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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숨겨진 아젠다
매일경제
1955년, 내가 16세 되던 해, 11학년(고등학교 2학년)이 시작 될 무렵, 아버지의 나를 대하는 태도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 전에는 우리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그는 명령 했고 나는 복종 했다. 이것이 우리 관계의 전부 였다. 전에 한번 이야기 한 것 처럼 우리 둘의 관계는 계약과 비슷 했다. 아버지는 먹을 것과 집을 제공 했고 나는 좋은 성적을 내면 그만 이었다.
11학년 시작하기 전 여름, 아버지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나에게 세계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과 인물에 대해서 일주일에 서너 번씩, 때로는 장시간 동안, 나에게 이야기 해 주었다. 나는 그가 왜 이일을 시작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세상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할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 했는 지, 아니면 그가 심심해서 그의 견해를 들을 청중이 필요 했는 지는 알 길이 없었다.
처음에는 말은 아버지가 다하고, 나는 약간의 관심을 보이면서 들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 였다. 그러나 두달 후 부터 나에게 호기심과 흥미가 생기기 시작 했다.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이해 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와 정치인들이 우리나라의 모습과 우리들의 생활 상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 했기 때문이었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나는 아버지의 의견에 대해서 반응하기 시작 했다. 질문을 하고, 그의 말에 대해서 캐묻고, 역사책을 읽어서 그의 이야기를 보충 했다.
아버지는 내 반응을 보고 너무나 좋아 했다. 과거에는 나에게 옷과 학용품을 시주는 데 항상 인색 했는 데, 이제는 그 답지 않게 관대해 졌다. 신문, 잡지, 자서전, 20세기 정치와 지도자에 관한 책들을 사주었다. 나는 그가 나에 던져 주는 것들을 열심히 읽었다.
국제정치에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여움과 대립없는 새로운 관계가 꽃을 피웠다.
힘을 기반으로 한다거나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은 이 우리 관계의 새로운 모습은 빨리 성장 했다.
짧은 시간 안에 우리는 제3세계와 국제분쟁에 대해서 공통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놀랍게도, 양쪽이 서로 의견을 주고 받는 생기 있고 풍부한 토론을 했다. 더욱 믿을 수 없게, 때때로 우리는 어떤 특정된 문제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일치하거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와 반대의견을 말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예를 들면, 아버지는 아직도 영국을 중요한 제국으로 우러러 보는데, 나는 영국이 식민지를 다 잃어 버려서 방해하는 제국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미국이 경제, 군사적으로 강국이지만, 세계를 리드할 경험이 없다고 했다. 나는 미국의 돈과 총이 국제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뒤돌아 보면, 우리의 새로운 관계 뿐만아니라, 정치에 관한 서로 다른 의견은 확실히 1950년의 아주 깊은 세상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2차대전이 시작할 무렵, 세계 정치에 지루한 순간은 있어 본적이 없다. 땅을 뒤 흔드는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한명의 망각 할 수 없는 인물 이 선풍적이고 매혹적인 끝없는 사건의 행렬에 있는 중앙 무대를 차지 함으로써 다음 인물을 사라지게 했다. 당시 국제정치에서 두가지 주제가 지배적 이었는데, 하나는 서방동맹국과 소비에트 블록의 싸움인 냉전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유럽국가들의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식민지와 준식민지의 독립으로 인한 새로운 국가의 출현이었다.
아버지는 중국과 식민주의에서 벗어나 새로 형성 된 제3세계에 초점을 맞추기를 좋아 했지만, 냉전이 모든 분쟁지역에 더큰 상황을 만드는 데 기여 했다. 우리는 동서 대립에 관련된 사건과 인물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다.
당시에 아버지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가장 매혹적인 정치인들 중의 한사람은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였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이집트 공화국을 만들고, 국수주의를 일어나게 하고, 8만명의 영국 주둔군을 철수 시켜서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집트의 완전한 독립을 이룩 했다. 그는 1954년에 알제리아 사람들로 하여금 프랑스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고무 시켰고 식민지 주의에 대항해서 싸우기 위해서 판 아랍운동을 시작 했다.
(*번역자 주: 수에즈 운하는 1869년 건설되었고 소유권자인 영국-프랑스 회사가 운영해 왔다. 한편 나세르는 나일강에 아스완 댐 건설을 계획 했고 미국과 영국은 원조를 약속 했다. 그러나 나세르가 소련과 체코슬로바이키아등 공산진영과 가까워 지는 기미가 보이자 영미는 원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나세르는 이에 반발하여스에즈운하를 국유화 했다. 그리고 운하 통과세로 댐을 겅설 하겠다고 선포 했다.)
