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의 활동 시기는 대개 모심는 계절부터 추수까지였고, 연희종목은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 여섯 가지인데 그 일부는 오늘 날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풍물은 윗다리가락을 바탕으로 하는 풍물놀이로 진풀이 무동 채상이라고 부르는 상모돌리기 등을 보여준다. 버나는 대접돌리기다. 쳇바퀴·대접·대야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묘기로 접시돌리기와는 달리 돌리는 사람을 버나잽이라 했고 소리꾼 매호씨가 어울려 재담과 창으로 흥을 돋운다. 살판은 땅재주 꾼이다. 앞곤두 뒷곤두 번개곤두 자반뒤지기 팔걸음 외팔걸음 외팔곤두 앉은뱅이팔걸음 수세미느리 앉은뱅이 모말되기 숭어뜀 등의 순서로 노는 땅재주인데 우리말의 '살판이나 죽을 판이라는 표현은 여기서 나왔다. 또 어름이라는 이름으로 줄타기가 있는데 앞으로 가기 및 장단줄 거미줄늘이기 뒤로 훑기 콩 심기 화장사위 처녀총각 외 호미거리 허궁잽이 가새트름 외 허궁잽이 쌍허궁잽이 양반걸음 양반 밤나무 지키기 장군행차 등의 순서로 노는 줄타기로 어름을 놀 때도 매호씨의 재담과 창이 있었다. 다음이 덧뵈기라는 탈놀음이다. 구경꾼의 요구와 흥취에 영합해 놀던 탈놀음으로 마당 씻기· 옴탈잡이 샌님 잡이 먹중 잡이 등 네 마당으로 이루어지고 마지막으로 덜미라는 꼭두각시놀음이 있는데 이것은 꼭두각시민속인형극을 말한다.
남녀혼성으로 이뤄진 사당패는 책임자를 모갑이라 했고 그 밑에 남자 거사(居士)와 여자 사당이 있었다. 모갑이는 예능면으로 책임자이며 거사는 자기 밑에 사당 1~2명을 데리고 기술지도와 생계 꾸리는 것을 맡았다.
이때 사당들은 놀이 이외에도 매춘을 하여 해의채(解衣債:몸값)를 받기도 했다. 17~18세기에는 그들의 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단체의 수도 많았고 예술적 기량도 발전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사당패들의 활동무대는 농촌으로 옮겨졌다. 그 주요 원인 중의 하나는 판소리 잡가 등을 전문으로 하는 자들의 역량이 발전함에 따라 이들과 예술적으로 기량을 겨룰 수 없었던 탓이다. 사당패들의 공연내용은 당시 유랑민의 처지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새롭게 대두되는 신흥예술의 양상을 잘 드러내준다. 그들의 활동근거지는 경기도 안성 청룡사, 경상남도 하동 쌍계사, 황해도 구월산 패엽사 등 대게가 이름난 사찰들이었었다. 불교의 한 종파인 태고종에서는 지금도 큰 행사 때에는 바라춤을 추는데 그 춤사위의 예스러움이 종교예술이라기보다는 민중예술에 가깝다. 이는 어쩌면 그적의 놀이문화를 종교예술에 접목시킨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봄직도 하다. 이들 또한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의해 소멸되었다. 지금은 남사당패의 잔재가 미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수랑골 최부자집 환갑연에 불려온 것은 남사당이었다. 시끌벅적한 놀음이 이틀째 이어지고 있었는데 이틀 째 낮거리 한판이 끝나고 패거리들과 동네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중참을 먹고 있을 때다. 놀음마당에서 소슬 문으로 나가는 외진 구석에 초라한 걸이 하나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개다리소반 앞에 앉아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있었다. 다름 아닌 나실 아비와 나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잔치를 벌이는 부잣집은 동네사람들을 모두 불러 먹고 마실 것을 후하게 장만하여 먹임으로서 은근히 가세를 자랑하던 것인데 최부자집도 남다르지 않았다. 나실 아비는 상위에 음식이 동나는 것이 아쉬운 듯 눈길이 자꾸만 부엌 쪽을 흘끔거리더니 기어이 빈 접시 두 개를 겹쳐들고 부엌으로 다가갔다. 그적의 나실 아비는 이미 피골이 상접하고 정신이 흐려진 듯 누가 보더란 데도 포악하던 시절의 나실 아비가 아니었다. 비척거리며 부엌으로 다가간 나실 아비가 음식을 나눠주는 부엌아낙에게 개면적은 듯 접시를 내밀었다. 