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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 호서유학 변천의 자취를 찾아 (2)—①
— [국제퇴계학연구회] 제5회 유교문화 유적답사
2022.08.25.(목)~08.27.(토) (3일간)
* [호서유학의 유적 답사] (제2일) 8월 26일(금요일) 오전
* [답사 제2일의 여정] ▶ 2022년 08월 26일 (금요일) : 도고 SM백셀(10:00) 출행→ 충북 보은 속리산
* [오전] • 도고 이광호 박사 SM백셀 특강→ • 아산 외암마을→ • 아산 맹사성고택→ • 예산 추사고택
* [오후] • 예산 최익현묘소→ • 홍성 양곡사→ • 보은 속리산 [연송호텔](연찬회)
도고의 아침
온천휴양지 아산의 도고(드 위트 도고콘도)에서 아침을 맞았다. 창문을 열어보니 눈부시게 화창한 날이다. 어제 아침 답사를 시작하면서 이광호 회장이, ‘답사를 떠나는데 우리가 제일 감사할 데가 어딘지 아느냐?’고 물었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하늘을 가리키며, ‘보세요. 이 좋은 날씨, 맑은 햇살을 내리는 하늘이 아니겠느냐?’ 했다. 그렇다. 어제 이어 오늘도 하늘이 푸르고 맑은 날이다. 콘도의 로비에 내려온 모든 회원들의 얼굴도 밝고 화사했다. — 회원들은 버스편으로 SM벡셀 회사의 식당으로 이동하여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 후, 오늘의 첫 일정이 시작되었다. 회사의 강당에서 회사 임원들과 답사 회원들이 모인 가운데 이광호 박사의 특강이 있었다.
“향기로운 삶의 길을 열다”
— [이광호 박사 SM벡셀 특강] —
이광호 박사는, 서두에 《대학》 「성의(誠意)」장을 인용하여, ‘부귀와 덕성 가운데 어떤 것이 향기로운 삶인가?’, ‘덕성이란 무엇일까?’, ‘진실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강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1. ‘진실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
우리가 사표로 삼는 퇴계의 학문은 자기완성의 학문[爲己之學]으로, 도(道)를 알고 실천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는 ‘성학(聖學)’이요, ‘도학(道學)’이다.
오늘날 과학이 물질과 욕망, 소유를 문제 삼는데 반해, 도학은 자신을 문제 삼고 자신의 삶을 문제 삼고 자신의 마음을 문제 삼는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이고 올바른 삶이란 무엇이며 진실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
유학에서 도학의 출발점은, 요(堯)가 순(舜)에게 왕위를 선양하며 전해 준 가르침인 “윤집궐중(允執厥中)”이다. 이 네 글자로 유학의 도(道)가 설명 가능하다. 순(舜)은 이 가르침에 충실하여 유학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왕(聖王)이 되었다.
그 다음 순(舜)이 우(禹)에게 왕위를 선양할 때는 여기에 설명이 추가되어 16자가 되었다. 즉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이다. 풀이하면,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하게 그 중(中)의 도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윤집궐중(允執厥中)’의 전제조건으로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을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서 인심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사리사욕이요, 도심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참다운 마음[性], 즉 양심이다.
주자는 《중용》 서문에서 ‘允執厥中’과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를 요—순—우가 서로 전한 도통의 전수(傳授)라고 밝히고 있다. 주자는 《대학》과 《중용》은 표리관계를 이룬다고 했다. 《대학》에 성(性)자가 없기 때문에 주자는 《중용》 서문에서 도학을 성(性) 중심으로 설명하여 “본성이 가진 것을 알아서 온전하게 실현한다(知其性之所有而全之也)”라고 설명한다. 《중용》에는 심(心)자가 없어 《중용》 서문에서 심(心)자를 중심으로 도학을 설명한다.《대학》, 《중용》의 내용은 도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송대의 정자와 주자가 《대학》과 《중용》을 도통의 핵심 사상으로 이해하여 《논어》《맹자》와 함께 사서(四書)로 체계화하였다. 퇴계는 도통의 전승과정과 《대학》-《중용》의 관계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 실천적인 내용이 퇴계의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에 담겨있다.
2-1. 《논어》의 도(道)
공자는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논어》, 「이인」, 8장)라고 하여, 도를 아는 것이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천명하였다. “학자는 도(道)에 뜻을 두어야 한다.”(《논어》, 「이인」, 9장)라고 하며 학자들에게 도를 가르치고, 도를 행하며 살면 가난한 가운데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 《논어》, 「술이」, 16장)고 하였다. 공자는 《논어》, 「위정」, 4장에서 도를 추구하고 실천하며 산 자신의 생애(生涯)를 보여주었다.
과학이 외적 세계에 대한 지식을 축으로 삼는데 반하여, 공자의 학문은 “옛날의 학자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학문을 하였다.”라고 하며 자신의 삶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학문을 하였다. 공자의 말에서 보듯 공자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기 시작하여 70세에는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 인간 완성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도(道)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귀일되는 것이라고 한다.
2-2. 《맹자》의 도(道)
맹자는 사람들이 도를 알고 실천하기 쉽게 설명하려고 인간의 심성(心性)에 바탕하여 도(道)를 설명한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는 사람이 가야 하는 길이다. 그 길을 버리고 따라가지 아니하고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찾을 줄 모르니 애석하구나. 사람이 닭과 개를 잃으면 찾을 줄 알지만 마음을 놓아버리고 찾을 줄 모른다. 학문의 방법은 달리 없다. 그 놓아버린 마음을 찾아야 할 뿐이다.”(《맹자》, 「고자」상, 11장)
“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 편안한 집을 비워두고 거처하지 않으며 바른 길을 버리고 따르지 않으니 애석하구나.”(《맹자》, 「이루」상, 10장)
사람의 마음에는 인의(仁義)를 실천할 수 있는 본성이 갖추어져 있는데 인간이 인의를 실천하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맹자는 인간의 감각기관에는 욕구와 욕망은 있지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외물에 끌려가고야 만다고 한다.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이를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며 ‘그 큰 마음을 먼저 세우는 것’을 강조하였다.(《맹자》, 「고자」상, 15장)
맹자는 놓아버린 마음을 되찾아 먼저 그 큰마음을 세우면, 감각기관의 욕구에 흔들리지 않게 되고 그러면 마음의 본성인 인의의 도덕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본성은 누구나 갖추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양을 하면 누구나 대장부가 되고 대인이 되고 요순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유학에서 존숭하는 성인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을 온전하게 실현하는 사람이다. — 그러면 본성(本性)의 실현으로 사람은 과연 얼마나 바뀔 수 있을까?
맹자는 수양을 통하여 사람이 선인(善人), 신인(信人), 미인(美人), 대인(大人)의 단계를 거쳐 도와 합일을 이룬 성인(聖人),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인(神人)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인간의 본성이 실재하고 수양의 길이 열려있는 한 학문을 통한 자기변화와 자기완성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2-3. 《대학》과 《중용》의 도(道)
《논어》와 《맹자》는 공자와 맹자의 삶과 언행을 통하여 도를 설파하고 있는데 반하여, 《대학》과 《중용》은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인 증삼(曾參)과 손자인 자사(子思)가 공자가 가르친 도학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지은 저술이다.
