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걷다 아홉 번째
10월 25일
지난 번에 기행을 마쳤던 파사산성 입구에서 버스를 내렸다. 바람이 차갑다. 마스크를 쓰고 모자의 귀마개를 내려서 덮었다. 진한 에메랄드색의 강물도 차가움을 더했다. 올해들어 가장 추운 날씨이다.
늦 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가을이 오긴 온 것이다. 설악산에도 단풍이 왔단다. 십여분 걸어서 군계를 넘었다. 양평군에 들어섰다. 개군면이다. 향리천을 돌아서 구미리 방축골 들어가는 입구에서 쉬었다. 한 시간 정도 걸었다. 구미리는 옛날에 유명한 한강의 나루터 였다. 여기서 나루터 까지는 300미터 더 강 쪽으로 나가야 한다. 햇살은 퍼졌지만 아직 차가움이 가시지는 않았다.
양덕리 고개를 넘어 솔숲마을에 이르렀다. 이십여분 마을 안길을 걷다가 강변길에 올라섰다. 흑천을 가로지르는 현덕교를 넘어서니 양평읍이다.
양평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양수장을 지나서 뚝길에서 고수부지 공원길로 내려섰다. 양평물소리 길이다.
창대리에서 오전 일정을 마쳤다.
오후에 창대리에서 다시 시작했다. 강변길을 따라 양평읍을 지난다. 군청, 경찰서, 읍사무소등 양평군의 주요관공서가 강변길에 있다.
양평은 물의 도시였다. 옥천면을 지나간다. 강변길이 끝나서 차로에 올라섰다. 육교를 넘어서 자전거 길에 올랐다. 서울 가는 4차선 차로에 차가 쉼 없이 오고간다. 소음이 심하다. 옥천면을 지나서 오후 세시에 양서면에 도착했다. 강변길로 내려섰다.
앞서가는 도반들의 모습이 정겹다.
강변길이 훨씬 소음이 덜했고, 풍광이 좋았다. 강변길이 끝나는 곳에서 잠시 멈춰 섰다. 자동차 길과 강변산길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강변 산길이 걷기에는 좋은데 막다른 곳에 이를 때가 있었다. 길이 강물이나 암벽에 막히면 다시 되돌아와야 하는 수고로움을 겪어야 했다. 네이버 지도 검색을 해봤더니 작은 오솔길이 있었다. 강변길을 택하여 고개를 넘어섰다. 길이 훨씬 넓어졌고, 멋진 별장촌이 펼쳐졌다. 도보 여행자들이 드물게 느끼는 황홀경이었다. 눈앞이 갑자기 훤해지며 “햐!”하는 탄성이 터졌다. 강변 별장촌으로 새로이 형성된 마을이 아니었다. 원래 자연부락이 있었고, 새로이 별장들이 터를 잡아 아름다운 강촌이 되었다. 도로는 널직했고, 마을 안길도 포장이 되어있고, 집들은 자연풍광에 어울리게 지어졌다. 정원과 화단이 잘 가꾸어진 마을길을 걷는 것은 넉넉한 즐거움이었다.
고풍스러웠고, 품격 있는 교회가 있었다. 상심리 교회였다. 개울 건너에는 널찍한 건물과 조경이 잘된 정원이 있었다. 개인 별장으로는 규모가 컸고, 어느 재별회사의 연수원이나 될까하는 호기심이 있어 출입구에 확인을 해보니 아무런 표식이 없었다. 출입구의 너른 공터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네시 반까지 상심리 마을 길을 걷고, 4차선 차로에 다시 올랐다. 폭주하는 차들을 갓길을 1키로 정도 걷다가 자전거 길로 올라서 걸었다. 다섯시반 쯤 중앙선 신원역에 도착했다. 오늘 일정의 종착점이었다. 오늘 아주 많이 걸었다. 30키로를 넘게 걸었다.