그러나 부엌아낙은 알고도 모르는 척 딴전을 피울 뿐이다. 그도 그럴 일이었다. 그럴 일인 것이 궐자가 몰락한 까닭이 천재지변 때문도 아니요 관의 수탈 때문도 아닌 것을 번연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못돼먹은 성정머리로 마누라를 치고 패며 들볶다가 마누라가 떠나버리자 허구헌 날 어린 자식을 두들겨 패는 짐승만도 못한 짓거리가 곱지 않을 것은 빤한 일이다. 더군다나 여인은 남정네와는 달리 마음에 늘 자식에 대한 잔정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아비가 자식들의 장래를 걱정할 때 어미는 자식들의 건강을 염려한다. 아비가 자식들을 사람답게 키우려고 노심초사할 때 어미는 자식들이 춥지 않을까 덥지 않을까 애를 쓴다. 어쩌다가 자식이 실수를 하여 아비에게 치도곤을 맞거나 했을 때 어미는 부엌구석이나 담 모퉁이에 치마폭에 자식을 감싸고 서서 자식이 안쓰러운 나머지 눈 꼬리를 훔쳐내며 남편을 원망하는 것이 또한 어미의 마음생김새다. 하물며 아내를 구타하고 자식을 두들겨 패는 위인이면 아낙들의 눈에는 그것이 사람으로 비칠 리가 없었다. 짐승잡귀보다 더 징그러운 존재인 것이다. 더구나 아내가 박수에게 몸을 팔아 구해다 준 몸값을 허릴 없이 투전판에서 몽땅 날리고 작금에 살림이 눈뜨고는 볼 수없는 지경에 이른 궐자를 받자할 아낙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터였다.
허나 곁에 똥을 두고는 먹어도 사람 두고는 못 먹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차마 먹을거리를 두고 야박할 수는 없는 아낙이었던지 처먹고 죽으라는 심사로 부침이 에 돼지고기 등속을 듬뿍 쥐어 접에 올려주었다. 헌데 먹을거리를 얻은 나실 아비가 막 돌아서는 찰라 쇳소리가 터졌다.
“저놈의 인사가 뒈지지도 못하고 아까운 음식만 축내는 가벼, 엠병을 헐-”
잔치에 쓸 음식을 총괄하기로 하고 부엌의 사정을 눈어림으로 헤아리던 절구통 같은 그 아낙은 잽싸게 달려오더니 나실 아비 가슴팍을 내질러버렸다. 일이 그리되자 나실 아비는 어김없이 땅에 나가 떨어졌고 들고 있던 접시와 음식들은 저만치 나뒹굴고 말았다. 아낙에게 밀려 쓰러져 한동안 눈만 껌벅거리는 나실아비가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땅에 쏟아진 음식들을 비실비실 주워 접시에 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아낙의 두 번째 쇳소리가 터졌다
“절로 찢어진 입이라고 음식은 들어가던가 보네. 엠병을 헐”
아낙은 음식을 줍는 나실 아비를 재차 밀쳐버리고 쏟아진 음식들을 발로 싹싹 비벼버렸다. 일이 그쯤 되자 나실 아비도 몸에 남아있는 마지막용을 쓰며 아낙에게 덤벼들었다. 덤벼드는 서슬에 아낙의 멱살을 움키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허나 허사였다.
“이놈의 인사가-”
한 소리 내지르며 아낙은 내미는 나실 아비 손가락을 꺾어 쥐더니
“이것이 어딜 덤비는겨 시방. 지 여편네한테 하던 짓거리를 누구헌티 하자는 행오여.”
남편의 바람기에 평생을 시달리며 살아온 그 아낙은 좀처럼 엉켜 떨어지지 않는 자신의 운명을 떼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나실 아비의 샅을 움켜쥐고 훑어버렸다.
“헉-”
나실 아비는 거품을 물고 거꾸러지는 서슬에 닿는 대로 아낙의 어깨 죽지를 물고 늘어졌다.
“오메, 이것이 살쾡이 능신이랑가? 사람을 물고 지랄이여.”
아낙이 소리를 내지르며 나실 아비를 밀쳐 내려했지만 그것이 그렇게 만만하질 않았다. 비록 거푸집 같은 사내였지만 그도 일약 투전판을 기웃거리던 사내였다. 죽을힘을 다해 밀쳐 내려는 아낙의 허리통을 껴안고 버팅기자 떼어내기가 쉽지 못한 사정인 것이다. 주먹을 불끈 쥔 아낙이 나실 아비의 등짝을 후려치며 소리소리 질러본다지만 날 잡아 먹으라는 심산이 되어 눈 질끈 감은 나실 아비를 쉽사리 떼어낼 수 없자 당황한 아낙은 후우적거리며 악을 쓸 뿐이었다. 잔치마당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참담한 꼴을 처음 당하는 사람들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누구를 말려야하고 누구를 떼어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아 전전긍긍하는 동안 엉킨 두 몸뚱이가 무너지듯 땅으로 내려 앉았다.
