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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원사화(揆園史話)
於是檀君西至(王)
[壬]儉城, 按撫庶民, 大會諸侯, 令復申天下[農桑之政. 乃北巡而祭天于太白之麓, 封天下]45)
山嶽河川之神, 凡三千餘. 歷牛首忽, 而至肅愼忽, 會北東諸侯, 令祭神誌氏之靈, 遂立廟于夙沙達. 西轉而至奄慮忽, 會南西諸侯, 令祭蚩尤氏之靈, 遂立廟于奄慮達. 復南巡而至甲比古次, 祭天于頭嶽之顚. 遂至樂浪忽, 會南東諸侯, 令祭高矢氏之靈, 遂立廟于蘇婁達. 乃還至平壤, 八加及衆諸侯畢集.
그리하여 단군은 서쪽으로 임금성에 이르러 모든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제후들을 크게 모아 명하기를, 다시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을 천하에 널리 펴게 하였다. 이에 북쪽으로 순행하여 태백산의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의 산악과 하천의 신을 봉하니46) 무릇 3천 곳 남짓 되었다. 우수홀을 지나 숙신홀에 이르러 북동의 제후들을 모아 명령하기를, 신지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숙사달(夙沙達)에 사당을 세웠다. 서쪽으로 돌아 엄려홀에 이르러 남서의 제후들을 모아 명령하기를, 치우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엄려홀에 사당을 세웠다. 다시 남쪽으로 순행하여 갑비고차에 이르러 두악의 꼭대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마침내 낙랑홀에 이르러 남동의 제후들을 모아 명하여 고시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소루달(蘇婁達)에 그 사당을 세우고는 평양으로 돌아오니 팔가(八加)와 뭇 제후들이 모두 모였다.
檀君乃使諸加及國內人民, 各獻祭于日月.陰陽.四時之神, 及山岳.河川.里社之主. 祭畢, 大誥于有衆, 若曰:
惟皇, 一神在最上一位. 創天地, 主全世界, 造無量物, 蕩蕩洋洋, 無物(不)
[弗]包, 昭昭靈靈, 纖塵弗漏.
惟皇, 一神在最上一位. 用御天宮, 啓萬善, 原萬德, 群靈護侍, 大吉祥, 大光明, 處曰神鄕.
惟皇, 天帝降自天宮, 率三千團部, 爲我皇祖, 乃至功完而朝天, 歸神鄕.
咨爾有衆, 惟則天範, 扶萬善, 滅萬惡, 性通功完, 乃朝天.
天範惟一, 弗貳厥門, 爾惟純誠一爾心, 乃朝天.
天範惟一, 人心惟同, 惟秉己心, 以及于人心, 人心惟化, 亦合天範, 乃用御于萬邦.
曰: 爾生由親, 親降自天, 惟敬爾親, 乃克敬天; 以及于邦國, 是乃忠孝, 爾克體, 是道. 天有崩, 必克脫免.
飛禽有雙, 弊履有對; 爾男[女], 以和, 毋怨.毋妬.毋淫.
爾嚼十指, 痛無大小; 爾相愛毋胥, 讒互佑毋相殘, 家國以興.
爾觀于牛馬, 猶分厥추; 爾互讓毋胥奪, 共作毋相盜, 家國以殷.
爾觀于虎, 强暴不靈, 乃作얼; 爾毋桀오以장物, 毋傷人, 恒(導)
[遵]爾天範, 克愛物. 爾如有越厥, 則永不得神佑, 身家以殞.
爾如衝火于(花)
[華]田, (花)
[華]將殄滅, 神人以怒; 爾扶傾, 毋凌弱, 濟恤, 毋侮卑.
爾雖, 厚包厥(杳)
[香], 必漏; 爾敬持彛性, 毋懷慝, 毋隱惡, 毋藏禍. 心克, 敬于天, 親于民, 爾乃福祿無窮. 咨爾有衆, 其欽哉!
단군은 이에 뭇 가(加)와 나라안의 인민들로 하여금 각기 일월과 음양 및 사시(四時)의 신과 산악과 하천 및 마을의 주인에게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제사를 마친 다음 무리들에게 크게 유시하니 다음과 같았다.
하느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하늘과 땅을 시작하게 하고 모든 세계를 주재하며 한없는 사물을 만드시니, 가없이 넓고도 넓음에 감싸지 아니한 사물이 없으며, 신령스럽게 밝고도 밝음에 가녀린 티끌마저도 새지 아니한다.
하느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부리고 거느리는 하늘 궁전은 모든 선함이 열리고 모든 덕화가 근원하는 곳이며, 뭇 영령들이 보호하고 모시는 크게 길하고도 크게 밝은 곳이니, 이름하여 신향(神鄕)이라 한다.
하늘의 천제(天帝)께서는 하늘 궁전으로부터 3천의 동아리를 거느리고 내려와 우리들 임금의 조상이 되더니, 공덕을 온전히 함에 이르러 하늘로 향하여 신향으로 돌아갔다.
너희 무리들아! 오직 하늘 본보기를 본받아 모든 선함을 돕고 모든 악함을 소멸시키며, 본바탕이 통하여 맡을 일을 온전케하면 이에 하늘로 향하느니라.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그 문은 둘이 아니니, 너는 오로지 정성을 순수하게 하고 너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한다면 이에 하늘로 향하리라.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사람의 마음도 오직 같으니, 오로지 자기의 마음을 잡아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 미치게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교화되고 또한 하늘 본보기에 부합하게 되므로 이에 만방에 이르러 부리고 거느리리라.
말하노니, 네가 생겨난 것은 어버이로 말미암은 것이요 어버이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것이므로, 오로지 너의 어버이를 공경하면 이는 능히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다. 이로서 나라에 미치게 하면 그것이 곧 충효이며, 네가 극복하여 체득하게 된다면 이가 곧 도(道)이니, 하늘이 무너짐이 있더라도 능히 피하여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날아다니는 짐승도 쌍이 있고 헤어진 신발도 짝이 있으니, 너희 남녀들은 화합할 뿐 미워하지 말고, 투기하지 말며, 음탕하지 말지어다.
네가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아라, 아픔에는 크고 작음이 없으니, 너희는 서로 사랑할 뿐 너희끼리 헐뜯지 말 것이며, 서로 도울 뿐 너희끼리 죽이지 말지어다. 집안과 국가가 이로서 일어나리라.
너희는 보아라, 소나 말도 가히 그 먹이를 나눠 먹으니, 너희는 서로 양보할 뿐 너희끼리 서로 빼앗지 말 것이며, 서로 같이 경작할 뿐 너희끼리 훔치지 말지어다. 집안과 국가가 이로서 은성하리라.
너희는 보아라, 범은 강하고도 사나우나 신령스럽지 않기에 재앙을 일으키는 법이다. 너희는 사납고 교만해져 사물을 상하게 하지 말며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며, 항상 하늘 본보기를 존중하여 사물을 사랑하라. 너희가 만약에 그것에 지나침이 있다면 곧 영원히 신인의 도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몸과 집안은 이로서 망하리라.
너희가 만약 꽃밭에 불을 질러 꽃이 장차 모조리 없어지게 되면 신인이 이로서 노여워할 것이다. 너희는 위태로움을 도울 뿐 약함을 업신여기지 말며, 어려움을 구제할 뿐 천하다고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가 비록 두텁게 감싼다 하더라도 그 향기는 반드시 새어나오는 것이니, 너희는 타고난 떳떳한 성품을 삼가 지닐 뿐 간사함을 품지 말고, 악함을 숨기지 말고, 재앙을 감추지 말라. 마음으로 능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가까이하면 너희는 이에 복록이 한없을 것이다. 이로서 너희 무리들은 삼갈지어다.
檀儉旣大誥于有衆, 於是神德大彰, 如此數十年, 天下復熙熙焉, 忘其災矣. 或曰, 此卽檀君八條之敎令, 可以此分八目, 或說是也. 後世, 駕洛國.房登王時, 有암始仙人者, 自七點山而來, 見王於招賢臺曰: 「君以自然爲治, 則民[自以]
(以自)然成俗. 爲治之道, 古有其法, 君何不體之.」 饋以大牢, 辭不受而去. 此道, 破先聖之訣也. 又崔孤雲.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實乃包含三敎, 接化군生. 且如入則孝於親, 出則忠於君,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孤雲, 精敏文學, 卓越諸人, 博通古今, 文名飄動, 其言可謂善採先聖垂訓之精華矣. 此外, 散見於載籍者, 及道家文集, 如《四聞錄》.《三韓拾遺記》等諸書者, 不可탄記矣.
단검이 무리들에게 크게 유시를 내리니 이에 신인의 덕화가 크게 빛나기를 수십년, 천하는 다시 화락하여 그 재앙을 잊게 되었다. 혹은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단군팔조(檀君八條)의 교령(敎令)'이라 하는데, 이것을 여덟 조목으로 나눌 수 있으니 혹은 그 예기가 맞을 것이다.
