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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
다니엘 튜더 지음
서양 좌파가 말하는 한국 정치
정보 제공 :교보문고
한국 민주주의를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한 합리적 좌파의 정치 철학 선언문!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사람. 거침없는 직언과 아웃사이더로서의 날카로운 시각을 견지하는 영국 청년 다니엘 튜더. 그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 정치는 조금 이상하다. 좌파도 우파도 없고, 진보는 과거에 사로잡혀 무능한 정치의 전형을 보여준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익숙함이 안타까워 저자는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는 한국 민주주의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제시하고 정당과 시민이 민주주의를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대한민국 정치 비평을 담은『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에서 그 대안을 제시한다.
먼저 저자는 퇴보 하고 있는 한국의 민주주의 민낯을 자세히 논한다. 한국어 머물며 《이코노미스트》서울 특파원으로 일한 그는 2012년 대통령선거 캠프의 다양한 사람을 만난 경험과 정치인 및 고위 관료들을 만나며 접한 한국 사회 부패 문제, 앨리트 사고방식 문제 등을 짚어낸다. 더불어 위기에 처한 한국 민주주의를 정상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며 한국 민주주의 정상화에 가장 필요한 효율적인 야권과 성숙한 시민이 수행해야 할 역할에 대해 강조하고 한국형 미켈슈탄트를 키우자는 제안과 이탈리아의 ‘5성운동’ 같은 풀뿌리 운동 같은 그만의 시각이 돋보이는 대안을 제안한다.
저자 다니엘 튜더
머리말_다만 ‘정상’의 자리로 되돌려놓을 때
서문_민주주의는 후퇴하지 않는다
PART 1 한국 민주주의의 풍경
01 유치한 쇼, 쇼, 쇼
02 민주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03 자유를 훼손하는 명예훼손법
04 언론의 나팔 소리
05 철학이 없는 가짜 보수와 진보
PART 2 우리는 시민인가
06 영웅은 없다
07 잊지 않겠습니다
08 음모론 전성시대
09 숨은 좋은 정치인 찾기
PART 3 정당정치 다시 쓰기
10 저격이 아니라 건설을 원한다
11 프로페셔널리즘은 어디에 있는가
12 부족주의에 결별을 고함
13 정책 실종
14 야합의 그늘
PART 4 민주주의, 끝나지 않은 여정
15 모두의 정치
16 제조업은 한국의 미래다
17 복지는 투자다
18 모든 것은 프레임에 달려 있다
맺음말_우리 자신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옮긴이의 말
좌파도 우파도 없는 이상한 한국 정치
절망 중독 사회에서 무엇을 꿈꿀 것인가?
도착하지 않은 민주주의를 호명하는
합리적 좌파의 정치 철학 선언문!
“절망이 문제가 아냐. 절망은 받아들일 수 있어.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은 희망이라고.”
―영화 《클락와이즈clockwise》 중
절망도 익숙해지면 몸의 일부가 된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희망은 불편하다. ‘희망고문’을 당하느니 차라리 편안한 절망을 택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니엘 튜더는 이렇게 말한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희망이라면, 기다리기만 하지 말고 우리가 직접 오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때로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사람,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침없는 직언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아웃사이더로서의 날카로운 시각을 견지하는 영국 청년 다니엘 튜더의 대한민국 정치 비평 책이 나왔다. 그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 정치는 조금 이상하다. 여기에는 좌파도 우파도 없다. 보수는 오로지 대기업 밀어주기와 ‘나 먼저’라는 생각을 외에는 아무런 철학이 없으며, 진보는 과거에 사로잡힌 채 프로페셔널리즘이 결여된 무능한 정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묻는다. “민주주의는 정말로 후퇴하고 있나?”(참고: 조슈아 쿨란트칙Joshua Kurlantzick, 『후퇴하는 민주주의Democracy in Retreat』)
그의 눈에는 충격적일 정도로 새로운 이야기들이, 어쩌면 한국 독자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익숙함’이 안타까워서 다니엘 튜더는 이 책을 썼다. 보이지 않는 적은 익숙한 절망, 곧 지독한 피로와 무력감이다. ‘희망’이란 말이 오염되고 탈색돼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듯한 시대에 그는 이 책을 썼다. 그는 말한다. “이제는 당신의 목소리를 내십시오.”
