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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여벌(吳汝橃)
[본관] 고창(高敞)
[문과] 선조(宣祖) 36년(160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2[榜眼]위(02/33
[진사] 선조(宣祖) 34년(1601) 신축(辛丑) 식년시(式年試) (進士) 2등(二等) 8위(13/100)
[생원] 선조(宣祖) 34년(1601) 신축(辛丑) 식년시(式年試) (生員) 2등(二等) 11위(16/100)
[생졸년] 1579년(선조 12)~1635년(인조 13) / 향년 56세
[거주지] 영천(榮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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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조 학사집(鶴沙集)
통훈대부 행 홍문관 교리 남악 오공 묘갈명병서
(通訓大夫行弘文館校理南嶽吳公墓碣銘幷序)
오씨(吳氏)가 고창(高敞)에 씨족을 형성한 지 오래되었으나, 한림학사 휘(諱) 학린(學麟)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드러났다. 이때부터 대대로 훌륭한 인물이 나타났다. 고조부 휘(諱) 석복(碩福)은 의령 현감으로 좌통례에 증직되었고, 증조 휘(諱) 언의(彦毅)는 전의 현감으로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조부 휘(諱) 수정(守貞)은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부친 휘(諱) 운(澐)은 통정대부 경주 부윤이다. 모친 정부인(貞夫人) 김해 허씨(金海許氏)는 생원 휘(諱) 사렴(士廉)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기묘년(己卯年, 1579, 선조 12)에 의령(宜寧)가례리(嘉禮里)집에서 공을 낳았다.
휘가 여벌(汝橃)이고, 자가 경허(景虛), 자호가 남악(南嶽)이다. 태어나면서 영특하여 6세에 글을 읽을 줄 알았다. 9세에 출계하여 백부(伯父) 제용감 정(濟用監正) 휘(諱) 진(溍)의 뒤를 이었다. 어머니는 숙인 상주 주씨로 제원 찰방(濟源察訪) 휘(諱) 세란(世鸞)의 따님이다.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 25)에 부윤공이 왜란을 피해 영천(榮川, 영주)으로 이거하였다. 영천은 본디 문학하는 선비들이 많아서 공은 실로뛰어났다. 신축년(辛丑年, 1601, 선조 34)에 생원 진사 모두 합격하였고, 계묘년(癸卯年, 1603, 선조 36)에 문과 갑과에 올랐다.
의례대로 종부시 직장에 제수되었다가 정언으로 천직하였다. 이때 양사(兩司)에서 상국(相國) 윤승훈(尹承勳)이 의론하여 존호(尊號)를 그만둘 것을 청한 것은 그릇되었다고 여기고서 체차시킬 것을 논계(論啓)하고서야 그만두었다. 옥당에서도 비로소 정계(停啓)를 배척하였고 끝내 출사(出仕)를 청하였다.
공은 그들의회호(回互)함을 미워하여 장차 신료들의 의견이 모순됨을 논의하려고 하였다. 공이 좌석(坐席)에 짜 놓은 ‘공명 정직(公明正直)’의 글자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글자에 부끄럽지 않으시오?”라고 하자 여러 신료들이 얼굴이 붉어졌다.
공은 마침내 인피(引避)하여 옥당을 배척하였고, 선묘(宣廟)가 가납하였다. 대사간(大司諫) 박이장(朴而章)이 공을 논박하여 몰래 윤승훈을 위한 입장에 있다고 말하였다. 성상(聖上)이 비답(批答)하기를, “오여벌(吳汝橃)은 새로 진출한 시골 유생으로 홀로 나서 감히 말을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근래에 없었던 일이다.
그런데도 도리어 배격하니 너무나 바르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박이장은 체직되었고 공도 스스로 편치 못해서 거듭 인피(引避)하여 정고(呈告)하고서 향리(鄕里)로 돌아왔다. 이에 공의 강직함이 안팎으로 알려져서 군소(群小)들의 시기가 더욱 심하여 공을 수성도 찰방(輸城道察訪)에 의망(擬望)하려 하였다.