후세에 가락국 방등왕(房登王) 때 암시선인(암始仙人)이 있어, 칠점산(七點山)으로부터 내려와 초현대(招賢臺)에서 왕을 뵙고 이르기를 「임금께서 자연의 도리로서 다스림의 기본을 삼으면 곧 백성들도 자연의 도리로서 풍속을 이루어 갈 것입니다. 다스림의 기본이 되는 도(道)는 예로부터 그 법도가 있는데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이를 체득하지 않습니까」라고 하기에, 왕이 크게 희생(犧牲)을 잡아 보내 주었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그가 말하는 도가 바로 앞선 성인의 도를 공구(窮究)할 수 있는 비결이다.
또 최고운(崔孤雲)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는 심오한 이치를 지닌 도가 있으니, 실로 삼교(三敎)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뭇 삶의 무리들을 가까이에서 교화한다. 또한 들어오면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서면 임금에게 충성함과 같은 것은 노나라 공자의 요지이고, 행함이 없는 듯이 일을 다스리고 말함이 없는 듯이 가르침을 펴는 것은 주나라 노자의 근본 되는 생각이며, 모든 악함을 짓지 말고 모든 선함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천축국 태자의 교화이다」라 하였다.47)
최고운은 문학에 정통하고 재주가 뭇 사람들 보다 뛰어나며 고금의 일에 대해 두루 통하고 글의 명성이 자자한데, 그의 말은 앞선 성인들이 후세에 전하는 교훈의 진국을 잘 가려 뽑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여러 서적에 흩어져 보이는 것과《사성록(四聞錄)》및《삼한습기(三韓拾記)》같은 도가(道家) 문집에 있는 것들은 빠짐없이 적지 못하였다.
從此時, 常出巡, 以孟冬月祭天, 遂爲萬世之遺俗, 此乃東方特有之盛典, 而非外邦之可比也. 太白一山, 足壓崑崙之名而有餘矣. 古之三神山者, 卽太白山也. 三神, 又云三聖, 今文化.九月山有三聖祠, 卽敬祀桓因.桓雄.桓儉者也. 今檀君之敎, 雖不得健行, 而神化靈訓猶傳於後世. 擧國男女, 猶崇信於潛默之中, 卽人生生死, 必曰三神所主, (兒小)
[小兒]十歲以內, 身命安危及智愚庸俊, 多托於
三神帝釋. 三神者, 卽創天地.造治民物之三神也. 帝釋等語, 雖出於佛家之《法華經》, 亦天帝之意. 此則, 只因古史譯出於緇流之手也, 不可妄以爲非. 昔司馬相如謂漢.武帝曰: 「陛下謙讓而弗發, 契絶也三神之歡.」 註云: 「三神, 上帝.」 三神之說, 當時亦通于漢土矣.
이때부터 항상 순행을 나가면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마침내 만세에 길이 전하는 풍습이 되었다. 이는 동방 특유의 성대한 제전으로 외국과는 가히 비할 바가 아니다. '태백'이라는 하나의 산은 족히 곤륜(崑崙)의 이름을 누르고도 남음이 있으니, 예전의 삼신산이 곧 태백산이다. '삼신(三神)'을 또는 '삼성(三聖)'이라 하는데, 지금의 문화 구월산에 삼성사(三聖祠)가 있어서 환인과 환웅 및 환검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낸다. 지금에 와서 단군의 가르침이 비록 꾸준히 행해지지는 않지만 신령스러운 교화의 가르침은 여전히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온 나라의 남녀가 여전히 은연중에 받들어 믿고 있는 것으로서, 곧 사람의 삶에서 나고 죽고 하는 것은 반드시 삼신이 주관한다고 말하며, 10살 이전 어린아이의 신변과 목숨의 안위 및 슬기롭고 어리석음과 못나고 뛰어남 등을 모두 삼신제석(三神帝釋)에게 의탁한다.
'삼신'은 곧 하늘과 땅을 열고 백성과 사물을 만들어 다스린 삼신을 말하는 것이다. '제석' 등의 말은 비록 불가의《법화경》에서 나왔지만 역시 하늘 임금의 뜻이다. 이것은 단지 옛 역사가 승려의 손으로 옮겨진 까닭일 뿐이니, 망령되게 잘못되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한나라 무제에게 아뢰어 「폐하께서 겸손하게 사양만 하시고 내어 비치지 않으신다면 이는 삼신(三神)의 기쁨을 끊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주석에 삼신은 상제를 말한다 하였으니, 삼신이란 말은 당시 한나라에도 통용되었던 것이다.48)
盖, 東方諸山, 以太白名者, 頗多. 俗士, 卒以寧邊.妙香山當之, 實由於一然《三國遺事》之說, 而彼等眼孔如豆, 安足以與論哉! 今白頭山上, 有大池, 周八十里, 鴨(록) [綠]49)
.混同諸[江]發源於此, 曰天池, 卽上述神市氏乘雲朝[天]處也. 妙香, 曾無一小만, 其不爲
桓雄肇降之太白, 不足辨也. 盖, 白頭巨岳, 盤據大荒之南, 橫..千里, 高出二百里, 雄偉山層
릉완연磅박, 爲東方諸國之鎭山. 神人陟降, 實始於此, 豈區區妙香一山, 只係狼林西走之一
맥, 而得참如許聖事耶! 世俗, 旣以妙香爲太白, 則其見, 只局於鴨水以南一隅之地, 便唱, 山
之祖宗崑崙, 欣欣然以小中華自甘宜; 其貢使北行屢百年而不爲之恨, 僅以南漢下城之羞, 효
(효)然, 自歎者也.
무릇 동방의 모든 산 중에 '태백(太白)'이라 이름하는 것이 자못 많은데, 세속의 선비들이 졸지에 영변의 묘향산을 그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이는 그저 일연의《삼국유사》의 이야기에서 연유한 것일 뿐이니, 저들의 눈구멍이 마치 콩알 같음에 어찌 족히 더불어 논박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백두산 위에는 큰 못이 있어 주위가 80여 리며, 압록(鴨綠)과 혼동(混同) 등의 여러 강이 여기에서 발원하기에 '천지(天池)'라 일컫는데, 곧 위에서 서술하였듯이 신시씨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곳이다. 묘향산에는 일찍이 작은 물줄기 하나 없었으니, 그 곳이 환웅이 처음으로 내려온 '태백'이 될 수 없음은 밝힐 필요도 없다.
무릇 백두의 웅대한 산악은 대황(大荒)의 남쪽에 굳게 자리하여 좌우로 1천리에 뻗치고 위로 2백리를 솟아 있으며, 웅장하면서도 층을 지은 험한 능선이 길게 이어지면서 아울러 하나가 되어 있으니, 동방의 모든 나라를 위엄으로 진압하는 명산이다. 신인의 오르내림이 실로 여기에서 처음 하였거늘, 구구하게 단지 서쪽으로 내달은 낭림의 한 줄기에 매어 달린 묘향의 산 하나가 어찌 그와 같은 많은 신성한 일들에 참여할 수 있었겠는가! 세속에선 이미 묘향을 태백으로 여기지만, 이는 곧 그 견해가 단지 압록강 이남의 한 모퉁이에만 국한된 것일 뿐이다. 곧잘 산의 으뜸이 되는 우두머리는 곤륜이라 노래 부르고 기꺼이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로 마땅한 듯 달갑게 여기며, 그 조공의 사절이 북으로 다닌지가 수백년이 되었으나 이는 한스러워 하지 않다가 겨우 남한산성 아래의 수치만을 떠들썩해 하니, 스스로 한탄스러울 뿐이다.
余嘗歷觀載籍, 白頭山之異名, 頗多.《山海經》曰: 「大荒之中, 有山, 名不咸, 有肅愼氏之國」.《後漢書》曰: 「東沃沮, 在高句麗.蓋馬太山50)
之東, 東濱大海, 北與읍婁接.」 註云: 「在平壤城西.」 此, 漢士眩學之(忘)
[妄]語也. 읍婁, 乃肅愼後身, 東沃沮, 又在今咸鏡之地, 則蓋馬之(謂)
[爲]太白, 可知. 且《麗史·列傳》曰: 「女眞, 本高句麗之部落, 聚居于蓋馬山東」云, 當時女眞, 明在白頭山之東北, 蓋馬之爲白頭, 明矣.《魏書·勿吉傳》曰: 「國有徒太山, 魏言太白, 有虎豹熊狼不害人, 人不得上山수溺…」云云.《北史·勿吉傳》[曰亦]
(亦曰): 「國有徒太山, 華言.太白, 俗甚畏敬之.」《唐書》曰: 「粟末部居最南, 抵太白山, 亦曰徒太山, 與高麗接.」《括地志》曰: 「靺鞨, (古)
[故]肅愼也, 其南有白山, 鳥獸艸木皆白.」《金史·高麗傳》述高句麗以來靺鞨之事曰: 「黑水末曷, 居故肅愼地, 有山曰白山, 蓋長白山, 金國之所起焉.」 葉隆禮《遼志》曰: 「長白山在冷山東南千餘里, 盖白衣觀音所居, 其山內禽獸皆白, 人不敢入, 恐穢其間…」云云, 又曰: 「黑水發源于此.」《明一統志》曰: 「長白山在三萬衛東北千餘里, 故會寧府南六十里, 橫선千里, 高二百里, 其전有潭, 周八十里, 淵深莫測, 南流爲鴨綠江, 北流爲混同江, 東流爲阿也苦河」云. 然則, 不咸.蓋馬.太白.徒太(白)[白]. 長白等名, 皆爲同山異名, 而歷代方言之異也. 又《高麗史》光宗十年: 「逐鴨綠江外女眞, 於白頭山外居之」云, 則白頭之名, 始見於此. 而蓋字之音, 近[白於]
(於白)字之意; 東語, 「馬」.「頭」亦同訓, 蓋馬, 白頭之異字同意亦可明辨, 而白頭之名, 其來亦尙矣.