《대학》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밝은 덕(明德)’을 밝혀 격물치지로 지선(至善)을 알고, 성의․정심‧수신으로 지선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화평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제1장의 경(經)은 이를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으로 설명하고 전(傳) 10장은 경의 내용을 알기 쉽게 풀이하고 있다. 요컨대 인간의 밝은 덕성을 밝히는 것과 지선을 실천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중용》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마음을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의 두 계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미발의 마음을 성(性), 이발의 마음을 정(情)이라고 하며, 성은 마음의 체(體)가 되고 정은 마음의 용(用)이 된다. 희로애락이 발하기 이전의 본성을 계신공구(戒愼恐懼)로 함양하여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은 중(中)을 이루고, 희로애락이 발할 때의 정을 신독성찰(愼獨省察)하여 절도에 맞게 실현하여 과불급이 없는 화(和)를 실현하는 것이 공부의 요체이다. 중용에서는 중화(中和)를 극진하게 실현하면 천지가 질서가 잡히고 만물이 육성되는 공효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제1장에서는 ‘중화(中和)’의 ‘성정(性情)’으로 도의 실현을 설명하고, 제2장 이후에서는 중용(中庸)이라는 덕행으로 설명을 하니 책의 제목이 《중용》으로 되었다. 이는 중화의 성정을 이루면 중용의 덕행을 자연스럽게 실천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사서(四書)에 제시된 유학의 도를 문장을 통하여 이해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유학의 도는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인이나 성인을 만나는 것은 얘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유학 경전에는 여러 가지 공부의 방법과 공부를 통하여 도달되는 삶의 경지에 대한 설명이 풍부하다. 오늘날 사람도 원하기만 하면 넓게 배우고(博學), 자세하게 묻고(審問), 신중하게 생각하고(愼思), 밝게 분별하고(明辨), 독실하게 행하는(篤行) 방법으로 도를 알고 있고 도를 자득할 수 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3. 퇴계의 도(道)
퇴계는 주자를 스승으로 삼고 유학을 공부하여 주자를 뛰어넘어 유학의 학문체계를 완벽하게 정리하셨다. 《성학십도(聖學十圖)》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는 선현들의 학설을 통하여 학문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뿐 아니라, 그러한 체계적 설명 가운데 자신이 자득한 방법을 통하여 도학을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기(理氣)를 겸하고 성정(性情)을 통회한 것은 마음이요, 성이 발하여 정이 되는 그 경계는 바로 마음의 기미(幾微)요, 만화(萬化)의 지도리로서 선과 악이 여기에서부터 갈라집니다. 학자는 진실로 한결같이 경(敬)을 유지하여 천리와 욕망에 어둡지 않고, 더욱 이 마음의 성(性)과 정(情)에 주의를 기울여 미발인 때에 존양(存養)의 공부를 깊게 하고, 이발인 때에 성찰(省察)을 익숙하게 하여 진리를 쌓고 오래도록 힘쓰면, 이른바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 중용을 잡는’[精一執中] 성학(聖學)과 ‘체를 보존하여 사물에 응하여 작용하는’[存體應用] 심법(心法)을 밖에서 구할 필요 없이 여기에서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퇴계는 원문 108자의 글 속에 자신이 생각하는 성학의 방법을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다. 퇴계는 「진성학십도차」에서 선현들이 설명하는 성인이 되는 방법을 성학(聖學)과 심법(心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성학에 대비하며 심법(心法)이란 《중용》에서 처음 설명하기 시작한 마음의 체용공부로서 미발과 이발이라는 마음의 두 계기를 통하여 미발(未發)일 때는 중(中)을 극진하게 하고 이발(已發)일 때는 화(和)를 극진하게 하는 공부이다. 퇴계는 종래의 도학을 《대학》 중심의 성학과 《중용》의 심법의 두 갈래로 나누어 이를 종합하고 있다.
퇴계는 《성학십도(聖學十圖)》 중 「심통성정도」 해설에서 자신이 자득한 도학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 퇴계의 공부 방법을 5단락으로 이해하여 볼 수 있다.
1. 이기(理氣)를 겸하고 성정(性情)을 통회한 것이 마음이다.
2. 성이 발하여 정이 되는 그 경계는 바로 마음의 기미(幾微)요, 만화(萬化)의 지도리로서 선과 악이 여기에서부터 갈라진다.
3. 학자는 진실로 한결같이 경(敬)을 유지하여 천리와 욕망에 어둡지 않아야 한다.
4. 더욱 이 마음의 성(性)과 정(情)에 주의를 기울여 미발인 때에 존양(存養)의 공부를 깊게 하고, 이발인 때에 성찰(省察)을 익숙하게 한다.
5. 진리를 쌓고 오래도록 실천에 힘쓴다.
이 다섯 단락의 설을 분석해 보면 제1단락은 마음의 강조이며, 제2단락은 성이 발하여 정이 되는 경계의 기미에 대한 중시이며, 제3단락은 경(敬)의 중시이며 제4단락은 미발일 때의 존양과 이발일 때의 성찰이며, 제5단락은 진리의 축적과 실천을 통한 역량의 강화이다. 퇴계는 이러한 다섯 단계의 방법으로 공부하면 지금까지 성현들이 설명한 ‘정일집중(精一執中)’의 성학과 ‘존체응용(存體應用)’의 심법을 모두 한꺼번에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 퇴계의 참다운 삶의 즐거움, 그 인생의 향기
‘도산서당’은 퇴계 도학의 자득처로 퇴계 도학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퇴계의 시 〈도산서원〉에 나타나는 ‘즐겁고 편안하고 기쁜 얼굴’은 그야말로 향내 나는 삶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퇴계는 시 〈완락재(玩樂齋)〉를 통하여 ‘영원한 즐거움을 주는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는 삶’을 노래하고, 시 〈시습재(時習齋)〉를 통하여 ‘맛있는 불고기보다 더 맛있고 즐거운 진리의 세계’를 노래한다. 더불어,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 술 한 잔 마시고 흥을 돋우며 만물과 일체가 되는 느낌에 취하는 것도 헛된 명예와 벼슬보다는 훨씬 나으니, 이 역시 향기로운 삶이요, 흥이 올라 째째한 마음을 떨치고 호연지기를 느끼는 것도 인생의 묘미에 속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퇴계는 시 〈음시(吟詩)〉에서, 도연명과 두보의 삶을 통하여 ‘인생의 참된 삶의 즐거움’을 터득한 자신의 밝은 마음을 보여준다. — 퇴계의 〈음시(吟詩)〉를 읽어보자
詩不誤人人自誤 시가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그르치니
興來情適已難禁 흥이 오고 정이 가면 이미 견디기 힘들다네
風雲動處有神助 바람 불고 구름 움직이는 곳에는 신의 도움 있으니
葷血消時絶俗音 매운 맛과 비린 내 없어질 때 속세의 소리 끊어지네
栗里賦成眞樂志 율리의 도연명은 시를 다 지으면 진실로 즐거웠고
草堂改罷自長吟 초당의 두보는 고치고 나면 길게 읊었다네
緣他未著明明眼 저들이 밝은 눈을 가지지 못한 것이지
不是吾緘耿耿心 나의 밝은 마음을 봉하지는 않았다네. ―
* [마무리 말씀] ― 화평과 사랑, 그리고 향내 나는 삶
— SM벡셀, Beyond Excellence 회사의 대표이신 정병수 사장처럼 시를 짓고 암송하고 누리는 즐거움 또한 향기로운 삶의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여기 단상의 태극기를 보시죠? 원(圓)은 하나입니다. 하나가 둘을 낳지요. 우리 속에는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가 다양성을 가능하게 합니다. 대립자인 음(陰)과 양(陽)은 ‘하나’가 나은 두 자녀로 서로 상보적인 관계입니다. 서로가 같은 부모의 형제라는 것을 알고 음은 양을 존중하고 양은 음을 존중한 때 화평과 사랑, 그리고 향내 나는 삶이 열립니다. 감사합니다!
○ 아산(牙山) 외암(外巖)마을
아침특강을 마치고, 우리 답사단은 전세버스에 올라 오늘의 첫 탐방지 외암마을로 향했다. 'SM 벡셀‘ 정병수 사장도 오전 답사에 동행했다. ― ‘외암민속마을’은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있다. 북쪽의 설화산(雪華山)을 배산으로 하여 그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마을 어귀는 낮고 마을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지형이다. 이러한 지형 조건에 따라 마을의 집은 대개 남향 또는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일조량이 많으며 겨울에는 서북풍을 막아 주는 좋은 기후 환경을 갖추고 있어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예안 이씨(禮安李氏)의 외암마을
이 마을은 애초에 강씨와 목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었는데, 조선 명종(明宗) 때 예안 이씨 이사종(李嗣宗)이 세 딸만 둔 진한평(陳漢平)의 첫째 사위가 되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그의 후손들이 번창하게 되었고, 그 후손 중에서 6세손 외암(外巖) 이간(李柬, 1677~1737)을 비롯하여 많은 인재가 배출되자 차츰 예안 이씨를 동족으로 하는 동족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 경종 3년(1723)에 이간(李柬)이 쓴 〈외암기〉에 마을 이름을 '외암(外巖)'으로 기록하였다.
