-29).
이 싸움의 결과로 황폐하여졌던 것을 이사야 시대에 재건하였고 후에 앗수르 군대의 침입을 당하였다(시10:28). 바벨론 포로 이후에 70년이 지난 뒤에 이스라엘백성 일부가 정착한 곳이기도 하다(스2:28)
(창12:9)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점점 남방으로 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의 중심지로 보내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성경적으로 보면 가나안 땅의 중심지는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시대에는 이곳을 살렘이라 불렀다.(창14:18)
예루살렘의 지형이 이스라엘 땅의 중심지에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디에 정착시키려하셨는지 짐작이 간다. 위의 지도는 아브라함이 이동한 곳을 보여준다.
(창12: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급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드디어 아브라함은 고생고생 끝에 하나님이 지시한 땅에 도착하였다. 자리를 잡고 살려고 하는데 비도 내리지 않고 농사나 목축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가지고 왔던 재물도 다 떨어지고 기근으로 인하여 먹을 것이 없게 되자 참으로 난감하게 되었다. 해서 아브라함은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애급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국어사전을 보니 기근이란 흉년으로 먹을 양식이 모자라 굶주리는 것이라 했다. 흉년이라는 것이 비가 오지 않아 작물을 심을 수 없고 심었다 해도 수분이 없으니 말라 죽고 만다. 또한 가뭄으로 인하여 풀이 없으니 가축들도 기를 수가 없다. 기근이 있는 땅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해서 아브라함은 애급 땅은 기근이 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을 떠나 남쪽 애급으로 내려간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가지고 온 재산은 모두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가지고 나온 재산은 우상을 섬기며 우상을 팔아 모은 재산이기에 하나님으로서는 기분이 나쁜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던 재물을 소진(消盡)시키기 위해 아브라함이 있는 곳에 비를 내리지 않으신 것 같다.
재물이 없는 아브라함은 당연히 하나님에게 살려달라고 구원을 요청했어야 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구하지 아니하고 세상 적으로 살던 방법으로 자신이 스스로 먼저 판단하고 먼저 움직이는 바람에 하나님은 두고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초신자의 약점이 이것이다. 아니 초신자가 아니라 너나 할 것 없는 모든 인간의 약점이래야 옳을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하나님께 고하는 것보다 내 생각을 앞세워 일하고 판단할 때가 많으니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을 광야로 들여보내고 이들이 애급에서 가지고 나온 먹을 것과 재물이 떨어질 때까지 아무것도 주시지 않았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을 칠 때까지 보고 계셨다.(출16:1-3)
모세는 하나님께 구했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세상방식으로 먹고 살게 하지 않고 직접 만나와 메추라기와 반석의 물을 주셨다.(출16:12-13) 구하는 자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으로 하나님이 머물라한 땅을 떠나므로 아브라함은 아내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좀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면 머물고 있는 땅에 비를 내려 주셨을 것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에서 고생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해주셨을 텐데 말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다고 하셨다. 아마 아브라함이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고 그곳에 머물렀다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그곳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복을 받아 기근에서 헤어났을 것이다.
지시하신 땅에서 자신의 판단으로 떠나는 이런 상태가 크신 하나님의 뜻을 작은 인간의 마음에 맞춰서 행하는 것이다. 내 작은 마음을 하나님의 큰마음에 맞추도록 해야 한다. 마음에 새겨 둘 일이다.
(창12:11-13)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아브라함은 이기주의자다. 자신이 살기 위하여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라 시키고 있다. 아마 사라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누이동생이라 하면 동생을 빼앗아 가지도 않고 자신도 그냥 둘 줄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세상이라는 것은 항상 변수가 작용하고 있어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사라에게 말한 모양이다.
하나님이 머물라 한 땅에서 떠나 애급에 도착하자 두려움이 들었던 것 같다. 이 두려움은 애급사람들이 텃세를 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머물라한 곳을 떠났기에 다시 돌려보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두려움이다. 두려움이 들었다면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돌아가 하나님 품에 안겨야 하는데 아브라함은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시키면서까지 애굽 땅에 머무르며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나 이기주의자인가?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하나님의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살필 수가 없다. 하나님의 지식이 풍족해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알았다면 아브라함은 결코 가나안 땅을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라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서 호세아 선지자는 열심히 하나님의 지식을 쌓아 망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인간은 먼 후일을 위해 참고 사는 것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익을 좋아한다. 그래서 스스로 불이익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아브라함도 당장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머물라한 땅을 떠났고 자신의 목숨을 위하여 아내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죄를 짓게 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면 어지간한 믿음 가지고는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연단으로 경험을 쌓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습관의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초신자들을 쥐면 꺼질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하시며 조심스럽게 대해주시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초신자임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겠다는 생각보다는 세상 방법으로 살겠다는 마음이 앞서있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방법이 세상 적인 지식밖에 가지고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알지 못하면 말할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고 말을 해줘도 알아듣지 못한다 하셨다.