내가 일찍이 여러 서적들을 두루 살펴 보건대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 자못 많았다.《산해경》에 이르기를 「대황의 가운데 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불함(不咸)이라 하며 숙신씨의 나라가 있다」51) 하였으며,《후한서》에 이르기를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태산(蓋馬太山)의 동쪽에 있다. 동으로 큰 바다를 접해 있고 북으로 읍루와 더불어 접해 있다」 하고는 그 주석에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하였는데, 이것은 한나라 선비가 잘 알지 못하고 배웠기에 생긴 망령된 말이다.
읍루는 곧 숙신의 후신이며 동옥저 또한 지금의 함경의 땅에 있었으니, '개마'가 '태백'이 됨을 알 수 있다.52) 또한《고려사·열전》에 이르기를 「여진은 본래 고구려의 한 부락이었는데 개마산의 동쪽에 모여 살았다」라 하였으니, 당시의 여진이 분명히 백두산의 동북에 있었으므로 '개마'가 '백두'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위서·물길전》에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태백'이라고 한다. 범과 표범·곰·승냥이 등이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은 산위에 올라가서는 방뇨를 하지 않았다」53) 하였고,《북사·물길전》에도 역시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중원의 말로 '태백'이라 하며, 풍속에 그것을 매우 삼가며 공경한다」54)고 하였다.《당서》에는 「속말부가 가장 남쪽에 살고 있는데, 도태산(徒太山)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태백산과 맞닥뜨린 곳에서 고려와 더불어 접해 있다」 하였다.《괄지지》에는 「말갈은 옛 숙신이다. 그 남쪽에 백산(白山)이 있는데 새와 짐승이며 풀과 나무가 모두 희다」라 하였고,《금사·고려전》에는 고구려 이래 말갈의 일을 기술하며 「흑수말갈이 옛 숙신의 땅에 거주하였는데, '백산(白山)'이라 불리는 산이 있었으니 곧 '장백산'으로서 금나라가일어난 곳이다」라고 하였다.
섭융례(葉隆禮)의《요지》에는 「장백산은 냉산(冷山)의 동쪽 1천여 리에 있으며, 대저 백의관음이 기거하는 곳이다. 그 산 안의 짐승은 모두 희다. 사람들은 그 곳을 더럽힐까 염려하여 감히 들어가지 않는다」라 하였고, 또 「흑수(黑水)가 그 곳에서 발원하였다」라 하였다.《명일통지(明一統志)》에는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 동북쪽의 1천여 리에 있으니 옛 회녕부(會寧府)의 남쪽 60리에 있다. 좌우로 1천리에 뻗어 있고 위로 2백리를 솟아 있으며, 그 곳의 정상에 못이 있는데 주위는 80리이며 못은 깊어서 측량할 수 없다.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서 혼동강이 되며, 동쪽으로 흘러서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 하였으니, 불함·개마·태백·도태·장백 등의 이름은 모두 같은 산의 다른 이름으로 역대 방언의 차이점일 뿐이다. 또《고려사》의 광종(光宗) 10년조에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어 살게 하였다」 하였으니,55)
곧 '백두'의 이름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보인다. '개(蓋)'의 음은 '백(白)' 자의 뜻과 가까우며, 동방의 말에 '말(馬)'과 '두(頭)'는 같은 새김이기에 글자의 뜻으로 새기면 '개마(蓋馬)'와 '백두(白頭)'가 글자는 다르지만 뜻은 같은 것이 분명하므로 '백두'라는 이름의 유래 또한 오래된 것이라 할 것이다.
東方諸山, 有馬耳.摩尼等山, 俗人幷以「摩利」呼之, 曾不相別. 盖馬耳.摩尼, 幷出於頭字之意也. 今廣州有修理山, 此必「鷲山」之意也; 積城有紺岳山, 則乃「玄山」之意也; 忠州有達川, 則是「月川」之意也; 而馬耳.摩利之爲頭嶽或頭山之訛, 尤可辨矣. 太白之一名曰白頭, 甲比古次之祭天處曰頭岳, 此非檀君祭天, 必隨「頭」名之山也, 乃檀君祭天處, 必成「頭」名之山也. 盖, 「頭」者, 最上或元首之稱也. 白頭爲東方諸山之宗, 而又是東人始降之地, 兼復, 元首檀君, 恒行祭天禮于其山, 當時之人, 名之曰頭山也, 必矣. 而甲比古次之頭嶽, 亦不出於此外也. 獨不知, 牛首河之名, 亦只出於沈牛首之俗耶. 此不可斷矣. 然則, 神市氏(之)降, 旣在[白頭於山]
(於白頭山), 乃漸(徒)
[徙]西南, 復沿浿水而南來, 三氏之族, 又各四遷也. (耳)
[且]太白旣爲東方靈地, 祭天大儀必始於其山, 則自古, 東民之崇敬是山也, 不尋常. (耳)
[且]古(者)
昔, 禽獸悉沾神化, 安捿於其山而未曾傷人, 人亦不敢上山수溺而瀆神, 恒爲萬代敬護之表矣. 夫我先民, 皆出於神市所率三千團部之裔. 後世, 雖有諸氏之別, 實不外於檀祖同仁之神孫. 因.雄.儉.三神之, 開創肇定之功德, 常傳誦而不忘, 則古民指其靈山曰三神山者, 亦必矣.
동방의 여러 산에는 '마이(馬耳)'나 '마니(摩尼)' 등의 산이 있는데, 항간의 사람들은 뭉뚱그려 '마리(摩利)'라고 부를 뿐 일찍이 구별하지 않았다. 대저 '마이'와 '마니'는 모두 '頭'의 '머리'라는 뜻에서 나왔다. 지금의 광주에 '修理山'이 있는데 이는 필시 '수리산(鷲山)'이라는 뜻이며, 적성에 있는 '紺岳山'은 곧 '검은산(玄山)'이라는 뜻이며, 충주에 있는 '達川'은 바로 '달천(月川)'이라는 뜻이니, '마이'나 '마리'가 '頭嶽' 혹은 '頭山'이 잘못 전해져 그리되었음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태백'을 달리 일컬어 '백두'라 하였으며, 갑비고차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을 '두악'이라 하였는데, 이는 단지 단군이 반드시 '머리'라는 이름이 붙은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아니라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은 반드시 '머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음을 말한다. 무릇 '머리'라 함은 가장 높다거나 혹은 으뜸 되는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백두'가 동방 모든 산의 으뜸이 되고, 또한 동방의 사람이 하늘로부터 처음 내려온 땅이 되며, 게다가 더하여 으뜸 되는 우두머리인 단군이 항상 그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예식을 행하였기에 당시의 사람들이 '머리산(頭山)'이라 이름하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니 갑비고차의 '두악'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수하(牛首河)'라는 이름은 알지 못하겠는데, 이 역시 단지 소머리를 물 속에 담그는 풍속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는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시씨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미 백두산에 있으면서 점차 서남쪽으로 옮기고, 다시 패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삼씨(三氏)의 겨레들은 각자 더욱더 사방으로 옮겨갔다. 또한 태백이 이미 동방의 신령스러운 땅이 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큰 의식은 반드시 그 산에서 시작하였으니, 예로부터 동방 민족이 이 산을 숭상하고 공경함은 남다른 것이었다. 또 옛날에는 짐승들이 모두 신의 교화에 젖어 그 산에 편안히 깃들여 살며 사람을 해치지 않았으며, 사람 또한 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는 등의 신을 모독하는 행위를 감히 하지 않았으니, 만대에 걸쳐 항상 받들고 보호하는 지표가 되었다. 무릇 우리 선조들은 모두 신시씨가 거느린 3천의 무리에서 나온 후예들이다. 뒷 날 비록 여러 씨(氏)의 구별이 있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단군 선조께서 똑같이 어여삐 여기는 신의 후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환인(桓因)·환웅(桓雄)·단검(檀儉)의 삼신이 나라를 열고 기초를 바로잡은 공덕을 항상 전하여 예기하고 잊지 않았으니, 곧 옛 백성들이 그러한 신령스러운 산을 가리켜 '삼신산'이라 하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盖, 神市以降, 神化之漸, 逐歲益深, 立國經世之本, 自與人國逈異. 其神風聖俗, 遠播於漢土, 漢土之人, 有慕於神化者, 必推崇三神, 至有東北.神明之舍之칭焉. 及其末流之弊, 則漸陷於荒誕不經, 愈出愈奇, 怪誕之說, 迭出於所謂燕.齊海上怪異之方士. 盖其地, 與我震邦相接, 民物之[敎]
(交)特盛, 自能聞風驚奇. 又推演傅會曰: 「三神山, 是蓬萊.方丈.瀛洲, 在渤海中…」云云. 且患其無驗, 則曰: 「望之如雲, 終莫能至…」云云, 以惑其世主.《神仙傳》又以「海中」字, 推以斷之曰: 「海上有三神山, 曰蓬萊.方丈.瀛洲山, 謂之三島…」云云. 而於是「海上」.「六鰲」, 荒怪之說, 繼出於(閑)
[閒]人之(革)
[筆], 乃我國之士, 則更效嚬於此, 曰: 「金剛.蓬萊也, 智異.方丈也, 漢拏.瀛洲也.」 則此, 又返咀漢士之餘唾也.《史記·封禪書》曰: 「三神山者, 其傳, 在渤海中. 盖嘗有至者, 諸僊人及不死之藥皆在焉, 其物禽獸盡白, 而黃金銀爲宮闕…」云云. 又仙家書類或曰: 「三神山, 有還魂.不老等艸, 一名震檀」云.