외암(外巖) 이간(李柬)은 역사적으로 외암마을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숙종 42년(1716) 세자시강원 자의가 되었으며 정조 때에는 이조참판을 지냈다. 그는 향리에 ‘권선재’를 건립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외암유고(外巖遺稿)》를 남겼다. 그는 조선 후기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명으로 호서사림파의 학맥을 계승한 인물로 명망이 높았다.
외암리는 조선 후기에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성렬은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해 응교, 직각승지, 대사성, 참찬까지 지냈으며 독립 운동에 관여했다. 퇴호 이정렬(1868~1950)도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이정렬은 근현대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이정렬의 할머니가 명성황후의 이모로 그는 어려서부터 명성황후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7세 때(1884)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위험을 무릅쓰고 내전에 들어가 사건의 전말을 명성황후에게 고해 명성황후로부터 직접 '원대지기(遠大之器)'라는 칭송을 들었다.
24세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 생활에 들어섰는데 34세 때 일본이 강제로 통상 조약과 사법권 이양을 요구하자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당시 책임자인 외부대신을 탄핵할 것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은 나라를 팔아먹는 조정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충남 일대의 항일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외암마을 ‘참판댁’은 이정렬이 살던 집이다.
외암마을의 역사
외암마을 입구, 천변에 있는 반석과 석각(石刻)이 자랑거리다. 물레방아와 정자 아래 개천 바닥에 반석이 있고 마을 쪽 암벽에 ‘巍岩洞天’(외암동천)과 ‘東華水石’('동화수석)을 새긴 석각이 있다. ‘외암동천’은 높이 52cm, 너비 175cm로 외암 이간의 직계 후손인 이용찬이 썼다. ‘동화수석’은 높이 50cm, 너비 2m로 역시 예안 이씨인 이백선이 썼다.
현재 이 마을에는 영암댁·참판댁·송화댁 등의 양반주택과 50여 가구의 초가 등 크고 작은 옛집들이 상당부분 원래모습을 유지한 채 남아 있다. 양반집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으며, 넓은 마당과 특색 있는 정원이 당시 양반의 생활모습과 풍류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초가 역시 예스러운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고, 돌담으로 연결된 골목길과 주변의 울창한 수림이 마을의 경관을 더욱 고풍스럽게 하고 있다.
외암마을의 주산인 설화산을 등지고 반대편에 위치한 맹사성(孟思誠)고택이 있는 중리(中里)마을과 함께 약 500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전해진다. 맹사성고택은 남한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옥이다. 그리고 인근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는 ‘추사고택’이 있다. 추사 김정희가 첫 부인과 사별하고 22세에 재혼한 부인이 예안 이씨 이병헌의 딸이다. 그러므로 외암마을은 추사(秋史) 김정희의 처갓집 마을이다. 현재 추사의 한글 편지는 40통이 전하는데 그중 부인 사후 며느리에게 보낸 2통을 제외하면, 38통이 부인에게 보냈을 정도로 사랑이 각별했다.
외암마을은 예안 이씨 종가(宗家)의 연엽주(蓮葉酒)로도 유명하다. 조선 고종 때 현감을 역임한 이원집이 궁중에 있을 때 왕에게 올린 술로, 대대로 종부를 통해 전수되었다. 1990년 충청남도 무형 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고 종부 최황규 여사가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건재고택(建齋古宅) 탐방
외암마을에는 초가(草家)와 기와집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고옥(古屋)으로는 ‘외암사당’이 있는 ‘외암종손댁’을 비롯하여 ‘건재고택’, ‘이참판댁’, ‘감찰댁’, ‘신창댁’, ‘교수댁’, ‘송화댁’ 등 여러 고택이 있다. — 우리 답사단은 시간 관계상 외암리를 대표하는 가옥인 ‘건재고택(建齋古宅)’ 한 곳을 탐방했다. 이 집을 지은 건재(建齋) 이상익(李相翼, 1848∼1897)이 영암 군수를 지냈으므로 택호를 ‘영암댁(靈岩宅)’이라고도 한다. 중요 민속자료 제233호로 지정되었다. 현지의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자상한 해설을 들었다.
건재고택(建齋古宅)은 규모가 매우 크며 사랑채와 안채의 큰 집과 작은 집이 별개로 배치되어 있다. 우선 7칸의 一자형 문간채 가운데에 솟을대문이 있다. 대문을 들어가면 고아한 사랑채[健齋莊]가 시선을 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두 칸의 큰 사랑방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누마루를, 동쪽에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또 하나의 사랑방(작은사랑)이 배치되어 있다. 결국은 마루와 방이 반복적으로 배치된 구성이다.
사랑채 기단은 장방형에 가까운 자연석 그대로를 축대로 쌓았다. 기단 위에는 자연석을 주춧돌로 놓았고, 각 기둥 위는 공포(栱包) 없이 납도리 가구 구조로 만든 팔작지붕 형태다.
조선시대 한옥에서는 일반적으로 정원을 만들지 않는데, 외암마을은 많은 집이 정원(庭園)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재고택 외에도 참판댁 큰댁과 작은댁, 송화댁, 교수댁 등에도 정원이 있다. 특히 건재고택 사랑채 앞의 정원은 처음 집을 지을 때 기본적인 구성을 했으나, 일제강점기 때 후손이 일본을 여행한 후 부분적으로 일본식 정원 기법을 도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특징은 넓은 외부 공간을 그대로 두지 않고 침엽수와 활엽수를 대담하게 군식(群植)하여 자연스런 수목을 구성하고 있다. 상록수를 주기적으로 손질하여 인위적으로 꾸민 일본식 정원과는 다른 모습이다.
안채는 사랑채 오른쪽에 있는 중문(中門)으로 들어간다. 살림집으로 큰 집은 10칸의 ㄱ자형 안채, 작은 집은 6칸의 ㄱ자형 안채, 7칸의 一자형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기둥에 많은 글[柱聯]이 걸려 있어 사랑채 같은 운치 있는 분위기가 흐른다. 안채는 동쪽에 곳간채를 두고, 위쪽에 사당(祠堂)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은 북동쪽 높은 곳에 있는데, 맞배지붕에 방풍판을 옆에 댄 전형적인 건물이다.
건재고택에는 여러 종류의 굴뚝이 있다. 그중 하나가 안채의 안방과 건넌방 굴뚝으로, 벽돌로 네모나게 쌓아 올린 후 옹기 굴뚝을 위에 올려놓았다. 중문을 지나 안채로 가면 사랑채를 드나드는 손님들이나 사랑채 하인들이 안채를 직접 볼 수 없도록 ㄱ자형 담을 두고 있고 위로 연가가 있다.
건재고택은 설화산 계곡에서 흐르는 계곡물의 일부가 동쪽 담장으로 흘러들어 안채의 연못물과 만난 뒤 사랑채 마당에 꾸며진 연못으로 흐르도록 해 놓았다. 외암리의 다른 집들도 계곡물을 이용한 연못을 갖추고 있지만, 건재고택은 별도로 담 아래에 우물이 있다. 사랑채 동쪽에 정자와 연지가 배치된 것은 마을의 지형적인 특징과 풍수지리를 조합해 건설했기 때문이다. 특히 설화산 계곡에서 흘러든 깨끗한 정원수와 소나무와 향나무, 단풍나무 등은 완벽한 그림 한 폭을 보는 듯하다.
외암(外巖) 이간(李柬)
이간(李柬, 1677~1727)의 자는 공거(公擧), 호는 외암(巍巖) 또는 추월헌(秋月軒), 본관은 예안(禮安)이며 입향조 이사종(李嗣宗)의 6세손이다. 이간은 숙종 36년(1710) 장릉 참봉에 천거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는데, 숙종(1716) 때 세자시강원 자의(咨議), 영조 즉위 1년 동안에는 회덕현감, 경연관(經筵官)을 잠시 지냈다. 정조 때 이조참판,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가 되고, 사후 순조 때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불천위(不遷位)에 제수되었다.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으로 외암서원(巍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외암(外巖) 이간(李柬, 1677~1727)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그리고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1641~1721)로 이어지는 율곡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율곡의 성리학설을 그 학파의 정통적 계승자들과 다르게 해석하여 자신의 학문적 독특성을 드러내게 된다.