이 책에서 그는 한국 민주주의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제시하고, 정당과 시민은 민주주의를 정상의 자리로 되돌리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대안을 제시한다. 쇠락이 우려되는 제조업을 위해 한국형 미텔슈탄트를 키우자는 제안, 이탈리아의 ‘5성운동’ 같은 풀뿌리 운동을 시작해보자는 제안 등에서는 그만의 시각이 돋보인다.
또한 이 책은 한국인 독자를 위해 쓴 책이다. 전작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가 영미권 독자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려고 출간한 책을 번역한 책이라면, 이 책은 기획 단계부터 집필, 출간까지 오로지 한국 독자를 위해 썼다. 한국에 머물며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이코노미스트』 서울 특파원으로 일한 그는 이 책에서 2012년 대통령선거 캠프의 다양한 사람을 만난 경험을 풀어내고, 정치인 및 고위 관료를 접하며 느낀 한국 사회의 부패 문제와 엘리트의 사고방식 문제도 짚었다. 이제 민주주의는 ‘그들의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삶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와 그 적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한국은 두 가지 기적을 이룬 나라로 통한다. 하나는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한 ‘한강의 기적’이고, 나머지 하나는 단기간에 이룩한 민주주의의 기적이다. 저자는 “한국인은 의아해할지 모르나, 한국은 아시아 최고의 정치 선진국”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점이라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 ‘희망’ ‘꿈’ ‘변화’ 등의 단어로 도배된 정치적 수사는 화려하지만 이제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을 만큼 정치적 불신과 피로감은 극에 달했고, 진정한 의미의 진보도 보수도 아니면서 기이하게 고착화돼 양분된 좌우 진영논리는 정작 유권자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모든 종류의 정치적 의제를 집어삼킨다. 상황이 이런데 표현의 자유마저 하락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사문화됐거나 존재하더라도 ‘형법’으로 분류되지 않는 명예훼손죄가 한국에서는 여전히 형법상으로 존재하며 명예훼손 기소 건수도 증가일로에 있다. 결과적으로 국민과 언론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자기검열을 강화하는 위축효과(chilling effect)가 강화된다.
저자는 어느 날 트위터에서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증오에 찬 쪽지를 받는다. “대한민국을 음해하는 전형적인 서양 좌파!” 그러나 그가 한국 정치를 우려하며 쓴 글은 다분히 합리주의자의 그것에 가까우며, 실제로 그는 한국 정치와 경제가 진영논리에 매몰되기 전에 우선 ‘정상’의 상태에 들어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 화두가 됐던 ‘경제민주화’라는 말도 사실은 ‘경제정상화’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기업 밀어주기’ 원칙은 자유시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한국 경제 역시 ‘민주화’라는 정치적 수사로 조명할 것이 아니라 정상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좌파와 종북은 얼마든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는데 ‘종북’과 ‘좌파’를 한데 묶어 ‘종북좌파’로 싸잡는 행태는 더 비열하다. 노인 유권자들은 이 수법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동으로 반응한다. 새정치연합과 여타 진보 정당은 번번이 새누리당이 색깔 공세를 펼칠 여지를 준다. (…) 한국 보수 진영이 진보 진영을 손쉽게 공격하는 비열한 수법은 또 있다. 진보 진영이 ‘포퓰리즘’을 일삼는다는 주장이다. 일반 대중의 감성이나 필요에 영합해 표를 얻는 것이 ‘포퓰리즘’이지만, 한국 보수 언론이 지적하는 ‘포퓰리즘’은 이와 다르다. 한국 보수층에게는 특권층의 희생으로 다수의 국민을 이롭게 하는 것이 모두 ‘포퓰리즘’이다. 복지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과 논쟁할 가치도 없다. 이 비열한 포퓰리스트!(35쪽)