대저 신시씨가 하늘에서 내려온 이래로 신의 교화가 점차 세월에 따라 더욱더 깊어 감에,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경영하는 근본이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와는 자못 다르게 되었기에, 그 신성한 풍속이 멀리 한나라 땅에까지 퍼져서 한나라 땅의 사람 가운데 신의 교화를 사모하는 자가 있었으니, 오로지 삼신을 추앙하여 동북 지방에는 '신명의 집(神明之舍)'이라는 명칭까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말단의 폐해에 이르러 곧 점차 허무맹랑함에 빠지고 더욱 기괴해지더니 괴이하고 허망한 말들이 꼬리를 물고 갈마들어 나왔는데, 심지어 '연나라와 제나라의 바다 위에 신선의 술법을 닦는 괴이한 사람이 있다'라고 말해지기까지 하였다. 무릇 그 땅은 우리의 진방(震邦)과 더불어 서로 접해 있어서 백성과 사물의 교류가 특히 왕성한데, 직접 그 풍문을 듣고는 놀라며 이상하게 여겼다. 또한 생각을 미루어 넓히고 억지로 이치에 맞춰 말하기를 「삼신산은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으로 발해 가운데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 증거가 없음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바라보면 마치 구름과 같은데 결국에는 능히 다다르지 못한다……」라고 말하며 세상의 주목을 미혹케 하였다.《신선전》에서는 또 '海中'이라는 글자만으로 추측하고 단정지어 말하기를 「바다 위에 삼신산이 있는데 봉래·방장·영주산이라 하며, 이를 일컬어 삼도(三島)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해상(海上)'이나 '육오(六鰲)' 등의 황당무계한 말들이 한가로운 사람들의 붓 끝에서 연이어 나왔음에도 우리나라 선비들은 다시 그것을 억지로 흉내56)만 내어 「금강산이 봉래산이며, 지리산이 방장산이고, 한라산이 영주산이다」라고 말하니, 이는 또한 한나라의 선비가 뱉은 침을 도리어 받아 곱씹는 격이다.《사기》의 <봉선서>에 말하기를 「삼신산이란 발해의 바다 가운데 있다고 전해진다. 무릇 가본 적이 있는 사람에 의하면 뭇 신선들과 불사의 영약이 모두 있으며, 그 곳의 사물과 짐승들은 모두 희고 황금과 은으로 궁궐을 지었으며……」57)
하였고, 또한 선가(仙家)의 서책에서 혹은 말하기를 「삼신산에는 넋을 부를 수 있거나 먹으면 늙지 않는 등의 풀이 있는데 일명 '진단(震檀)'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今白頭山, 自古有白鹿.白雉或白鷹之屬;《括地志》所云: 「其南有白山, 鳥獸草木皆白」者, 是也; 方士之說, 亦頗有所據也. 又白頭山一帶, 時産山蔘, 世人擬之以不老草. 山氓欲採取, 則必沐浴致齋祭山以後, 敢發, 其還魂.不老之名, 想, 亦原於此也. 古, 烏斯帝北巡而得靈草, 則此尤驗矣. 且白頭山産紫檀樹, 從古所稱檀木者, 是也. 而古記所傳, 九변震檀之說, 想, 必有因於此, 而「不老震檀…」云云者, 盖亦聽者之錯誤也. 然則, 燕.齊方士, 扼腕而言「海中三山」者, 亦병遊於夢中, 欺其主而又自欺也. 今我國有 「願得三山不老草, 拜獻高堂白髮親」之句, 殆爲養老者, 春祝之定文, 究其原則, 亦可噴飯. 何不, 卽往白頭山, 拜檀帝之靈, 而祈其萬壽耶.
지금의 백두산에는 예로부터 흰사슴이나 흰꿩 혹은 흰매의 무리가 있었으며, 이는《괄지지》에서 말한 바 대로 「그 남쪽에 '백산'이 있는데 날짐승과 들짐승 및 초목이 모두 희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니,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의 얘기 역시 상당히 근거하는 바가 있다. 또한 백두산 일대에는 때때로 산삼이 나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불로초로 생각하였다. 산에 사는 백성들이 이를 캐고자 하면 반드시 목욕하고 정성을 들여 산에 제사를 드린 후에야 감히 캐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고 하는데, '환혼(還魂)'이나 '불사(不老)'라는 이름은, 생각건대 역시 이러한 것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옛날 오사제(烏斯帝)께서 북쪽을 순행하다 신령스러운 풀을 얻었다 하였으니, 곧 그것으로 더욱 증거가 된다. 또한 백두산에는 자단수(紫檀樹)가 나는데 예로부터 단목(檀木)이라 일컫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생각건대 옛 기록에 전하는 '구변진단(九변震檀)'이란 얘기는 반드시 이러한 것에 연유함이 있을 것이나 '불로진단(不老震檀)' 운운하는 것은 아마도 역시 전해들은 사람의 착오일 것이다. 그러한 즉, 연나라와 제나라의 방사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바다 속의 삼신산'을 말하는 것 역시 똑 같이 꿈속을 노닐며 그 주인을 속이고 또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된다. 지금 우리나라에 「원하건대 삼신산의 불로초를 얻어, 윗채에 계신 백발의 어버이에게 바치고자 한다」는 글귀가 있으니, 아마도 노인을 봉양하는 자가 젊음을 찾아 드리고자 하는 전형적인 글인 것 같은데, 그 근원을 따져 보면 역시 웃음을 참지 못할 뿐이다. 어찌하여 백두산에 가서 단제(檀帝)의 영정에 절을 하고 만수를 기원하지 않는 것인가.
漢.淮陽之地, 古陳國地, 本太昊之墟, 婦人崇好祭祀用史巫, 故其俗崇巫鬼.《陳詩》曰: 「坎其擊鼓, 宛丘之下. 亡冬亡夏, 値其鷺羽.」 又曰: 「東門之분, 宛丘之허. 子仲之子, 婆娑其下.」 吳札, 聞其歌則曰: 「國亡主, 其能久乎.」云. 此 又伏犧所傳, 倚數觀變之餘弊也.《孟子》[舜曰]
(曰: 「舜)生諸馮, 東夷之人也.」《尙書》曰: 「舜肆類于上帝, 인于六宗, 望秩于山川, 편于군神.」 虞舜以前, 曾無是事, 此或原於上古東邦祭天報本之禮, 及山嶽.河川.洋海.沼澤, 皆有奉命主治之神者也. 漢土, 自古, 以雍州積高爲神明之오, 故立치郊上帝, 諸神祠皆聚云, 則此又與檀祖祭太白, 同其類也. 齊俗有八神之祭, 八神者曰天主.地主.兵主.陰主.陽主.月主.日主及四時主也. 天好陰, 故祠之必於高山之下.小山之上, 此祭天太白之麓之類也. 地貴陽, 祭之必於澤中환丘, 此祭天頭嶽之類也. 兵主, 祠蚩尤, 蚩尤氏爲萬代强勇之祖, 作大霧, 驅水火, 又爲萬代道術之宗. 是以, 太初之世, 恒爲東方戎事之主, 海岱一帶, 曾爲其族虎據之地. 藍侯之民, 再進而建奄.徐諸國於淮岱之地, 則八神之說, 萌於是時也.
한나라 회양(淮陽) 땅은 옛적 진(陳)나라의 땅으로 본디 태호씨(太昊氏)의 옛터인데, 그 땅의 부인들이 제사지내 받들기를 좋아하여 화려하게 꾸민 무당을 이용하였기에 그 곳의 풍속은 무당과 도깨비를 숭상하게 되었다.《시경》의 <진시(陳詩)>에서 이르기를,
그 북을 둥둥치며 완구(宛丘) 아래에서 놀고 있네.
겨울이나 여름도 잊고 저 백로깃을 가지고 춤추네.
또 이르기를, 동문(東門)에는 흰느릅나무 완구땅에는 상수리 나무.