이를 찾으려고 영국-프랑스-이스라엘 연합군이 수에즈 운하를 침공 했으나, 나세르는 굽히지 않고 침략군과 싸우는 한편 유엔을 통해서 국제 여론을 이집트에 유리하게 몰아 갔다. 소련이 이집트를 돕기 위해서 개입 하겠다고 나서자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에 압력을 넣어 운하 탈환을 포기하게 했다. 결국 나세르의 승리로 끝났다.
나세르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인기있는 지도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방 식민주의에 반대해서 싸운 제3세계의 영웅이 되었다. 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권리 회복이라는 새로운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아버지는 흠모와 약간의 부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그가 이집트에서 식민지세력을 패배 시킨데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가 드디어 권력은 만년필로 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포기 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존경하는 또 하나의 인물은 안토니 이든 이었다. 그는 영국정치의 금수저이며 윈스톤 처칠의 후계자였다. 아버지는 자주 우리들의 토론에 그를 거론 했다. 그가 영국정치에 중요한 역활을 했기 때문 만은 아니었다. 이든은 아버지와 같이 옥스포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대를 다녔다. 아버지는 네빌 캠벌린의
히틀러를 달래는 정책에 반대하는 내용의 1938년 연설문을 읽게 했다. 이든은 영국역사상 최연소 외무 장관이었고, 이것은 그가 외무장관 직을 사퇴 하면 서 했던 연설이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준 이 과제의 아이러니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든의 사퇴는 아버지의 멘토 였던 왕징 웨이가 중국의 일본점령지역에 친일정부를 수립하는 절차를 밟고 있을 무렵에 이루어 졌다. 아버지는 새 정부의 중요한 멤버 였다. 우리가 이든의 국회 연설을 분석하는 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왜 이든의 좋은 예를 따르지 않았느 냐고 물어 보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는 쉬운일이 아니었다.
나세르와 이든 다음으로 나의 정치교육에서 중요하게 다루어 진 인물은 매우 공격적인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 였다. 수카르노는 반식민지 운동의 아시아 영웅이었다. 인도네시아는 400년전 향신료 무역이 처음 시작 될 무렵 부터 화란 사람들의 지배를 받았다. 그는 화란 사람들을 몰아 내고 인도네시아를 독립시켜서 유명 해 졌다. 인도네시아는 수많은 섬으로 만들어진 나라이다. 섬은 여러 봉건 영주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수카르노는 화란을 패배 시킨 후, 여러 섬의 영지들을 통합하여 한 나라로 만들어서 그의 지위를 확고하게 했다.
1955년,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에서 반둥 회의를 개최하여 국제적인 명성를 얻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들이 식민주의에 반대하기 위해서 서로 단결 할 것을 제안하기 위해서 였다. 아버지는 반둥회의가 신기원을 만드는 사건이라고 생각 했다. 빼앗기고 짓밟힌 사람들의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서방 식민주의의
도덕적인 타락을 국제 무대에 보여 줌으로써 식민지시대의 종말을 선언 했다. 그는 시대의 분기점을 만드는 회의에서, 얼마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기를 원했을 까!
그가 반둥회의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나는 처음으로 정치적인 야망에 얽매인 사람의 감정적인 면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인도 수상 자와할랄 네루의 연설을 들을 때, 너무나 열광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카리스마 있는 인도 수상의 식민주의 비난을 지지하고 박수를 치며 찬사를 보내는 많은 청중과 같이 있는 것을 상상하고 있었 음에 틀림이 없었다. 식민세력의 죄악에 대한 아버지의 분노는 마치 억수 속의 홍수 처럼 격렬하게 쏟아져 나왔다. 이것은 그의 사상적인 신념과 추상적인 정치 이론을 뛰어 넘었다.
“대단한 웅변 이야! 무서운 통찰력이야! 제3세계 국가들은 식민세력을 패패 시켰고 계속해서 승리 할 것이다. 네루와 그의 멘토 였던 마하트마 간디는 제3세계의 승리를 거둔 투쟁의 화신이 되었다.”
나는 터져 나오는 그의 심정에 의해서 너무나 감동하여 그냥 그대로 굳어 버렸다.
수카르노에 대한 우리들의 이견에 관하여, 아버지는 그가 이차대전 중에 일본과 협조 했다고 성급하게 지적 했지만, 그는 일본이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의 “적의 적” 이었음을 말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를 침략하는 일본과 수카르노가 협조 한 것은 인도네시아가 화란 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반면에, 욍징웨이의 일본과의 협력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려는 나라의 욕망을 저 버리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제3세계 지도자들 처럼 수카르노도 다수의 칭송을 받은 후 독재자로 변했다. 결국 1960대 중반에 미 중앙정보부의 조종을 받은 쿠데타로 그는 권좌에서 축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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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아버지 지도하에 이루어진 나의 정치교육에 놀랍지 않게 자주 등장 하는 토픽이었다.