외암 이간과 호락논쟁
외암(外巖) 이간(李柬)은 권상하 문하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으뜸이었다. 그의 독창적인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은 융화적 세계관, 이신론적(理神論的) 가치관을 바탕으로 체계화한 보통주의적 철학사상이다. 외암은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논쟁에서 ‘인간과 동물의 본성은 다르지 않다.’라는 이른바 인물성구동(人物性俱同)을 주장하였다. 조선조 성리학에서 ‘인물성동이’에 대한 논쟁은 회암(晦庵) 주희(朱熹, 1130~1200)에게서 비롯되었다. 회암은 《중용(中庸)》 첫머리에 나오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을 주석하면서 “인간과 동물이 태어남에 각기 부여받은 리(理)를 얻음으로 인하여 건순(健順)·오상(五常)의 덕(德)을 삼는다.(於是人物之生 因各得其所賦之理 以爲健順五常之德 所謂性也)”고 하였다.
외암(外巖)은 인성과 물성은 다 같이 오상(五常)을 가진다는 인물성구동론(人物性俱同論)과 미발한 마음의 본체는 기질의 선악이 없으므로 ‘본래선’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을 비롯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하는 쪽은 인성(人性)은 오상을 갖지만 물성(物性)은 그 오상을 모두 가지지 못한다면서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고 했고, 미발한 마음의 본체에도 기질의 선악이 있다는 미발심체유선악론(未發心體有善惡論)을 견지함으로써 견해차를 드러내게 되었다.
외암과 남당의 인물성동이론에 대한 토론은 약 3년(1709~1711) 여 동안 서신왕래로 진행되다가 스승 권상하의 만류로 중지되었다. 그러나 외암은 스승인 권상하에게 서신으로 자신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계속 주장했다.
그의 인물성동론이 조선 후기 최대 학술 논쟁인 호락논변(湖洛論辨)의 실마리가 되었으므로 스스로 낙론계(洛論系)의 선봉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외암의 인물성동론은 후속되는 인물균론(人物均論), 인물막변론(人物莫辨論)으로 발전하여 북학파 형성에 영향을 주게 되었으며, 조선 후기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에 통치 이념으로 변화되어 소인교화론(小人敎化論), 탕평론(蕩平論), 서얼소통론(庶孼疏通論) 등 혁파 논리의 기조가 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 아산 맹씨행단(孟氏杏壇)
‘맹씨행단(孟氏杏壇)’은 말 그대로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壇)이 있는 집으로,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행단길 22[중리 275]에 있다. 조선 초기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의 고택(古宅), 세덕사(世德祠), 구괴정(九槐亭), 쌍행수(雙杏樹, 두 그루의 은행나무) 등을 망라하여 ‘맹씨행단(孟氏杏壇)’이라 한다.
맹사성고택의 너른 마당의 가장자리에 600년이 넘은 거대한 은행(銀杏)나무 두 그루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 이 은행나무를 손수 심고 학문에 정진하며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사적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행단(杏壇)은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치는데서 유래했다. 은행나무는 유학 강단의 상징이다.
맹사성고택(孟思誠古宅)
‘맹사성고택(孟思誠古宅)’은 설화산을 서쪽으로 등지고 동북으로 배방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고택 가운데 600년간 무사히 보존되어 온 우리나라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옛 모습을 간직한 집이다. 본래 고려 말의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이 살던 집인데, 맹사성이 다섯 살 때쯤에 아버지 맹희도(孟稀道)가 온양에 정착하며 최영의 이웃이 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늠름했던 맹사성의 사람됨을 눈여겨본 최영이 그를 손녀사위로 삼고 집까지 물려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내력을 볼 때 이 집이 처음 지어진 연대는 14세기 중엽으로도 추측된다. 기록에 의하면, 성종 13년(1482), 인조 10년(1632)에 안채가 크게 중수됐다고 한다.
고택의 건물은 아주 단아하고 소박하다. 가옥의 형태는 ‘工’자형의 맛배집으로 목재는 광솔이 되다시피 그을렸으며, 기둥과 도리 사이에는 단구로 봉설(鳳舌, 봉황의 혀)이 장식되어 있고, 내실 천정은 ‘소라 반자’로 흔히 볼 수 없는 나무반자다. — 우리 답사단은 마루턱과 봉당에 앉아 해설사의 자상한 설명을 들었다.
세덕사에 모신 삼대(三代) 이야기
‘세덕사(世德祠)’는 고택의 뒤쪽 언덕에 있는 사당이다. 고려 말 두문동 72현인 맹유(孟裕, 맹사성의 조부), 맹희도(孟稀道, 맹사성의 아버지) 그리고 맹사성(孟思誠) 삼대의 위패를 모신 묘당이다.
사성의 아버지는 맹희도(孟希道)는 정몽주(鄭夢周)와는 막역한 벗이었다. 정몽주가 먼저 과거에 급제하자 맹희도 역시 절간에 들어가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며느리 조씨로부터 ‘해를 삼키는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할아버지 맹유(孟裕)는 '부친위독'이라는 급전을 띄워 아들을 집으로 불러 들여 며느리와 동침케 했고 그리하여 태어난 아이가 맹사성(孟思誠)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그의 비범함을 알려 주는 일화들이다.
할아버지 맹유(孟裕)는 원래 최영(崔瑩)과 친구 사이로 고려의 고위 관리였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우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개경 두문동에 들어가 불타 죽었다. 이른바 두문동 72현 중 하나다. 이 때 자신들은 불에 타 죽으면서도 끝내 밖으로 내 보냈던 인물이 황희(黃喜)였다.
맹유의 아들 맹희도(孟希道) 역시 우여곡절 끝에 충청도 한산에 정착했으나 끝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들 맹사성에게는 출사(出仕)를 권했다. 세상이 변했다는 것. 이로써 황희와 맹사성, 고려의 유신 두 명이 조선왕조 최고의 황금기를 만들어낸 명재상이 되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구괴정(九槐亭)
구괴정(九槐亭)은 세종 때의 영의정 황희(黃喜), 좌의정 맹사성(孟思誠), 우의정 권진(權軫) 등 삼정승 이 이곳에 내려와 국사를 논하고 그 기념으로 ‘아홉 그루의 느티나무’[九槐]를 심은 데서 유래한다. 안내문에는 현재 2그루만 남아있다고 한다. 구괴정은 고택의 언덕 너머, 한참 떨어진 건너편 산록에 있다.
답사단 일행은 고택의 우측 언덕에 있는 작은 문을 지나고 나서, 구괴정이 있는 건너편 숲을 바라보기만 하고 갈 뜻이 없었다. 궁금한 것을 참을 수 없는 필자가 빠르게 달려가 그 언덕에 올라보니, 지지대로 받친 휘어진 등걸로 남아있는 한 그루 느티나무가 수많은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고목 앞에는 ‘三相堂’(삼상당) 현판이 걸린 너른 정자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안쪽에 ‘九槐亭’(구괴정) 현판이 걸려 있었다.
조선시대의 청백리 맹사성
조선시대에 가장 이상적이고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관리는 청렴하고 깨끗한 관리를 의미하는 청백리(淸白吏)이다. 청백리에 대비되는 용어는 뇌물을 받은 관리를 뜻하는 장리(贓吏)라고 한다. 장리의 후손은 대대로 과거에 응시할 수 없도록 하는 등 조선시대에는 무엇보다 관리들의 도덕성과 청렴성을 강조했다. 청백리의 명단을 기록한 ‘청백록’에는 조선의 청백리 217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세종 15년 병조판서 황상(黃象)이 당시 좌의정이던 맹(孟) 정승집을 방문하여 국사를 논하던 중,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정승 집이 워낙 퇴락해서 그 소나기에 천장이 새자 두 분은 하는 수 없이 삿갓을 쓰고 대담을 마쳤다. 병판 황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정승집이 저러한데 견주어 고루거각인 자신의 집이 부끄럽다고 하며, 곧 행랑채를 헐어버렸다는 등 청백리로서 맹사성의 일화가 숱하게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황희, 허조, 유관 등과 함께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청백리 재상이었다. 맹사성은 고려 말인 1386년(우왕 12) 27세의 나이로 관직에 진출하여, 세종 때인 1435년 관직에서 물러나기까지 약 50년간 관료 생활을 했다. ‘태종실록’이 완성된 후 세종은 선왕의 실록을 보고자 했지만, 우의정으로 있던 맹사성은 이를 저지하였다. “전하께서 만일 이를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서 고칠 것이며, 사관(史官)도 또한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그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는 논리를 폈고, 세종도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성군으로 여겨지는 세종대왕은 이런 맹사성이나 황희 정승과 같은 청백리를 만났기에 그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으리라. 맹사성이 79세로 별세하자 세종대왕이 ‘文貞’(문정)이라는 시호를 내리며 ‘忠信接禮曰文, 淸白守節曰貞’(충신은 예로써 대접하니 文이라 하고 청백하고 절조를 지킴으로 貞이라 한다)이라 했다.