자중(子仲)씨 딸이 그 아래서 덩실덩실 춤을 추네.
라 하니, 오찰(吳札)이 그 노래를 듣고는 말하기를 「나라는 망하고 주인은 없는데 그 향락이 오래 가겠는가.」 하였다. 이는 또한 복희씨가 전한 '의수관변(倚數觀變)'의 남겨진 폐단이다.
《맹자》에 이르기를 「순(舜)은 제풍(諸馮)에서 났으며 동이 사람이다」58) 라고 하였으며,《상서》에 이르기를 「순(舜)에 이르러 드디어 상제(上帝)에게 성대히 제를 올리고, 육종(六宗)에게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며, 섶을 태워 멀리 산천에 제를 지내고, 여러 신들에게 두루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우순(虞舜) 이전에는 일찍이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옛적에 동방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고 그 근본에 보답한다'는 예식과, '산악·하천·해양·소택에 있어서도 모두 하늘의 명을 받들어 맡은 곳을 주관하여 다스리는 신이 있다'는 생각에서 근원 하였을 것이다.
한나라 땅에는 예로부터 옹주(雍州)의 높은 산을 신명이 거처하는 곳으로 여기고 제사 터를 세워 상제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뭇 신들의 사당 또한 모두 그 곳에 모여 있다 하니, 이는 또한 단군이 태백에서 제사지내던 것과 같은 것이다. 제(齊)나라의 풍속에 '팔신제(八神祭)'라는 것이 있는데, 여덟 신이라 함은 천주(天主)·지주(地主)·병주(兵主)·음주(陰主)·양주(陽主)·월주(月主)·일주(日主) 및 사시주(四時主)를 말한다. 하늘은 음(陰)을 좋아하기에 제를 올릴 때는 반드시 높은 산 아래의 작은 산 위에서 지냈으니 이는 태백산의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던 것과 같은 것이며, 땅은 양(陽)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못 가운데의 둥근 언덕에서 지냈으니 이는 두악(頭嶽)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던 것과 같은 것이다.
군사를 주재하는 자는 치우씨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치우씨는 만대에 걸쳐 굳셈과 용감함의 조상으로서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몰아쳐 부렸으니, 또한 만대에 걸친 도술의 근본이 된다. 그러한 까닭에 태초의 세상에서는 항상 동방의 군사(軍事)를 주재하는 자가 되었으며, 해대(海岱) 일대는 일찍부터 그의 부족들이 자리잡고 앉은 땅이 되었다. 남후(藍侯)의 백성들이 다시 더욱 나아가서 엄국(奄國)과 서국(徐國) 등의 뭇 나라들을 회대(淮岱)의 땅에 세웠으니, '팔신(八神)' 등의 얘기는 이 때 싹튼 것이다.
漢.高起兵於豊沛, 則祠蚩尤, 흔鼓旗, 遂以十月至파上, 與諸侯平咸陽, 而立爲漢王, 則因以十月爲年首. 此雖, 襲於秦之正朔, 而亦有因於敬蚩尤也. 後四歲, 天下已定, 則令祝官, 立蚩尤之祠於長安, 其敬蚩尤之篤如此.《晋書·天文志》「蚩尤旗類彗而後曲象旗, 主所見之方下, 有兵」云, 則是乃蚩尤氏, 上爲列宿也.《通志·氏族略》「蚩氏, 蚩尤之後也」云, 則是蚩尤氏之後而永居於漢土者也. 蚩尤氏之英風雄烈.播傳異域之深, 推此可知, 而今世人, 殆無過問者, 則此, 又國史散滅之故也, 而後代學者, 竟不免疎迂之譏矣.
한나라 고조는 풍패(풍沛)에서 병사를 일으키며 치우씨에게 제사를 지내고 북과 깃발에 희생의 피를 발랐으며, 마침내 10월에 패상(파上)에 이르러 제후들과 더불어 함양(咸陽)을 평정하고 한나라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런 연유로 10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비록 진(秦)의 책력을 이어서 따른 것이긴 하지만 역시 치우씨를 공경함에서 연유되었다 할 것이다. 그 뒤 4년에 천하가 이미 안정되자 곧 축관(祝官)에게 명하여 치우씨의 사당을 장안에 세우게 하였으니, 치우씨를 공경함이 이와 같이 돈독하였다.59)
《진서·천문지》에 「치우기(蚩尤旗) 유형의 혜성은 그 뒷 꼬리의 곡선이 마치 깃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주로 나타나는 방향의 아래에는 병사가 있다」60)고 하였으니, 이는 곧 치우씨가 하늘로 올라가서 별자리가 되었음을 말한다.《통지·씨족략》에 「치(蚩)씨는 치우의 후손이다」라 하였으니, 곧 이들은 치우씨의 후손으로서 영원히 한나라 땅에 머무른 자들이다. 치우씨의 영웅된 기풍은 다른 지역까지 매우 널리 퍼졌음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으나 지금의 세상 사람들 가운데 이를 물어 오는 자가 거의 없으니, 곧 이는 또한 나라의 역사가 흩어지고 없어진 까닭이기도 하지만, 후대의 학자들도 그것을 소흘히하고 멀리하였다는 비난을 결국에는 면할 수 없을 것이다.
盖, 燕.齊之士, 沈惑於神異之說, 亦尙矣. 自齊.威宣.燕.昭之時, 遣使求三神山. 秦.漢之際, 宋無忌.正伯.僑克.尙이.門子高之徒, 則皆燕人也; 文成.五利.公孫卿.申公之屬, 皆齊人[人]
也. 昔, 太公治齊, 修道術, 後世其地, 多好經術者. 則此又太公爲之助俗也, 燕.齊之士, 安得以不好怪異之說哉!
무릇 제나라와 연나라의 선비들은 신비하고 괴이한 말에 깊이 현혹되고 또한 이를 높이 여겼다. 제나라의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및 연나라의 소왕(昭王) 때부터 사신을 보내 삼신산을 찾게 하였으니, 진(秦)과 한(漢) 때의 송무기(宋無忌)·정백(正伯)·교극(僑克)·상선(尙羨)·문자고(門子高) 같은 무리는 모두 연나라 사람이고, 문성(文成)·오리(五利)·공손경(公孫卿)·신공(申公) 등의 무리는 모두 제나라 사람이다. 옛날 태공(太公)이 제나라를 다스리며 도술을 닦았더니, 뒷날 그 땅의 사람들이 도술 부리는 것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곧 이것은 또한 태공이 세상의 풍속을 그렇게 이끈 것이므로, 연나라와 제나라의 선비들이 어찌 괴이한 말들을 좋아하지 않았겠는가.
余幼而嫌梳頭, 老婢諭曰: 「不梳頭者, 蚤슬鑽穴, 將至耳腦相通, 寧不懼乎.」 余曰: 「寧有是事乎.」 曰: 「東部山邨之兒, 正如是矣.」 及後, 到山村, 無有是事. 嘗與客坐談, 客曰: 「木之最大者, 有(經)
[徑]數間者.」 曰: 「寧有是事乎.」 曰: 「嶺東之地, 多斯木, 斫而橫之, 則行旅可連枕而宿其上, 一面至(數十人)
[十數人].」 其後, 余隨舍叔父, 至嶺東, 曾無是木. 及讀《莊子》曰: 「北溟有魚, 其名爲鯤, 化而爲鳥, 其名爲鵬, 其長數千里, 其翼若垂天之雲.」 余問於師曰: 「可信有此事否.」 曰: 「窮髮之北, 安知, 其必無耶.」 雖然, 其後歷觀載籍, 且無是語. 今, 大荒數萬里, 未聞有數千[里]巨湖, 且寒威酷烈, 絶冠天下, 安容如許大物, 能逍遙於寒熱兩極之間耶. 其云「단扶搖而上[者]
(有)九萬里」者, 欲杜世人之辨也. 又看《神異經》曰: 「崑崙之西, 有大蛇繞山, 長三萬里…」云云. 長三萬里大蛇, 盤據於崑崙之西, 則西域諸國, 應遊牧於鱗角之下, 世間寧有是事耶. 盖喜作迂怪之說者, 必藉於聽者之所不知. 此, 漢土迂怪之士, 只憑東方三神之說, 而효효然, 胥出浮言, 以惑其聽者也.
내가 어렸을 때 머리에 빗질하기를 싫어하였더니 늙은 종이 빗대어 말하기를 "머리를 빗지 않으면 이가 구멍을 뚫어 장차 귀와 뇌가 서로 통하게 되기에 이르는데 어찌 두렵지 않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였더니, "동쪽 산골 마을의 아이가 바로 그렇게 되었다"고 하여, 나중에 산 마을에 가 보았더니 그런 일이 있은 적이 없었다 한다. 한번은 손님과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데 손님이 말하기를 "나무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직경이 몇 칸이나 되는 것이 있습니다"라고 하기에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영동 땅에 그런 나무가 많습니다. 베어서 가로질러 놓으면 지나가는 나그네가 그 위에서 배게를 나란히 하고 누워 잘 수 있는데, 한 쪽 면에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누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내가 작은 아버님을 따라 영동에 가 보았더니 일찍이 그러한 나무는 없었다 한다.