홍콩에 사는 수백만의 중국 사람들 처럼, 아버지와 나는 매일 여러가지 다른 관점에서 우리는 식민지 인임을 상기 시켰다. 우리는 영국 시민이 될 자격이 없었고 시민의 권리도 가질 수 없었지만 영국 국고에 세금을 내고 있었다.
1950년대에 매년 새해가 되면 홍콩의 총통은 왕실의 식민지가 영국 국고를 얼마나 채웠는 가를 발표 했다. 그러나 클론과 홍콩의 언덕은 판잣집 으로 덮여 있고 거의 대부분의 식민지 교육기관은 개인 사업체가 이익을 목적으로 운영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영국인들은 어떤 공원에 “개와 중국인의 출입을 금지 합니다.” 라는 팻말을 세워 놓았었다. 1940년대 후반에 이 사인을 제거 했는 데, 이것은 중국이 이차대전에서 승리한 4개 동맹국 중의 하나 임을 인정 한다는 제스처 였다. 영국인들은 한편으로 잔악한 차별 정책을 버리기는 했지만, 같은 백인인 영국 사람과 미국사람은 식민지에서 부와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계속해서 즐겼다. 1950년 대에는 단순히 “백인” 이라는 그 자체 때문에 백인에게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중국인에게는 닫혀 있었다.
백인들은 언제든지 명예와 부를 능력과 추진력에 상관 없이 얻을 수 있었다.
이 땅의 주인이었던 사람이 이곳에 속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이등 국민 취급 받는 것처럼 화나고 멸시 당하는 일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홍콩에 사는 중국인들이, 중국 본토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두려움과 국민당에 대한 거리감에도 불구 하고, 결국 왕실의 식민지 주민이 된 이유는 결코 중국인임을 포기하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중국 본토의 공산당 편이 아니면 타이완의 국민당 편을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거래의 편의에 따라서 이 쪽에서 저 쪽으로 바꾸기도 했다.
형과 두 누나가 타이완에서 살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타이완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었다. 장카이 색은 자신이 중국전체를 대표 한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지만, 아버지는 그가 결코 중국 본토로 돌아오지 못 할 것이 라고 믿고 있었다.
타이완에서 장카이색과 국민당 패거리들은 *미 해군 제7함대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살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아버지가 보기에 별볼일 없는 존재 였다.
*(번역자 주: 1945-1949년, 4년동안의 중국 내전이 마오의 승리로 끝나고, 장카이색이 타이완으로 도피 하자, 마오는 타이완 정벌 군을 중국 남부 해안에 배치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전동안 장카이색의 국민당 정부를 원조 했던 미국은 국민당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실망하여 원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장의 타이완 정부는 마오에게 함락 될 가는 성이 높았다. 이때 김일성이 남한을 침략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었다. 미국의 투르만 정부는 타이완 해엽에 제 7함대를 급파하고 중공(마오)의 타이완 참략을 견제 했다. 숨이 넘어갈뻔 했던 장카이색은 김일성 덕분에 살아 남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마오는 남부 해안의 타이완 정벌 군을 북쪽 앞록강 가로 이동 시켜 한반도 진입 준비를 시작 했다. 1950년 10월 맥아더 지휘하의 미군과 유엔군 그리고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중공군이 한반도로 들어오고,
한국전은 미군과 중공군의 싸움이 되었다. 북한에서 미군은 중공군에게 대패하여 1951년1월4일 서울이 중공군에게 힘락 되었다. 거의 멸망을 눈앞에 두었던 인공(북한)을, 세계 최강국 미국을 이기고, 살려낸 신생 중국공화국(중공)은 축제 분위기 였다. 100여년동안 서방 세력에게 능멸 당했던 중국인들의 자존심은 하늘을 찌를 듯 했고 공산당의 인기는 절정에 달 했다. 1949년10월 마오가 중국공화국(중공)을 선포 한지 1년만의 쾌거 였다.)
중국 본토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중국공화국을 세운지 7년 후, 공산주의 정권은 중국근대사에서 처음으로 정치, 경제, 행정적 지배력을 성취 했다. 마오 주석과 그의 동료들은 대중적 인기의 최고점에 있었다. 요지음 중국의 부러울 만한 경제 발전을 이룩한 공산당 엘리트들의 인기도 당시 지도층의 인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마오, 저우언라이(수상), 리우 사오-치(실권없는 국가주석 ), 주대(군 사령관, 중국 해방군 창설), 또 다른 폴리티보로 동료들은 1950년대 중반의 중국인들의 인기를 독 차지 했다. 어떤 사람들은 50년대 중반을 중국 사회주의의 황금기라고 한다.
