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대남(余大男)은
아버지 여천갑(余川甲)의 아들로서 백제왕손 의령여씨(宜寧余氏) 21세손이며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박달리 출신이다,
남전생옥(藍田生玉): 남전에서 옥이 난다는 뜻으로, 명문(名門)에서 뛰어난 젊은이가 나옴을 칭찬(稱讚)하는 말이다. 오늘날 후손들이 위대한 조상의 업적을 받들어 선인들의 숭배정신 중요성을 알리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2003. 2월 KBS 역사스페설에 “임진왜란추적 특집 다큐멘터리”로 큐슈(九州) 구마모토현에 500여년의 역사를 지닌 혼묘지(本妙寺) 3대 주지인 여대남과 조선에 있는 아버지 간에 오고간 피맺힌 사연이 담긴 3통의 편지내용이 400여년 만에 밝혀져 방영되었고 2009,7.17 KBS “잊어버린 왕손을 찾아서” 역사스페설에서도 방영 등 비운의 역사 인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여대남은 생이별 28년만에 조선통신사 통해 기별 환국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좌절돼고 세 통의 편지만 혼묘지(本妙寺)에 소장돼 있어 그 안타까움을 더해 주고 있다,
사연은 이렇다
여대남(余大男 1580년 -1659 12월 16일)은 조선 출신 일본의 승려이다. 별칭은 일요(日遙) 스님, 일요상인(日遙上人), 고려일요(高麗日遙), 고려상인(高麗上人).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출신이다,.
여대남은 경남 하동군 양보면 박달리 쌍계동 골짜기 보현암(普賢菴)에서 글 공부를 하던 중 1593년 6월 29일(416년전) 진주성이 왜군에 함락 당하고, 살륙이 한참 벌어지고 있을 때 13세 소년인 여대남은 일본의 장군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 다카하시(高橋三九)에 의해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다카하시에 의해 왜장 가토 앞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어린 여대남은 그때 종이와 붓을 달라 해서 중국 당(唐)조의 시인 두목(杜牧)의 산행시 獨山寒山石經斜 (춥고높은 산에 돌길이 비스듬이 있고) 白雲深處有人家 (흰구름있는 곳에 인가가 있네)를 써서 가토에게 바치자 한문과 한시 실력을 인정받고 가토 기요마사가 그를 보고 이 아이는 범상한 아이가 아니다하여 풀어준 뒤 자기 곁에 두고 보살폈다. 그뒤 고향으로 보내줄 것을 가토에게 청 하였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고 일련종(日連宗)의 신도 였다는 그 영향력으로 출가 하여 일진(日眞) 스님의 제자로 출가 하게 된다,
그뒤 일진스님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서 제일가는 불교학당인 교토(京都)의 육조강원(六條講院)에서 수학을 하게 된다. 여대남은 그후 규엔지(久遠寺) 호린지(法輪寺)등에서도 수학하고 일요 (日遙)상인이란 호칭을 받는다,
29세인 1609년에 혼묘지(本妙寺)의 제3대 주지(主持)가 되었는데 이절은 구마모토(熊本)의 중심 사찰이요 2대주지는 여대남을 출가시킨 일진(日眞)스님의 제자 일요(日遙) 스님이었다 부친의 편지를 받아본 여대남은 한때 신변을 정리 하고 귀국하려 가토 기요마사의 아들 가토 다다히로(忠廣)에게 석방을 간청해 보았지만 거절 당하고 편지 왕래조차 통제 되었다,
다음은 여대남(余大男) 부자가 주고받은 편지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본다.
본묘사3대주지 여대남(余大男)의 묘앞
일요상인 (여대남)님의 초상화
이 편지는 임란(壬亂)때의 분위기와 余大男의 처지(신상)를 밝혀내는 결정적 단서라 할 수 있다. 부친(余天甲)이 아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내용을 아래와 같이 간추려 내놓는다.
지난 정미년(丁未年)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갔을 때 길에서 너를 만난 일이 있다며 그 사람이 돌아와 내게 알려주는 바람에 네가 ‘교토(京都)’ ‘오산(五山)’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느니라. 너의 어미와 나는 통곡하며 남들은 잘도 도망쳐 나오는데 어찌하여 ‘대남(大男)’이는 돌아오질 못하는지 답답하다. 편지를 보내려 해도 전할 길이 없었다.