임금이 늙으신 부모님이 있는지를 묻고서 마침내 낙점하지 않고 전적(典籍) 겸 기사관(記事官)에 제수하였다. 병오년(丙午年, 1606, 선조 39)에 병조 좌랑 겸 지제교에 제수되었다. 이때부터 많은 제수가 있으나 모두 겸대(兼帶)였다. 무신년(戊申年, 1608, 선조 41)에 울산 판관에 제수되었다가 경술년(庚戌年, 1610, 광해 2)에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되어 예조 좌랑이 되었다.
신해년(辛亥年, 1611, 광해 3)에 호남의 좌막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영천 군수(永川郡守)에 옮겨 제수되었다. 을묘년(乙卯年, 1615, 선조 43)에 역모를 했다는 무고가 있어 공이 붙잡아 갔다가 곧장 석방되었다. 병진년(丙辰年, 1616, 광해 8)에 진휼 종사관으로서 본도(本道)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진휼하고 구휼하였다.
조정에 들어가서 시강원문학과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교리로 승차되었다. 정사년(丁巳年, 1617, 광해 9)에 부친상을 당해 기미년(己未年, 1619, 광해 11)에 복을 마쳤으며 문학에 되었으나 편양(便養: 부모를 펀하게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청하는 일)을 위해서 대구 부사가 되었다가 청송 부사로 옮겼다.
경신년(庚申年, 1620, 광해 12)에 모친상을 당하여 임술년(壬戌年, 1622, 광해 14)에 복을 마쳤다.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1) 이후로 수성도 찰방ㆍ연일 현감ㆍ좌통례ㆍ창원 부사에 연달아 제수되었다. 을축년(乙丑年, 1625, 인조 3)에 병에 걸려 관에서 운명하였다. 이해 10월에 군 남쪽 10리쯤 산이리(山伊里)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 공은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였고, 겨우 성동(成童)이었으나 후사(後嗣)한 부모에게 성인처럼 복응하였다. 큰 병란을 당해 떠돌이생활을 하는 중에서도 직접 신주를 받들어 가는 곳마다 통곡하였다. 일찍이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여종에게 음악을 가르쳤으나, 부모가 죽자 그만두고 시키지 않았다.
백씨(伯氏)가 멀리 변방에 떨어져 있음을 한스러워 하다가 백씨에 대한 언급이 있으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한 아우의 궁핍함을 불쌍히 여겨 비축해둔 곡식을 다 털어내어 두루 구휼하였다. 임금을 사랑함이 혈성(血誠)에서 나왔으며 국상(國喪)에 졸곡 전에는 어류와 육류를 섭취하지 않았다.
혼조(昏朝: 광해군)에 힘쓰지 않고 두문불출하고 자신의 분수를 지키니 시배(時輩)들이 꺼려하였으나 끝내 양사(兩司)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반정 뒤에는 공론이 확장되어 천거하여 제수함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의 명철함에 탄복하였다. 백성을 다스림에 더욱 잘하여 울산(蔚山)ㆍ연일(延日)ㆍ창원(昌原)에 모두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무릇 공의 재주와 공의 덕으로 먼 길을 떠나는 밝으신 임금의 지우를 입었으나 군소배에게 미움을 받아 끝내 잘못되어 곤궁해졌으니 애석하도다. 공이 일찍이 서애 유 선생에게 찾아뵈니 선생이 예모를 갖추어 그를 대하고서 작별함에 고인(古人)이 매화를 읊은“성긴 꽃송이로 가벼이 눈과 다투지 말고, 맑고 고움을 밝은 달빛 속에 고이 간직하라.〔莫把疎英輕鬪雪, 好藏淸艷月明中.〕”라는 시구를 들어 작별의 말로 주었는데, 대개 고아한 지조가 세상과 어울리기 힘듦을 염려해서이다.
