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3월7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청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예레 7, 23 - 28
† 복음 : 루카 11, 14 - 23
★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며
그들이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수많은 예언자들의 권고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제1독서).
★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자 군중 가운데 몇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모략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악의적인 행동과 양립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악으로써 선을 행하지 못한다. 악으로써
악을 이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둠을 어둠으로 없애지 못하고
오직 빛으로써 없앨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언젠가 목사님 한 분을 초청해 사제 연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분은 복음을 전하려면 그 방법 자체도 복음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10년 전 무렵
개신교에서는 ‘선교왕’이라는 것이 한창 유행했다고 합니다.
선교를 가장 많이 한 사람에게 자동차 같은 고가의 상품을
시상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처음에는 효과가 꽤 있는
듯 보였으나, 갈수록 점점 역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 방법이 선교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뒤부터
이 유행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복음화를 이룬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할 때에도, 악을 이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이유로 촛불을 훔칠 수
없다.”는 서양의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목적이 선하고
정당하다 하더라도 이를 이루는 방법이 폭력적이거나
악의적이면 그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께서
마귀를 쫓아내실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힘’이 아니라 ‘강력한
사랑’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선한 마음과
선한 방법을 통해 선한 결과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어중간은 없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3월7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 루카 11,14-23
어중간은 없다.
어느 신부님께서 마음을 고쳐먹은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주교님께서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름대로 혼자서
열심히 지냈답니다. 주교님의 사목방침에 구애 받지 않고
이런저런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독불장군으로 지내는
중에 성경을 열심히 읽었는데 한 말씀이 가슴깊이 다가왔답니다.
루카복음 7장32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신부님은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에
차있는 아이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을 바꾸었으며 비로소 자유와 해방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앞에서 어중간은 없습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세상에서 안전한 처세술이 될 수 있지만
주님의 자녀로서 자세는 아닙니다. 또한 주님은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
(묵시4,15-16) .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마귀를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님을 선택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한 답이지만 삶의 모습은 여전히 이해타산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는, 그리고 모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루카11,17). 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정도,
공동체도 어떤 모임도 한마음 한 뜻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야 합니다. 나쁜 습관이 있다면 고쳐야 하고 내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열린 마음의 눈을 떠야
하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과 포용할 수 있는 큰 품을 키워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위로가 되고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실천이 없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주님의 편이 되어 주님의 눈에 들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메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이 모든 것이 바로 주님의 큰 도움입니다.
먼저 제주도에는 잘 다녀왔습니다. 제주도 많이 따뜻하고
좋더라고요. 봄기운을 맘껏 얻을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비록 관광이 아니라 특강 때문에 제주도를
다녀온 것이지만, 그래도 정신적으로 많은 여유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제가 없었던 하루 동안 새벽 카페를
잘 지켜주심에 감사드리며, 오늘의 묵상 글 시작합니다.
요즘에는 사인을 해달라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아마도
평화방송에서 저를 보기도 하고, 또 제가 쓴 책이나 글을
보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그때마다
저는 당혹스럽습니다. 유명인사 취급 받는다는 당혹스러움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사인을 하기위해 쓰는
글씨가 너무나 형편없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글을 못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요즘 가톨릭 교리서 필사까지 하면서
글씨를 예쁘게 쓰려고 해 보지만 영 잘 써지지 않습니다.
글쎄 제가 쓴 글씨를 제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이니 말 다했지요.
그런데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컴퓨터라는
신통방통한 물건이 있어서 저의 못 쓰는 글씨를 가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깨끗하게 인쇄된 글을 통해서는 그
누구도 제가 글을 못 쓴다는 사실을 모르지요.
생각해보니 저를 도와주는 것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내비게이션! 길치, 방향치인 제가 어떤 두려움도
없이 어느 곳이든 다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아주 유용한
물건이지요. 그렇다면 이것 외에는 저를 도와주는 것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내 자신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너무나
많은 도움을 계속해서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편안히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주님의 큰 도움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도움을 깨닫지 못합니다. 당연히 내게 주어지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으면서도
감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 바로 우리가 주님의 큰 도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그 사랑을 알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을
비방하기에 바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우리들은 그렇지 않다고 힘주어 말할 수 있지요.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 허황된 말이 사실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향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주님의 큰 도움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오해해서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지지 않고,
대신 주님의 큰 도움을 받고 있음에 감사하며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편에 서는 길이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길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바르게 충고하며, 기꺼이 도와주고, 끝까지
인내하고, 용감하게 지켜 주며, 변함이 없다(윌리엄 펜).
제주도 잘 다녀왔습니다.
시간을 통해 우리를 치유해 주시는 하느님
포도주를 만들 때 무엇이 필요할까요? 저는 이 질문을
받고서는 간단히 생각하며 말했습니다.
