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1장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1)발신자가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히브리서의 저자가
익명으로 처리되어 있는 반면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추측되는
야고보(야곱/제임스, 주후 62년경 순교)라는 실명이 거론됩니다.
2)수신자의 처지가 비슷합니다.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기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히브리서 11장 후반부에 나오는 여러 가지 시험들이지요.
(새)11:35 믿음으로 여자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가족을
다시 맞이하였습니다.
또 ①어떤 이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하여,
구태여 놓여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11:36 또 ②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11:37 또 ③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질을 당하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④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11:38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⑤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지만 말로
다할 수 없는 시련들을 겪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수신자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3) 히브리서나 야고보서나
둘 다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행함입니다.
사랑과 자비를 행하는 것이지요.
히브리서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위해
사랑과 자비를 행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면
야고보서는 믿음을 위해 사랑과 자비를
행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관점이 차이가 있지만 둘 다 가난한 사람을 편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젖동생이라고 불리는 야고보가
이런 말씀으로 권면을 합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했을 때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2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감당할 수 없는 여러 시험이 닫치면
사람들은 주로 이런 반응이 나타납니다.
1)외면하거나 회피하거나 도망치거나 숨습니다.
2)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폭력을 행하지요.
그것이 폭력인지도 모르고 폭력을 행합니다.
하지만 사도 야고보는 우리에게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왜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에서 언급한 시험들을 당할 때,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시련이 결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정욕으로 말미암은 시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시련(연단)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받지 않아도 되는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 시험에 빠질 때에,
오히려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반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편지의 수신자를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고난과 핍박과 조롱을 피해서 이방의 땅으로
흩어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특히 안디옥, 다메섹, 그리고 로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흩어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또 하나 우리가 당하는 여러 가지 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길 필요가 있는 것은 3절과 4절 때문입니다.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첫째,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맥락인데
여러 시험을 통해 나의 믿음을 달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장성한 어른처럼 성숙한 믿음인지 아니
면 어린 아이처럼 연약하여 여물지 못한
믿음인지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가지 시련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하는 이유는 그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이지요.
파루시아를 소망하며 기쁨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편지를 시작하자마자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래야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온유와 겸손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