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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7일
서울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시간을 내어 여러곳을 구경하였다. 10월 17일에는 오전에 외손녀 가을 운동회를 참관하고 근처에 있는 하늘공원에 갔다. 하늘공원에는 억새꽃이 절정에 이르는 10월 18일(금)부터 10월 24일(목)까지 7일간 제18회 서울억새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하늘공원은 난지도 쓰레기 매립지를 매워 2002년 5월 개장한 재생공원으로, 낮에는 시민들의 이용이 가능하지만 야간에는 야생동물이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도록 시민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그러나 축제를 여는 7일간은 밤 10시까지 개방한다.
하늘공원에 도착하니까 맹꽁이 전기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긴 줄을 서고 있었다. 맹꽁이 전동차는 주차장에서 하늘공원 입구까지 데려다준다. 차비는 왕복 3000원 인데 차 탈 때까지 30분이 걸리고 표사는 줄도 길게 늘어져 10분쯤 걸리는 것 같아서 줄서서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걸어 올라갔다. 292계단이 조금 힘들지만 슬슬 걸어가면 2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니까 맹꽁이차 타려고 바보 같은 맹꽁이짓 안 해도 되었다.
하늘공원은 올해는 강수량과 일조량이 적당하여 전년 대비 30cm 이상 더 높이 자라 풍성해진 억새밭 경관이 일품이었다. 게다가 코키아(댑싸리)와 핑크뮬리(분홍쥐꼬리새) 그리고 코스모스까지 예쁘게 피어있어 볼만하였다. 야간에는 조명이 들어와서 멋진 광경을 연출한다는데 피곤해서 패스했다. 맹꽁이차 코키아(댑싸리) 갈대 억새 박춘석 지음
필봉은 홍 향수의 돈과 세력을 이용하려고 젊은 누이동생을 칠십 고령의 소실로 주어 버린 모양이니, 여정은 결국 오빠를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어 버림 셈이 아니고 무엇인가? ........
그런 생각을 하며 서당으로 돌아오다 보니, 필봉이 경영하는 백중국 약국에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한밤중에 약국에 불이 환히 켜진 것이 이상하여 김삿갓은 약국에 들러 보았다.
"필봉 선생 계시오니까?"
문밖에서 그렇게 부르자 방안에서 필봉의 대답이 들려왔다.
"삿갓 선생이오? .... 어서 들어오시오."
김삿갓이 무심코 방안으로 들어와 보니, 필봉은 삼십 세가량 되어 보이는 젊은 남녀와 마주 앉아 있었다.
"아, 밤중에 환자가 오신 모양입니다."
김삿갓이 환자가 있는 것을 보고 돌아서 나오려고 하자 필봉은 손을 흔들며 만류한다.
"환자는 곧 돌아갈 것이니 잠깐만 거기 앉아 계시오. 며칠 못 만났으니 술이라도 한잔해야 할 게 아니오."
김삿갓은 술도 술이지만 필봉이 환자를 어떤 식으로 치료해 주는지 궁금하여 윗목에 눌러 앉았다. 환자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인 듯, 필봉은 젊은 아낙네를 보고 말한다.
"젖이 어떻게 아프다는 것인지, 젖을 내놓아 보시오."
젊은 아낙네는 외방 남자 앞에 젖을 내보이기가 거북스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남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자 필봉이 환자를 퉁명스런 어조로 나무란다.
"나는 의원이야! 내 앞에서는 이보다 소중한 물건도 내보이는 법인데, 젖을 보여주기가 뭐가 부끄러워 그러는가? 그래 가지고는 병을 고칠 수가 없지 않은가."
남편 되는 사람은 옆에서 보기가 민망했던지,
"어차피 병을 고치려면 선생님에게 젖을 내보여야 할 게 아닌가. 빨리 내보여요."
하고 재촉을 한다.
환자는 그제서야 옷고름을 풀고, 옷자락을 좌우로 벌려 젖을 드러내 보인다. 김삿갓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젊은 여인의 오른쪽 젖이 고무풍선처럼 시뻘겋게 부풀어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 유종(乳腫)이로구먼!"
필봉은 시뻘겋게 부풀어 오른 젖을 이모저모로 살펴보고 나더니, 옆에 있는 남편을 나무란다.
"이 사람아! 마누라의 젖이 이처럼 곪기까지는 무척 아팠을 것인데, 자네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서방이란 사람이 밤마다 마누라 궁둥이만 두드려 주면 그것으로 그만인 줄 알았단 말인가?"
