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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祖 | 曾祖 | 祖 | 父 |
찬우 | 순인 | 경(褧) | 이주 |
자(字) 정이(靜而)
선조(宣祖) 1580년 생원(生員) 급제
관력(官歷) :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
효행(孝行) : 부모 장례시 예를 넘어 슬퍼하였다.
별세(別世) : 1585년 27세로 별세
증직(贈職) : 좌찬성(左贊成)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
배위(配位) : 강릉김씨(江陵金氏) 사예(士藝) 사섬(士銛) 녀(女)
묘소(墓所) : 형님 사호(賜湖) 묘 뒤 유좌(酉坐) 합조(合兆)
묘지명(墓誌銘) :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찬(撰)
신도비명(神道碑銘) : 명(明) 어사(御使) 손원화(孫元化) 찬(撰)
ㆍ子 두원(斗源) 見下
[묘지명]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정명호(鄭明湖 )의 묘지명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찬
을유년 봄에 내가 이조랑(吏曹郞)으로 있으면서 인사 행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한 여노(女奴)가 와서 그 주부(主婦)의 명을 전해 왔는데, 그 주부의 말에, “윤자(胤子) 아무가 평상시에 모든 하는 일이 있을 적에는 반드시 ‘이모(李某)가 무어라고 할지 물어봐야겠다.’ 하고는, 한 마디 가부(可否)를 얻을 때마다 이를 굳게 지켜 엄숙한 자세로 시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불행히 부친상을 당하여 근심 속에 있는데, 삼년상을 1개월쯤 남겨둔 이때에 예에 지나치게 슬퍼한 관계로 몸이 파리해져서 병이 날로 깊어져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망인(未亡人)이 삼가 초목의 맛있는 음식을 먹이려고 해도 안 된다고 굳이 거절합니다. 그러니 만일 하늘의 영험을 힘입어 이 홀어미 집에 뜻밖의 복이 내려진다면, 군자의 말씀 한 마디로 거의 스스로 깨닫게 할 수 있을 듯합니다.”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들은 즉시 달려가 문병을 하고 포수(脯脩)의 중동을 구부려서 왼쪽에 놓고는 온갖 방도로 자세하게 비유하여 그를 달래보았다. 그런데도 그는 마음을 돌리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대명(大命)이 이미 다하여 수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지금은 예를 따르건 어기건 간에 죽는 것은 똑같을 뿐입니다.”하므로, 나는 차마 여기에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 문을 나와 버렸는데, 그로부터 6일 뒤에 그 집 노인이 부고(訃告)를 전해 왔으니, 이 때 나이 27세였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사람이 앞일을 미리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어찌 그리도 신기하단 말인가?” 고 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16년 뒤에 친구를 만나서 그 일을 말했더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 장부(丈夫)는 문사(文思)에만 물처럼 솟아나는 뛰어난 재주를 지녔을 뿐 아니라,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의약(醫藥) 등 여러 가지 기예(技藝)도 정묘(精妙)하지 않은 것이 없거니와, 음양가(陰陽家)의 술수에는 더욱 조예가 깊었습니다.
일찍이 괴원(槐院)에 있을 적에 내가 동료들을 죽 열거하여 운명을 물으니, 근심스러운 기색으로 말하기를, ‘모두가 원대한 그릇이 아니다. 임군(任君)은 앞으로 1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고, 이군(李君)은 좋게만 죽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리고 오직 윤군(尹君)은 겨우 정옥(頂玉)을 달게 될 것이고, 나 또한 30세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0일 뒤에 임군은 과연 병이 들어 요절하였고, 또 5년 뒤에는 그가 이어서 죽었으며, 또 8년 뒤에는 이군이 죄를 얻어 장사(杖死)하였고, 또 6년 뒤에는 윤군이 승지로 있다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은 한 번 입에서 나오면 마치 숫자를 세거나 촛불로 비추어 보듯이 적중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신기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더욱 놀랐었다.
인하여 기억하건대, 내가 소싯적에 공과 함께 밤중에 마당 가운데를 거닐면서 부질없이 성차(星次)를 가리키며 천상(天象)을 대략 논하자, 공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이로부터 나에게 왕래하면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그런데 처음에는 내가 그를 노둔한 줄로 알고서 잠시 서로 도와서 가르쳐 주었더니, 시일이 한참 지난 뒤에는 학교에 들어가 수업을 하였으나, 그래도 둔체(鈍滯)하여 진취하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런데 1년도 넘지 않아서 마침내 한 세상의 명가(名家)가 되었으니, 그 예리하게 파죽(破竹)의 형세로 사리를 분석하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지금 그가 죽은 지 23년이 되었는데, 그의 고자(孤子) 두원(斗源)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명(銘)을 청하였다. 아, 내가 오히려 우리 군(君)에게 차마 명(銘)을 쓴단 말인가.
정씨(鄭氏)는 광주(光州)에서 나왔는데, 국초(國初)에 휘 귀진(龜晉)이란 분이 문장으로 세상에 명성을 드날렸고 벼슬은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이르렀다. 그 후 오세(五世)에 이르러 진사(進士) 휘 경(褧)은 문행(文行)이 있었는데 소양강(昭陽江) 가에 은거하였고, 이 분이 휘 이주(以周)를 낳았다. 이주는 문과에 급제하여 헌납(獻納)이 되어 간신(諫臣)의 풍도가 있었고 벼슬이 정주 목사(定州牧使)에 이르렀는데, 역시 소양강 가에서 만년을 보냈다. 이 분이 세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 사호(賜湖)는 지금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고, 그 다음이 군(君)이다. 군의 자는 정이(靜而)인데 가정 기미년 모월에 태어나서 나이 22세에 등제(登第)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선보(選補)되었다. 사예(司藝) 김사섬(金士銛)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으니 바로 지금 명(銘)을 청한 사람인데, 나와 좋게 지낸다.
군이 병들었을 적에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내 명(命)이 금년 2월에 다하는데, 혹 하늘이 내 명을 조금 연장시켜 주기를 기대해 볼까? 그러나 운수가 기박하므로 나는 이제 그만이리라.”하였다.
그리고 하루는 새벽에 일어나 의관(衣冠)을 단정히 하고 앉아 글을 지어서 정(情)을 서술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슬펐다. 그리고는 마침내 누워서 다시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작고하였다. 지금 장지(葬地)는 양주(楊州)의 마차산(磨叉山) 아래에 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孰賦之豊而施之嗇 누가 재능은 풍부하면서 베푸는 덴 인색했던고
若軒擧也而中躓 높이 날아오를 듯하다가 중도에 넘어졌네.
磨叉蔚其蓄靈 마차산은 성대하게 정령이 쌓여 있으니
從先人而受祉 선인을 따라서 길이 복을 받으리라.
[인물사전]
1559년(명종 14) ~ 1585년(선조 18)
대표관직 - 승문원정자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정이(靜而). 순인(純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褧)이고, 아버지는 증예조판서 이주(以周)이며, 어머니는 정응서(鄭應瑞)의 딸이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지냈으나 문과에 급제한 지 5년 후에 병으로 죽었다. 천문·지리·의약 등에 정통하고, 문장에도 밝았다. 사후(死後)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정명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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