“포도주? 당연히 포도가 들어가겠고, 여기에 소주를 넣어야
할 것이고, 설탕도 있어야 하나? 맞다. 포도주를 담을 병도
필요하겠다.”
그런데 가장 필요한 것이 빠졌다고 하네요. 무엇일까요?
시간이랍니다.
처음 포도주가 발견된 것은 어떤 사람이 포도를 버린 것에서
시작되었답니다. 버린 포도가 땅에 고였고, 시간이 지나
발효해서 술이 된 것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지요. 그래서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랍니다.
우리 삶 안에도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나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기위해서는 첫째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누가 관장하나요? 주님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떠나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사실 시간이 나를 치유해준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때는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웠는데,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그때를 그리워하면서 그때가 좋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점을 생각해보면 시간이 해결하지
못하는 고통과 시련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결국 시간을
통해 우리를 치유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정말로 감사를 드려야 할 분이 아닐까요?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선의 힘인 기쁨을, 지금도 그래요.
OX문제, 긍정 아니면 부정, 그렇다 아니다 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경우, 유도 심문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며 궁지로
몰리기 쉽습니다. ‘그렇다.’ ‘아니다.’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이 바로 시험 보는 거지요.
예수님의 신기한 일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악의 힘이라고
평했습니다. 여기서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자로 갈리며 기쁨과
두려움을 만나지요. 주님은 신앙인에게 선의 힘인 기쁨을
만나게 하셨지요. 지금도 그래요.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루카 11,20)”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의 묵상 글 -
◈ [서울] 하늘의 표징과 믿음
예레미야 예언자 시대에 이웃 강대국 바빌론이 유다 왕국을
빼앗으려 하자 대부분 사람들은 이집트에 도움을 요청해
국난을 모면하자고 했는데, 예레미야 예언자 홀로 바빌론에
투항하자고 했다. 예레미야는 왕국의 흥망이 정치외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라고 보았다. 잠시 바빌론의
식민지가 되더라도 그 기회에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되찾는다면,
유다 왕국의 재건은 보장된다고 여겼다. 과연 그 당시 이 방법이
옳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었겠는가!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
때문에 하느님께서 등을 돌리셨다고 경고했다. 그동안
하느님께서 숱하게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표징을 보였는데도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께 표징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표징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는가! 오히려 자기 꾀에 걸려들어 거짓
예언자들의 유혹에 넘어가기 일쑤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신앙의 눈을 떠야 하늘의 표징을 올바로 알아볼 수
있을것이다.
- 전영준 신부(서울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교수) -
◈ [수도회] 이쪽이냐? 저쪽이냐?
2013년 3월7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루카 11,14-23
이쪽이냐? 저쪽이냐?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성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불신의 벽은 엄청나게 높았습니다.
워낙 의심이 많은 존재가 인간이기에 아직도 긴가민가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정도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해도 해도 너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당대
가장 잘 나가던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친구 정도로
여겼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구마와 치유의
기적을 통해 회개하고 구원의 길로 돌아섰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그 마음
안에 대체 뭐가 자리 잡고 있었을까요?
예수님을 향해 악령의 힘을 빌리느니 어쩌느니 하며
빈정거렸지만 사실 그들 내면 안에 악령이 들어있었습니다.
불신의 악령, 완고함의 악령...
그들은 사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구마나 치유의 기적보다
더 센 기적을 보여 달라고 졸라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고방식 안에 진정한 메시아의 기적은 구마나 치유
정도가 아니라 하늘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현상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태양이나 달, 별, 그리고 하늘을 통해서
일어나는 엄청난 표징만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심, 온 우주의 주인으로서
삼라만상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 정도 표징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보여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기대를 일일이
충족시켜주러 오신 메시아가 아니셨습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는 불신자들의 욕구를 채워주러 이땅에
오신 것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헛된 바람 앞에
이리저리 끌려 다닐 예수님이 절대 아니셨습니다. 그들이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으시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당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벙어리 마귀를 쫒아내게 된 원동력은 예수님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힘이었습니다. 벙어리 마귀의 추방은 곧 하느님
권능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이제 사탄들의
입지는 완전히 좁아졌습니다. 더 이상 설 곳이 없습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려줍니다. 하느님 나라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 본격적인 공생활로 확장되기 시작한 하느님
나라는 마귀와 악령의 세계를 정복하심을 통해 완성의 길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악령의 세계를 정복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 당부를 덧붙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 들기 위해서는 마귀의 편에
서지 말고 당신의 편에 서라고 말입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우리 각자에게 태도를 분명히 해달라는 요구입니다. 하느님과
마귀,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천구과 지옥, 영원한 축복과
영원한 저주, 그 사이에는 중립지대나 완충지대, 방관자나
제3자의 땅은 없습니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명확히 선택할
순간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관상가가 되지 맙시다?