남편 되는 사람은 무안스러워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아, 아니올시다. 그동안 약국을 여러 군데 찾아 다녔지만 별로 효험을 보지 못해, 결국은 선생님을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음 - 처음부터 나를 찾아올 일이지, 그동안에는 괜스레 돌팔이 의원만 찾아 다녔던 모양이구먼!"
필봉은 한마디로 모든 의원들을 일거에 돌팔이 의사로 처단해 버렸다. 김삿갓은 필봉이 어쩌려고 저렇게 큰소리를 치는가 싶어 옆에서 보기에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환자의 남편 되는 사람도 필봉의 큰소리가 미심쩍었던지,
"선생님은 이 병을 고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필봉은 또다시 큰소리를 치고 나온다.
"예끼 이 사람아! 이런 병을 내가 못 고치면 누가 고친단 말인가."
그리고 이번에는 환자의 얼굴을 마주 보며 묻는다.
"그동안 몹시 아팠지?"
"예, 몹시 아팠사옵니다. 이렇게 곪기까지는 너무도 아파 잠도 제대로 못 잘 지경이었습니다."
"이렇게 마누라는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는데도 불구하고, 서방이라는 자는 무정스럽게도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덤벼들지 않던가?”
남편 되는 사람은 그 말에 다시 얼굴을 붉히며,
"아이 참, 선생님두! 제가 아무리 무지막지하기로, 설마 그렇게야 했겠습니까."
필봉은 그제서야 통쾌하게 웃으며,
"하하하, 사내 녀석들이란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닌가! .... 안 그렇소, 삿갓 선생!"
하고 김삿갓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필봉은 이번에는 환자에게 말한다.
"젊은 아낙네가 무척 예쁘게 생겼으니, 내가 특별히 잘 고쳐주어야 하겠는 걸 .... 내가 이제부터 치료 방법을 잘 일러줄 테니, 자네도 잘 들어 두었다가 마누라에게 꼭 그렇게 해드리게, 내 말 알아듣겠나?"
그리고 필봉은 치료 방법을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이제 집에 돌아가거든, 사람의 똥(人糞)을 한지(漢紙)에 겹겹이 싸가지고 화롯불 속에 묻어 두어서, 그 똥을 구워 내도록 하게.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불이 너무 강하면 똥이 타 버리기 쉬우니까, 똥을 태우지 말고 꼭 구워 내도록 해야 하네.
똥을 구우면 회색 빛깔의 밤알만한 덩어리가 되는데, 그것을 가루로 빻아서, 그 가루를 꿀에 개어 가지고 상처에 붙여 두도록 하게. 그러면 반나절쯤 지나면서 곪았던 젖이 저절로 터지면서 고름이 수없이 흘러나오게 될 걸 세.”
필봉의 치료 방법이 너무도 원시적이어서 김삿갓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것은 환자의 남편도 마찬가지인지,
"사람의 똥을 불에 구워 가지고, 똥가루를 꿀에 개어 바르란 말씀입니까? 그렇게 하면 낫게 되는 것입니까?"
하며 따지듯이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러자 필봉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환자의 남편에게 큰소리로 호통을 지른다.
"이 사람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할 일이지, 자네가 무얼 안다고 미주알고주알 캐묻는가?"
환자의 남편은 호된 책망을 듣고 얼굴을 붉힌다. 27. 유종(乳腫)을 치료하는 민간요법 (하편)
"죄송합니다. 꼭 선생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똥가루를 꿀에 개어 붙이는 곳은 어디에 붙여야 하는 것이옵니까?"
"유종이 처음 시작될 때, 젖 속에 밤알만한 응어리가 생겼다가 그것이 곪고 곪아서 지금처럼 전체가 부어올랐을 것이야. 어때? 내 말이 맞지?"
"예, 그러하옵니다. 처음에는 젖 속에 밤알 같은 응어리가 생기더니, 그것이 점점 곪아서 이렇게 되었사옵니다."
"물론 그랬을 것이야. 그러니까 그 약은 그 응어리가 처음 생겼던 자리에 붙이면 되는 것이야."
"곪았던 고름이 터져 나오면, 그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름을 깨끗이 짜고 나거든, 그때에는 찰밥을 소금에 개어 그 자리에 발라 두도록 하게.