고불맹사성기념관(古佛孟思誠記念館)
‘맹씨행단’ 길 건너편에 ‘고불맹사성기념’이 있다. 맹사성기념관은 조선시대 전기의 명재상인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청백리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설립된 기념관으로, 아산 ‘맹씨행단’의 귀중한 역사적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교육과 문화 자원으로 보존 전시하고 있다. 2017년 6월 1일에 설립·개관하였다.
신창 맹씨 집안의 관련 유물의 전시 및 관리, 청백리 교육 및 체험 프로그램 운영, 고불 맹사성 선생 선양 사업 등을 하고 있다. 단층으로 된 기념관은 크게 전시동과 교육동으로 나눠진다. 전시동에는 영상실과 전시실이 있다. 영상실에서는 맹사성, 신창맹씨 문중, 아산 맹씨행단에 대한 영상을 볼 수 있다. 전시실에는 맹사성 선생의 일대기와 유품, 맹사성과 관련된 청렴 이야기, 아산 맹씨행단에 관한 내용 등을 관람할 수 있다.
고불맹사성기념관에는 국가민속문화재 제225호 전세 맹고불 유물(專世孟古佛遺物)을 신창맹씨대종회로부터 2018년 1월 15일 기탁 받아 보관하고 있다. 맹고불 유물은 옥적(玉笛), 백옥방인(白玉方印), 채석포도문일월연(彩石葡萄文日月硯), 수정죽절비녀(水晶竹節簪), 목칠도형배(木漆桃形杯) 등 총 5점으로 지난 1990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옥적(玉笛)은 백옥으로 만든 횡피리이다. 대금과 같이 7개의 구멍이 나 있으나 소리는 다르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네 토막으로 부러져 접착제로 잇고 백동관으로 감싸 수리한 흔적이 남아 있다. 백옥방인(白玉方印)은 손잡이에 사자가 앉아 있는 모양을 크게 새긴 옥으로 만든 도장이다. 인면에는 가운데 ‘죽관(竹觀)’이라는 글자를 각각 원 안에 음각하였고, 오른쪽과 왼쪽에는 ‘만산명월(萬山明月)’, ‘일사화풍(一事和風)’을 새겼다. 채석포도문일월연(彩石葡萄文日月硯)은 연면 주위에 단풍나무, 개구리, 포도송이, 원숭이 두 마리 등을 사실적으로 양각한 벼루이다. 수정죽절잠(水晶竹節簪)은 유백색 수정을 대나무 아랫부분처럼 다듬어 머리를 만들고 몸통에 구리판을 말아 끼운 비녀이다. 본래 수정제 끝부분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목칠도형배(木漆桃形杯)는 해당화의 밑둥치로 만든 술잔으로, 안팎으로 옻칠을 하였고 작은 고리가 달렸던 구멍이 있다.
명재상 맹사성(孟思誠)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성지(誠之), 호는 동포(東浦)·고불(古佛)이다. 온양 출신으로 아버지는 고려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 맹희도(孟希道)이며, 최영(崔瑩)의 손서(孫婿, 손녀사위)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고려 우왕 12년(1386년, 26세)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전의시승(典儀寺丞)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때 중용되어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된 이래, 태종 11년(1411년, 51세) 판충주목사(判忠州牧使)로 임명되었는데, 예조에서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인 맹사성이 음률(音律)에 정통하므로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울에 머물게 하도록 건의하였다.
세종 원년(1419년, 51세)에는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다. 세종 14년(1432년, 54세)에는 좌의정에 올랐으며 세종 17년(1435년, 57세)에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특히 맹사성은 조선 세종 때 청백리이며 예악에 밝았고 최고의 재상으로 추앙받았던 문신이다.
맹사성은 청렴했으며 관직이 낮은 사람이라도 예로 잘 접대해 이름이 높았다. 오늘날 맹사성의 유덕을 ‘고불정신(古佛精神)’이라고 하는데, 충효정신(忠誠, 孝行), 청백정신(淸廉, 潔白), 충신정신(誠實, 信義), 겸례정신(謙遜, 禮儀), 수절정신(節義, 守分)을 말한 것이다.
맹사성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맹사성(孟思誠)은 고택에 살면서 아름다운 〈강호사시가〉 4수를 지었다. 맹씨행단 앞을 흐르는 금곡천을 배경으로 만년에 지은 시조로 추정된다. 〈강호사시가〉는 이러하다.
〈춘사(春詞)〉
강호(江湖)에 봄이 드니 미친 흥(興)이 절로 난다
탁료계변(濁醪溪邊)에 금린어(錦鱗魚) 안주로다
이 몸이 한가(閑暇)하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 ‘탁료계변(濁醪溪邊)’은 ‘물가에서 마시는 막걸리’
* ‘금린어(錦鱗魚)’는 ‘싱싱한 물고기’
* ‘역군은(亦君恩)이샷다’는 ‘역시 임금님의 은덕이시도다’
〈하사(夏詞)〉
강호(江湖)에 여름이 드니 초당(草堂)에 일이 업다
유신(有信)한 강파(江波)는 보내나니 바람이다
이 몸이 서늘해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 ‘유신(有信)한 강파(江波)’ ; 믿음직한 강물 즉 자연과 합일된 경지
〈추사(秋詞)〉
강호(江湖)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
소정(小艇)에 그물 시러 흘리 띄여 더져 두고
이 몸이 소일(消日)하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 동사(冬詞)〉
강호(江湖)에 겨울이 드니 눈 기픠 자히 남다
삿갓 빗기 쓰고 누역으로 오슬 삼아
이 몸이 칩지 아니하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 ‘눈 기픠 자히 남다’ ; 눈 쌓인 깊이가 한 자가 넘는구나
* ‘누역’은 ‘도롱이’, ‘볏짚으로 만든 비옷’이다 / * ‘칩지’는 ‘춥지’
―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시조(聯詩調)이며 훗날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원류가 되었다. 자연[江湖]에서의 생활을 노래한 작품이다.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면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누리는 것도 ‘임금의 은혜’를 잊지 않는 점에서 사대부의 유교적 충의(忠義)가 드러나 있다.
○ 예산 추사 김정희고택(秋史金正喜故宅)
‘추사고택(秋史古宅)’은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다. 조선 후기 서예가이며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태어난 고택으로, 추사의 증조부이자 영조의 부마(駙馬)인 월성위 김한신(金漢藎)에 의하여 건립되었다고 한다. 고택 주위에는 화순옹주와 김한신 부부의 합장묘, 화순공주 정려문, 예산 입향조인 고조부 김흥경의 묘, 두 부인과 합장된 김정희의 묘, 화암사, 그리고 인근에 천연기념물 제106호인 용궁리 백송(白松) 등이 있다.
고택 앞 잔디 광장에서 ‘秋史先生學藝術碑’(추사선생학예술비)가 있다. 묵직한 자연석 바위 위에 오석(烏石)의 장방형 비신을 올려놓았다. 비신(碑身)의 하단에는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를 음각하고 상단에는 추사체로 ‘畵法有長江萬里 書藝如孤松一枝’를 종서로 새겨놓았다. — 필자는 그 동안 개인적으로 기회가 있어 추사고택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지만, 오늘 ‘참공부 도반’들과 함께 하는 고택의 탐방은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추사고택에 들다
고택의 솟을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너른 마당과 사랑채와 그 뒤의 안채의 부분이 시야에 들어온다. 건물 전체가 서에서 동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와 대청이 동향하고 사랑채와 안채의 각 방이 남향하여 기능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ㄱ자형으로 남향하고 있는데, 별당채의 성격을 가지고 안채와 분리되어 있다. 각 방의 전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이것을 통로로 서로 내왕할 수 있게 하였다.