당시 중국 본토에 살던 중국인들은 공산주의자가 통치하기 전의 혼란과 장카이색의 국민당 정부의 무능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공산당 정부가 전국민교육과 전국민의료 보험을 실시한 데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두가지 목표는 기술, 경제, 산업화에 있어서 유럽과 미국에 수세기 동안 뒤진 나라의 대담하고 웅장한 설계의 상징이었다. 사회기반시설이 부족하고 도저히 이겨낼수 없는 장애에도 불구 하고, 공산당은 높은 목적을 향해서 빠른 속도로 계획을 진행 했다.
여러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1950년 대에, 100년만에 처음으로 이 나라가 옛날의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길을 발견 했다고 생각 했다. 공산당이 나라를 통일 했고, 나라의 품위와 독립을 확고하게 했다는 것에 대다수의 중국사람들이 동의 했다. 그들은 산업자유의 상실은 필요한 희생이라고 생각 했고, 그 것이 영구적이 아니기를 바랐다. 공산주의를 거부한 사람들은 타이완, 홍콩 그리고 해외로 이주 했다.
1955년에 홍콩에 살던 2백만 중국인들 중, 친공산주의자들은 아주 작은 소수민이었다. 대부분의 사업가, 기술자, 교육받은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피해서 홍콩으로 이주 했다. 당연히 이들은 공산주의에 반대 했다. 아버지는 아니었다. 나에게 한번도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1955년이 되자, 그는 공산주의 편으로 기울어 지기 시작 했다.
제3당을 만들려는 시도를 포기 하면서, 그는 정파를 조직하거나 정파에게 자금을 조달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성공에 휩쓸려 버린 것처럼 보였다. 여러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홍콩에 처음 왔을 때 처럼 “파괴를 위한 허무주의자”라고 공산주의자들을 더이상 비난하지 않았다. 그가 공산당 폴리트보로 멤버와 그들의 정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가 그들의 효율적인 관리와 통치에 깊은 인상을 받았 슴에 틀림이 없었다. 어떤 분야에서는 계몽적인 정책을 쓰기도 했다.
“지주를 없애 므로써, 농부들의 생산력을 자극하여 그들의 지지를 얻은 마오가 영리하지 않니?” 아버지는
어느날 현대 중국정치를 나에게 가르치리는 동안 나에게 물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1950년대 초 토지개혁은 잔인했고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그 결과 수만명이 사망했는 데, 그중에 많은 지주들은 소작인을 압박한 적도 없고 약탈하는 불량배도 아니었다. 어쨌든, 토지개혁은, 중국 농부들의 대부분을 차지 했던 다수의 가난한 소작인들의 마음을 샀다. 새로운 질서에서 사회적 지위의 향상과 농촌 구석구석 까지 퍼져 있는 중앙정부에 대한 두려움은 폭발적으로 생산력을 증가 시켰다. 이것은 중국역사상 어떤 정부도 시도해 본적이 없었다. 그 결과 20세기 최초로 중국이 식량 자급자족에 거의 접근 했다.
“공산주의자들이 표준말을 정하고 글자를 쉽게만들어서 소통과 전국민교육을 진작 시킨 것은 현명한 조치였다. “ 어느날 아버지는 감탄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5.4 운동이 시작된지 40년이 지난 후, 그들은 전국민이 읽고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라를 옳은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
그후 그는 단언 했다. “공산당이 국민건강보험을 만드는 데 한의학, 침 그리고 양의학을 다 쓰기로 한 것은 천재의 한 수 였다. 전통 의학은 기술과 기구가 덜 쓰이지만 의료의 여러분야에서 대단히 효과 적이다.”라고.
아버지는 북경대학에 입학하기 직전에 침으로 그의 목숨을 구한 의사 송을 기억 했을 것이다.
“정부가 소수민족에게 어느정도의 자율과 우대를 해주어서, 그들을 달래어 한번에 국가에 합류하게 했다. 이것은 훌륭하고 전례없는 성과다.” 아버지는 나에게 귓속말로 일러 주었다.
