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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 선생 16
오락가락하는 미국의 대한정책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해방직후 미국의 대한정책은 일관된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대외정책을 담당하는 미 국무성과 현지 주둔군을 휘하에 둔 펜타곤(국방성)의 생각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뉴딜 정책을 추진한 루즈벨트 대통령 휘하의 미 국무성엔 진보적인 관리들이 많았다는 점이 있다.
우리가 상기해야 할 점은 적어도 2차대전 기간 동안에는 이념이 서로 다른 미소가 연합국이었다는 사실이고, 따라서 국제무대에서 서로 협조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전략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펜타곤의 생각은 처음부터 달랐다.
그들은 공동의 적이었던 추축국(독-이-일)이 사라진 이후 소련은 미국의 가상적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후의 세계에서 미소는 협력적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관계로 날아갈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2차대전 중 이승만의 손길이 닿아 있던 곳은 미 국무성이 아니라 펜타곤이었다.
종전후 이승만은 즉시 귀국을 원했으나 미 국무성에서는 이승만의 여행증명서를 발급해주지 않았다.
당시 하와이 소재<동지회>의 회보를 보면 이승만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미국무성을 원망하는 편지를 싣고 있다.
미 국무성이 이처럼 이승만의 귀국을 방해한 배경은 1943년경 미국 내의 교포 1만여 명의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이승만은 결코 한국 주민 전체를 대표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까닭이다.
당시 미국에는 이승만의 동지회와 안창호 계열의 국민회, 그리고 김용중, 김호 등의 진보세력으로 3등분 되어 있었다.
여기서 발을 동동 구르던 이승만에게 동경까지 가는 군용기편을 제공한 것은 펜타곤이었다.
2차대전 중 창설되었던 OSS에는 작전국장 굿펠로우가 있었다.
1942년 이승만은 미국내에서 <일본의 안과 밖(Japan Inside Out)> 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일본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던 당시 미국의 상황에서 이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특히 작전국장 굿펠로우의 눈길을 끌었다.
그래서 굿펠로우는 이승만을 불렀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일본 본토에 투입할 특공대원으로 생긴 것도 비슷하고 일본말도 잘 하는 한국 청년들을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작전국장 굿 펠로우는 이승만의 제안을 채택하여 한국인 특공대원 1백명을 양성하기로 하고, 이 계획이 추진되어 중국 내에서 한국인 OSS 요원들을 양성하게 된다.
이때 중국에서 OSS 요원으로 양성된 사람들 가운데 장준하, 김준엽 등이 있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때 양성된 OSS요원들은 미국의 원폭투하로 그 필요성이 없어져 결국 일본 본토에 투입되지는 않았으나, 아무튼 이런 일을 추진하면서 이승만은 펜타곤과 깊은 유착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이승만은 사실상 굿펠로우의 소개로 미 군용기를 타고 동경으로 날아가 맥아더 사령관을 만나게 되었던 것인데, 이때 맥아더 사령관은 한국 책임자였던 하지 사령관을 동경으로 불러들여 3자 회동을 가졌다.
이승만의 참모였던 T.S 올리버의 회고록을 보면 이 자리에서 3인은 일본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공산세력의 남진을 한반도에서 막아야 한다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한다.
반공노선으로 급선회하는 미국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국 군부 현지 사령관들의 생각이었다.
이 무렵까지도 미 국무성은 소련과의 협력관계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 1945년 말의 신탁통치 안이었다.
하지 사령관은 현지 사령관이지만 남한 책임자이기도 했으므로 미국무성의 지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속마음은 반공노선이더라도 일단은 국무성의 지령에 따라 중도노선의 지도자를 찾아야만 했다.
여기서 중도노선의 지도자로 여운형-김규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당시 미 국무성과 G-2의 자료를 보면 이것은 미 국무성의 지령이기도 했다.
속마음이야 어쨌든 미 국무성의 지령에 따라 중도노선의 인물을 앞세우려는 하지 사령관의 태도에 이승만은 배신감을 느끼게 되며, 그 결과 상당한 정도까지 하지와 이승만의 불화가 진척된다.
그러나 미 국무성의 대소협력 방침은 소련이 동구와 남구 지역으로 전진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1947년 중반부터 철회된다.
