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동 회상기
배 화 열(대구수필)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은 즐겁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태어난 곳이, 태평로였는데, 어느날 고성동으로 바뀌었다. 시민 운동장 근처의 우리 집은 주위가 논밭이었고, 우리 집과 엿집의 두 집만 존재하였다.
대구역에서는 15분 거리였는데, 집근처에 달성초등학교가 있었고, 가기 전에는 옛날 대구방송(KBS)과 경마장이 있었다. 여름방학때는 곤충채집을 하였고, 가을에는 논에 메뚜기를 잡으러 다녔다. 큰집이 칠곡이어서 방학때만 8식구에 보태어서, 방문하여 놀았다. 과자점도 별로 없었지만, 3끼 식사로 잘 지냈다. 반찬은 주로 된장에 넣은 토란뿌리가 기억난다.
그런데 초등 4학년때, 냇가에서 물놀이를 오래하다가 보니, 양쪽 귀에 중이염으로 고름이 차였다. 그 이후에는 큰집에 가는 것은 금지당했다. 한 해 일찍 들어가서, 10살때였다. 그 후로는 주로 집가까이에 있는, 외삼촌댁으로 제사때는 가서 놀았다. 무척 엄하신 외삼촌은 늘 공포의 대상이셨다.
시민 운동장은 해자가 파여있어서, 잠자리(특히 푸른 잠자리. 부리라고 불렀슴)를 잡기 위해서 잠자리 채를 준비하였으나, 좀처럼 잡기가 어려웠다. 다른 친구들은 암컷으로 수컷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문에 따라서 잠자리의 눈을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는 속설을 믿고 있었고, 더욱이 양초를 씹으면 껌이 된다는 말을 듣고 열심히 씹었다. 그리고 무식하게도 크레용을 같이 씹으면 색깔이 있는 껌이 된다는 말도 굳에 믿고 따랐다.
선비께서 막내이셨고, 고아로 형제자매에게 의지하여 자라셨다. 둘째 언니께서 시집가신 후에 태어나셨다. 성당가는 길에는 외가가 있어서, 가끔 들르기도 하였다. 외사촌 형님들과 동생들이 여럿이 모이면, 어르신들이 제삿날 모여서 화토놀이 하시는 것을 가끔 구경도 했다. 어느날 잠을 자다가 꿈에서 고양이가 배를 꽉물자, 놀라서 일어나보니 외사촌의 큰 다리가 배위에 있었다. 아마 형님이 몸부림치다가 발로 나의 배를 차버렸던 모양이다.
큰집에서 생각나는 에피소드는, 작은 종형께서 중학교에 입학하여, 초등 3학년이던 나에게, 영어가 쉽다고 가르쳐주었다. 비자루와 재떨이였다. 엉터리 영어가 비샬루와 재터릴리였다. 영어교사로서 블룸과 에시트레이(broom and ashtray)임을 알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멋진(?) 외국어의 맛을 본셈이다. 그후에 중학교에서 겨우 ABC의 철자를 배웠다.
대학생 때 외가에 가서, 외삼촌(50대 말)께서 고박정희 대통령의 신년사를 듣고 계셨다. 나는 몹시 놀랐다. 아니 외삼촌같이 박학다식하신 분께서, 대통령의 신년사를 듣고 계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칠순을 넘긴 나로서는, 나의 무지가 잘 보인다. 지금은 세계의 대통령도 평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 6학년때는 성적순으로 자리에 앉혔다. 모든 줄이 7줄이어서, 나는 늘 일등(경북대 의과대학 교수)과 나란히 앉아서 공부했다. 수십년이 지나서 초등동기 모임에서 만났을 때, 나의 성을 기억하여 주었다. 외사촌 동생(8일 차이)과 한 반에서, 공부하고 벌도 같이 받았고, 코로나19 이전에는 같이 외삼촌 제사도 같이 모셨다.
이제는 모두 손자녀를 거느린 할아버지 신세로 전락하였다. 어린 손주들에게는 두 가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먼저 어린이에게 쌈싸먹기(호박 잎과 우엉 잎)를 강조하지 않는다. 선친께서 어린 나에게, 된장에다가 우엉 잎을 싸서 드시면서, 맛있다고 하셨는데, 거친 잎이 씹어도 목구멍에서 삼키지를 못했다. 그래서 쌈은 나이가 들면 저절로 즐기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다음으로 어린 손주들에게 할아버지에 대한 상을 강조하지 않는다. 약간 특이한 경험이지만, 나는 대학생때까지도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로 태어나서 살고 계신다는, 모순된 생각을 가졌다. 초등의 어린 손주들에게 물어보면, 모두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모른다. 그래도 어린 시절에 대한 강요를 구태어 분별하지 않는다. 나이와 세월이 가르치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에서는 가정의 자녀들을 돌보기 위하여, 직장에서 이눈치 저눈치를 보아가며 살아왔다. 지금은 눈치를 강요하지 않으나, 나의 이웃에게 혹시나 하고 눈치를 살피고 있다. 그만큼 약해진 나의 모습을 알 수가 있다. 과거에는 이웃이 불쌍하였으나, 요즈음은 나자신에 대한 불쌍함이 함께 묻어있다. 이것이 인생이라고 생각된다.
아직 배움의 길을 나아가고 있다. 책만 읽어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강좌를 들어서 같이 나아가는 것이, 인문학의 길로 접근하기가 쉽다. 요사이 도서관마다, 인문학 특강이 널려있다. 주어 담으면 모두 나의 비전으로 들어온다. 물론 나의 주관이 뚜렸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나의 연구 주제가 정해져 있어서, 강의가 나에게 연구하는 방향이나 내용으로 활용하는 단계가 된다면, 매일 일장월취하는 기쁨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어린 소년이 쉽게 늙은 노인이 된다. 그러나 공부는 성취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포기해서는 어르신이 아니라, 나이든 노인으로 추락한다. 마치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꿈을 가지고 노를 계속해서 저어야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신건강은 육체건강과 함께, 잘 관리하여야 한다.
따라서 정신의 목표를 향하여 포기하면, 인생이 허무하게 끝난다. 종교이거나 학문과 예술에 대한 신념을 줄기차게 밀고나가야 한다. 육체가 녹이 슬어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을 때까지라도. 멋진 부모와 조부모가 되기를 바라면서, 우리 모두 파이팅을 외칠 시간입니다. 고성동은 나의 꿈의 동산이었고, 이젠 수성구의 만촌동이 손주들의 꿈의 동산으로 지켜야 할 시점에 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