▶ 우리 답사단 일행은 추사고택 ㄱ자 사랑채 툇마루에 걸터앉아 서근식 박사의 설명을 들었다. 추사의 실학에 주목하여 해설을 했다. 조선후기 실학이 대두된 배경을 설명하고, 1963년 이우성 교수의 논문에 의거하여 조선후기 실학을 크게 시기적으로 세 단계로 나누어 추사 김정희 위상을 조명했다.
… 실학의 첫 번째 단계(18세기 전·후반)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으로 대표되는 경세치용(經世致用, 重農)학파이고, 두 번째 단계(18세기 후반)는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 등으로 대표되는 이용후생(利用厚生, 重商)학파인데 흔히 북학파(北學派)로 불린다. 그리고 19세기 초반 추사 김정희의 실사구시(實事求是)학파이다. 실사구시는 김정희의 대표적인 저술인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중농학파, 중상학파처럼 학파의 특징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위의 분류법에 이의(異議)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흔히 김정희가 ‘박제가의 제자’라고 하고 ‘이하응(흥선대원군)의 스승’이라고 하는데, 임형택은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이에 이론(異論)을 제기하기도 했다. …
고택의 사랑채 좌측 툇마루 위에 추사체 특유의 ‘竹爐之室’(죽로지실)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사랑채와 안채의 모든 기둥마다 추사체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추사의 글씨와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글귀들이다. 그런데 그것이 고즈넉한 고택의 분위기를 해치는 느낌이 들었다. 문중에서 고택을 중수하면서 ‘추사체’의 모든 것을 보여주듯 게시해 놓았다.
안채는 가운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완전히 밀폐된 ㅁ자형의 평면구성이다. 안채 서쪽 중앙부분에는 3칸×2칸 대청이 동향하고 있으며 앞 반칸 통(通)을 툇마루로 꾸몄는데, 대청과의 사이에는 4분합(四分閤)의 띠살문을 달았다. 대청과 대향하여 동쪽에는 2칸 규모의 중문과 1칸의 행랑방이 있으며,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직접 보이지 않도록 판벽으로 내외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수리공사 도중에 내·외벽을 철거하고, 남쪽에 1칸 마루방을 설치해서 안마당에 곧바로 진입하도록 변경하였다고 한다.
안방과 거기에 부속된 공간들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붕구조는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주로 하여, 지형의 고저차가 생긴 곳에서는 맞배지붕으로 처리하여, 지형에 따라 층을 지게 적절히 처리하였다.
추사고택의 주련(柱聯)
고택에는 사랑채든 안채든 기둥마다 주련이 걸려 있다. 주련(柱聯)을 돌아보며 급변하는 시대를 살다 간 한 예술가의 굴곡진 삶과 그의 정신을 되살려 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필적(筆跡)이다. 이광호 박사는 사랑채 기둥의 여러 주련(柱聯) 중에서 서화가(書畵家)로서 고절(孤節)한 생애를 산, 추사에게 가장 핵심이 되는 대련(對聯)을 가리키며 읽어 내렸다.
畵法有長江萬里 (화법유장강만리)
그림의 법도는 장강만리와 같은 유장함이 있고
書藝如孤松一枝 (서예여고송일지)
글씨의 예도는 외로운 소나무의 한 가지와 같다
고택 앞의 잔디광장의 비석에 새겨놓은 바로 그 글귀이다. 화법(畵法)의 깊고 유장함과 서예(書藝)의 절제와 준열함을 담고 있는 대련이다. 그의 작품은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처절하게 고독한 수련을 통하여 정제(精製)된 것이다. 그리고 안채에도 기둥마다 주련을 있는데, 그 중에서 오랜 유배 생활의 적적함을 느낄 수 있는 소박한 소망이 담긴 글귀도 있다.
大烹豆腐瓜薑菜 (대팽두부과강채)
가장 좋은 음식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고
高會夫妻兒女孫 (고회부처아녀손)
가장 아름다운 것은 부부, 아들딸, 손자손녀와의 만남이다
유배 등 각박한 삶속에 범상한 생활과 가족에 애틋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고독한 노학자의 말년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대련(對聯)에 담은 소박한 나물 밥상과 가족의 화목함, 늘그막 노인에게는 가장 간절한 소망이요 행복이 아닐까.
안채의 뒤쪽 언덕 위에 추사 선생의 영정(影幀)을 모신 ‘秋史影堂’(추사영당)이 있다.
지금은 그 붉은 꽃이 다 지고 말았지만, 작약(芍藥)이 가득 심어져 있는 사랑채 화단 앞에 해시계 받침 용도로 쓰였다는 '石年(석년)'이라고 쓴 돌기둥이 있다. 추사의 글씨로 알려져 있지만, 돌기둥의 아래쪽에 그의 서자인 김상우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돌기둥은 그의 아들 대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많다.
추사고택에 얽힌 이야기
추사고택은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태어나서 여덟 살 무렵까지 살았던 곳이다. 추사 집안은 경주 김씨로,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당대의 세도가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추사의 11촌 대고모였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그는 여덟 살 때 친부모와 헤어져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에게 양자로 보내졌다. 그리고 어머니 기계 유씨와 첫째 부인 한산 이씨를 가슴에 묻어야 했고, 양아버지와 스승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죽음도 어린 나이에 감내해야 했다. 이런 개인적인 아픔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져, 입신한 뒤에는 정치적 핍박으로 유배지를 떠도는 파란 많은 인생을 꾸려야 했다. 〈세한도(歲寒圖)〉에는 그의 쓸쓸한 삶의 단면이 오롯이 그려져 있다. 추운 겨울, 한기 서린 소나무로 그려진 그의 고독한 삶이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은 예술이 가지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추사는 장성해서도 이따금 이곳에 내려와 책을 읽고는 했다고 하니 고택 안팎으로 추사의 체취가 남아있다. 담장 위로 중첩된 고택의 지붕이 위엄이 있다. 1930년대 추사고택을 찍은 사진을 보면 솟을대문에 딸린 문간채가 지금보다 커서 좌우로 꽤 긴 행랑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그저 단출한 문간채뿐이다.
증조모 화순옹주(영조의 딸)가 살았다는 방의 툇마루에 우리 답사단이 걸터앉았다. 화순옹주는 남편인 김한신이 죽자 10여 일을 곡기를 끊고 슬퍼하다 그의 낭군을 따라 숨을 끊었다고 한다. 영조는 딸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했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열녀문을 내린 것은 영조가 아니라 정조였다. 고택에는 화순옹주의 뜨거운 사랑 이야기가 여운을 남긴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의 24세손이다. 김정희는 조선 시대 말기인 1786년 충청남도 예산(禮山)에서 태어나 서예가, 금석학자, 정치가, 실학자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신라의 김생(金生) 이래 우리나라에는 많은 서예가가 있었으나 김정희만큼 커다란 업적을 남긴 사람도 드물다. 김정희는 어렸을 때부터 글씨에 뛰어났다.
김정희는 북학파인 박제가(朴齊家, 1750~1805년)의 뒤를 이어 청나라 고증학(考證學)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학문을 연구했다. 1809년 24세 때에는 연경에 가는 부사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중국 청나라에 가서 그곳에서 40일간 머물며 청나라 고증학을 접했으며, 또한 옹방강(翁方綱, 1733~1818년), 완원(阮元, 1764~1849년) 등의 대학자들을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금석학과 서체 등을 배웠다.
옹방강은 추사와 필담을 나누다가 박식과 총명함에 놀라 그를 “경술문장 해동제일(經術文章海東第一)”이라 칭찬했다. 당시 78세 옹방강으로부터는 금석 고증과 서화 감식, 서법 원류에 관한 가르침을 받는다. 옹방강은 추사가 귀국한 뒤에도 제자를 통해 추사의 질의에 답한다. 추사는 여기에 영향을 받아, 31세에 옹방강과 완원의 학문을 합쳐 새로운 경학관인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지었다.