이 무렵 미국 정가에서는 소련과의 협력무드가 깨졌고, 뒤이어 매카시즘 선풍이 불면서 미 국무성 안에 있던 진보적 관리들이 빨갱이로 몰려 투옥되는 사태를 빚으면서 미국의 대한정책도 반공노선으로 급선회하게 되고, 여기서 중도노선의 핵심인물이던 여운형 선생을 암살하려는 우파의 자신감이 생기게 된 것이다.
나침반
좌우합작의 추진 과정에서 여운형은 극우파로부터 그리고 극좌파로부터 끊임없는 방해와 견제와 질시를 당했다.
박헌영은 좌우합작을 추진하는 여운형에게 “미국 놈에게 놀아나지 말라.”는 모욕을 주었고, 극우파는 “빨갱이”라고 낙인을 찍었으며, 일부 사람들은 “좌도 우도 아닌 회색분자.” 라고 매도했다.
이에 대해 여운형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왕년 필리핀에 갈 때 여객선 항해실에 들어가 나침반을 구경한 일이 있는데, 그때 보니 북쪽을 가리키고 있어야 할 바늘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전후좌우로 움직인 것은 배인데, 나침반은 북쪽을 고수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더러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고 손가락질하는 모양이나, 만일 배가 요동치는데 나침반이 계속 한 곳에 멈춰 있다면 그 바늘은 고장 난 것이다. 지금 파도처럼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나는 좌우합작의 노선을 일관되게 고수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내외 공격에 시달려 1946년 말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여운형이 다시 근민당을 창건하고 김규식과 좌우합작운동에 나선 것은 제2차 미소공위의 개최를 2개월 앞둔 1947년 4월부터였다.
이 무렵 좌우합작의 성공 가능성은 높아 모였다.
마침내 그해 개최된 미소공위의 협의 규정에 따라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합동회의에 참석했다.
여운형은 김규식, 홍명희, 김창숙 등과 만나 통일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통일전선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다시금 세간의 이목이 여운형에게로 쏠렸다.
암살 경고서한
이 무렵 극우파는 박헌영의 극좌파와 함께 좌우합작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여기서 이승만과 하지의 불화는 극에 달했고, 마침내 하지는 이승만을 대신할 우파 보강책의 하나로 서재필을 미국서 불러들였다.
1947년 7월 1일, 여운형과 김규식은 서재필을 환영하기 위해 인천항으로 마중 나갔다.
이때 서울로 올라오는 승용차 뒷좌석에는 서채필, 여운형, 김규식 세 사람이 동승했다.
신문에 보도된 이 한 장의 사진은 앞으로의 정국 주이가 어디로 향하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기도 했다.
여기서 극도로 분개한 것이 판에 끼지 못한 극우파였다.
그들은 여운형의 암살을 계획했다.
여운형과 함께 합작운동에 나선 김규식은 인품이 훌륭하지만, 대중성에서는 여운형에 필적하지 못했다.
따라서 극우파의 생각은 여운형을 제거하면 여운형-김규식 주도의 좌우합작 운동은 깨질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여기에 위에서 언급한 미국의 대한정책 변경이 첨가된다.
1947년에 들어서면 이미 미국은 동구와 남구지역에서 남진정책을 강행하는 소련과의 협력무드가 깨지고, 뒤이어 매카시즘의 분위기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해 5월, 이 가은 미국 정가의 분위기를 극우파에게 전달 하러온 특사가 있었다.
그는 당시 덕수궁에서 진행 중인 제2차 미소공위도 결렬될 것 이라는 정보를 귀띰해 주었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극우파는 미군정하의 한국인 경찰세력과 연계하여 여운형을 암살하기로 계획했던 것이다.
이러한 극우파의 움직임을 파악한 하지는 그해 6월 28일자로 극우파의 수장에게 여운형을 암살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서한을 보냈고, 격분한 극우파의 수장은 그 답장을 도하 신문에 공개적으로 게재하면서, “암살을 하다니 천부당만부당한 얘기다. 누가 그런 정보를 주었는지 3자대면을 시키라.” 고 하지에게 반박했다.
이 무렵 미 군정에서는 잦은 테러를 당해온 여운형을 보호하기 위해 미군 헌병을 경호원으로 붙여주겠다고 했으나,
“대중과 함께 살아온 내가 어찌 대중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되겠는가?”
하고 여운형은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나 극우파는 여운형의 암살에 자신들의 사활이 달려 있다고 보았다.
