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칙 세존염화(世尊拈花)
1. 싯다르타가 들어 올린 한송이 꽃
불교의 창시자 싯다르타(Gautama Siddhārtha, BC563?~483?)는 우리에게는 석가모니(釋迦牟尼)라는 이름으로 더 친근하다. 사실 석가모니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석가(Śakya)라는 부족의 성자(muni)를 뜻한다. 그렇지만 과연 싯다르타는 성스러운 사람을 의미하는 석가모니라는 명칭을 탐탁하게 생각했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거다. 그는 제자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일종의 멘토로 숭배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가 진정으로 바란 것은 자신처럼 제자들도 그들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깨달음은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타당한 것이니까 말이다. 다시 말해 싯다르타는 자신을 부처로 숭배하기보다는 제자들이 스스로 부처가 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선생님을 계속 존경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학생으로 남게 되고, 부모님의 말에 계속 복종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자식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싯다르타의 가르침은 아이러니한 데가 있다. “내가 깨달은 것을 맹신하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가르침은 “나의 깨달음을 부정하라!”라는 역설적인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오직 그럴 때에만 제자들도 자신처럼 성불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모든 맹신은 맹신의 대상이 좋든 그렇지 않든 일종의 집착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반대로 외적인 권위에 대한 부정은 모든 종류의 집착을 끊고 자유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자신만큼 자유로워져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기다리며, 싯다르타는 제자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싯다르타는 주로 인도 중부 영취산(靈鷲山, Gṛdhrakutaparvata)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했다고 한다.
‘무문관’의 여섯 번째 관문은 우리를 바로 2,500여 년 전 영취산의 설법 현장으로 데리고 간다. 지금 영취산에서 싯다르타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위대한 선생님의 말씀을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제자들은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다. 어쩌면 방금 스승 싯다르타가 했던 말을 메모하던가 아니면 그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싯다르타로서는 너무나 못마땅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집착을 끊어 해탈의 길로 나아가야 할 제자들이 반대로 말과 글, 혹은 그 의미에 집착하는 아이러니한 사태가 펼쳐졌으니까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싯다르타는 갑자기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려 제자들에게 보여준다. 스승의 말에 집중하고 있던 제자들로서는 당혹스러운 사건이었을 것이다. 무엇인가 비밀스런 가르침을 전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2. 꽃 보며 빙그레 웃은 가섭의 미소
당연히 제자들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스승님은 왜 꽃을 들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일까? 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싯다르타가 손에 들고 있는 꽃 한 송이는 제자들에게는 일종의 화두(話頭)로 기능했던 것이다. 제자들 중에는 기억력과 이해력이 탁월해 동료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던 아난(阿難, Ānanda)도 있었다. 25년간 싯다르타를 따랐던 탓일까. 아난은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부릴 정도로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많이 들었고 그만큼 많은 것을 암기하고 있던 제자다. 여기서 다문제일이란 가장 많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뒤에 싯다르타가 이 세상을 떠난 뒤, 아난이 스승의 가르침을 경전으로 정리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스승이 들고 있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 앞에서 아난마저도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의 모습에 실망하려고 하는 순간, 싯다르타의 눈에는 제자 한 명이 빙그레 웃고 있는 모습이 들어온다. 아난과 함께 쌍벽을 이루던 제자 가섭(迦葉, Kāśyapa)이었다. 평소 지적인 이해에 몰두했던 아난과 달리 가섭은 철저히 자신에 직면하는 수행으로 일찌감치 싯다르타의 눈에 들었던 제자였다. 아난을 ‘다문제일’로 부르는 것처럼 가섭을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여기서 두타(頭陀, dhūta)란 집착과 번뇌를 제거하려는 일상생활에서의 치열한 수행을 의미하는 말이다. 어쨌든 가섭의 미소를 보고서 싯다르타는 비로소 안심하게 된다. 어차피 유한한 생명일 수밖에 없기에 싯다르타도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자신이 애써 불을 지핀 깨달음의 등불을 보존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제 안심이다. 가섭이라면 자신이 떠난 뒤 뒷일을 충분히 감당할 테니까 말이다.