신원역 왼쪽으로 돌아서 올라가는 길에 몽양 여운형 선생의 기념관이 있었다. 몽양선생의 생가터에 세운 기념관이었다. 몽양선생은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국내에 남아서 갖은 고초를 겪었던 정객이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고나서 조선 총독부에서 제일 먼저 찾은 조선인 인사가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이념을 떠나서 분단을 막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좌우합작운동이었다. 통일된 조국의 정부수립을 위해서 안간힘을 쓰던 도중, 한지근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한지근은 이북출신 테러단체 백의사 소속이었다.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백의사가 이승만이 비호한 단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기막힌 사실은 몽양의 경호원들이 암살범 한지근을 쫓아가자, 경찰이 암살범을 체포하지 않고, 경호원을 못 가게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암살은 사전에 경찰에 통보되었고, 경찰의 묵인과 비호아래 자행되었던 것이었다. 몽양의 암살범에게 총을 주고 격려했다고 김두한이 구두로 발설한 바 있다. 해방 후 어지러웠던 정국에서 이렇게 터무니없는 테러를 저지른 확신범들이 많았다. 김두한도 그런 백색테러범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것도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김두한과 같은 인물이 영화의 소재가 될 수는 있어도, 正史에서는 신중히 다뤄야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월 27일
아침에 천진암에 올랐다. 우리 일행이 첫 방문객이었다. 천진암은 작은 암자였다. 옛날부터 선비들이 공부하려면 책을 싸들고 찾았던 곳이 암자였다. 암자는 속세와 떨어져 있어, 혼자 공부하기에는 좋았다. 천진암이 서학을 접했던 남인 계열의 선비들에게 좋은 강학 터였다. 처음에는 유교경전에 대한 연구를 주로 했지만, 나중에는 천주신앙 중심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천진암은 초기 한국 천주교 신앙본산으로 섬김을 받게 되었다. 지금은 스님들이 기거했던 절의 흔적은 사라지고 그 암자터만이 천주교 성인들이 공부했던 자리라는 표지판이 서있다. 그 당시에 여기서 천주교 교리를 공부했던 이벽, 정약종,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은 순교를 했고, 그들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 자리에 같이 공부를 했고, 한 때 천주교에 입문했던 정약용은 천주교 입장에서 보면 애매한 인물이다. 그가 천주교도로 몰려 문초를 당할 때, 그는 천주학쟁이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조상을 부정하고, 위패를 불태우는 천주학쟁이들의 행태를 보고는 더 이상 천주교를 공부하기를 거부했다고 진술한다. 이때 천주교에서는 정약용이 살기 위해서 배교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그 후로도 그런 자세는 평생 변함이 없었다. 천주교임을 부정하지 않았던 바로 위의 형 약종과 둘째 형 약현의 처남이었던 이벽은 순교를 당했다.
다산 선생이 공부하러 다니 실 때에도 단풍이 아름답다 했는데 이백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천진암의 단풍은 아름다웠다. 천주교에서 대대적으로 성역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넓게 터를 잡고 대성당을 짓는다고 준비 중이었다.
열시에 기행을 다시 시작했다. 자전거 도로를 따라 걸었다. 예전에 철로였던 길을 자전거도로로 만든 길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옛날의 중앙선 간이역 능내역이다. 옛 기억들이 새삼스러웠다.
전철화된 지금의 철로는 더 위로 올라가 있다. 열두 시에 양수역에 도착해서 점심식사를 하고 두물머리로 내려갔다. 한강 기행 중 가장 이름 난 곳이다. 우리가 지난 1월부터 지금까지 걸어왔던 남한강과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만나는 곳이다.
양수리를 나서 다시 자전거길을 따라 팔당댐에서 기행을 마쳤다. 다산 생가는 다음 기행에 가기로 했다.
첫댓글 아홉번 째 한강답사 기행문 잘 보았습니다.
쌀쌀한 날씨에 건강 조심!
서울이 가까워져가는 군요. 한강의 비경은 다 본것 같아요. 다음달에는 조안면 능내리의 다산생가와 실학박물관을 볼 겁니다. 모레에는 정겨운 얼굴들 볼 수 있겠네요.
드디어 바우가 아주 익숙한 곳까지 걸어 오셨네. 양평에서 우리들 OCS365행사도 두세차례 가졌지.
이독하 사돈댁 별장에서 두번?, 두물머리 근처 양서 테니스장 + 예봉산 산행이 기억에 남습니다.
오호라 최회장님 얼굴뵌지 오래되었소이다. 이번 가을 기행에 무신 일이 있어 안 오셨는지. 만나서 이야기 나누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