하지사령관의 경고서한이 발송된 지 20여일 뒤인 그해 7월 19일 여운형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이 쏜 두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승용차 뒷자리에 동석해 있던 고경흠이 “선생님, 선생님!” 하고 어깨를 흔드니 여운형은, “조국...조선!” 두 마디의 말을 입에 올렸으나 종내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아직 심장이 뛰고 있었으므로 일행은 급히 서울대학 병원으로 옮겼으나 맥박을 만져본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사건을 담당한 검찰은 여운형을 암살한 자가 북한에서 넘어온 21세의 중도좌파 한지근의 돌출행동이었다고 발표했으나, 이를 믿었던 사람은 별로 없고, 지금까지도 그 진상은 파헤쳐진 것이 없다.
그의 장례식에는 죽음을 슬퍼하는 서울 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노제가 진행되는 광화문에서 동대문 운동장까지 인파는 거리를 가득 메웠으며, 장례식이 진행된 동대문 운동장은 수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운구차에 뒤이어 40여대의 차량이 뒤 따른 가운데 북한산 기슭 태봉 숲속에 구슬픈 봉도가가 울려 퍼졋다.
아! 우리의 몽양선생
위대한 지도자 인민의 벗
땅 위에 떨어진 거룩한 피는
여기 인민의 가슴에 뭉쳐 있나니
고이 잠드시라 우리의 몽양 선생
우리는 기어코 원수를 갚으오리다.
고인의 유해는 부인 진씨의 손으로 취토가 뿌려지는 가운데 대지의 품에 안겼다.
향년 62세.
한 시인은 여운형의 죽음을 이렇게 노래했다.
하루 낮의 꿈같은 님의 소식을
젊디젊은 나더러 믿으란 말가
은하수 서천으로 흘러가는데
뻐꾹새 뒷산에서 울지 않던가
이강산 골짜기의 골짜기마다
불행한 형제들의 서러운 눈이
님을 믿어 헤메며 찾지 않는가
무엇이랴 이 땅에 님이 없다고
별빛이 스러지듯 아주 가신 것
다시는 뵈올 길이 다시없다고
믿으랴 안 믿으랴 믿어야하나
아니로다 님께선 여기계시다
피에 적은 깃발을 나부끼면서
울부짖는 형제들 노호 속에서
님께선 우리들과 함께 가시네
저어기 앞장서서 나아가시네
여운형에 대한 평가
장례식장에서 당시 미국총영사 윌리엄 랭던은 여운형을 이렇게 평가했다.
“여운형 선생은 혁명가로서 정치적 식견이 탁월하며 개인적 교제에 있어서도 남을 중상함을 모르는 힘을 가졌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의 감시가 심해서 그다지 만나지도 못했지만 해방 후에는 개인적 교제도 많았는데, 여 선생은 다른 미국 요인들과도 깊은 친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비명에 숨졌을 때, 내 기엇에 남아 있는 모든 말과 행동을 종합하고 분석함으로써 내가 도달한 결론은, 여 선생은 개인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소련보다는 미국과 더 가까웠지만 정치적으로는 이들 양국에 가급적 빨리 한국으로부터 물러나게 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한국 현대사의 권위인 전 펜실베니아대학 교수 이정식은 금년 초 동아일보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몽양 여운형이 여태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다. 몽양을 빼고 독립운동사를 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한국독립운동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기 때문에 몽양의 발자취를 너무나 잘 안다. 그는 1918년 중국 상하이에서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해 조선민족의 독립염원을 세계에 선포하게 하고, 장적수를 조선과 일본에 보내 그 소식을 전함으로써 3.1운동의 계기를 만들고, 임시정부 외무위원장을 맡아 대외선전의 주역이 되고, 1919년 말 일본 도쿄에 가 기자들에게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그는 또 1921년엔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나 조선독립을 논의하고, 상하이에 있는 동안 안창호와 거의 매주 연락을 포함한 중국지도층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등 자랑스러운 일을 많이 해냈다.”