필봉은 자신만만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 한 후, 서랍 속에서 고약 다섯 봉지를 꺼내 주는 것이었다. 환자의 남편은 고약을 두 손으로 받아 들며 말한다.
"이 사람아! 자네는 내가 아니었으면 틀림없이 홀애비가 되고 말았을 걸 세. 마누라 유종이 깨끗이 낫거든 내 덕택인 줄로 알게!"
"그야 물론이죠 ... 약 값은 얼마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필봉은 말을 함과 동시에 김삿갓을 쳐다보며 싱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을 한다.
"죽을 사람을 살려주는 셈이니까 약 값을 제대로 받으려면 천 냥은 받아야 할 것이야. 그러나 자네 마누라가 워낙 미인이라, 내가 특별히 깎아줄 테니 한 냥만 내게!"
환자의 남편은 "천 냥"이라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가, "한 냥"이라는 소리에 크게 기뻐하며,
"약 값을 싸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즉석에서 돈을 내놓자,
"약 값을 특별히 싸게 해주었으니까, 마누라 병이 다 낫거든 술이나 한 병 들고 찾아오게. 그것은 의원에 대한 환자의 예의라는 것이야 ... 삿갓 선생! 안 그렇소이까, 하하하."
필봉은 또 한번 호탕하게 웃으며, 환자더러 어서 가보라고 손짓을 해 보인다. 환자가 가고 나자, 김삿갓은 아랫목으로 내려와 필봉과 마주 앉으며 물었다.
"필봉 선생! 그 여인의 젖이 무섭게 곪은 것 같은데, 똥가루를 발라서 치료가 되겠습니까?"
치료 방법이 너무도 불결하고 유치해 보여서 솔직한 심경으로 물었던 것이다. 그러자 필봉은 정색을 하며 김삿갓을 나무란다.
"똥가루를 꿀에 개어 바르면 유종이 틀림없이 낫는다는 말씀입니까."
"내 말대로 해서 유종이 낫지 않는다면, 내가 환자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말씀이오?"
"필봉 선생이 설마 환자에게 거짓말을 하셨을 리는 없겠지요. 그러나 저로서는 얼른 믿어지지 않아 한번 물어보았을 뿐입니다."
필봉은 그렇게 말하며, 부엌에다 대고 술상을 빨리 차려오라고 호령을 지르는 것이었다.
이윽고 술상이 들어오고, 필봉은 술잔을 나누며 다시 말한다.
"삿갓 선생에게 "동의보감"까지 배우면, 나도 만고에 빛나는 명의가 될 자신이 있어요. 그런데 그 놈의 책을 구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김삿갓은 "명의"라는 말을 듣자, 불현듯 홍 향수가 와병(臥病)중인 사실이 떠올라 이렇게 물어보았다.
"참, 조금전에 집 앞에서 매씨(妹氏)를 만났는데, 향수 어른의 병환은 아직도 좋지 않으신 모양이죠?"
필봉은 그 소리에 흠칫 놀라며,
"삿갓 선생이 내 누이동생을 만나셨던가요? 그 애가 선생한테 무슨 말을 하지 않습디까?"
조금 전에 노상에서 만났을 때 여정은 김삿갓에게 이상한 눈치를 보이며,
"언제 한번 선생님을 조용히 만나 뵙고 싶다"고 분명하게 말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필봉에게 하기가 거북스러워 김삿갓은 시치미를 떼고,
"노상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을 뿐입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혹시 매씨께서 나에게 무슨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던가요?" 하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필봉은 김삿갓에게 술을 권하면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대답한다.
"그 애가 조금 아까 나를 만나러 와서, 삿갓 선생의 옷에 대한 걱정을 하더군요."
"매씨께서 나의 옷에 대한 걱정을 하고 계시더라구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날씨가 추워져서 솜옷을 입을 때가 되었는데, 삿갓 선생은 아직도 겹옷을 입고 계셔서 여자의 눈에는 무척 측은하게 보였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 애가 나더러 <삿갓 선생에게 솜옷을 한 벌 지어드렸으면 싶은데, 오빠 생각은 어떠냐>고 물어보더군요. 나는 그거 참 잘 생각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답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대뜸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말씀만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춥지 않아서 솜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뿐이지, 솜옷이 없어서 겹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행여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도록 전해주십시오. 그런 일을 혹시 향수 어른께서 아시면 어떤 오해를 하실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여정이 솜옷을 지어 주겠다는 호의와 <조용히 만나 뵙고 싶다>는 말 사이에는 깊은 관련이 있는 것만 같아서 김삿갓은 단호한 태도로 거절해 보였다. 필봉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침통한 표정으로 술만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향수 어른의 병세가 암만해도 심상치 않단 말이야."