공산당지도자들은 다수 민족인 한족과 수백의 소수민족 사이의 오래묵은 역사적 분쟁을 중국공화국 선포 직후 부터 해결하러 나섰다. 소수 민족을 우대하는 입법으로, 차치지구를 만들었다. 가장중요한 소수민족의 언어를 장려 했다. 예를 들면 위구르, 몽골리안, 티베탄, 그리고 다른 소수민족언어 들이다. 정부는 이와같이 소수민족에게 계몽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 법의 시행은 한족 간부가 했는 데, 그들 대부분은 소수민족의 문화와 사람들에 대해서 뿌리깊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궁극적으로 중앙정부는 한족의 우월감과 수백의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 대우를 제거하는 데 실패 했다. 차별은 마오의 문화혁명 동안에 마치 암세포 처럼 퍼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찬사가 더할 수 없이 지루했지만, 공산당 정책에 대한 그의 열렬한 칭찬은 당시에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1950년 대 중반, 반 우파 운동이 시작되기 전, 당은 몇 백의 다른 인종들로 만들어진
화합의 나라로 향하는 새로운 시작임을 공표 했다.
아버지의 정치 문제에 대한 강의와 우리의 토론은 의심할 여지 없이 나의 고등학교 시절의 하이라이트 였다. 나는 그의 지식을 소화 했고 배움을 즐겼다. 그는, 그 대가로, 나의 활발한 반응을 좋게 받아들였고 우리의 토론을 즐거워 했다. 그 때 까지 내가 위트와 싸캐즘에 재주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는 나의 정치인에 대한 신랄한 코멘트에 폭소를 터트렸다.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한데, 내가 조셉 스탈린의 KGB
수장이었던 악마 라브렌티 베리아를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라스푸틴”이라고 하자 아버지가 네 앞에서 박장대소를 하여 내가 깜작 놀란 적이 있다.
(*번역자 주: 그리고리 라스푸틴은 러시아 제국 때의 인물로, 본래 떠돌이 수도자에 불과했으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아들인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의 병을 호전시킨 업적으로 황제의 탄탄한 신임을 얻은 후부터 비선실세가 되어 국정을 제멋대로 휘두르면서 러시아 제국의 몰락에 막대하게 일조한 인물이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유럽 주요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후진적인 전제군주제 체제와 농노제에 머물러 있었고, 대내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이미 망국의 요인이 가득 쌓여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라스푸틴은 러시아 제국의 멸망을 앞당기다 못해 로마노프 왕조의 이미지에도 크게 먹칠하였다. 결국 그의 사후 황제 가족을 포함한 로마노프 황실 관계자들은 물론 러시아의 내전으로 많은 러시아 국민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나라를 망친 간신 그 자체이다.
그래서인지 서구권에서 라스푸틴은 간신의 대명사 중 하나처럼 되었을 정도다. 러시아에서는 괴승(безумный монах)으로 불리고, 영어권에서는 미친 수도자 라스푸틴(Rasputin the Mad Monk), 한국에서는 요승 라스푸틴등으로 불린다. -나무위키)
그러나 내가 윈스턴 처칠을 “고래 기름 덩어리”라고 했을 때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처칠이 더좋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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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고등학교 시절이 끝나갈 무렵, 어느 잊지 못할 날, 아버지는 나를 그 앞에 앉히고, “너는 머리가 있다.” 나는 갑자기 기쁜 마음이 솟 구쳤다. “너는 열정도 가지고 있다.” 그는 말을 이어 갔다. 그러더니 악의 없이, “나는 네가 네 큰형 처럼 잘 생겼기를 바랬다. 그러면 너는 언젠가 중국의 훌륭한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네 머리와 많은 노력으로 아직도 그렇게 될 수 있다.” 라고 덧붙였다.
1957년 17살 때, 나는 평민의 보습을 받아들였다. 우리집 사람들은 모두 매력적이었다. 큰형은 어느 누구 보다도 잘 생겼었다. 4명의 누나들은 어디를 가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서 쳐다보았다. 나만이 그저 그런 얼굴로 태어 낫다.
10살 먹어서 내가 홍콩에 사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돌아 온 후, 나는 왜 막내 아들은 다른 형제들 처럼 잘 생기지 않았나 하고 이야기 하는 것을 여러번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내 생김새에 관한 비평은 엄현한 사실이었다. 이것은 정치인의 나의 장단점에 대한 평가였다. 이것은 더이상 나를 속 상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 말에 내가 대꾸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속이 상해서가 아니었다. 내 꿈과 환상 속에서 정치인으로서 나를 한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린시절 가장 가치있는시간 이었던 난징의 빈민촌에서 만들어진 층성스럽고 헌신적인 인간관계를 갈망 했다. 나는 세상 저 먼곳을 가보는 것이 내 꿈이었다. 헬렌 이모가 일요일 마다 상하이 항구를 데리고 갓을 때 상상 했던 것 처럼. 나는, 상하이에서 사귄 큰형 다게 같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사람을 지도하고 관리 한다?” 나는 좀 의심스럽게 생각 했다. “나에게 무슨 보탬이 되겠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관대하고 넓은 기분이었다. 나의 침묵에는 아랑곳 없이 내 장래 설계를 계속 했다.
