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만 하던 손에 ‘주걱’ 쥔지 20년, 서울역 무료배식 김범곤 목사
지난 13일 저녁 7시.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 사람들이 하나 둘 서울역 지하도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한 줄에 대여섯 명씩 열을 맞춰
앉는 사람들. 그런데 차림을 보니 이들은 모두 노숙자들이다. 어느덧 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을 때쯤 김범곤(60·예수사랑선교회
대표) 목사가 그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는다.
“저도 여러분처럼 알코올 중독자였고 사회의 골칫거리였습니다.”
서울역 주변 노숙자들에게 20년째 무료배식을 해온 김목사는 배식을 하기 전 이렇게 매번 설교를 한다. 한 명이라도 마음을 바꾸고 새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사뭇 진지하게 김목사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 5~10분 정도의 짧은 설교가 끝나고 사람들이 줄지어 배식을 받기
시작한다.
◆서울역 무료배식 20년째, ‘자장면’에서 ‘사랑의 등대’까지
올해 나이 어느덧 60이 된 김목사는 지난 1989년부터 서울역 일대에서 무료배식을 실시해 왔다. 당시 식사를 해결하지 못한 채 서울역
주변을 배회하던 조선족이나 중국인들에게 중국집과 계약을 맺어 자장면을 대접한 것이 20년 무료배식의 첫 시작이었다. “한 번에 자장면
80~100그릇 정도를 대접했는데 금세 돈이 다 떨어지고 말았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중도에 그만둘 수 없었던 그는 자금사정상 자장면을 컵라면으로 대체하는 대신 배식인원을 점차
늘려나갔다. 그 과정에서 배식을 받는 노숙자들의 비중이 점차 늘어났고, 1991년 예수사랑선교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후암동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서울역을 ‘거지 소굴’로 만든다는 이유로 경찰들의 방해가 심했어요. 하지만 꿋꿋하게 하루 이틀 배식을 계속 이어나갔고,
IMF 때는 8,000명 정도가 무료 급식을 이용할 정도가 되었죠.”
이렇게 지난 20년 동안 서울역을 지켜온 김목사는 올해 4월 서울시 중구 중림동에 노숙자 긴급구호센터인 ‘사랑의 등대’를 개원했다.
‘사랑의 등대’는 약 660㎡(약 200평) 규모로 한 번에 200여명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는 식당과 500명분의 식사를 조리할 수 있는
취사장이 함께 갖춰져 있다.
현재 ‘사랑의 등대’는 서울역 주변 노숙자 1,000여명에게 아침(화~토)과 저녁(수~금, 일)을 무료로 배식하고 있으며, 음식 준비,
배식, 설거지 등을 자발적으로 돕는 봉사자 10~20명으로 운영되고 있다. 김 목사는 “공식적인 후원자는 20명 내외인데 신기하게도 부족할 때면
항상 누군가 채워주세요. 가령 자고 일어났더니 수박 300통이 배달되어 있거나 하는 식이죠. 그래서 회계가 따로 없고 식단도 짜지 않지만
불안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 ▲ 배식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
◆ “저도 원래 ‘건달’. 그래서…”
경남 마산고 출신인 김 목사는 학창시절 공부를 썩 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상 1년을 공부하면 다음해는 쉬어야 했고,
자연스레 동네 건달들과 어울려 다니게 되었다. “부모님께서 3남 2녀 중 장남인 저에게 기대가 크셨는데, 저 때문에 두 분 모두 화병으로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교복 입은 아들에게 소고기 국밥을 사주시며 자랑스러워하던 분들이었는데….”
젊은 시절 세상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던 그는 전역 후 알코올 중독에까지 빠지며 사회의 골칫거리가 되어갔다. 하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는 네온사인 제조와 실내장식 등의 일을 하며 신앙에 대한 확신을 키워 나갔다. 그러다 결혼 후 30대 중반을 넘길 무렵 그는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게 된다.
“저 스스로가 원래 ‘건달’이었고 ‘알콜 중독자’였기 때문에 노숙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잘 알고 있었고요.”
김 목사는 “노숙자들에게 밥을 주는 것만으론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 “그들이 다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희망자들에게 6개월간
사회적응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예수사랑선교회는 경기도 양주에 훈련소를 마련해 놓고 희망자들에 한해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유도하는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사랑의 등대’에서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전직 노숙자’ 출신들이 더러 있다. 김 목사의 봉사와 사역으로 마음이
변한 사람들이 이제 반대로 봉사를 베풀고 있는 것. “며칠 전에도 ‘여기’ 출신의 총신대 학생이 찾아왔어요. 늦게나마 사회에 필요한 사람으로
거듭난 모습을 보니 정말 뿌듯했답니다.”
◆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김 목사가 지난 20년간 서울역에서만 사랑을 실천한 것은 아니다. 2002년 태풍 루사가 휩쓸고 간 강릉, 2003년 태풍 매미가 지나간 삼척, 2006년 홍수 피해를 입은 인제에도 김목사가 있었다. 특히 지난 2007년
태안 기름유출 사고가 발생하였을 때 김목사는 천리포와 신노루에 ‘밥공장’ 2개를 운영하며 하루 평균 6,000명분의 식사를 제공했다.
“최근 경제가 어려운 탓인지 작년보다 200~300명 정도 배식인원이 늘어났다”는 김목사는 “세상이 많이 변한 것 같다”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자기 부모도 ‘고려장’ 하는 시대라지만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은 것 같아 씁쓸합니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아직까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삶의 여유가 부족한 것 같아요.”
벌써 20년째 묵묵히 걸어온 길. 김목사는 다시 또 20년을 준비하고 있었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식사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분명
많이 생길 겁니다. 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우리의 것이라 생각하고 함께 나누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도록 앞으로 더 노력해야죠.”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그리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는 김목사는 인터뷰를 마칠 때쯤 “원래 명함이 없다”며 ‘사랑의 등대’
전화번호(02-754-0031~2)를 적어주었다. “젊은 청년들이 직접 찾아와 봉사를 하며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홈페이지를 만들까도 생각 중인데 도움주실 분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2010년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