표면적으로 새정치연합과 새누리당을 구별할 수 있기는 하다. (…) 하지만 두 당의 정책과 정책을 뒷받침하는 사고방식은 본질적으로 별로 다르지 않다. (…) 한국에서는 대기업 우선주의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시장이 존재한 적이 없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앞으로도 그것이 영영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대기업이 사실상 거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업 기회가 생겨도 금세 대기업 차지가 되며, 대기업의 독주에 방해되는 존재들은 금세 박살나고 만다. (…)
전경련이 내세우는 자유시장은 미국 신자유주의자들이 열렬히 신봉하는 자유시장과 다르다. 미국에는 진정한 자유시장이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미국 전 공화당 하원의원 론 폴(Ron Paul)과 같은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은 시종일관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려고 애쓴다. 반면 한국의 사이비 자유시장주의자들은 정부가 허가해주는 독과점 혜택을 누려왔고, 막대한 규모의 정부 계약을 따내고 국민의 혈세로 제공되는 전기 사용료 등의 보조금을 받으면서도 사회에 기여하라는 요구에는 사회주의 운운하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나 먼저’라는 믿음 외에는 별다른 철학이 없다. 일종의 ‘신자유주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코노미스트』에서 기자로 일하던 시절, 한국을 방문한 영미권 시장옹호주의자들을 만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한국의 시장 환경이 실망스럽다고 말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진정한 신자유주의 대신 ‘국가 자본주의’, 나아가 ‘정실 자본주의’뿐인 한국의 맨얼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상 어느 정부도 ‘대기업 밀어주기’ 원칙에 반기를 든 적이 없다. 진정한 의미의 신자유주의도 진보도 없었다. 박정희 시절부터 이어져온 대기업 밀어주기만 존재할 뿐이다. 대기업 밀어주기를 보수주의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 진정한 자유주의자라면 정부의 개입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마땅하다. (…)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에서 좌우를 가늠하는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복지국가를 지지하는가? 자유무역협정을 지지하는가? ‘파이 크기 키우기’와 ‘파이 나누기’ 중 어느 쪽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가?(70~72쪽)
저격이 아니라 건설을 원한다
효율적 야권은 어디에 있는가?
또하나, 한국 민주주의의 정상화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효율적인 야권이다. 저자가 보기에 정치적인 의미가 아닌 광의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불만족스럽더라도 위험이 덜한 현 상태를 유지하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는 유권자들에게 청사진을 제시하고, 희망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 유인이 있을 때만 사람들을 투표장으로 이끌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야권은 주야장천 ‘돌 던지는’ 저격수 역할에만 충실했다. 그러나 네거티브 전략만으로는 ‘만년 야당’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386 아저씨에 의한, 386 아저씨를 위한 야당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정책을 제시하고, 당에도 여러 방면으로 경험이 많아 리스크에 대처하는 법을 아는 프로페셔널이 더욱 보강되어야 한다. 저자는 이를 ‘진보적 프로페셔널’로 명명한다.
새정치연합 지지층과 진보 진영은 젊은 세대가 보수화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정말 그러한가? (…) 대북정책을 제외한 나머지 정책에 있어서 한국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전쟁 세대나 386 세대와 달리 이념에 영향을 받지 않은 첫번째 세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다른 연령층과 마찬가지로 범야권 정당의 무능력에 실망했다. 내 생각에 한국 젊은이들은 보수화됐다기보다는 하얀 도화지 상태에 가깝다.