“ 정치 활동을 위한 준비로, 오늘날의 몇가지 기본적인 법칙을 말해 주마.” 그는 솔직하게 말 했다. 너는 그것들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어야 한다. 왜냐면 그것들이 함정과 배반을 피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첫째: 너 자신은 그림자 속에 있고 모든 사람은 밝은 곳에 두어라.”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 보았다.
“그 뜻은 네 주위의 모든 것을 파악하려면; 너 자신의 생각, 계획, 느낌, 또는 너자신에 대한 모든 것은 숨기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세상이 다 알게 한다는 뜻이다. “ 라고 설명 했다.
나는 보통 나 자신에 대한 정보를 자진해서 말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일부러 수집하지도 않는 다고 생각 했었다. 아버지는 예외 지만. “세상에 이런 이상한 법칙도 있나!” 나는 혼자 나 자신에게 말 했다.
아버지는 계속 했다.
“둘째: 누가 누구와 연관이 있나를 파악 하라. 누구나 자신의 내부 서클이 있다. 모든 사람의 절친한 친구들의 서클을 아는 것을 너의 업으로 삼아라.”
흥미가 있었다기 보다는 호기심에서 물었다.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아주 간단하지.”그는 대답했다. “아주 재미있지만 누구에게도 해가 않되는 가십을 어떤 사람에게
살짝 이야기하고 이것이 어떻게 퍼지는 가를 보면 된다. 하루 이틀만에 퍼지는 곳이 그 사람의 내부 서클이다.”
“똑같은 목적을 달성 할 수 있는 또 다른 트릭은 어떤 사람에게 하찮게 보이는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어 보면, 그 내용이 어디에서 나왔는 지를 알 수 있다. 때때로 이 대답의 근원지가 서클 맴버 한 사람이나 여러 사람을 지적 한다.”
나는 두가지 트릭 모두 대단히 약은 방법이라고 생각 하고 내가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고 고개를 끄덕 였지만, 한편으론 “내가 뭐하러 다른 사람의 내부 서클 친구들을 걱정 해?” 라고 나 자신에게 속으로 말했다.
셋째: “서쪽을 치려면 먼저 동쪽에서 잡음을 내라.” 아버지는 계속 했다. 이것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이었다. 나는 벌써 이 책을 읽어서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다.
넷째: “상대를 끝내 버릴 수 있는 방법과 의도가 없으면 절대로 남을 공격하지 말라.” “끝내 다니요, 완전히 파멸 시키는 것입니까?”
“그렇다. 정치적으로 아니면 신체적으로,” 아버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아버지가 누구를 파멸 시킨적이 있느냐고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아마 그는 그런적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 했다. 결국, 그가 정치 활동을 하는 동안 그는 권력은 총이 아닌 만년필에서 나온다고 믿어 왔다.
다섯째: “상대가 아주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 말을 들을 시간을 마련 하라. 쓸데 없는 소리를 해도, 왜 그러는 지를 알기 위해서 귀를 기울여라.”
여섯째: “참아라, 참아라, 참아라.”
아버지가 그의 법칙을 하나하나 이야기 할 때, 나는 정치인이 되는 것과 정치와 정치적인 사건을 공부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임을 깨달았다. 정치를 공부 하는 것은 파페트 연극을 구경하는 것이고 정치인이 되는 것은 파페트가 되는 것이었다. 전자는 흥미롭지만 후자는 소외 되는 것이었다. 나는 정치인이 자신이 파페트라고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은, 특히 저개발국가에서, 관점의 문제였다.
아버지가 말한 법칙이 옳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정치인은 극도로 지루하고 병적으로 피해망상적인 인생을 산다. 획책하고, 계획하고, 의심하고, 추측하고, 항상 자신의등을 실핀다. 이것은 마치 자기가 지도하는 사람들과 자기와 협조하고 있는 동료들에 대항하여 피곤한 전쟁을 하는 것과 같다. 나에게는 정치가 아니라도 이미 전투로 꽉차 있다. 나는 아버지, 선생, 동급생과의 전투, 인질범, 비밀경찰, 불량배들과의 전투, 공포, 유령, 악마와의 전투를 하면서 살아 왔다. 나는 더많은 사람들과 피곤한 전쟁을 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나는 혼자 절대로 정치인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날 아직도 강의를 끝내지 않았다. 끝으로 그는 천연스럽게 그의 나에 대한 기대를,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또 다른 그의 환상적인 꿈을 말 했다.