‘무문관’의 여섯 번째 관문에는 싯다르타가 들고 있던 아름다운 꽃 이외에도 가섭의 환한 미소도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설상가상이다. 싯다르타가 왜 꽃을 들었는지도 아직 아리송하기만 한데, 이제 가섭의 미소도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으니까 말이다. 어떻게 미소가 깨달았다는 징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싯다르타는 가섭의 미소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만 한다.
다행스럽게도 이어지는 싯다르타의 말을 통해 우리는 여섯 번째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하나 얻게 된다. 싯다르타는 자신에게는 열반에 이른 미묘한 마음과 “실상(實相)에는 상(相)이 없다”는 미묘한 가르침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미묘한 마음이나 미묘한 가르침이나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열반에 이른 미묘한 마음이란 실상에는 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음일 테니까 말이다.
3. 사람 수만큼 많은 세계가 존재한다
“실상에는 상이 없다(實相無相)”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푸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에게서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영민한 프랑스 소설가만큼 우리의 삶과 마음을 민감하게 포착했던 작가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자신의 걸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la recherche du temps perdu)’에서 프루스트는 말했던 적이 있다. “세계는 모든 인간에게 참되지만 동시에 모든 인간마다 다르다. (…) 사실은 단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몇 백만의 세계, 인간의 눈동자 및 지성과 거의 동수인 세계가 있고, 그것이 아침마다 깨어난다.” 사람들의 수만큼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 각자에게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의 세계가 나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쉽게 믿고 사람들에게 프루스트의 이야기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일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이런 믿음은 타당한 것일까. 혹시 집착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까마귀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고, 물고기에도 그만의 세계가 있다. 또한 눈이 좋은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고, 눈이 나쁜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다.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고 깨달은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는 법이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세계를 부정하고 다른 진짜 세계, 혹은 초월적인 세계를 꿈꾸고 있다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집착이다. 자신이 보는 세계는 가짜이고 스승이 보는 세계가 진짜라고 믿는다면, 과연 부처가 될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겁이다.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세계를 긍정하며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이제야 싯다르타의 꽃과 가섭의 미소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분명해진 것 같다.
세존께서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자 이때에 대중이 모두 그 뜻을 몰라 묵묵히 있는데 오직 가섭 존자만이 미소를 지었다. 세존께서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 있으니 마하가섭에게 부촉(付囑)하노라."라고 하셨다.
世尊 昔在靈山會上 拈花示衆 是時 衆皆默然 唯迦葉尊者 破顔微笑 世尊云 吾有正法眼藏 涅盤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 付囑摩訶迦葉
무문 선사 평창
황면(黃面) 구담(瞿曇)이 자신 밖에 아무도 없는 듯 양민(良民)을 강압하여 종으로 삼고 양 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파는 격이로다. 이것을 다소 기특하다 할지 모르나 만약 당시에 대중이 모두 웃었다면 어떻게 정법안장을 전수했겠는가. 만약 가섭이 웃지 않았다면 또한 어떻게 정법안장을 전수했겠는가. 정법안장에 전수할 것이 있었다면 황면 노자(老子, 세존)가 사람들을 속인 것이요 만약 전수할 것이 없었다면 무엇 때문에 오직 가섭에게만 허락하였겠는가.
無門曰 黃面 瞿曇 傍如無人 壓良爲賤 懸羊頭 賣狗肉 將謂多少奇特 只如當時大衆都笑 正法眼藏 作?生傳 設使迦葉不笑 正法眼藏 又作?生傳 若道正法眼藏 有傳授 黃面老子 ? 閭閻 若道無傳授 爲甚?獨許迦葉
무문 선사 송
꽃을 들어 보일 때
온통 드러났어라
가섭의 빙그레 지은 미소는
인간과 천상이라도 모르네
拈起花來
尾巴已露
迦葉破顔
人天罔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