"향수 어른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뇨? 그게 무슨 말씀 입니까."
필봉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김삿갓을 마주 보며,
"선생이니까 말씀인데, 향수 어른의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별안간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병세가 갑자기 악화라도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사람은 먹어야 사는 법인데, 그 어른이 요즘에는 하루 미음 한 공기로 간신히 연명을 해오시는 중이거든요.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오래 살 수 있겠소이까?"
"일전에 읍내에서 지어 온 보약은 자셨는가요?"
"보약도 소화시킬 만한 기운이 있어야 효과를 보실 게 아니오."
필봉은 거기까지 말하고 또다시 침통한 침묵에 잠겼다가,
"그 애를 향수 어른에게 주어 버린 것은 나의 일생일대의 실수였어."
하고 자탄하듯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필봉의 애타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홍 향수의 돈과 세도를 이용하려고 누이동생을 소실로 들여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러나 홍 향수가 너무 늙어서 남편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데다가, 덜컥 죽어 버리기라도 하게 되면 여정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될 것 아니겠나.
필봉은 지금 그런 경우를 생각하고 혼자 한숨을 쉬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승자박(自繩自縛)이니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할 것이랴. 김삿갓은 그런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아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하고 이렇게 말했다.
"향수 어른이 오늘 내일로 돌아가실 것도 아닌데, 왜 지나친 걱정을 하시오."
필봉은 술을 마셔 가면서,
"물론 나도 향수 어른이 오늘 내일로 돌아가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가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러워요."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으니, 사람의 앞날을 누가 알 수 있겠소이까."
"그야 물론 그렇기는 하지요. 당장 죽을 것 같으면서도 4,5년씩 길게 끄는 목숨도 없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나 어차피 늙고 기력이 쇠약해져 죽을 사람이 목숨만 오래 끌면 무엇하오. 그럴수록 누이동생의 신세만 비참해질 뿐이지요."
김삿갓은 이와 같은 우울한 화제에서 한시 바삐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우울한 애기는 집어치우고 술이나 유쾌하게 마십시다. 이 좋은 술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술맛이 떨어집니다."
"알겠소이다. 그런 애기는 집어 치우고 술이나 마십시다."
술잔이 오고 가는 동안에 두 사람은 어지간히 취했다. 그러나 필봉은 아무리 취해도 누이동생 일만은 잊어버릴 수가 없었던지, 또다시 그 애기를 들고 나온다.
"어머니, 아버지가 돌림병으로 한꺼번에 돌아가신 것은 그 애가 여섯 살 때의 일이었지요. 그때부터는 그 애를 내가 맡아 길러 왔으니까, 그 애는 말이 누이동생일 뿐이지 나에게는 딸이나 다름없는 아이예요."
"매씨 애기는 안하기로 해놓고, 그 애기를 또 끄집어내면 어떡합니까?"
"그 애의 장래가 너무도 암담해 보여서 그래요. 본인이 싫다는 것을 내가 우겨서 향수 어른의 부실(副室)로 들여보냈거든요."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 마당에,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그야 그렇기는 하지만 ...."
필봉은 한동안 침통한 표정을 짓더니, 문득 이런 말을 한다.
"그 애가 머지않아 과부가 될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만약 그렇게 되면 삿갓 선생은 그 애를 불쌍하게 여겨서 적당한 기회에 거두어 주실 용의는 없으시겠소?"
김삿갓은 필봉의 말을 듣고 기절초풍을 할 듯이 놀랐다. 홍 향수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죽거든 그의 소실인 누이동생을 거두어 달라는 말은, 아무리 가상의 말이라 하여도 있을 수 없는 부탁이었기 때문이다.
"에이, 여보시오. 필봉 선생! 주정을 해도 분수가 있지, 그게 무슨 말씀이오. 그런 소리는 두 번 다시 하지 마시오."
그러나 필봉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나는 주정이 아니고 진담이에요. 삿갓 선생도 언제까지나 독신으로 지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내가 왜 독신입니까. 관서 지방을 구경가는 길에 필봉 선생에게 붙잡혀서 이곳에 잠시 머물러 있을 뿐이지, 고향에는 처자식이 멀쩡하게 살아 있습니다."
