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많은 남자와 성교를 하면 보통 욕을
먹는다. 헤픈 여자, 걸레,
창녀.
그런데 남자가 많은 여자와 성교를 하면
오히려 선망이나 칭찬의 대상까지 되는 경우가 많다. 영웅호색.
많은 학자들이 이런 이중 기준이 가부장제
문화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가부장제 문화에서 여성 편력은 금지하고 남성 편력은 장려한다는 것이다.
나는 가부장제 문화가 이런 이중 기준에
영향을 끼친다는 가설이 가망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중 기준의 기원이 몽땅 가부장제 문화로 설명되기는
힘들 것 같다.
우선 이런 이중 기준이 인류 보편적인지
여부를 따져보아야 한다. 만약 이런 이중 기준이 순전히 가부장제 때문이라면 가부장제적이지 않은 문화권에서는
이런 이중 기준이 없어야 할 것이다. 또는 여성 편력은 장려하고 남성 편력은 금지하는 식의 이중 기준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나는 현존 사냥-채집 사회를 포함하여 온갖 문화권을 대상으로 이런 이중 기준에 초점을 맞추어서 체계적으로 보고한 글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이런 이중 기준이 인류 보편적이며
인간 본성을 반영한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진화론의 논리 즉 선택압(selection pressure)의 논리와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이중 기준이 진화론의 논리와 어떻게 부합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진화 심리학자들 사이에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물론 어떤 선택압이 있다고 해서 꼭 그
방향으로 진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 선택압에 맞서는 더 강력한 선택압을 내가 고려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발생(development)과 관련된
요인들 때문에 어떤 선택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방향으로 진화하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이중 기준과 관련된 인간 본성의 생김새가 내가 추정한 것과 같은지 여부는 순전히 실증적으로 검증할 문제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것을 체계적으로 설득력 있게 검증한 연구를 본 적이 없다.
어쨌든 진화론의 논리를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여자의
남성 편력에 비해 남자의 여성 편력이 능력과 상관 관계가 크다.
쉽게 말하자면, 여자는 마음만 먹으면 많은 남자와 잘 수 있지만 남자의 경우에는 마음만 먹는다고 많은 여자와 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리 비싸지 않은 창녀촌이 있는 문화권에서는
남자도 마음만 먹으면 수 많은 여자와 잘 수 있다. 하지만 창녀촌은 인류 진화라는 시간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아주 최근에 생겼다. 사냥-채집 사회에는 창녀촌이
없었다. 따라서 이중 기준과 관련된 인간 본성 진화의 선택압을 따질 때에는 창녀촌을 무시해도 무방할
것 같다.
왜 여자는 마음만 먹으면 많은 남자와 잘
수 있을까? 그 이유는 남자는 여자가 성교를 제안할 때 성교에 응하기 쉽기 때문이다. 왜 남자는 여자의 성교 제안에 쉽게 응할까? 그 이유는 남자는 많은
여자와 성교하면 큰 번식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수 많은 여자와 자면 수 많은 여자를 임신시킬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남자가 여자에 비해 이성의 성교 제안에 쉽게 응하도록 진화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런 것 같다.
왜 남자는 마음만 먹는다고 많은 여자와
자기는 힘들까? 그 이유는 여자는 남자가 성교를 제안할 때 쉽게 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여자는 남자의 성교 제안에 쉽게 응하지 않을까? 그 이유는 여자는
많은 상대와 성교를 한다고 해도 결국 임신을 할 수 있는 자식의 수는 자신의 자궁에 의해 제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자가 남자에 비해 이성의 성교 제안에 쉽게 응하지 않도록 진화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런 것 같다.
자신의 몸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여자와
성교를 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 능력이 언변이든, 카리스마든, 잘생긴 얼굴이든, 돈이든, 높은
지위든, 싸움 실력이든 말이다. 남자의 여성 편력은 여자의
남성 편력에 비해 능력과 상관 관계가 크다. 따라서 남자의 여성 편력은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바람둥이
여자는 바람둥이 남자에 비해 짝짓기 시장에서 인기가 없다.
인간은 포유류다. 임신은 여자의 몸 속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여자는 자신의 뱃속에서
태어난 자식이 자신의 유전적 자식임을 ‘확신’할 수 있는
반면 남자는 자기 아내의 뱃속에서 태어난 자식이 자신의 유전적 자식임을 ‘확신’할 수 없다.