아! 끝내 유선생의 말로 징험이 있게 하였으니 운명인가 보다. 판서(判書)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이 공을 제사하는 글에, “도덕이 성대하고 언론이 올바르다.〔道德之盛, 言論之正.〕” 하였으니 사류(士類)들에게 중망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부인은 숙인 의성 김씨로 학봉 선생의 후손이고 세마 휘(諱) 집(潗)의 따님이다. 타고난 품성이 현숙하며 법문에서 태어나 덕이 순수하고 행실이 올바르며 노복들을 대함에 은혜로웠고 규범(閨範)이 매우 올발랐다. 공보다 15년 뒤(1650, 효종 1)에 운명하여 공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아들이 없어서 공의 백씨(伯氏)의 둘째 아들 진사(進士) 익황(益熀)을 후손으로 삼았는데, 안동 권씨 대사간(大司諫) 태일(泰一)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다. 덕기(德基)는 딸 하나를 낳았는데, 사인 김수창(金壽昌)에게 출가하였고 아들 셋은 어리다.
경기(慶基)는 생원이고 재주와 학문이 있어 조석으로 진보하였으며, 2남 2녀를 낳았으나 어리다. 측실 소생의 아들 익문(益炆)과 사위 정익주(鄭益周)는 모두 자녀가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태평성대의 운세를 맞아 / 際會昌辰
직간으로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였네 / 其直足以寒奸諛之骨
혼탁한 세상에서 주선하며 / 周旋濁世
침묵으로 열렬한 자기 뜻을 온전히 할 수 있었네 / 其默足以全其志之烈
맑은 조정 만났으나 끝내 벼슬이 현달하지 못했고 / 卒之遇淸朝而仕未顯
재주를 펼치지 못했는데 갑자기 목숨을 재촉하니 / 才不售而壽遽促
조물주에게 물으려 해도 방법이 없구나 / 無由問於命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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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만력(萬曆):
원문에는 정덕(正德)으로 되어 있으나 오여벌(吳汝橃)의 문집인《경암집(敬菴集)》에 실려져 있는 김응조의 묘갈명에는 만력으로
되어 있고, 그 외 가장, 행장 등에도 모두 만력으로 되어 있어, 만력으로 바꾸어 번역하였다.
[주02] 가례리(嘉禮里):
원문에는 주례리(住禮里)로 되어 있으나 오여벌(吳汝橃)의 문집인《경암집(敬菴集)》에 실려져 있는 김응조의 묘갈명에는 가례리
로 되어 있고, 가장에도 가례리로 되어 있어 가례리로 바꾸어 번역하였다.
[주03] 뛰어났다:
교초(翹楚)는 뛰어난 인재를 의미한다.《시경》〈주남(周南) 한광(漢廣)〉에 “쑥쑥 뻗은 잡목 속에, 그 가시나무를 베리라.[翹翹錯
薪, 言刈其楚.]”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04] 회호(回互):
잘못을 거짓으로 꾸미거나 변호하는 것을 말한다.
[주05] 대사간(大司諫) …… 못하다:
《선조실록》선조 37년 12월 11일(병진)조에, “삼가 살피건대 오여벌(吳汝橃)이 한 말은 깊이 따질 것도 없습니다만, 오여벌이 늘
어놓은 사설은 윤승훈(尹承勳)을 위해 겉으로는 물리치는 체 하면서 암암리에 감싸주는 내용으로 엄폐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
다.……”라고 함에, 비답하기를, “자신이 스스로 반성은 하지 않고 또 와서 쟁변(爭辨)을 하니 그대가 잘못이다.