- 이해욱신부
<斷想> 11. 관상가가 되지 맙시다?
언제까지 바라다보고만 계시렵니까?
이젠 껴안으십시오!
그리고 느끼십시오!
모든 생겨난 것들은 그 생김에 따라 그 성질이 다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관상가(觀相家)는 사람의 생김(相)을
보고 사람의 운명을 판단합니다.
예로부터 사람뿐만 아니라 하늘도 관상(觀象)하여 길흉을
예견하기도 했습니다. 신약성경의 동방박사들이 그 좋은
예입니다. 그들은 하늘을 관상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알았습니다.
자연(풍수지리)도 잘 관상(觀賞)하여 관찰(觀察)해 보면
그 성질(기운)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도 관상(觀想)하면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하느님이 어떤 하느님인지가 보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는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거룩하시고, 위대하시고, 오묘하시고 참으로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모습을 영혼의 눈으로 발견해 내고 바라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모르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실재(實在)의 모습을 모르고
어떻게 실제(實際)로 사랑할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자신이 직접 발견해 내야 하느님의
실재(實在) 하심을 확고히 믿게 되고 그때야 비로소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관상(contemplation)하십시오!
그러나 너무 즐기지는 마십시오!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하느님이시지만,
너무 바라다보기만 하면 가슴만 아파집니다."
이젠, 그만 바라다보십시오.
언제까지 바라다보기만 하시렵니까?
이젠 껴안으십시오, 하느님을!
그리고 하느님을 느끼십시오! 깊이 느끼십시오!
하느님은 형상(形狀)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뻘겋게
그리고 뜨겁게 살아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깊이 들어오셔서 뻘겋게 그리고 뜨겁게 작용하시기를
우리보다 더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살아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그저 바라다보기만 하는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관상(觀想 = 바라보면서 생각함)을 멈추십시오!
바라보고 생각함을 멈추십시오. 생각은 "지식"입니다.
지식을 버리십시오. 끊어버리십시오.
하느님은 바라보고 생각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느끼는
하느님입니다. 인간의 보잘 것 없는 지식으로 결코 얻어질
하느님이 아닙니다.
느껴야 합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느낌"을 느끼며
무엇이든 느껴야 합니다. 느낌을 느낄 수 없으면 "죽음"일
뿐입니다.
몸도 늙어가면 갈수록 느낌을 잃어갑니다.
죽은 몸, 주검은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갓난아이일수록 잘 느낍니다.
어린이도 잘 느낍니다. "철부지"도 잘 느낍니다.
머리에 인간의 알량한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느낌을
잃어갑니다. 느낌이 지식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느낌을 잡아먹었기 때문입니다.
잡혀 먹은 느낌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껴안고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느낌을 느끼지 못하면 하느님을 껴안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은 "산송장"입니다.
산송장이 아무리 껴안아도 하느님은 외롭습니다. 하느님으로
부터 처음 받은 느낌, "원초적 느낌"을 되찾아야 합니다.
원초적 느낌은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느낌, 즉 "거룩한
느낌"입니다.
거룩한 느낌으로 하느님께 다가가 그분을 껴안으면,
내 영혼이 뜨거워집니다. 내가 거룩해집니다.
뜨거워진 내 영혼이 하느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게
되고, 그분의 사랑에 영혼은 복에 겨워 눈물만이 흐릅니다.
그분께서는 내 영혼에 더욱 뜨겁게 작용하십니다.
내가 더욱 거룩하게 됩니다.
내 영혼은 하느님의 것이 되며 하느님은 나의 소유가
됩니다. 하느님을 소유하여 하느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만이, "뜨거운 사랑"만이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사람"만이, "아주 거룩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거룩"은 같은 말입니다.
"성인(聖人)"이란 하느님과 그분이 만드신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영혼과 하나 된 거룩하신 하느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라
인간과는 전혀 달리 결코 배반이 없으십니다.
한 번 하느님을 소유하게 되면 하느님을 영원히 소유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그렇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엄마는 사랑하는 아기가 똥을 싸도 더럽지가 않습니다.
그저 설사만 안 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느님도 우리의 부족함이, 더러움이 드러나도 모든 것을
다 껴안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나날이 조금씩,
그리고 때로는 왕창 정화시켜 주시고 당신 가까이로 더
힘 있게 꼬옥 껴안아 주십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에 더욱
일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에 내 영혼은 한없는
"감사"와 "찬미"를 올려 드리게 되며, 그럼으로 영혼이
받게 된 모든 "영광"을 다시 남김없이 그분께 되돌려
드리게 됩니다.