“물론 그는 공산당에 협조하기도 했고 공산당으로부터 이용도 당했다. 1921년에는 고려 공산당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진정한 민족운동가였다. 레닌은 그에게 ”조선은 이전에는 문화가 발달했지만 현재는 민도(民度)가 낮기 때문에 당장 공산주의를 실행하는 것은 잘못이고 지금은 민족주의를 실행하는 편이 낫다.“고 했는데 몽양은 이에 동조했을 뿐 아니라 이를 신념으로 삼고 있었다. 그는 착취가 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인도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모든 형태의 독립운동을 도왔지만 기독교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유물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폭력 혁명에도 반대했다. 서울 승동교회에서 7년간 전도사로 시무했던 경험과 신앙이 그의 사상과 행동에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중단된 공식 추모제
그러나 이 같은 평가들에도 불구하고 그 뒤 정권을 장악한 정적들은 여운형을 ‘빨갱이’로 몰아 공식 추모식도 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여운형의 추모식이 열린 것은 아직 남한 정부가 들어서기 전인 1948년 7월 19일 한 번 뿐이었다.
여운형의 공식적인 추모식이 다시 재개된 것은 그로부터 17년 뒤인 1965년이었다.
이해 7월 19일 준비위원장에는 이갑성, 고문으로는 당시 대통령 박정희, 당시 국회의장 이효상, 전 대통령 윤보선 등 24명이 선정되었고, 다시 각계각층의 저명인사 359명이 위원으로 위촉되어 시민회관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그러나 정국이 경직되면서 여운형의 공식 추모식은 다시 금지되었다.
그러다가 정국이 완화된 6공에 들어서서 몽양선생의 추모비가 건립되었고, 다시 1991년 7월 30일 현 <몽양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의 전신인 <추모사업회>가 발족되었다.
이후 해마다 사업회에 의해 공식 추모제가 열렸다.
그리고 2005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 장이 수여되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당초 북한산에 안장되었던 여운형의 묘소는 현재 수유리 묘소로 이장되어 있다.
어떤 독후감
현재 여운형에 대한 전기는 3종류가 나와 있고, 그를 주인공으로 한 대하소설 1종류가 출간되어 있으며, 수많은 학술논문이 발표되어 있다.
그 가운데 여운형의 전기를 읽은 김용범은 다음과 같은 소감을 최근 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 남겼는데, 공감할 부분이 많이 이를 부분적으로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역사의 현실에 남길 수 있었던 흔적이 적었다 하더라도, 여운형 선생은 현실에 남길 수 있었던 흔적 이상의 지표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위대성을 무시 할 수 없는 인물이다. 자주를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론 현실과의 타협도 숙고하는 그 모습은 현재의 ant 정치가들이 되새겨야 할 귀감이다. 그리고 친화적이면서도 인위적이지 않은, 정적들마저 탄복했던 완벽에 가까운 인간적 매력도 단순히 정치가나 운동가를 떠난 한 인간으로서의 매력이야말로 후세인의 귀감이다.”
“보통은 자의 또는 타의로 이데올로기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그 정치적 삶을 마쳤던 게 해방 정국의 노정객들의 보인 모습이지만, 고려대 최창집 교수의 말처럼 좌우 모두 최대강령적 이념과 실천이 지배적이었던 해방정국에서 몽양 선생은 최소강령적 실천으로 열린 민족주의를 견지하고 관용을 정신으로 하는 지도자 상을 보여 주었다.”
“이상주의자는 이상에 취해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은데, 여운형 선생은 현실을 잊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어두운 눈길을 꿋꿋이 걸어 나갈 수 있었던 미스터 코리아였다. 그 찬연함이 백주 대낮의 두발의 총성으로 영영 꺾이고 말았다는 점이 조국을 위해 너무나 아쉬운 일이지만, 여운형 선생을 죽인 음모가들도 남북분단정부의 수립과 6.25라는 비극이 닥쳤을 때 어쩌면 죄우합작으로 일관했던 여운형 선생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큰 인물은 사라지고 난 뒤라야 그 빈자리를 알 수 있듯, 여운형 선생 같은 거대한 인물이 스러지고 나서야 그들은 남은 현실이 너무나 차갑다는 것, 그리고 민족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끝-
첫댓글 " 현실을 잊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암울한 시대에, 그래도 이렇게 위대한 지도자가 계셨다는 것으로나마 위안이 되는군요. 애쓰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평화가 함께하시길~~~~
아참 원본은 각글에 답글로 올려놨습니다.
관심가져주시고 답글달아주신 별밤님게서도 하루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_^
덕분에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라미드님 타자치느라 수고하셨습니다..항상 수고로움에 감사드립니다..^^;
아이구 체로키동지님 요즘 제가 바빠서 아침시간 외에는 어떻게 시간이 잘 안나는군요. 다음에 한번 시간나면 귀신들출근시간에 카페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