작년 가을 너의 친구 ‘하종남(河終南)’이 일본에서 돌아와 나에게 알리기를 네가 지금은 승려의 몸이라는 걸 전해주었다. 그리고 네가 ‘교토(京都)’에서 ‘히고국(肥後國)’ ‘혼묘지(本妙寺)’로 이동, 일요상인(日遙上人) 또는 김법사(金法師) ‘학연(學淵)’으로 행세한다고 전하더라.
그렇다면 그곳 생활에 부족함이 없어서 돌아오지 않는 것이냐? 아니면 중이 되어 편하기 때문이냐? 〈중략〉네 나이 이제 40이고 학문도 하였다하니 부모를 봉양해야 할 도리쯤은 알고 있을 터인즉, 돌아와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느냐? 고향땅에서 노비를 부리며 가업을 계승하는 것도 뜻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대장군(大將軍)과 대사(大師)에게 귀국할 뜻을 간곡히 말씀 드려 무사히 돌아와 부모와 한 집에 산다면 이 보다 더 큰 보람이 어디 있겠느냐? 부모의 소원은 이것뿐이니라.
庚申(1620) 五月 初七日〉
〈余大男의 답서〉
〈부모님을 향해 백번 요배(遙拜)하고 답서를 올리나이다. 천만 뜻밖에 하서를 받자와 부모님이 강녕하심을 알고 밤잠을 설쳤습니다. 하서(下書)를 읽다 보니 눈물이 앞을 가릴 따름입니다.
아들 호인(好仁-余大男의 아명)은 선조들의 쌓은 적선(積善)과 아버님 슬하에서 글을 배운 덕분에 붙잡혀 가던 날 시퍼런 칼날 앞에서 두려워 않고 〈독상한산석경사, 백운생처유인가(獨上寒山石逕斜. 白雲生處有人家)〉라는 2구(二句)를 써서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가토장군(淸正)’ 왈〈이 아이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라며 옆에 두고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 후 머리를 깎고 중이 되라는 명(命)을 받고 그때부터 법화묘경(法華妙經)을 28년간 읽으며 손을 씻고 향을 피우고 아침에는 해님을 향해 저녁에는 부처님께 빌었습니다. 그러던 중 뜻밖에 아버님 편지를 받자옵고 그간 올린 기도가 헛되지 않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부모님을 뵙고 쌓인 회포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된다면 당장 죽는다 해도 후회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형벌이 엄한 왜국(倭國)땅에선 도망친다는 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엎드려 비옵건데 어머님, 아버님 3~4년간 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아버님 편지를 장군님과 태수님께 보여드리고 간절히 읍소(泣訴)하면 그들도 부모를 모시는 몸이라 풀어 주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해서 귀국할 수 있다면 두 분은 잃었던 자식을 얻는 일이요, 저로서는 잃었던 부모님과 만나게 되는 길입니다. 이제부터 저는 아버님 편지를 받들어 모시겠사오니 두 분께서도 이 자식 편지를 자식 본 듯이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헌데, 어찌해서 할아버지 안부와 수방(邃方) 스승님 생사를 알려주지 않으셨는지요?
꿈에서조차 잊을 수 없는 분들입니다. 또, 하동관속(河東官屬)과 벗 하종남(河終南) 두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드릴 말씀 끝이 없으나 매인 몸이라 이만 줄이옵니다.
庚申(1620)年 十月 初三日
〈미자(迷子) 余好仁 ‘웅본(熊本)’ ‘혼묘지(本妙寺)’에서 올립니다. 〈追白〉
보내주신 편지는 9月 그믐께 받았습니다. 이곳엔 친구가 없으나 居昌 이희윤(李希尹), 普州 정 적, 密陽 변사순(卞斯循), 山陰 홍운해(洪雲海), 扶安 김여영(金汝英), 光陽의 이 거 등 5~6명과는 자주 만나 고국 이야기를 나누며 향수를 달랠 뿐입니다.
아버님, 불효자식은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왜인들은 매(鷹)를 소중한 영물(靈物)로 여기고 있으니 인편이 닿는대로 매 두 마리만 보내 주시면 대마도주(對馬島主)와 ‘히고태수(肥後太守)’에게 한 마리씩 바치고 석방을 도모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다.
