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함[李之菡]
민초들의 삶 한가운데 살았던 조선의 선각자
‘나라 안 산천 멀다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던’ 이상한 선비
서울 마포대교 북단 마포동과 합정동 사이에는 약 3.3킬로미터의 토정로(土亭路)가 있다. 토정로가 지나는 오늘날의 용강동에 토정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이 ‘흙으로 언덕을 쌓아 아래로는 굴을 파고 위로는 정사(亭舍)를 지어 스스로 토정(土亭)이라 이름 하였기’(선조수정실록) 때문이다. 조선 시대 마포는 서해에서 한강 하구를 거쳐 한양으로 들어오는 각종 물산이 모이는 수운(水運) 물류의 중심지였다. 소금과 젓갈이 거래되고 그것을 담기 위한 옹기가 생산되는 민초들의 활기 넘치면서도 고단한 삶의 현장 한 가운데에 살았던 선비. (오늘날 염리동 일대에 소금창고가 있었고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으며, 오늘날 용강동 일대에는 옹기 만드는 독막이 있었다.) 그러한 선비 이지함의 자는 형백(馨伯), 호는 토정 또는 수선(水仙)이며, 고려 말의 저명한 성리학자 목은 이색이 그의 7대조가 된다. 이지함은 의금부 도사, 수원 판관 등을 지낸 이치(李穉)의 막내아들로 151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14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형 이지번(李之蕃)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6살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뒤 형 이지번과 함께 한양으로 왔다. 이지번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의 아버지로, 이지함은 조카 이산해를 가르쳤으니 형이 베푼 가르침의 은혜를 갚았던 셈이다.
‘배 타기를 좋아하여 큰 바다를 마치 평지처럼 밟고 다녔다. 나라 안 산천을 멀다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험하다고 건너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간혹 여러 차례 추위와 더위가 지나도록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도 하였다.’이산해, ‘숙부 묘갈명’ 중에서
이산해가 숙부를 추모하며 쓴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지함은 한 곳에 얽매이거나 구속되는 것을 싫어했다. 정홍명도 [기옹만필]에서 ‘그가 강해(江海)를 떠돌아다니며 방랑 행각을 한 것은 세상을 싫어해서만이 아니라 구속받는 것을 피하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고 기록했다. ‘그와 함께 이야기하면 기발하여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지만, 때로는 수수께끼 같은 농담을 하며 점잖지 못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헤아리기 힘들었다’는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은 또 어떤가? 이른바 ‘품행이 방정하여 타의 모범이 되는 도학군자 선비’의 모습과는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생(民生)을 돌보기 위한 이지함의 의지와 정책
이지함은 이정랑(李呈琅)의 딸과 혼인한 뒤 당시 풍습대로 충주에 있는 처가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인 이정랑이 1547년 정미사화(丁未士禍.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장형을 당하고 능지처사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충주 일대의 많은 선비들이 연루된 이 사건으로 충주는 현(縣)으로 강등되고 충청도라는 이름에서도 빠져 충청도는 청홍도(淸洪道)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지함은 그 전에 과거를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처가가 역적 집안이 되고만 이 사건 이후 주로 마포와 서해안 일대를 오가며 다른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생활을 했다.
이지함이 벼슬길에 나선 것은 1573년(선조 6년), 그의 나이 56세 때였다. 덕성과 능력을 갖춘 재야의 선비를 기용하는 정책 덕분에 천거되었고 이듬해에 포천 현감이 되었다. 그러나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로 곧 사직했다. 황해도 풍천부의 염전을 임시로 포천에 속하게 하여 소금을 곡식과 바꾸어 식량 부족을 해결할 수 있게 해달라는 제안이었다. 이후 아산 현감이 백성들의 어려운 형편을 해결하기는커녕 탐욕을 부리다가 관직을 그만두자 조정은 1578년 이지함을 아산 현감으로 임명했고, 이지함은 걸인청(乞人廳)을 운영하는 등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힘쓰다가 병을 얻어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덕(德)은 근본이고 재물은 말(末)이지만, 본과 말이 상호 보완하고 견제해야 사람의 도리가 궁해지지 않습니다. 재물 생산에도 본과 말이 있으니, 농사가 본이고 염철(산업생산)은 말입니다. 포천의 실정은 본이 이미 부족하니 말을 취해 보충해야 합니다.…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일에서 지원자를 모집해 그 이익을 백성과 나누면, 국가는 한 섬의 곡식도 소비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인력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서도 만 사람의 삶을 건질 수 있으며, 현은 백 년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포천 현감 때 올린 위의 상소문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방 수령으로서 이지함이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첫째도 민생(民生), 둘째도 민생이었다. 물론 민생을 지극히 돌보고자 하는 뜻을 품고 나름대로 실천한 수령은 그 말도고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지함의 다른 점은 민생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에 있었다. 단순히 농사만을 독려하거나 일시적인 대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농사 외의 산업 생산을 통해 일종의 지속가능한 민생 정책을 펼치고자 했고, 군역(軍役) 제도를 혁신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고자 했다.