“저런, 저런?”
모두가 경악을 하고 있는 그때였다. 잔치판 돌아가는 형편을 곁눈으로 살피던 남사당 꼭두쇠가 부스스 일어나 엉켜 쓰러진 남녀에게 다가가더니 나실 아비의 목덜미를 뒤에서 움켜쥐고는 귀밑 턱뼈를 지그시 누르자 신기하게도 악물었던 나실 아비의 턱이 힘없이 열리고 두 몸뚱이가 따로따로 떨어졌다.
엉켰던 두 몸뚱이가 떨어지자 나실 아비는 기진맥진하여 땅바닥에 누운 채 숨만 헐떡거리고 아낙은 아낙대로 물린 자리를 감싸고는 부엌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렇게 한 차례 드잡이가 끝나고도 잔치는 계속되었지만 제대로 흥이 날 리가 없었다. 하나 둘 자리를 털고 일어서 버렸다. 일이 그렇게 풀리자 어정쩡해진 잔치집은 훵하니 냉기가 돌았다. 그러자 눈치 빠른 꼭두쇠가 동패들에게 뒷수습을 이른 뒤에
“생원어른 저희들은 판을 이만 거두어야 겄구먼요.”
주인에게 허락을 청했다.
“그려? 그러시겄네. 아직 두어 참은 더 놀 판이디. 섭허구먼.”
주인으로서도 잔치를 계속할 마음이 사그라졌는지 그리하라 하고는 행하를 챙겨주며
“거, 가는 길에 저 궐자나 집에 데려다 주시게.”
나실 아비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예 그리합지요.”
허나 남사당이 나실 아비를 수습하여 집으로 데려갔을 때는 나실아비는 이미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모질게 이어오던 천박한 목숨이 거기서 곧 끈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던 것이고 사정을 짐작한 꼭두쇠는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나실 아비에게 몸값으로 좁쌀 두말을 적선하듯 던져주고 나실을 거두었다. 그런 뒤 여자를 둘 수 없는 남사당은 남장을 시켜 패거리로 삼았던 것이다.
바람같은 시절이었다. 정해진 길이 없는 바람은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까지 불어야한다는 까닭이 없었다. 불다가 지치면 스스로 잦아들어 소리 없이 소멸되는 바람이었고 이와 같은 인생들이 모인 남사당이었지만 그들의 세월도 어김없어서인지 나실의 나이 이미 열여덟이었다. 작년 재작년부터 제법 몸꼴이 잡혔고 이를 지켜보는 패거리들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한다고 느끼는 꼭두쇠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꽃을 꺾어주는 것은 꼭두쇠의 몫인 것이다. 그것이 남사당의 불문율이었다. 어느 날 꼭두쇠는 그들만의 법대로 나실의 봉오리를 꺾어주었다. 그리고 먼저 욕심을 채운 꼭두쇠는 사내들에게 나실을 내주었고 사내들은 서열을 따라 돌아가면서 나실의 몸에 입질을 해댔다. 그 짓거리가 남사당패거리들에게는 반연한 일상이었을 테지만 당하는 나실로서는 차마 못 견딜 노릇이었다. 여자가 품은 정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이 순정이요 참이다. 한 여자 몸으로 태어나 성장하면 한 남정네를 만나 은애하고 아끼며 자식을 낳아 오순도순 살아가는 팔자를 꿈꾸어보지 않았을 리 없는 나실이었다. 그것이 순명이기도 하고 여자의 참살이라고 믿고 있는 나실이었지만 지금의 처지는 생불여사였다. 남사당을 따라다니며 살아온 나실로서는 남사당을 떠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 고창의 신씨댁 잔치가 옴팡지게 벌어졌고 패거리들이 그곳에서 주린 창자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은 좋았으나 나실의 몸에 탈이 붙은 것이다. 꼭두쇠는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었다. 가엾어서 거두어주고는 있었지만 언제 사단이 붙을지 모르는 사정이었고 그 사단이라는 것이 일어나고 보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짐작을 못할 리 없는 꼭두쇠로서는 나실을 슬그머니 그곳에 떼어버리고 떠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