당시 47세 완원(阮元)은 자신의 경학관과 예술관, 금석 고증 방법론 등을 전하면서 자신의 저서 《경적찬고(經籍纂詁)》 106권과 《연경실집(揅經室集)》 6권, 《십삼경주소교감기(十三經注疏校勘記)》 245권을 김정희에게 기증했다. 김정희의 호 완당(阮堂)은 완원(阮元)의 제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연경에서 추사는 구양순((歐陽詢, 557~641년), 미불(米芾, 1051~1107년), 동기창(董其昌, 1555~1636년) 같은 명필들의 필법과 금석문(金石文)을 연구하여 추사체의 바탕을 갖추었다.
이후 추사체(秋史體)로 일가를 이룬 그의 글씨는 생동감과 고박(古朴)한 맛을 풍기며 자형의 변화가 무쌍하여 그만의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그리고 난초 그림에도 뛰어났다. 순조 16년(1816)에 북한산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찾아내 고증하고 이듬해엔 문무왕비(文武王碑) 비편을 발굴했다. 지은 글로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진흥이비고(眞興二碑考)〉,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 대표작으로 〈예서대련 호고연경(隸書對聯好古硏經)〉, 〈세한도(歲寒圖)〉,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등이 있다.
추사 김정희는 순조 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헌종 2년(1836)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으며, * ‘윤상도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헌종 6년(1840)에 제주도로 9년간 유배되었다가 헌종 말년에 귀양에서 풀렸다. 제주도에 지내면서 *〈세한도(歲寒圖)〉를 그리고 그 동안 연구해 온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는 바다를 건너 완도에 도착했다. 그는 해남 대흥사에서 초의를 만나 회포를 푼 뒤, 예산 고향으로 돌아갔다. 유배 사이 집안은 풍비박산이 됐다. 고택은 팔리고 가족들은 흩어졌다. 추사는 서울 용산의 한강 가에 자리 잡았다. 이 시기 추사 서화 중 일품인 〈잔서완석루〉, 〈불이선란〉, 제자들의 서화 경진대회 출품작 비평서인 〈예림갑을록〉을 썼다.
1851년(철종 2년) 7월 추사는 66세 고령에 다시 북청으로 유배된다.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난 지 2년 반 만이다. 예송논쟁이 된 영의정 권돈인의 진종조천예론을 배후에서 발설한 사람으로 지목된 것이다. 귀양살이 1년, 추사는 북청에서 금석학자답게 주변 유물을 찾아가 고증했다. 북청은 특히 발해 땅이었기 때문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북청읍성 동쪽이 대조영의 발해 5경 중 남경쯤으로 추정했다. 이듬해 8월, 2년 만에 추사는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왔다.
갖은 역경을 겪으며 정신세계는 깊어졌다. 추사는 글씨를 쓸 때마다 완벽해지려 했고, 피눈물 나는 수련을 거듭했다. 추사는 친구인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 “내 글씨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나는 칠십 평생 벼루 열 개를 밑창 내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네.”
1852년 10월 9일부터 추사는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果川)의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지내다가 1856년 10월 10일 향년 71세로 생(生)을 마쳤다. 1856년 10월 서울 봉은사 영기 스님은 화엄경 판이 완성되자 경판전을 짓고 편액을 추사에게 부탁했다. 추사는 병든 몸이지만 세로 65㎝ 큰 글씨로 ‘板殿’(판전) 두 글자를 썼다. 그리고 사흘 뒤 세상을 떠났다. 봉은사의 ‘板殿’ 글씨는 추사 최후의 작이다.
예산의 예산 추사고택에 〈추사박물관〉이 있고 유배지인 제주도 대정에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추사관〉이 있으며, 그가 말년을 보낸 과천에도 〈추사기념관〉이 있다.
* 윤상도 옥사사건과 추사의 제주 유배
‘윤상도(尹尙度) 옥사’는 1830년 윤상도가 탐관오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자 군신(君臣)을 이간질한다며 윤상도를 능지처참하고 김노경(金魯敬)을 유배 보낸 사건이다.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은 1830년 윤상도의 배후조종자로 전라도 고금도로 유배되었다가 1834년 순조의 배려로 해배됐다
1840년 순조가 사망하고 헌종이 즉위하여 권력을 잡은 안동 김씨가 경주 김씨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김정희는 10년 전에 윤상도 상소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의금부에 투옥되었고 김노경은 사약이 내려져 사사됐다
김양순(金陽淳)의 무고를 받아 참형까지 당할 뻔했지만, 벗 우의정 조인영(趙寅永)이 ‘추사를 살려달라’는 상소를 올려 김정희는 목숨을 유지하고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되어 위리안치형을 받았다. 조인영은 조선에 고구마를 도입한 조엄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의 장인인 조만영의 동생이다 조인영은 헌종을 섭정했고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역임했다.
‘제주도 유배(流配)’는 가다가 죽거나, 풍랑을 만나서 죽거나, 병에 걸려 죽거나, 배고파 굶어 죽거나 살아도 죽은 목숨이 되는 가혹한 형벌이다. 위리안치(圍籬安置)는 배소 주위에 탱자나무를 돌리고 외부와 통하지 못하게 하는 잔인한 유배형이다
1841년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제주 유배소를 찾아온다. 그는 이후 넉 달을 머물며 추사에게 시·서·화를 배웠다. 제주도 유배 3년차 추사는 부인 예안 이씨의 부음을 듣는다. 죽은 지 한 달이나 지나서다. 그는 유배소에 신주를 설치하고 곡한 뒤, 예산의 본가로 통곡의 제문을 보냈다. 애절한 시도 지었다.
저승엘 가서 월하노인과 송사를 해서라도,
다음 세상에서는 부부의 지위를 바꾸리라.
나는 죽고 그대는 천리 밖에 살아 있어,
그대로 하여금 이 애통함을 절감케 하리.
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도망시(悼亡詩)이다. 애절하다! 차라리 내가 죽고 당신이 살아 있기를 소망하면서 애통해 하고 있다. ―추사는 사후 첫째 부인 한산 이씨, 둘째 부인 예안 이씨와 함께 합장되어 예산의 추사고택 옆에 묻혔다.
유배 중에 김정희는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이자 다성(茶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대흥사 초의(草衣)선사에게 ‘햇차를 몇 편이나 만들었습니까? 잘 보관하였다가 내게도 보내주시겠어요’라고 편지를 보냈다. ― 1843년엔 초의선사가 바다를 건너 찾아왔다. 추사는 초의가 머무른 6개월 동안 큰 위안을 얻었다. 그는 이후 유배지에서 열심히 책을 읽고 글씨를 썼다. 1844년 추사 나이 59세. 유배 온 지 5년이 지났다. 그해 추사는 〈세한도(歲寒圖)〉를 그린다.
2년 뒤엔 회갑을 맞아 추사의 혈육인 서자 김상우가 제주도로 내려왔다. 추사는 아들에게 난초 그리기를 가르친다. 〈시우란(示佑蘭)〉에 이런 화제(畫題)가 들어 있다.
“난초를 그릴 때는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잎 하나 꽃술 하나도 마음속 부끄러움이 없어진 뒤라야 남에게 보일만 하다. 열 개의 눈이 보고 열 개의 손이 지적하는 것과 같으니 마음은 두렵도다. 이 작은 기예도 반드시 생각을 진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서 출발해야 비로소 기본을 얻게 될 것이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박혜백·이한우·김구오 등이다. 추사는 동생에게 연락해 필요한 책까지 구했다. 자취는 대정향교에 걸린 ‘疑問堂’(의문당) 편액 등에 남아 있다.
추사는 일찍이 문장과 글씨가 빼어난 소동파를 흠모했다. 추사는 소동파의 유배 모습을 그린 소치(小痴)의 〈동파입극도〉에서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다. 소치는 〈완당선생 해천일립상(海天一笠像)〉을 그렸다. 추사의 처연한 귀양살이 모습이다. 1848년 추사의 지인 장인식이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그 덕분일까. 추사는 뜻밖에 대정 유배소를 벗어나 귤림서원 등 제주 읍내를 답사하고 한라산을 오를 수 있었다. 그해(1848년) 12월 63세 추사는 마침내 유배에서 풀려났다. 9년 만이다. ―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추사관 뒤 적려(謫廬, 귀양 살던 집) 앞에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 추사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고 *〈세한도(歲寒圖)〉(1844년, 59세)를 그렸다.