“ 아들아, 만약 내가 운이 좋아서 어느날 중국의 대통령이 되면, 네 큰형을 비밀경찰의 수장으로 고려 해야 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 아버지의 생각은 도를 넘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아버지는 발끈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나는 그때 타이완에 살고 있는 큰형을 “비밀경찰의 수장”으로 임명 하라는 제안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항상 비밀경찰의 수장은 스탈린의 베리아, 장의 데뤼, 마오의 강센 처럼 백정들이라고 생각 했다. 왜 아버지는 형을 그런 미움받는 악마가 되기를 원 할 까? 나는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저 가정적인 상황에서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반발하지 않기로 했다.
하여튼 이 과대망상적인 기대 즉 나와 아버지 관계의 새로운 국면은 수많은 즐거운 결과를 만들었다. 과거에 아버지는 친구들과 같이 오락을 즐기려 외출 했다. 그러나 나의 정치교육을 시작한 다음 부터, 그는 나를 극장, 식당 그리고 해변가 리조트에 데리고 갔다. 우리 관계는 나의 고등학교 시절 마지막 2년 동안에 바뀌었다. 그것은 사랑스러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적대적이거나 반복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그를 무서워 했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더이상 나를 무시하거나 무조건 명령에 복종하게 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번, 그가 내생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태도를 보여 주기 까지 했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변하면서, 나는 이 아버지와의 원만한 소통이 어디서 왔는 지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인정과 애정에 너무 궁핍 했었다. 나는 너무 어렸고 남의 말에 넘어가기 쉬었다. 정치인에 대해서 많이 배웠지만 나는 아직도 순진 했다.
나는 그때 그의 충고를 가슴깊이 받아 들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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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이 가까워 지자 나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얻은 후 내가 선택 할 수 있는 3가지 길이 있었다. 홍콩에서 지위가 낮은 사무 직원으로 일 하거나, 타이완에 있는 대학에 입학 하거나, 아니면 중국 본토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3가지 선택은 결국 두가지로 압축 할 수 있다. 취직 하느냐 아니면 대학에 가서 더 공부 하느냐 였다.
대학에 다니려면 나는 어디서 어떻게 다녀야 하는 냐를 알아야 했다. 우리 고등학교에 진학상담이라는 것은 아예 없었다. 우리반 동급생들 대부분은 졸업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하는 데 가족의 도움과 지도에 의지 했다. 나는 가족이 없었고, 내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충고는 아버지로 부터 였다. 그는 나에게 중국 본토에서 대학교육을 받을 것을 권유 했다.
대부분의 동급생들은 외국에서 대학에 다닐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미국, 캐나다, 영국, 오스트랄리아가 그들의 목적지 였다. 그들은 이미 가족의 친구, 그리스도교 선교단체, 혹은 친척들을 통해서 외국에 연고가 있었다. 홍콩에는 중국고등학교 졸업생을 위한 고등교육은 없었다. 영국 학교 졸업생 만이 홍콩대학의 입학시험을 치룰 자격이 있었다. 이것은 영연방 교육제도권에 있는 아주 작은 대학이었다. 홍콩에 있는 몇 안되는 영국 중고등학교는 홍콩 영국 관리들의 자녀를 위해서 세워 졌다. 만약 중국사람이 이 학교에 자녀를 보내려면 영국사람의 앞잡이가 되어 중국사람을 관리하는 입장(comprador)이 될 것을 각오 해야 했다. 이 학교를 다닌 학생은, 한문도 모르고, 자기나라의 엉성한 역사도 모르고, 문화유산도 모르고, 문학의 전통도 모르고 자랐기 때문이었다. 중국인 학교의 선생과 학생은 이 영국 앞잡이들 를 증오 했다.
정기적으로,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영국교육제도의 상급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시험을 보게 하여, 우리들에게 이것들이 얼마나 쉬운지를 확인 시켰다. 그래서 우리들은 영국 학생들을 놀릴 수 있었고, 길거리에서 서로 만나면 자주 싸웠다. 써움은 경찰 사이렌이 울려야만 끝이 났다.
내가 홍콩에서 하급 사무직을 택하면, 나는 영국학교 졸업생의 관리하에 들어가게 된다. 식민지 정부는 영국학교 졸업생들을 더 양질의 지원자로 우대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런 수모를 원치 않았다.
타이완에 가는 것도, 나는 그곳에 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우리 형제가 그곳에 있지만 서로 연락이 없었다.
전에 이야기한것과 같이, 아버지와의 정치 토론에서 타이완은 거론 된 적이 없다. 그와 나는 그곳은 경력을 쌓기에 별로 장래가 보이지 않는 다는 점에 동의 했다.
따라서 나에게 남은 선택은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중국을 높이 평가하고 외국 유학에 필요한 학비 조달을 거절 함으로 써 이 선택을 굳혔다.