(요3: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 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 도다
(요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어찌하든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의도 없고 염치도 없이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아내를 버리는 사람이 초신자 아브라함이었다. 이런 아브라함이 믿음이 담대해지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무장을 하자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조카 롯이 잡혀갔을 때 용감하고 담대하게 구해오는 거물급 믿음자로 변했다.
이것은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믿음이 담대함을 만들어 준 결과인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었을 때 여러 번에 걸쳐 담대하라고 하셨다.(수1:6, 수1:7, 수1:9)
(창12:14-15)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사라는 아브라함과 10살 차이다.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란을 떠났다고 했으니 사라는 65세에 하란을 떠난 것이 된다. 그리고 세겜을 거쳐 벧엘을 지나 애급에 도착하기까지 약7년이 흘렀다. 그러면 사라는 72세 정도가 된다.
지금 72세면 쭈글쭈글한 할머니처럼 돼 노인 취급을 받는 나이인데 그때는 좀 오래 살아 그런지는 몰라도 애급사람들이 사라를 보고 심히 아리따움에 놀래고 애급 왕 바로도 반했다고 하니 정말 예쁘긴 예뻣던 모양이다.
사라는 127년을 살았다. 그렇다면 애급에 내려갔을 때가 인생의 절반을 조금 넘긴 정도인 세월에 해당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에 해당할 것이다. 지금은 이정도 나이를 먹은 예쁜 여자들이 많이 있는데 이것을 보면 옛날 시대나 지금시대는 비슷비슷한 것 같다.
아브라함이 늑대를 피해 도망하다가 배고픈 호랑이를 만났다고 해야 할까?
굶주린 사자를 만났다고 해야 할까?
결국 아브라함이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애급의 대신들이 사라의 아름다움을 보고 즉시 바로 왕에게 고하였고 바로 왕은 아름다운 여인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동생이라는 말을 듣고 즉각 궁으로 불러들여 왕의 후처로 삼았다.
(창12:16)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아브라함은 졸지에 바로의 처남이 돼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알지 못한 아브라함은 아주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하나님의 큰마음을 자신의 작은 마음에 맞춰 생각해낸 것이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속여 자신의 목숨을 구명도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끔찍하게도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긴 것이었다.
한편 바로는 기분이 좋아 처남이 된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주었고 노비까지 주며 왕가로서의 친척으로 대우했다. 물론 사라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인 대가다. 사라가 얼마나 예뻣으면 바로가 이 정도일까?
(창12:17-20)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여호와하나님은 사라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고 했다. 이는 바로가 사라를 끌어들여 육체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연고”라는 말은 어떤 일이 벌어진 상태 후를 말한다.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라는 말은 이미 육체관계가 일어난 뒤에 결과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니까 바로가 사라와 동침을 했다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사전(事前)에 막아주지 않으셨다. 왜일까?
불순종의 대가일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 지시한 땅에서 살라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연단의 어려움 즉 배고픔의 연단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이 지시한 땅에서 애급으로 내려갔고 자신의 생각대로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속이는 거짓을 행했다.
거짓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행한 행동은 바로를 속이려고 한 것이지만 결과는 자신이 주가 되어 행한 것이기에 이것은 스스로 신이 되어 행한 결과에 속한다. 고로 스스로 우상이 돼버렸고 또한 하나님을 속인 것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행하는 일을 사전에 막아 주지 않으셨던 것 같다. 당해보지 않으면 그 일에 어떻게 전개되는지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경험을 하지 못하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면 반드시 대가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속여 바로에게 빼앗겼을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상했겠는가? 비참함 바로 그 자체였을 것이다. 따라서 순종만이 어려움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혼쭐이 난 바로는 곧바로 부하들에게 명하여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냈다.(창12:20) 사라를 돌려보냈지만 아브라함에게 준 재물을 도로 빼앗아 올 수는 없었다.
박동일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