세한도(歲寒圖)
작가의 응축된 내면세계를 그려낸 문인화의 걸작
제주 서귀포 삼방산이 바라보이는 대정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중, 모든 이들이 등을 돌리고 외로움과 괴로움 속에서 세상을 아파할 때, 오직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만은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먼 제주까지 찾아주었다. 그리고 중국에 다녀 올 때마다 귀한 책과, 연경소식도 전해 주었다. 추사는 답례로 이상적에게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보냈다.
그림의 오른쪽 상단 여백에는 큰 글씨로 ‘歲寒圖’라는 화제(畵題)를 가로로 쓰고. 작은 글씨로 * ‘藕船是賞’이라는 관지(款識)를 세로로 쓴 다음, 행을 바꾸어 ‘阮堂’이라는 호를 쓰고 [正喜]라는 이름이 새겨진 도서(圖署)를 찍었다. * ‘藕船是賞’(우선시상)은 ‘우선은 감상하라’는 뜻이다.
〈세한도(歲寒圖)〉의 구도는 아주 간단하게 그려졌는데 겨울 칼바람이 쓸고 지나간 듯 황량한 여백에 위치한 허름한 집 한 채, 그 양쪽에 소나무와 잣나무 네 그루를 배치하여 담백하게 먹으로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이 구도가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화면은 직업 화가들의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와는 반대되는 문인수묵화의 특징으로 작가의 응축된 내면세계를 잘 그려낸 작품이다. 고상한 문인화의 품격이 돋보이는 글씨와 그림이 함께 어우러진 걸작으로 추사의 필법과 화법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문인이다. 역관(譯官)이라는 신분으로 열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귀국할 때면 제주에 유배가 있는 추사에게 중국에서 구입한 귀한 책들을 보내 스승을 위문했다. 그는 오숭량(吳崇梁), 유희해(劉喜海) 등 당대의 저명한 중국문인들과 교우를 맺고, 이러한 인연으로 청나라에서 명성을 얻게 되어 1847년, 자신의 시문집을 북경의 우박계관에서 간행한다. 후에 온양군수를 거쳐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세한도(歲寒圖)의 발문(跋文)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
(그대[藕船 李尙迪]가) 지난해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 주고, 올해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120권을 보내 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쫓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같이 하고서도, 그대의 이끗을 보살펴 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쫓듯이 하였구나!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 진다(利權利合者 權利盡而交疏)”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으로 잇속을 좇는 세상 풍조의 바깥으로 초연히 몸을 빼내었구나. 잇속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 되었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겨울이 된 다음에 소나무 잣나무가 더디 시들음을 알 수 있다.*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고 하셨다. 소나무 잣나무는 본래 사계절 없이 잎이 지지 않는 것이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공자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 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 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더디 시드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전한(前漢) 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 에도 *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처럼 어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賓客)이 모였다 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下邽縣)의 * 적공(翟公)이 대문에 써 붙였다는 글씨는 염량세태(炎凉世態)를 풍자한 세상인심의 박절(迫切)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다. 완당(阮堂) 노인이 쓰다. * 낙관(落款) [長毋相忘]
*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 ; 《논어》 〈자한〉 27에 나온 말을 인용했다
*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 : 한(漢)나라의 관리. 모두 교제를 중시하여 빈객들이 찾아오면 극진히 대접 하였고 지조를 숭상했다. 《史記》권120, 급정열전(汲鄭列傳, 급암과 정당시 두 사람을 ‘급정(汲鄭)’으로 썼음)에 나온다.
* 적공(翟公) : 전한 중기의 관료. 원광 5년(BC130), 그가 정위란 관직을 임명받자 찾아오는 빈객이 많았으나, 해임되고 나니 발길이 뚝 끊어졌다. 그후 적공이 복직이 되자 다시 빈객이 몰려드니 그는 문 앞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한 번 죽고 사니 사귐 의 정을 알겠고, 한 번 가멸고 가난해지니 사귐의 모양새를 알겠으며, 한 번 존귀하고 비천해지니 사귐의 정이 보이는구나.”
* 낙관 [長毋相忘](장무상망)에 담긴 말 ; “고맙네! 내 결코 잊지 않음세! 우리 서로 오래도록 잊지 마세!”
〈세한도(歲寒圖)〉에 대한 제영(題詠)과 평가
이상적은 스승으로 부터 받은 세한도를 가지고 중국으로 가서 당대 중국의 최고 지식인들에게 보여 주었다. 대학자로서 서예의 제1인자인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에게 인정을 받고 있는 학자들 16명에게서 제영(題詠, 제목을 붙여 쓴 시 또는 감상문)을 받아냈다. — 세한도는 문인화의 최대 걸작으로, 그림 자체가 국보(國寶 제180호)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지만, 당시로는 세계 석학들이라 할 이들이 작품에 흠모와 찬탄의 글을 덧붙여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세기 정도 후에 우리나라의 대학자 정인보 선생, 전 부통령 이시영 선생, 33인의 한 분으로 당대 최고의 서예가인 오세창 선생도 댓글에 참여하였다. — 세한도의 제영에 댓글을 올린 이들을 쓴 순서대로 적어보면, 장악진(章岳鎭), 오찬(吳贊), 조진조(趙振祚), 반준기(潘遵祁), 반희보(潘希甫), 김준학(金準學), 반증위(潘曾瑋), 풍계분(馮桂芬), 왕조(汪藻), 조무견(曹楙堅), 진경용(陳景庸), 요복증(嶢福增), 오순소(吳淳塑), 주익지(周翼址), 장수기(莊受祺), 장목(張穆), 장요손(張瑤孫) 그리고 정인보(鄭寅普), 이시영(李始榮), 오세창(吳世昌) 등이다.
《완당평전》을 쓴 유홍준은 세한도를 두고 “그림과 글씨 모두에서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을 강조했던 추사의 예술세계가 소략한 그림과 정제된 글씨 속에 흥건히 배어 있다”고 평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한도(歲寒圖)〉
우여곡절 끝에 극적으로 되찾은 국보
국보 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 보전된 경로가 파란만장하고 극적이었다. — 〈세한도〉는 이상적(李尙迪) 사후에 그의 제자 김병선이 물려받았다. 그 뒤 세한도는 휘문고 설립자 민영휘의 손에 들어가 있다가 아들 민규식이 매물로 내놓는다. 일제시대 경성제국대학 중국철학 교수로 고미술 수집가이자 완당에 미쳐있던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의 손에 들어갔다. 후지츠카는 완당의 서화나 그에 대한 자료를 매우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서예가 손재형(孫在馨, 1902-1981)이 일본에 건너가 후지츠카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여 세한도를 양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손재형이 세한도를 양도받은 지 석 달이 지나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으로 후지츠카의 서재가 모조리 불타버리면서 그가 수집한 완당의 수많은 작품들도 함께 사라졌다고 한다. 〈세한도(歲寒圖)〉는 그야말로 운명처럼 살아남은 작품이라고 하겠다.
일본에서 손재형은 세한도를 받았으나, 이후 그는 정치에 투신해 재산을 탕진하자 고리대금업자에게 세한도를 담보로 돈을 빌렸는데, 그후 돈 갚을 길이 없자 세한도의 소유권을 포기했다. 이후 여러 사람 손을 거친 이 작품을 개성 출신의 갑부 손세기가 사들이고 그의 아들 손창근이 소유하고 있다가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손창근은 이 기증으로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 따뜻한 점심식사 —
추사고택 탐방을 마치고 국도(21번)로 나오는 길목,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 ‘민가네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미리 예약한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전골이 보글보글 끓었다. 가정식 백반, 구수하고 따뜻한 시골밥상이었다.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이 없을 수 없다. 이광호 회장과 김덕현 교수가 건배 제의를 했다. 추사고택의 주련 중 “화법유장강만리(畵法有長江萬里)!”를 선창하고, 모든 분들이 “서예여고송일지(書藝如孤松一枝)!”를 후창했다. 이날 점심식사는 김덕현 교수가 식사대를 쾌척하였다. 모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했다. …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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