문제는 젊은이들에게 있지 않다. 합리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의제를 내세운다면 누구라도 수긍할 것이다. 진짜 문제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의제를 제시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 새정치연합은 과거에 대한 인식을 통해 정의되는 정당이다. 물론 새누리당도 박정희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아직까지 숫자에 집착하며 20세기 후반의 개발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 점에서 새누리당을 보수당으로 보는 것은 오류다. 다른 나라의 보수당과 비교했을 때 새누리당의 사고방식이나 전통에 대한 태도 등에서 도덕적으로 보수적인 관점을 찾아볼 수가 없다. 사실상 GDP 성장 외에는 아무런 기본 철학이 없는 정당이다. (…)
사회 전반에 불평등과 불만족이 증대되면서 “정치인들은 그 나물에 그 밥” “정치인들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나”라고 푸념하는 유권자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 또한 진정한 의미의 선택도 없다고 느끼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해도 새정치연합에 불리할 뿐 새누리당은 건재하다. 한국에서 새누리당은 일단 기본으로 설정된 전제조건임을 인정해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수백만의 노년층은 무조건 새누리당을 찍는다. 반면 젊은이들을 투표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긍정적 유인이 필요하다.(74~76쪽)
2015년 1월 말 리얼미터 설문조사에 따르면 32.5퍼센트의 유권자가 선호하는 정당이 없다고 응답했다. 32.5퍼센트의 상당수가 안철수를 지지했지만 새정치연합에 합류한 안철수는 지지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흔히 재계에서 합병이 이루어지면 시너지 효과 등을 말하는데, 새정치연합 합당의 경우는 막대한 부정적 시너지를 유발했다. 안철수 신당이 기업이었다면 주주들이 들고 일어나 이사회를 싹 갈아치웠을 판이다.
이번에도 익숙한 결말이 펼쳐진다. 새누리당은 승리감에 도취돼 덩실덩실 춤을 춘다. 새누리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싸움 상대인 야당이 지리멸렬할 정도로 무능하기 때문이다. 어찌나 무능한지 필자가 음모론을 믿는 이발사 마리오 아저씨였다면 새정치연합이 새누리당의 X맨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어찌 됐든 한국에서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후퇴하고 있다. 보다 넓은 맥락에서 보면, 민주주의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이 10년 후에도 반(半)민주주의나 ‘권위주의와 혼합한 민주주의’가 아닌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 남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효율적인 야권이 필요하다.(153쪽)
10년 후, 한국의 제조업을 생각하라
부패한 재벌 총수를 처벌하는 것은 오히려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
한편, 저자는 2000년대 한국의 증권회사에서 일한 경험, ‘신자유주의의 경전’으로 불리는 『이코노미스트』 서울 특파원으로 일한 경험을 살려 한국 경제에 관해서도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특히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한국 제조업의 미래다. “현재 아동 빈곤율이 60퍼센트에 육박하는 미국 디트로이트도 1960년대에는 제조업 덕분에 당시 미국에서 가장 높은 1인당 소득을 자랑했다는 사실을 혹시 아는가? 영국의 항구 도시 뉴캐슬과 글래스고도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선박을 건조하면서 한때 부자 도시로 등극했다. 하지만 이들 도시는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과 한국에 자리를 내줬다. 울산이 부상하면서 디트로이트와 글래스고는 저물었다. 한국인들에게는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끝이다. 하지만 산업기지를 신흥 국가에 내준 영국과 미국에는 대규모 실업, 범죄, 사회 분열, 잠재력 있는 인재의 낭비 등 암울한 이야기가 이어진다.”(169쪽)
저자가 보기에 디트로이트와 글래스고에서 일어난 제조업의 몰락이 한국에도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중국 최대 스마트폰 제조업체 샤오미의 선전을 보라. 그는 한국이 사실상 제조업을 포기하고 서비스업으로 전환한 영국 대처리즘의 전철을 밟지 않고, 스위스나 독일처럼 고숙련 인력을 보유한 제조업 모델로 전환할 것을 촉구한다. 서비스업이냐, 제조업이냐 식의 양자택일에 근거한 사고방식으로 경제를 볼 것이 아니라 양자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면서 ‘고급경제’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또한, 자유시장을 진정으로 옹호한다면 재벌의 부패와 가격 담합을 눈감아줄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진짜 의미의 자유시장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의 주식이 실제보다 저평가되는 현상을 뜻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말이 있다. 