……오여벌은 새로 진출한 시골 유생인데도 홀로 나서서 감히 말을 하였으니 이는 실로 근래에 없었던 일이다. 그런데도 도리어 배격
을 하니 너무나 바르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주06] 성긴 …… 간직하라〔莫把疎英輕鬪雪, 好藏淸艷月明中.〕:
이 시구는 처신을 경계한 내용으로, 송나라의 양시(楊時)가 저궁(渚宮)에서 매화를 보면서 호안국(胡安國)에게 지어 보낸 시의 마
지막 두 구이다. 양시의 문집인《구산집(龜山集)》권42에〈저궁관매기강후(渚宮觀梅寄康侯)〉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황만기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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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通訓大夫行弘文館校理南嶽吳公墓碣銘 幷序。
吳之氏於高敞。尙矣。至翰林學士諱學麟。始大著。自是以後。世有聞人。高祖諱碩福。宜寧縣監贈左通禮。曾祖諱彥毅。全義縣監贈左承旨。祖諱守貞。贈吏曹參判。考諱澐。通政慶州府尹。妣貞夫人金海許氏。生員諱士廉之女。以正德己卯。生公于宜寧住禮里第。諱汝橃。字景虛。自號南嶽。生而穎邁。六歲。知讀書。九歲。出繼伯父濟用副正諱溍後。妣淑人尙州周氏。濟原察訪諱世鸞之女。壬辰。府尹公避南亂。移居榮川。榮素多文學之士。公實翹楚焉。辛丑。俱中生員進士。癸卯。登文甲科。例授宗簿直長。遷正言。時兩司以尹相承勳議停尊號之請爲非。而論啓遞差乃止。玉堂始斥停啓。終請出仕。公惡其回互。將論之僚議矛盾。公指坐席所織公明正直字曰。得無愧此乎。諸僚騂然。公遂引避。因斥玉堂。宣廟嘉納。大司諫朴而章駁公以爲陰爲承勳地。聖批有曰。吳汝橃。以新進鄕生。獨立敢言。此誠近日所未有。反爲排擊。不正甚矣。朴旣遞。公亦不自安。再引避。仍呈告歸鄕里。於是公直聲動中外。而群猜益甚。擬公輸城。上問有老親否。遂不點。授典籍兼記事官。丙午。佐郞兵曹。兼知製敎。自是凡有除拜。皆兼帶。戊申。拜蔚山判官。庚戌。瓜遞。爲禮曹佐郞。辛亥。佐湖南幕。未赴。移授永川郡守。乙卯。有誣告逆獄。公被拿旋宥。丙辰。以賑恤從事官。巡歷本道。賑救畢。入爲侍講院文學。弘文館修撰。陞校理。丁巳。丁外艱。己未。服闋。爲文學。爲便養得大丘。移靑松。庚申。遭內艱。壬戌服闋。癸亥以後。連除輸城,延日,左通禮昌原府使。乙亥。遘疾卒于官。是年十月。葬郡南十里許山伊里艮坐之原。嗚呼。公事親盡其孝。纔成童。持所後父母服如成人。當大亂流離中。親奉神主。隨處號哭。嘗爲悅親。敎婢子樂。親沒廢不御。恨伯氏遠隔塞外。語及必流涕。憐一弟窮乏。傾儲周恤焉。愛君出於血誠。國恤 卒哭之前。不啖魚肉。僶勉昏朝。杜門自守。時輩忌之。終不許兩司。反正後。公論恢張。而荐有除拜。人服其明哲。尤長於治民。蔚山,延日,昌原。皆有去思碑。夫以公之才之德。發軔脩途。受知明主。而慍于群小。卒以齟齬窮。惜哉。公嘗拜西厓柳先生。先生禮貌之。臨別。擧古人詠梅詩莫把疏英輕鬪雪。好藏淸艶月明中之句。以當贈言。蓋慮其雅操難諧於世。嗚呼。卒使先生之言有驗。則天也。東溟金判書世濂。祭公文有曰。道德之盛。言論之正。其見重於士類如此。配淑人義城金氏。鶴峯先生之孫。洗馬諱潗之女。稟淑質生法門。德純而行備。待妾媵有恩。閨範甚正。後公十五年卒。合窆于公之墓。無子。以公伯氏第二子進士益熀後。娶安東權氏大司諫泰一之女。生二男。曰德基。生一女。適士人金壽昌。三男幼。曰慶基。生員。有才學。朝夕且升。生二男二女。幼。側室子益炆。壻鄭益周。皆有子女。銘曰。
際會昌辰。其直足以寒奸諛之骨。周旋濁世。其默足以全其志之烈。卒之遇淸朝而仕未顯。才不售而壽遽促。無由問於命物。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