"처자식이 있기로 그게 무슨 상관이오. 사내자식이 오죽 못났으면 마누라 하나만 데리고 산단 말이오. 그 애는 제법 쓸 만한 아이라오. 가만히 보니까 그 애도 삿갓 선생을 남몰래 흠모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삿갓 선생의 옷 걱정을 할 이유가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 애가 만약 불행하게 되거든, 선생이 그 애를 꼭 거두어 주시오. 나의 간곡한 부탁이에요."
김삿갓은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술 취한 사람을 상대로 더 이상 애기를 해보았자 귀결이 맺어질 것 같지 않아서,
"그런 애기는 그때에 가서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오늘은 술이나 마십시다."
하고 억지로 필봉의 말을 막아 섰다.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김삿갓 생각에는, 필봉이 워낙 끈기가 강한데다 무슨 일이나 자기 본위로 밀어붙이는 성격인지라, 그의 함정에 빠져들까 봐 내심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필봉은 새삼스럽게 술을 권하면서,
"우리가 언젠가는 남매간이 될 것을 나는 꼭 믿고 있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술을 한잔 받아 주시오."
하고 나오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술잔을 받기는 하면서도 속으로는 겁이 나 견딜 수 없었다. 필봉이 언제 무슨 술책을 부려 자기를 업어 넘기려고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그날부터는 이곳을 떠나 버릴 궁리를 골똘히 하게 되었다.
(어차피 나는 언젠가는 이 마을을 떠나야 할 몸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루속히 후계자를 구해 놓고, 나는 나대로 다시, 방랑의 길로 오르리라.)
필봉과 헤어진 김삿갓은 후계자를 사방으로 구하면서, 필봉과의 만남은 의식적으로 피해가면서 날마다 망월정에 올라가는 것을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아오고 있었다.
김삿갓이 필봉을 경계하며 지내던 어느 날 밤, 김삿갓이 정신없이 잠을 자고 있는데 이불 속에서 여자의 목소리로
하고 작은 소리로 김삿갓을 부르며 몸을 흔든다. 김삿갓은 자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며,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이불 속의 여인은 놀라 일어나려는 김삿갓의 몸을 짓누르며 침착한 어조로,
여정은 김삿갓의 팔을 힘주어 움켜잡으며 호소하듯 속삭인다.
"오라버니께서 오늘밤 삿갓 선생님을 모시라는 말씀이 계셔서 체면없이 이렇게 모시러 온 것입니다."
"오라버니의 말씀이 없었더라도 저는 오래 전부터 삿갓 선생님을 사모하고 있었어요."
"당신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소. 당신에게는 홍 향수가 있는데 이럴 수가 있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삿갓은 젊은 여인의 육체가 몸에 닿는 순간부터, 전신이 후끈 달아오르는 본능적인 욕구가 터져 나오려는 화산처럼 꿈틀거렸다.
여인은 김삿갓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말이 없었다. 그제야 깨닫고 보니, 여인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여인이 울고 있음을 깨닫자, 김삿갓은 별안간 측은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울기는 왜 우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애기 좀 들어 봅시다."
여인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울음 섞인 음성으로 호소하듯 말한다.
"싫으면 처음부터 들어가지 말아야 할 일이지,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떡하오?"
김삿갓은 못마땅하게 여겨져서 의식적으로 꾸짖어 보였다. 그러자 여인은 어깨가 들먹이도록 울어 대더니, 문득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때만 하여도 제가 철이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삿갓 선생님을 알고 나서는 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졌어요."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다니, 뭐가 어떻게 달라졌다는 말이오?"
김삿갓은 그렇게 반문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여인의 등을 정답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여인은 김삿갓의 팔을 두 손으로 힘주어 움켜잡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은 옳게 생각했구려. 인생이 돈만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혹시 나는 지금 필봉의 흉악한 음모에 걸려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윽고 멀리서 새벽 닭소리가 들려오자, 여정은 그제야 자기 정신으로 돌아왔는지, 이불 속에서 일어나 앉으며, 무척이나 아쉬운 어조로 말한다.
"날이 밝아 와요. 누가 보기 전에 저는 돌아가야겠어요."