《장자》를 읽으니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은 곤(鯤)이다. 변화하여 새가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하는데, 그 길이는 수천리가 되며 그 날개는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도 같다」라 하였다. 내가 스승에게 여쭙기를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은 믿을 만한 것입니까." 하니 "초목이 나지 않는 북극 지방인데 어찌 알겠냐 마는 그것이 반드시 없다고만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그 후에 모든 서적들을 낱낱이 살펴보았지만 또한 그러한 말은 없었다. 지금에 대황의 수만 리 넓은 땅에 수천 리에 걸친 큰 호수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며, 또한 추위의 위세가 혹심하기로 으뜸인 하늘 아래 어찌 그와 같은 큰 사물을 받아들여서 능히 춥고 더운 양극 사이를 유유자적히 노닐게 할 수가 있겠는가. 「큰 바람을 북돋우며 9만리의 상공으로 오른다」라고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의 분별을 가로막기 위해서이다.
또한《신이경(神異經)》을 보았더니 「곤륜산의 서쪽에 큰 뱀이 있어 산을 휘어 감고 있는데 그 길이가 3만리이다」 하였다. 길이가 3만리나 되는 큰 뱀이 곤륜의 서쪽에 또아리를 틀고 앉았으면 서역의 뭇 나라들이 응당 그 비늘조각 아래에서 짐승을 길렀을 터인데,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릇 이상한 말을 짓기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듣는 사람이 모르는 것을 빌미로 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한나라 땅의 기괴한 선비들도 단지 동방의 삼신 예기에 빙자하여 공연히 시끄럽게 거짓말을 퍼트려 인심을 선동하고 이로서 듣는 자들을 미혹케 하였다.
高麗.仁宗九年, 因妖僧妙淸之說, 置八聖堂于西京.林原宮中. 淸平爲之說曰: 「第一曰護國白頭嶽太白仙人, 有大(彗)
[慧]大德, 助主神, 造大界, 卽桓雄天王之謂也. 第二曰龍圍嶽六通尊者, 有변化萬理之能, 掌人間禍福. 第三曰月城嶽天仙, 掌風雨之神. 第四曰駒麗平壤仙人, 掌光明之神. 第五曰句麗木覓仙人, 掌人間壽命之神. 第六曰松嶽震主, 有大勇大力, 掌神兵, 恒鎭守國都, 以驅外敵, 卽古蚩尤氏之神. 第七曰甑城嶽神人, 掌四時穀蔬草木之事, 卽古高矢氏之神. 第八曰頭嶽天女, 掌地上善惡, 卽神市氏之后.桓儉神人之母. 皆在主神調度之下, 掌治天下諸事之神…」云云. 盖仁宗之於妙淸, 信惑太甚, 卒致西京之變, 使金富軾討平. 妙淸, 發身於沙門, 蠱惑其世主, 寵傾宗戚, 權壓內外, 漸致驕傲, 敢謀不軌, 其罪固不可誅. 然而, 當時猶有, 恨國力之不振, 憤外侮之천至, 採古來之神明於殘散傳說之中, 欲以激當時之人心, 其行雖乖, 其志則猶有可采者矣. 古之說史者, 只以妖僧荒誕之說, 唾棄而不采, 則猶有一分迂소之責[八聖矣]
(矣. 八聖)之名, 必表以佛家名字, 僧侶之筆, 安不得如斯耶. 此不可深怪也.
고려 인종(仁宗) 9년에 요승 묘청(妙淸)의 말로 말미암아 서경의 임원궁에 팔성당(八聖堂)이 설치되었다. 청평이 그 예기를 보충하여 이르기를 「그 첫번째를 호국백두악(護國白頭嶽)의 태백선인(太白仙人)이라 하는데, 큰 지혜와 큰 덕을 지니고 주신을 도와 큰 세상을 만드니 곧 환웅천왕을 일컫는 것이다. 그 두번째를 용위악(龍圍嶽)의 육통존자(六通尊者)라 하는데, 1만 가지의 이치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길융화복을 관장하고 있다. 그 세번째를 월성악(月城嶽)의 천선(天仙)이라 하는데, 바람과 비를 관장하는 신이다. 그 네번째를 구려(駒麗)의 평양선인(平壤仙人)이라 하는데, 광명을 관장하는 신이다. 그 다섯번째를 구려(句麗)의 목멱선인(木覓仙人)이라 하는데,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신이다. 그 여섯번째를 송악(松嶽)의 진주(震主)라 하는데, 큰 용기와 큰 힘을 지니고서 신의 군사를 관장하고 항시 나라의 도읍을 지키며 외적을 몰아내니 곧 예전의 치우씨 신이다. 그 일곱번째를 증성악(甑城嶽)의 선인(神人)이라 하는데, 사시(四時)와 곡식 채소 및 초목의 일을 관장하니 곧 예전의 고시씨 신이다. 그 여덟번째를 두악(頭嶽)의 천녀(天女)라 하는데, 땅위의 선악을 관장하니 곧 예전 신시씨의 황후이며 환검신인의 어머니이다. 이들 모두가 주신의 영도 아래 있으면서 천하의 모든 일을 관장하여 다스리는 신이다」라고 하였다.
무릇 인종이 묘청에 대하여 믿고서 현혹됨이 너무 심하여 결국에는 서경의 변란이 일어나기에 이르자, 김부식으로 하여금 토벌하여 평정하게 하였다. 묘청은 불문(佛門)에서 몸을 일으켜 임금의 마음을 미혹시키고 종친과 외척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권력으로 안팎을 누르고는 점차로 교만해져 감히 모반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니, 그 죄는 진실로 주살 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당시에도 여전히 국력이 위세를 일으키지 못함을 한탄하고 외적들의 업신여김이 거듭됨을 분개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에 헤지고 흩어져 전해 내려온 얘기 가운데에서나마 예로부터 내려오는 신명(神明)을 골라내어 이로서 당시의 인심을 격앙시키고자 하였으니, 그 행위는 비록 어그러졌다 하지만 그 뜻은 오히려 가려서 취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할 것이다. 옛적에 역사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단지 요승의 황당무계한 말만을 들어 침을 내뱉듯이 버리고는 가려서 취하지 않았으니, 이는 오히려 조금은 그 일에 어둡고 소홀한 책임이 있다 하겠다. 여덟 성인의 이름을 반드시 불가의 이름으로 나타낸 것은 승려의 글이기에 어찌 그와 같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는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噫! 神市立極, 檀帝垂訓, 聖化神澤, 皇皇亮亮, 足爲萬代之天範. 而後孫不肖, 乃致聖謨鴻猷, 潛消默失於冥冥之中, 使堂堂皇謨, 盡付於空山臥睡之人, 所傳者, 只遺怪亂之說, 不亦悲乎. 今, 崇三神帝釋之風頗盛, 每人家正寢壁上, 以檀木爲釘, 紙囊盛純白米而掛之, 名曰三神囊或帝釋囊. 每十月, 新穀肇成, 則主婦必정手, 換新甑, 蒸爲餠, 以賽其神而祝景福. 此, 旣出於檀朝之遺制, 而俗民競以巫覡相尙, 或至禍福壽夭, 專托巫祝而云爲之, 此乃古俗末流之弊也. 能向燕.齊之士, 而嗤其迂怪也哉! 悲夫!
오호라! 신시씨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고 단제가 그 교훈을 후세에 전하니, 성스러운 교화와 신인의 은택은 환히 빛나서 족히 만대에 걸쳐 하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후손이 불초하여 성스럽고도 원대한 대계(大計)는 어둑어둑한 가운데로 잠겨서 사라지듯 소리 없이 잃어버리고, 당당하던 임금의 천하 경영의 뜻은 빈 산에 누워 잠든 이들에게로 모두 미뤄 버리니, 전해지는 것이라곤 단지 괴상하고 어지러운 말만 남았을 뿐이라, 이 역시 슬프지 않겠는가.
이제 삼신제석(三神帝釋)을 숭배하는 풍조가 자못 성하여, 집집마다 잠자리의 바로 윗 벽에 박달나무로 만든 못을 박고, 종이 주머니에 깨끗한 흰 쌀을 가득 담아 걸어 두며 이름하여 '삼신낭(三神囊)' 혹은 '제석낭(帝釋囊)'이라 한다. 매년 10월 새로운 곡식이 날 때면 주부는 반드시 손을 정결히 하고 새로 마련한 시루에 떡을 쪄서 그 신에게 정성을 올리며 큰 복을 바란다. 이것은 단조(檀朝)때 생겨나 지금까지 남겨진 풍속인데, 속된 백성들은 다투어 무당과 박수를 받들면서 혹은 길흉화복과 장수하고 단명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무당과 박수에게 의탁하며 말과 행동을 그것에 따르니, 이는 곧 옛 풍속의 끄트머리로 흐르는 폐단이다. 그러니 어찌 연나라와 제나라 선비를 향하여 그들이 괴상하다고 비웃을 수 있겠는가. 슬프도다!