余天甲이 다시 아들에게
〈전년 6월, 왜인에게 답장을 전한 바 있고 그 이전에도 부산을 왕래하는 왜인에게 편지를 전했지만 답장을 받지 못해 밤낮으로 목 놓아 울었느니라. 〈중략〉생이별 후 28년 만에 너의 편지를 받고 세 번, 네 번 읽다보니 네 얼굴과 음성을 대하는 듯 슬픔과 기쁨이 엇갈리는 걸 억제할 길이 없구나.
(그런데 아들 大男아!) 아비 나이 이제 60이요, 네 어미도 65세가 되었으니
앞으로 살면 얼마를 더 살겠느냐? 밤이면 밤마다 향을 피워놓고 너를 위해 하느님께 빌었더니 그것이 헛되지 않았구나! 이제 원하는 것은 너를 만나보고 죽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너의 편지에 매(鷹) 두 마리를 보내 주면 대마도주(對馬島主)와 ‘히고국왕(肥後國王)’께 진상, 풀려나기를 도모하겠다고 했는데 난들 왜 네 뜻을 모르겠느냐? 하지만 매(鷹)는 개인이 거래할 수 없도록 국법으로 정해놓아 어찌할 수가 없구나. 그러니 답답할 뿐이다. 壬戌年(1622년) 七月 初八日 父 余天甲은 이 편지를 아들에게 전하노라.〉
피맺힌 사연의 편지 3통
余大男 부자의 이별은 66년 편지를 나눈 것은 딱 세 번뿐인데 余天甲이 아들에게 2회, 아들 大男의 답신은 단 한 번이었다. 첫 번째 아들에게 띄운 편지는 〈조선통신사〉로 갔던 역관한테 소식을 듣고 반가움에 곧장 서신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아버지는 첫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대장군께 잘 말씀드려 귀국해서 부모와 편안하게 살아보자는 내용이었다.
그 다음은 아들 余大男이 부친에게 보낸 답신내용이다.
〈전략>
하루도 부모님을 잊은 일이 없었다며 집안어른, 스승, 친구들의 안부를 묻고 나서 말미에 다음과 같은 부탁을 곁들이고 있다. 왜인들은 매(鷹)를 귀한 동물로 여기고 있어 인편이 닿으면 매 두 마리만 보내주시면 대마도 도주(島主)와 이곳 태수(太守)에게 바치고 매달려 볼 요령이라 적고 있다.
그들도 부모를 모시는 인간인지라 들어줄 것이라며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다. 하지만 부친 余天甲은 두 번째 편지에서 그럴 수 없다고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반 백성들은 매를 거래할 수 없도록 국법으로 정해놓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걸 딱 부러지게 밝히고 있다. 이는 余天甲이 선비다운 기질을 잘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13세 소년이 왜군에 잡혀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79세에 몰(沒)하니 66년의 한(恨)을 우리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들 부자가 주고받은 세통의 편지는 1급 문화재에 속하는 것으로 정작 〈여씨〉문중에는 한통도 남아 있질 않고 ‘혼묘지(本妙寺)’에 그 원본이 소장되어 있을 뿐이다.
* 고려일요(高麗日遙)로 까지 추앙을 받은 일요스님 여대남!
79세에 한많은 생을 마감하여 묘비는그렇게 가고 싶던 조국을 향하고 있다. 본묘사 절은 임진왜란당시 왜군의 선봉 장수 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凊正)의 개인사찰로 전해지고 있으며 구마모토성 옆에 있다.
♣ 이자료는 KBS 역사스페설에 “임진왜란추적 특집 다큐멘터리“잊어버린 왕손을 찾아서”역사스페설 방영 내용과 조선왕조역사. 계룡장학회 해외학술탐사팀이 발굴한 편지내용을 편집 한 것이다.♣
◆ 色あざやかな清正を祀る浄池廟(じょうちびょう)
◆ 本妙寺の裏の中尾山八合目に建つ加藤清正像
◆ 浄池廟の門(この奥に清正を祀る浄池廟がある
◆ 石燈篭が所せましと並ぶ参道
혼묘지(本妙寺)
*글 宜寧余氏32世孫 남해종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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