"제가 돌아가고 나거든 한잠 더 주무세요. 이따가 오라버니께서 무슨 말씀이 있겠지만, 오늘밤이나 내일 저녁이나 형편 보아서 또 오겠어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쭉 돋았다. 왜냐하면, 자기는 지금 필봉의 음흉한 계략에 말려들었음을 분명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일어서려는 여정의 치맛자락을 부랴부랴 움켜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여정은 하룻밤 사이에 정이 들었는지, 김삿갓의 어깨를 이불로 감싸 주면서 스스럼없이 말한다.
"고단하실 텐데 주무시지 않고 무슨 말을 물어보시려고 그러세요."
말할 것도 없이 여정이 안심하고 입을 열게 하려는 김삿갓의 의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여정은 자못 행복스런 웃음을 보이며 김삿갓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아까는 맘대로 찾아왔다고 야단을 치시더니, 그동안 마음이 변하셨어요?"
"우리는 이미 남남지간이 아니지 않은가, 이제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아?"
김삿갓은 손을 뻗어 여정의 젖가슴을 만지던 손을 엉덩이 쪽으로 옮겨, 정답게 어루만져 주다가 별안간 생각이 난 것처럼 물었다.
"참, 당신은 오라버니가 나를 모시라고 해서 마지못해 찾아온 것처럼 말했는데, 오라버니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을 한 것이 사실인가?"
여정은 김삿갓이 당신이라는 말로 자신을 불러주자, 얼굴에 기쁨의 빛이 들면서 눈이 초롱초롱 해졌다. 그러나 대답만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잠시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저는 오라버니의 말씀이 없었더라도 언젠가는 삿갓 선생님을 찾아왔을 거예요. 저는 그만큼 삿갓 선생님을 사모하고 있었던 걸요."
"나같이 못난 사람을 그처럼 사모하고 있었다니 고맙군 그래… 오라버니가 뭐라고 하면서 나를 모시라고 하던가?"
"향수 어른이 돌아가시거든 삿갓 선생님과 결혼시켜 줄 테니, 지금부터 정을 통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김삿갓은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실상인즉 필봉의 무시무시한 음모에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혹시 삿갓 선생님은 어젯밤의 일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 말에 여정은 자신 있는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오래가지 못하다니?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그러자 여정은 김삿갓의 손을 꼭 움켜잡고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 애기는 누구한테도 말할 수가 없는 일이지만, 그 영감님은 열흘 안에 꼭 돌아가시게 되어 있어요."
김삿갓은 음모의 진상을 좀 더 상세히 알고 싶어, 슬쩍 이렇게 물어보았다.
"홍 향수는 지난 겨울부터 돌아가신다고 하면서 아직도 살아 있는 분이 아닌가? 그런 분이 열흘 안으로 죽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느냐 말야."
"그 문제는 걱정하실 것 없어요. 오라버니가 그러시는데, 이번만은 틀림없이 돌아가신다는 거예요."
"다르기는 뭐가 달라. 우리 사이에 숨길 일이 뭐가 있겠는가.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해 주어요. 그래야 나도 당신을 믿고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을 것 아닌가."
그 말에 여정은 무척 감격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 놓기가 너무도 거북스러운지 한동안 주저하는 빛을 보이다가,
"오라버니가 이번만은 그 양반한테 특별한 약을 쓰고 계신 것 같아요."
김삿갓은 자신의 추측이 적중한 데 대해,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놀라며,
하고 예사롭지 않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이 문제만큼은 여정도 정확하게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어떤 약을 쓰고 계시는지 그것만은 저도 몰라요."
김삿갓은 그 대답 한마디로 필봉의 음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필봉은 지금 홍 향수를 독살하려고 그에게 보내는 약에 독약을 섞어 먹여 오고 있었던 것이다.
"홍 향수가 열흘 안에 죽게 되면, 우리들은 그때부터는 마음대로 만날 수 있게 되겠지?"
"그 양반만 돌아가시면 저희들의 문제는 마음대로 될 수 있을 거예요."
"알았어! 그러면 그때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늦기 전에 어서 가 보아요!"
"그럼, 가겠어요. 무슨 일이 생기면 곧 알려드리겠어요."
여정은 커다란 희망을 품고, 유령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필봉은 지금 홍 향수를 독살하고 있는 중인데, 그를 살려 낼 무슨 방도가 없을까?)
(가만있어 보자, 홍 향수가 죽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건 안 될 말이다. 사태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엇을 주저하랴.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당장 이 시간에 멀리 도망을 쳐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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