예전에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이 ‘북한의 잠재적 위협’이었지만 요즘은 오히려 한국 기업의 불투명한 경영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야기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은 무엇인가? 원인은 간단하며, 북한과는 관련이 없다. 한화, SK, 현대자동차 등에 투자를 고려하고 있다면 나라도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이 기업의 가치는 ○○정도 될 테지만 회장은 주주의 돈을 사적 용도로 배임하고, 망해가는 계열사를 지원하는 데도 쓰고, 가치가 뻥튀기된 삼성동 땅을 사거나 아들에게 고용 승계할 가능성이 높단 말이지. 그렇다면 당연히 이 기업의 평가가치를 낮출 수밖에.’ 코리아 디스카운트에 대해 외국 투자자들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문제를 일으킨 기업 총수에게 대통령 특별사면을 불허하고, 형기를 채우도록 하는 등 기업인에게 응당한 처벌을 내린다면 비정상적인 패악은 사라지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이다. 현저히 낮은 주가수익률(PER)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한국 기업의 주식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싼 주식 중 하나다. MSCI 세계지수에 따르면 2014년 코스피 상장 기업의 주가 순자산비율은 전 세계 평균보다 50퍼센트 낮은 1.05였다. 한국 기업의 지배 구조가 투명해져 한국 주식시장이 (매우 보수적으로 잡아) 10퍼센트만 가치 절상된다면 어떤 효과를 볼지 상상해보자. 이런 정상화 움직임이 주식 평가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한국 주식시장의 전체 시가 총액은 1200조 원가량이므로 10퍼센트만 잡아도 120조 원이 증가한다. 국민 1인당 250만 원이 돌아가는 액수다. (…) 사실 이는 잠재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아니다. 오히려 잃어버린, 아니 도둑맞은 돈의 가치로 생각하는 것이 온당하다. 독자 여러분보다 만 배쯤 부자인 사람들이 여러분 할머니의 쌈짓돈을 훔쳐가고 있는 것이다. 재벌 회장들이 국민들에게 ‘민영’ 세금을 물리고 있는데도 한국 사회는 재벌 회장 앞에서 조아린다.
사실 필자는 재벌 해체를 바라진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가족 경영이 영미식 ‘주주자본주의’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 하지만 오너가 5~6퍼센트 지분 소유만으로 거대한 그룹의 경영권을 갖는 가족 경영 행태는 분명 부정적인 인센티브를 야기한다. 부정적인 인센티브를 유발하는 사안들을 적발해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 (…)
상습적 경제범죄에 대해서는 해당 그룹 해산이 사실상 가능하도록 하는 특별법 도입을 제안하고 싶다. 모든 가족 경영 재벌 기업을 주주 자본주의식 전문 경영인 제도로 탈바꿈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제지’ 목적으로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처럼, 기업들이 법규를 준수하게끔 위협하는 도구로 사용하자는 취지다. ‘재벌들은 특혜를 받고 있으니 행동 조심하시오!’라는 것이 법안의 주요 메시지다. 빨갱이 발상이 아니다. 사실 다른 주요 경제국 관점에서 보면, 심지어 우파 성향 국가의 관점에서도 저 정도 처벌은 상당히 관대하다. 한국 재벌이 미국 기업이었으면 미국 법무부가 나서서 진즉 해체하고도 남았다.(212~214쪽)
모든 것은 프레임에 달려 있다
또 ‘프레이밍’ 문제가 있다. 복지, 페미니즘, 안전 이슈 등 여러 방면에서 저자는 오염된 언어를 걷어내고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제대로 된 논의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지 제시한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복지를 확대하려는 사람들조차 그릇된 방식으로 복지를 제시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2012년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민주당이 내세운 메시지는 이랬다. ‘가난하고 딱한 국민이여, 국민의 최상위 1퍼센트만 부자가 되고 나머지는 빈곤해진 이명박 정권 아래 끔찍한 시간을 보낸 여러분, 여러분의 시름을 덜어주기 위해 복지를 확대하겠습니다.’ 마치 사탕을 잃어버린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수사였다. 복지에 대한 궁극적 메시지는 ‘복지는 정부가 여러분에게 투자하는 것입니다. 투자를 통해 여러분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지원하겠습니다. 나중에 세금을 많이 낼 수 있을 만큼 성공해서 돌려주십시오’라고 전달되어야 한다. 지위 상승에 대한 열망이 강한 한국에서 특히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반값 등록금, 무상급식 등 ‘무상’ ‘반값’ 타령뿐이다. 최근 정의당은 반값 통신비 실현까지 들고 나왔다. 이런 접근법을 택하면 복지는 상금이 걸린 촌스러운 퀴즈 쇼처럼 보일 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혜로 비칠 뿐이다. 게다가 복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복지는 사람들이 공짜를 바라게 만든다”고 주장하도록 도와주는 좋은 구실이 된다. ‘사회가 지금 여러분을 도울 테니, 나중에 여러분이 성공하면 사회를 도와야 합니다’라는 암묵적 합의가 복지정책에 내포되어야 한어야 한다. (…)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복지는 고수익 투자다. (193~195쪽)