‘의식(衣食)을 자급할 수 있게 하라.’ 이지함의 경제사상‘
이지함은 유민(流民)들이 해진 옷을 입고 걸식하는 것을 가엾게 여겨 큰 집을 지어 그들을 수용하고, 사농공상 중 하나를 업으로 삼아 살도록 했는데 직접 가르치며 이끌어 각자 의식(衣食)을 자급할 수 있게 하였다. 가장 능력이 떨어지는 이에게는 볏짚을 주어 미투리를 만들게 했는데, 그 일을 친히 감독하여 하루 10짝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게 했다. 남은 이익을 축적하니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의식이 모두 풍족해졌다.’[연려실기술],[어우야담]
구휼이라고 하면 곡식과 물자를 내어 백성들에게 지급하는 것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무한정 곡식과 물자를 내어줄 수도 없으니 지속가능한 대책은 될 수 없다. 이지함은 백성들이 각자의 힘과 능력에 맞는 생산 활동을 하여 이익을 축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구휼 대책이자 민생 대책이라고 보았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자립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았던 셈이다. 이지함의 이러한 민생 대책의 밑바탕에는 경제에 대한 당시로는 획기적인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땅과 바다는 백 가지 재용(財用- 쓸 수 있는 재물)의 창고이니, 여기에 의존하지 않고 능히 국가를 다스린 이는 없습니다. 진실로 이것을 개발하면 이익이 백성에게 베풀어질 것이니 어찌 그 끝이 있겠습니까. 씨 뿌리고 나무 심는 일은 백성을 살리는 근본입니다. 여기에 은(銀)은 주조할 것이며 옥(玉)은 채굴할 것이며 고기는 잡을 것이고 소금은 굽는 데 이를 것입니다. 사적인 경영으로 이익을 취하고 남는 것을 탐내며 후한 것에 인색함은 소인들이 유혹하는 바이고 군자가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지만, 마땅히 취할 것을 취하여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 또한 성인(聖人)이 권도(權道)로 할 일입니다.’[토정유고], 포천 현감 시절 올린 상소문 중에서
엄격한 사농공상의 질서 속에서 공상(工商), 즉 산업 생산과 상업은 중시되지 못하고 다분히 천시되기까지 한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지함은 권도(權道), 즉 현실을 충분히 감안하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취하는 구체적인 방안과 대책으로 산업을 진흥시켜 이익을 축적할 것을 주장했다. 시대를 앞서 간 경제사상가로서의 이지함의 면모가 분명해지는 대목이다.
[토정비결]의 저자 아닌 저자 토정 이지함
이지함이라고 하면 [토정비결]을 떠올리게 된다. 해마다 설날 연초가 되면 한 해 운수를 [토정비결]로 알아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지함이 [토정비결]의 저자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토정비결]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이며, 그 이전에 [토정비결]이라는 제목이 언급되어 있는 문헌도 찾기 어렵다. 오늘날 전해지는 [토정비결]의 내용과 비슷한 단편적인 문서들과 다양한 전승(傳承)들이 19세기에 이르러 결집, 편찬되면서 ‘토정’을 가탁(假託- 그 일과 무관한 다른 대상과 관련지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토정비결]의 저자가 이지함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보다는, 왜 저자가 ‘토정 이지함으로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첫째, 이지함은 민초들의 삶에 늘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하루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불안하고 고된 처지에서 살아가는 많은 백성들을 이해하고 돌보고자 했던 그의 삶은, 운세를 점쳐 흉한 것을 피하고 길한 것은 북돋게 해주는 ‘운명 카운셀링’ 책의 저자가 되기에 매우 적합하다. 둘째, 이지함이 서경덕에게 [주역]을 바탕으로 우주의 운행과 시간의 질서를 탐구하는 상수학(象數學)을 배웠다는 기록으로 볼 때, [주역]에 바탕을 두었다고 할 수 있는 [토정비결]의 저자가 되기에 역시 적합하다.
셋째, 이지함은 사대부 선비라는 신분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 기이한 행적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 구리로 만든 솥을 머리에 쓰고 다니다가 그 솥을 벗어 밥을 지어 먹었다거나, 직접 배의 키를 잡아 바다 가운데 소금 산을 찾아 소금을 가득 싣고 돌아왔다거나, 처가의 형세를 보니 장차 화가 미칠 것이라 예측하고 처자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떠났는데 정말로 화가 발생했다거나 하는 등,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정형화된 선비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파격적이면서도 신통하기도 한 그의 행적 이야기 역시 점서(占書)의 저자가 되기에 적합하다. 민생이 극도로 피폐해지고 정치가 부패하며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진 19세기 조선의 앞날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의지할 곳 없는 많은 백성들의 마음속에 ‘토정 이지함’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커졌을 것이다. 그 마음 속 공간에 자리 잡은 [토정비결]은 많은 사람들이 널리 찾는 대표적인 점서가 될 수 있었고, 그와 함께 토정 이지함의 이미지도 그러한 방향으로 더욱 강화되어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이지함은 [토정비결]의 저자 아닌 저자인 셈이다.
‘대인(大人) 이지함’
‘사람들은 안으로는 똑똑하고 강하기를, 밖으로는 부유하고 귀하기를 바란다. 벼슬하지 않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고, 욕심 내지 않는 것보다 부유한 것이 없으며, 다투지 않는 것보다 강한 것은 없고, 알지 못하는 것보다 똑똑한 것은 없다.…알지 못하면서 똑똑하고, 다투지 않으면서 강하고, 욕심 내지 않으면서 부유하고, 벼슬하지 않으면서 존귀한 것은 실로 대인(大人)만이 할 수 있다.’[토정유고]의 ‘대인설(大人說)’ 중에서
부유하고 높고 귀하며 강하고 똑똑한 사람.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이지함은 진정한 큰 사람, ‘대인(大人)’은 무지(無知)의 지, 무쟁(無爭)의 강, 무욕(無慾)의 부, 무관(無官)의 귀를 갖춘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지함의 이러한 역설적인 ‘대인설’은 바로 이지함 자신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신병주의 [이지함 평전]은 이지함의 생애와 사상을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시대 배경과 적절히 관련지으면서 종합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 글의 인용문과 이지함에 관한 정보는 이 책에 빚지고 있다.
출처:(인물한국사, 표정훈)
2024-07-15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