先是, 夫婁旣平水土, 而夏禹適治唐堯九(年)
[秊]之水. 宇內諸國, 悉會於塗山.明.鳳陽府. 夫婁亦奉命往會, 又使神誌(氏)61)
齋寶玉.弓矢以從焉. 自蚩尤.軒轅大戰以後, 兩國始以玉.帛相見, 可稱東方會盟之始矣.
이보다 앞서 부루가 물과 땅을 모두 안정시키고 나니, 하우씨(夏禹氏)가 마침 당요(唐堯) 9년의 홍수를 다스리기에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모두 도산(塗山)(명明의 봉양부鳳陽府)에 모였다. 부루 역시 명을 받들고 가서 함께 모이며 신지씨로 하여금 보옥 및 활과 화살을 지니고 따르게 하니, 치우와 헌원이 크게 싸운 이후 두 나라가 처음으로 옥과 비단을 가지고 서로 만난 것으로서, 가히 동방회맹(東方會盟)의 시초라고 할 만하다.
在位九十餘載, 天下호호然, 忘其樂焉. 乃命夫婁攝位曰: 「天道昭昭, 降在爾心, 惟秉爾心, 以親萬民, 其惟純誠乎!」 乃南至唐莊, 入居阿斯達, 以孟冬月, 化神朝天. 在世凡二百十年, 在君位九十三年. 於是夫婁率諸加及諸侯, 獻祭於朝天處, 以辛丑歲卽位于平壤, 是二世檀君也. 後有文朴氏, 居阿斯達, 韶顔方瞳, 頗得檀儉之道. 其後, 如向彌山之永郞及馬韓之神女寶德諸人, 只得其一斑, 淸정無爲, 適遙塵外, 又非檀祖用化萬民之大義也.
재위 90여 년 동안 천하는 공허롭게 넓기에 즐거움을 잊고 지냈다. 이에 부루에게 명하여 재위를 잇게 하며 이르기를 「하늘의 도는 밝디 밝게 네 마음에 내려와 있으니, 오로지 네 마음을 잡고 그로서 만백성을 사랑하면 그 뜻은 순수하고 정성스러울 것이니라」 하고는, 남쪽으로 당장(唐莊)에 이르러 아사달에 들어가 기거하다가 10월에 신이 되어 하늘에 오르니, 세상에 있은 지 무릇 210년이요 임금의 자리에 있은 지 93년이다. 이리하여 부루가 뭇 가와 제후를 거느리고 하늘에 오른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는 신축년에 평양에서 즉위하니, 바로 두번째 단군이다. 뒤에 문박씨(文朴氏)가 아사달에 살고 있었는데, 환하게 젊어 보이는 얼굴에 모가 난 눈동자62)를 하고서 자못 단검(檀儉)의 도를 얻은 듯하였다. 그 후에 향미산(向彌山)의 영랑(永郞)과 마한(馬韓)의 신녀보덕(神女寶德) 등 뭇 사람들은 단지 그 한 부분만을 체득하여 정결하게 무위(無爲)로서 속세를 벗어나 소요할 뿐이었으니, 이 또한 단조(檀朝)가 만백성을 교화시키는 그러한 큰 뜻은 아니다.
辛丑歲, (王)
[壬]儉夫婁元年. 夫婁旣卽位, 繼父志而治天下, 凡三年, 出巡國中, 祭天如禮, 復使諸侯, 致祭如古. 居數年, 有앙肅者無道, 使仙羅往撫之. 其後, 앙肅再叛, 乃使仙羅會루진.蓋馬之兵, 討平之, 逐其徒於窮北. 益修德政, 廣采賢能, 乃擧息達爲龍加, 今勿爲馬加, 增置主財之職曰鳳加, 使阿密主之. 於是浚渠혁, 開道路, 興農桑, 勸牧畜, 啓學而廣敎, 民生益殷, 聲聞大彰. 令天下, 以孟冬西成之後, 居民相聚, 薦穀而祭天, 幷祀檀儉在天之神, 民人咸悅, 推戴欽慕, 無異存日.
신축년은 부루 임금의 원년이다. 부루가 즉위하여 부왕의 뜻을 이어 천하를 다스리니, 무릇 삼년만에 나라안으로 순행을 나가서 예를 갖추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다시 제후들로 하여금 제사를 지냄을 예전처럼 하게 하였다. 수년이 지난 후에 앙숙(앙肅)이라는 무도한 자가 있어서 선라(仙羅)로 하여금 가서 그를 달래게 하였는데, 그 후에 앙숙이 다시 배반하기에 선라로 하여금 속진과 개마의 병사를 모으게 하여 그를 토벌하고는 그 무리를 북쪽의 후미진 곳으로 내어쫓았다.
이에 덕스러운 정치를 더욱 닦으며 널리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를 가려 뽑았으니, 식달(息達)을 등용하여 용가로 삼고, 금물(今勿)을 마가로 삼았으며, 재정을 주관하는 직책을 증설하여 붕가(鳳加)라 이름하고 아밀(阿密)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물도랑을 파고 길을 내며 농사와 누에치기를 일으키고 목축을 권장하였으며, 학문을 계도하여 널리 가르치니, 백성의 생활은 더욱 윤택하여지고 이를 기리는 소리는 천하에 자자하였다. 천하에 영을 내려 10월 추수를 마친 후에 그 땅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서로 모여 새 곡식으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아울러 하늘에 계신 신(神)인 단검께도 제사 드리게 하니,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추대하여 떠받들고 그 덕을 흠모하기를 살아 있을 때와 다름없이 하였다.
初, 夫婁踐位之際, 虞舜以藍國隣接之地爲營州, 凡數十年, 夫婁使諸加征其地, 盡逐其衆. 是時, 天下諸侯, 來朝者數十. 於是作於阿之樂, 以諧人神. 於阿者, 喜悅之詞也. 時有, 神獸出於靑丘, 白毛九尾, 銜書作瑞, 乃賞高矢氏, 令國中奏樂而致歡, 又作朝天之舞. 封仙羅於앙肅之地, 後數年, 又封道羅.東武, 以表其功, 卽後之沃沮.沸流.卒本(朝)
諸國也. 在位三十四歲, 崩, 壽一百四十六歲. 子, 嘉勒立.
처음에 부루가 임금의 자리에 올랐을 때 우순(虞舜)이 남국(藍國)에 인접한 땅을 영주(營州)로 삼은지가 무릇 수십년이기에, 부루가 뭇 가로 하여금 그 땅을 정복하게 하고 그 무리들을 모두 내치게 하였다. 이 때 천하의 제후 가운데 들어와 알현하는 자가 수십 명에 이르니, 이에 '어아의 노래(於阿之樂)'를 지어 이로서 사람과 신이 어울려 화합하였다. '어아'라 함은 기쁨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때 신령스러운 짐승이 청구(靑丘)에 나타났으니, 털은 희고 꼬리는 아홉에 서책을 입에 물고 상서러움을 드러내는지라, 이에 고시씨에게 상을 내리고는 나라 안에 영을 내려 음악을 연주하게 하여 매우 즐기며, 또한 '조천무(朝天舞)'를 지었다.
선라(仙羅)를 앙숙의 땅에 봉했다가 그 몇 년 뒤에 또 도라(道羅)와 동무(東武)를 봉하여 그 공덕을 표창하니, 곧 뒤에 옥저(沃沮)·비류(沸流)·졸본(卒本) 등의 뭇 나라들이다. 임금으로 있은 지 34년만에 세상을 떠나니 수(壽)는 146세였다. 아들 가득(嘉勒)이 임금이 되었다.
乙亥歲, (王)
[壬]儉嘉勒元年. 亦有聖德, 能繼父祖之道. 又擧九室氏爲龍加, 益致其隆盛焉. 時, 夏王失德, 其臣有簒逆者, 乃使息達率藍.眞蕃之民, 以征之, 於是國威益彰. 乃行祭天禮, 遍及于諸神. 在位五十一歲, 威德流被于四表, 國人咸慕其化. 以乙丑歲崩, 壽八十四. 子, 烏斯立.
을해년은 가륵 임금의 원년이다. 역시 성스러운 덕이 있어 능히 부왕과 조부의 길을 이었다. 또 구실씨(九室氏)를 등용하여 용가로 삼으니 그 융성함이 더욱 극진하였다. 이 때 하나라 왕이 덕을 잃어 그 신하 가운데 왕위를 넘보고 반역하는 자가 있으므로, 이내 식달(息達)로 하여금 남국(藍國)과 진번(眞蕃)의 백성들을 이끌고 가서 그를 정벌케 하니 나라의 위세가 더욱 빛났다.63)
이에 하늘에 제사의 예식을 행하며 뭇 신들에게 고루 미치게 하였다. 재위 51년 동안 위엄 있는 덕은 사방으로 퍼져서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가 그 교화를 사모하게 되었다. 을축년에 세상을 떠나니 수는 84세였다. 아들 오사(烏斯)가 임금이 되었다.
丙寅歲, (王)
[壬]儉烏斯元年. 北巡而得靈草. 分天下爲二十一州. 征夏王后相, 不克, 後和, 遣使相通. 在位四十九歲, 崩, 子, 丘乙立.