작은 회사에서는 더 심각했다. (…) 물론 여성 지원자들의 이력서도 들어왔다. 남자들은 모여서 이력서에 붙은 사진을 보며 외모 평가나 할 뿐이었다. “패스, 패스, 패스…… 오, 예스! 이것 좀 봐! 이 여자는 ‘반드시’ 면접 봐야겠는데.” 하지만 면접은 없었다. 어차피 남자만 뽑을 요량이었기 때문에.
이력서에 사진을 부착하는 관행을 전면 금지해야 한다. 이는 단지 여성 지원자만 환영할 일이 아니다. 외모에 고민이 많은 남성도 있으니 사실 모두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 영국에서 반성차별주의 법규가 도입됐을 때처럼, 한국의 재계를 장악하고 있는 중년 남성들은 처음에는 죽는 소리를 하겠지만 결국 익숙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음 세대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합리적인 관행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래야 맞다.
이런 주장을 하거나 여성 채용 할당제 도입을 제시하면 ‘페미니스트’라는 소리를 듣는다. 한국에서는 여성들조차 스스로의 이익에 배치되는 성차별주의를 내면화하고 있어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정도로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오염되었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하는 여성은 누구든 ‘꼴페미’로 불리며 심지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게 된다. 하지만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보수주의나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페미니즘도 흑백논리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모든 사람은 성공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아
야 한다고 믿는 남자도 페미니스트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런 정의라면 필자는 페미니스트라는 타이틀을 기꺼이 수용하겠다.(205쪽)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은 2014년 한 해 동안 한국 정치판을 가장 뜨겁게 달군 이슈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극우 세력은 이를 국민적 관심이 필요한 사안이 아닌 진보 세력이 주도한 정치적 문제로 몰아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광화문에서 “세월호, 아듀!”라는 피켓을 든 채, 세월호의 침몰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자는 사람들을 공산주자와 동일시하는 노인 시위자들의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필자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 역대 한국 정부는 하나같이 안보의 중요성은 외치면서 안전은 외면해왔다. 하지만 안전이야말로 정부 존립의 핵심이다. 정부가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정부의 존재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207~211쪽)
“우리는 시민인가?”
도착하지 않은 민주주의를 호명하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가장 힘주어 이야기하는 것은 성숙한 시민이 수행해야 할 역할이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덮어놓고 믿어버리기”를 좋아한다. 그렇기에 영웅은 대중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영웅은 없다. 불완전한 인간을 숭배하기보다는 아이디어나 논의 자체를 함께 발전시켜나가는 시민이 있을 때,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할 것이다.
런던에는 1000명 넘는 회원을 보유한 ‘런던 토론회(Central London Debating Society)’라는 클럽이 있고, 프랑스에는 사람들이 모여서 철학과 현안을 논하는 카페 필로(cafephilo)라는 철학카페가 전국에 수십 개 있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살인적으로 긴 근로시간 때문에 이런 토론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가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는 결국 정치가 보통 사람 모두의 삶의 문제로 귀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구세주가 필요하지 않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을 때다”라고.
/ 출처;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