이에 하느님은 더욱 기뻐하시고 내 영혼에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열어보여 주십니다. 이것이 곧 하느님의 "뜻"이요,
"섭리"요, 거룩하신 당신의 "계획"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 땅의 모든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질 때,
그때 새 하늘 새 땅 위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먼저 이 땅 즉, 내 안에 건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제 하느님을 그만 바라봅시다.
관상가가 되지 맙시다. 관상을 끝냅시다!
이제 하느님을 끌어 껴안읍시다. 살아 있는 송장이 되어
끌어 껴안지 말고 원초적 느낌, 거룩한 느낌으로 하느님을
끌어 껴안읍시다.
원초적 느낌을 되찾으려면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지혜롭다는 어른이, 슬기롭다는 어른이,
느낌의 킬러(killer)인 지식인이 어린이가 되는 방법은
"철부지"가 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철부지가 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 바로 "거룩한 내맡김"
입니다. 그분께 자신의 모든 것의 주인은 당신이시라고
"인정"하고, 그 다음 자신의 모든 것을 당신께 내맡겨
드리겠다고 "말씀"드리십시오.
당신이 나의 주인이시라고 인정하는 것이 "굳은 결심"이며,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리겠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바로 "봉헌미사"입니다.
모든 중요한 일은 크게 드러내고 공적으로 알려야 하듯이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드러내고 알리는 예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굳은 결심을 봉헌하는 미사가 그래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철부지가 되어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깁시다.
그리하여 내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정말로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기타]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3월7일 목요일 복음묵상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루카11,18)
사람들이 마을에 커다란 꽃밭을 만들어 삶을 풍요롭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밭을 일구고 꽃씨를 뿌렸지요.
하지만 꽃씨만 싹을 낸 것이 아니라, 잡초들도 싹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결론으로 모아진 것은 모두가
함께 잡초를 뽑아버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잡초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잡초는 꽃을 위해서 있어서는 안 될 나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또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뽑고 또 뽑아도 잡초는 다시 생겨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약을 써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꽃은 살리면서
잡초들만 죽일 수 있는 약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동네에서 약을 팔고 있는 유지가 끼어들었습니다.
“물론 그런 약은 없네. 하지만 어차피 일일이 잡초를 뽑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면, 잡초가 몰려 있는 곳에 약을 뿌려
없애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세. 물론 다소의 꽃이 희생되기도
하겠지만 그것이야 우리가 꽃을 즐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꽃들 사이에 생겨나는 잡초는
수고스럽더라도 솎아내면 되는 것이고 말이야. 아무래도
이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네.”
그렇게 약을 파는 유지의 말에 사람들은 수긍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잡초는 다시 생겨 나기 시작했고, 역시
사람들의 수고는 줄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강한 약을 써보기도 했지만, 그러면 잡초뿐만
아니라 동시에 죽어가는 꽃들도 늘어갔고,
더욱 큰 문제는 땅들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필요한 곳에는 약도 쓰고, 꽃들과
섞여 있는 잡초는 손으로 뽑기도 하면서 꽃밭을 계속
만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하지만 뽑고 또 뽑아도 다시
생겨나는 잡초!
그러다 보니 즐기기 위해 심은 꽃을 감상하기보다는
잡초를 뽑는데 모든 것을 허비하고 맙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힘들어하던 어느 날, 한 청년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한 마디를 던집니다.
“뽑아도 다시 생겨나는 것이 잡초이니, 그것보다는 꽃을 더
많이 더 강하게 키우는 것에 힘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말에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마을의 유지라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화를 내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디 근본도
모르는 놈이 와서 쓸데 없는 소리를 하는가?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가? 어디서 뜨내기의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되돌리라는 말인가?”
알고 보니 마을 유지들이 화를 낸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약을 파는 이와 한통속이 되어 돈을 버는 사람들이었고,
사람들이 잡초를 뽑는데 열중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일이
줄어들고 귀찮은 일들이 생기지 않아 이익을 보던
관리들이었습니다. 몇몇의 사람들은 청년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마을 유지들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청년을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잡초만을 보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어설프게 급히 이야기 하나 만들어 보았다.
인류의 역사가 늘 저질러왔던 잘못된 방법이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흐를 공산이 큰
어리석음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옳은 것을 위해 일한다면서
옳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악을 없애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똑같은 악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결국 정당화될 수
없는 인간의 범죄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끝까지 보여야 할 삶은 잡초를
뽑기에 힘을 쏟는 것보다 꽃을 심고 아름답고 강하게
피우는 일이다. 또한 그것이 정말 잡초인 것인지를
식별하는 일도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지나갈
이 세상은 선과 악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약속된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악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선을 행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가늠할 수 있도록, 절망을 넘어서 희망 안에 꽃을
피우는 삶이어야 한다. 결국 사랑하며 살라는 이야기다.
옳은 목적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악한 수단이
정당화되는 일이 없어야만 한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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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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