나는 아버지 사무실에서 북미와 유럽에 대해서 읽었다. 나는 파리, 베니스, 뉴욕, 로마,그랜드 티톤, 요세미티, 다른 훌륭한 곳들의 사진을 보았다. 그곳에 가보는 것보다 나를 더 유혹하는 것은 없었다.
그곳을 꿈 꾸는 것만도 나를 흥분하게 했다. 나는 우리 동급생들의 외국유학 가는 기회를 몹시 탐냈다. 아니 탐내는 것을 넘어서 부러움으로 몹시 속이 상 했다. 누군가가 미국, 캐나다, 영국, 오스트랄리아의 이 대학 저대학에 간다고 발표 할 때 마다, 내 가슴을 쳤고 바로 우울해 졌다. 얼마나 내가 같은 기회를 갈망 했 는가!
누군가가 갈길을 지적해주고 도움의 손을 내민 다면 나는 무슨일이든지 할 것이고 어떤 가치도 지불 할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 공부하러 외국에 가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선택의 기회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한번도 그것을 가능성으로 제시한 적이 없었다. 나는 학비를 조달할 길이 없었고, 미국이나 캐나다에 있는 학교가 학생들에게 좋은 성적 만으로 입학을 허가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중국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여, 이를 싫어하는 마음 이 생길 때 마다, 나 자신을 위로 했다. “나 자신의 나라에서 나의 미래를 찾는 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하고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마지막 수단으로 국수주의 까지 동원 했다. “ 결국, 아버지 말씀 대로 공산주의자들은 아주 지혜로운 일을 해서 중국을 근대 세계로 들어오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나도 그 일에 참여 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합리화 했다.
일기장에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두각을 나타 내 겼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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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9월, 내 나이 열일곱에, 내인생에 두번째로 중국과 홍콩 경계를 넘었다. 첫번째는 내등을 조국에 돌렸고 이번에는 홍콩 쪽에 돌렸다. 내 소지품은 모두 작은 여행 가방에 들어 갔다.
경계선에서 나는 7년전 헬렌 이모와 같이 했던 우리들의 여행을 생각 했다. 그때 나는 작은 소년 이었고, 중국을 탈출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가운 데 헬렌 이모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지금도 이모와 헤어져서 캔톤 역에 혼자가 되어 놀랐던 일을 생각 하면 아직도 몸이 떨린다. 그때 홍콩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아버지에게도 낯설은 곳이었다.
나는 영국 열차에서 내리자 경계선을 살펴보았다. 같은 다리에 같은 검문소였다. 이번에는 피난민들의 긴 줄이 없었다. 사람이라고는 보초 서고 있는 중국군인과 영국 경찰 뿐이었다. 1950년 말에 홍콩 정부는 경계선을 닫았다. 반면에 공산당 정부는 홍콩에서 중국으로 건너오고 싶은 중국인에게 경계선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그쪽으로 걸어가는 홍콩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홍콩과 중국 사이의 강 위에 놓여 진 다리를 건너면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외로움을 느꼈다. 과연 내가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이 현명한 일이었나 하는 의심과 내가 발을 디디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다. 내가 도망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 있었는 데, 그것은 홍콩 신분증 이었다. 이것이 있으면 식민지로 돌아갈 권리를 가진다. 나는 이것을 사용하지 않기를 바랐다.
앞으로 걸어 가면서, 나는 헬렌 이모와 그녀를 떠나게 한 괴로움에 대한 생각을 그칠 수가 없었다. 나는 지난 7년 동안 그녀와 말한 적이 없지만, 1950년 상하이에서 그녀에게 닥친 난관을 생각 하면 뱃속에 불안한 느낌이 자꾸 쌓인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 않지기 위해서, 아버지가 해준 정치교육 에서 자주 나왔던 공산당정부가 실시 했던 칭찬받을 만한 정책을 자꾸 생각 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아버지 마음을 돌려서 그들을 그렇게 높이 평가 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한 약속으로 나라가 발전하고 있다면, 내가 돌아가서 그 약속에 참여 할 수 있을 것이다.”하고 나자신에게 말 했다.
지금, 나를 환영하듯 불어오는 가벼운 바람이 내 이마와 손의 땀을 식혀 주는 동안, 나는 내 가방을 꽉잡고 서둘러 걸어서 다리를 건너 중국으로 향 했다. 용감하고 낙관적이려는 나의 의식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의심을 지워버릴수가 없었고 나의 불안감을 극복할 수가 없었다. 다리를 건너 중국으로 들어 가면서, 내 가슴속에 꺼지려고 깜박이는희망의 불빛을 겨우 유지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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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철 James Ohn은퇴 의사
온기철의 브런치입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본직은 의사이고 취미는 골프와 역사 공부입니다. 지루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시키기위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