병인년은 오사 임금의 원년이다. 북쪽을 순행하다 신령스러운 풀을 얻었다. 천하를 21주(州)로 나누었다. 하나라 왕 후상(后相)을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후에 화해하여 사신을 보내고는 서로 교통하였다.64) 임금자리에 있은 지 4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구을(丘乙)이 임금이 되었다.
乙卯歲, (王)
[壬]儉丘乙元年. 時, 夏民有慕化而至者, 使處於奄慮忽. 後, 少康復興夏道, 久相和好. 封太白之山, 使凡民不得恣意侵犯. 在位三十五歲, 崩. 子, 達門立.
을묘년은 구을 임금의 원년이다. 이 때 하나라 백성 가운데 임금의 교화를 사모하여 오는 자가 있으므로 엄려홀(奄慮忽)에 거처하게 하였다. 뒤에 소강(少康)이 하나라의 도를 다시 일으키므로 오랫동안 서로 화목하게 지냈다.65)
태백산을 봉하여 일반 백성들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3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달문(達門)이 임금이 되었다.
庚寅歲, (王)
[壬]儉達門元年. 生而有異, 及長, 有聖德. 又得東海人黎老爲龍加. 德聞益彰, 國人不知惡.不知煩懊, 聲敎之漸, 可謂盛矣. 乃西撫알견兪, 北安앙肅, 南攘夏, 東至于蒼海, 而波息十年. 在位三十二歲, 崩. 子, 翰栗立.
경인년은 달문 임금의 원년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다름이 있더니, 자라서는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또 동해 사람 여로(黎老)를 얻어 용가로 삼으니 그 덕의 평판은 더욱 빛났다. 나라 사람들은 악을 모르고 번민을 몰랐으니, 임금의 가르침이 번져나가 백성에게 물들어 감이 가히 융성하였다 할 것이다. 이에 서쪽으로 설유를 달래고 북쪽으로 앙숙을 진정시켰으며, 남으로 하나라를 물리치고 동쪽은 푸른 바다에 이르니, 십년동안 어려움 없이 조용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32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한율(翰栗)이 임금이 되었다.
壬戌歲, (王)
[壬]儉翰栗元年. 有阿叱者, 作亂害民, (王)
[壬]儉曰: 「惟罪歸于作犯, 惟道成于謹修.」 乃益修德政, 使黎老征之, 三年而後始禽. 且當時, 夏政方殷, 使藍侯勤修戎事, 而終世以和. 在位二十五歲, 崩. 子, 于西翰立.
임술년은 한율 임금의 원년이다. 아질(阿叱)이라는 자가 있어 난을 일으켜 백성을 해치니 임금이 이르기를 「죄(罪)는 오로지 그것을 범한 자에게로 돌아가며, 도(道)는 오로지 그것을 삼가 닦은 자에게서 이루어진다」라 하고 더욱 덕스러운 정치를 닦으며 여로(黎老)에게 그를 정벌하게 하니, 삼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사로잡았다. 또한 당시 하나라의 정치가 바야흐로 융성해지므로 남후로 하여금 군사 일을 힘써 다스리게 하니, 오랫동안 이로써 평화로웠다.66) 임금자리에 있은 지 2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우서한(于西翰)이 임금이 되었다.
丁亥歲, (王)
[壬]儉于西翰元年. 或曰烏斯含. 使民, 九十稅一, 廣通有無, 以補不足. 在位五十七歲, 崩. 子, 阿述立.
정해년은 우서한 임금의 원년이다. 혹은 오사함(烏斯含)이라고도 한다. 백성들에게 90분의 1을 세금으로 내게 하였으며, 물자의 유무에 따라 널리 통하게 하여 부족한 것을 보충케 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57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아술(阿述)이 임금이 되었다.
甲申歲, (王)
[壬]儉阿述元年. 有仁德. 時, 民有犯禁者, (王)
[壬]儉曰: 「糞地雖汚, 乃有降露之時.」 置而不治, 犯禁者, 乃化其德. 在位二十八歲, 崩. 子, 魯乙立.
갑신년은 아술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에게 어진 덕이 있었는데, 이 때의 백성 가운데 금지한 것을 범한 자가 있기에 임금이 말하기를 「똥을 눈 땅이 비록 더럽기는 하지만 거기에도 이슬이 내릴 때가 있을 것이다」라 하며 내버려두고 죄를 다스리지 않으니, 금지한 것을 범한 자가 그 덕에 감화되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8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노을(魯乙)이 임금이 되었다.
檀君紀
壬子歲, (王)
[壬]儉魯乙元年. 始作유, 養畜外之獸. 在位二十三歲, 崩. 子, 道奚立.
임자년은 노을 임금의 원년이다. 처음으로 우리를 만들어 바깥의 짐승들을 길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도해(道奚)가 임금이 되었다.
乙亥歲, (王)
[壬]儉道奚元年. 夫餘侯有알견兪之難, 熊加與句麗.眞番侯, 助平之. 在位三十六歲, 崩. 子, 阿漢立.
을해년은 도해 임금의 원년이다. 부여후가 설유 때문에 어려움을 치르자 웅가와 구려후 및 진번후 등이 도와서 이를 평정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36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아한(阿漢)이 임금이 되었다.
辛亥歲, (王)
[壬]儉阿漢元年. 在位二十七歲, 崩. 子, 屹達立.
신해년은 아한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7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흘달(屹達)이 임금이 되었다.
戊寅歲, (王)
[壬]儉屹達元年. 有武勇, 國人畏愛之. 得奚門爲龍加. 夏人來至, (王)
[壬]儉優禮之. 時, 夏德旣衰, 使人往觀其政, 又送舞樂而試之. 及後, 使奚門與藍侯率諸兵, 進征奄至빈.岐之間. 後與夏王和. 在位四十三歲, 崩. 子, 古弗立.
무인년은 흘달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은 무예에 용맹이 있음에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좋아하였다. 해문(奚門)을 얻어 용가로 삼았다. 하나라 사람이 건너오자 임금이 그를 예절로서 대우하였다. 이 때 하나라의 덕이 이미 쇠퇴하니 사람을 시켜 가서 그 정치를 살펴보게 하고는, 또 춤과 노래를 보내어 그를 시험하게67) 한 후에, 해문과 남후로 하여금 모든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엄(奄)에서 빈(빈)·기(岐) 사이의 지역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 후 하나라 왕과 서로 화해하였다.68) 임금자리에 있은 지 4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고불(古弗)이 임금이 되었다.
辛酉歲, (王)[壬]儉古弗元年. 繼父志而修戎事, 然而終世無事. 루진侯獻赤玉之瑞. 在位二十九歲, 崩. 子, 伐音立.
신유년은 고불 임금의 원년이다. 부왕의 뜻을 이어 군사 일을 잘 다스렸으나 오랫동안 그 군사를 쓸 일이 없었다. 속진후가 상스러운 붉은 옥을 바쳤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벌음(伐音)이 임금이 되었다.
庚寅歲, (王)
[壬]儉伐音元年. 種薰華於階下, 以爲亭. 使末良爲龍加. 曰: 「孩提, 亦歸于寵者. 保民之道, 不可暫弛.」 遂, 廣施德政, 於是兆民久懷. 時, 夏王遣使請援, 乃[使]末良興兵進救. 後, 夏王復請兵, (王)
[壬]儉以其無道, 却而不許. 及湯王.商大修仁政, (王)
[壬]儉曰: 「有德之君也, 不可相侵.」 乃집其兵, 後和. 使民, 八十稅一. 在位三十三歲, 崩. 子, 尉那立.
경인년은 벌음 임금의 원년이다. 훈화(薰華)를 섬돌 아래 심어서 이를 길렀다.69) 말량(末良)을 용가로 삼았다. 이르기를 「어린아이도 그를 귀여워해 주는 사람에게 끌려 돌아가기 마련이니, 백성을 보살피는 도리는 잠시라도 소흘히 할 수 없다」 하며 마침내 널리 덕스러운 정치를 펼치니, 이로서 모든 백성이 그 덕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다. 이 때 하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 와서 구원을 청하므로 말량에게 군사를 일으켜 나아가 구원하게 하였다. 뒤에 하나라 왕이 또다시 병사를 요청하였으나 임금이 그의 무도함을 들어 청을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았다.70)
탕(湯)왕이 상(商)나라를 일으키고 크게 어진 정치를 닦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덕이 있는 군주로다. 서로 침범할 수 없도다」 하고는 군사를 거두어들인 뒤 화해하였다. 백성들로 하여금 80분의 1의 세금을 내게 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3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위나(尉那)가 임금이 되었다.
첫댓글 1945년 말~1946년 1월에 국립중앙도서관 직원이 서울 한 책방에서,
우연히 고서 1권을 발견, 우리역사를 밝힐 중요한 책으로 판단하고 구입 합니다.
김수일씨에게 100원을 주고 구입합니다
당시 소장자: 김수일 ,
구입가격: 100원 (지금 싯가로 100만원수준)
5. 1946.5.25에 국립중앙도서관에 귀중본으로 등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