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와 자도 자기의 뱃속에서 태어난 자식은 자신의 유전적 자식이다. 반면 남자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잔다면 자신의 사회적 자식 즉 자신의 아내의 뱃속에서 태어난 자식이 자신의 유전적 자식이 아닐 수도 있다. 배우자가 성교를 수반한 바람을 피울 때 남자가 더 큰 타격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에 비해 남자는 편력이 심한 사람을 배우자 감으로는 낮게 평가하도록 진화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바람둥이라는 평판이 여자에게 더 치명적이다. 즉 여자는 많은 상대와 성교를 하면 남자보다 더 많은 것을 잃는다. 그리고
여자가 아무 남자와 성교를 하면 자식을 혼자 키울 가능성이 있다. 사냥-채집 사회에서 여자가 자식을 혼자 키우면 남편과 같이 키울 때에 비해 온갖 문제들이 더 발생하며 자식 사망 확률도
훨씬 높았을 것이다. 이런 요인들도 여자가 남자에 비해 이성의 성교 요구에 쉽게 응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하도록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셋째, 여성
편력이 심한 남자의 아들 역시 여성 편력이 심할 가능성이 크다.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여자가 여성 편력이 심한 남자의 정자를 받아서 아들은 낳는다고 치자. 능력과
성격이 대체로 유전되기 때문에 그 아들도 여성 편력이 심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다. 그러면 여자에게
이득이 된다. 왜냐하면 아들의 DNA 속에는 그 여자의 유전자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 잘 번식하면 결국 어머니도 잘 번식한 꼴이 된다.
물론 요즘에는 콘돔과 같은 피임 기술이
발달했고 낙태 기술도 발달했기 때문에 성교가 임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이전보다 작았다. 하지만 효과적인
피임 기술과 낙태 기술은 인간 진화라는 기준으로 볼 때 최근의 일이다. 따라서 이중 기준과 관련된 인간
본성의 진화의 선택압을 따질 때에는 무시해도 무방할 것 같다.
남성 편력이 심한 여자의 딸 역시 남성
편력이 심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딸의 유전적 아버지가 큰 번식 이득을 얻지는 않는다. 자신의 아들이 수 많은 여자와 잔다면 수 많은 여자를 임신시킬 수 있지만 자신의 딸이 수 많은 남자와 잔다고
해서 그 딸이 수 많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자의 자식 수는 자신의 자궁에 의해 제한된다.
이 글의 내용은 여자가 여성 편력이 없는
남자에 비해 여성 편력이 심한 남자를 선호하도록 진화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여성 편력이 심한 남자는 그렇지 않은 남자에 비해 능력이 더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해도 가정적이지 않다는 약점이 있다. 자신과 결혼한 이후에도 바람을 피우느라 자신과 자신의 자식을 잘 돌보지 않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여성 편력이 없는
남자와 결혼해서 그 남자의 지원을 받고 여성 편력이 심한 남자와 성교를 해서 그 남자의 유전자를 받는 것이 괜찮은 전략일 때도 꽤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여자는 결혼 상대를 고를 때보다 성교 상대를 고를 때 여성 편력이 심한 남자를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하도록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남자의 입장에서 볼 때 남성 편력이 심한
여자는 아내감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여자와 결혼하면 남의 유전적 자식을 키우기 위해
고생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룻밤 상대로는 좋은 점도 있다. 왜냐하면 성교하자고 꼬시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남자는 결혼 상대를 고를 때보다 성교 상대를 고를 때 남성 편력이 심한 여자를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하도록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남자와 여자 모두 결혼 상대를 고를 때보다는 성교 상대를 고를 때 편력이 심한 상대를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하도록
진화했다고 해도 그 이유가 다른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위에서 제시한 것은 가설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는 아주 가망성이
큰 가설이지만 그래도 가설은 가설일 뿐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경우에는 가설을 만들어내기가 엄청나게
힘들었으며 이것을 천재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1916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해냈다. 에딩턴(Arthur Eddington)이 1919년 일식 때 한 검증은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에 비한다면 노가다에 가까웠다.
반면 진화 심리학의 경우에는 그 반대일 때가 많아 보인다. 가설 만들기가 오히려 노가다에
가까울 때가 많고 그것을 검증할 때 더 큰 재주가 필요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위에서 제시한 것을 가설이라고 부르는 것도
과찬일지 모른다. 가설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착상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검증을 따지기 전에 좀 더 명료한 용어로 이루어진 가설을 정립하는 것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가부장제 이론가들은 남자들의 이해관계만
따진다. 그들이 역사를 쓸 때에는 여자는 수동적 존재가 된다. 여자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남자한테 당하기만 하는 존재로 묘사되는 것이다. 적어도
여성 운동이 시작되기 이전의 시점까지는 그런 식으로 묘사한다.
반면 위에서 제시한 진화 심리학 가설에서는
여자도 자신의 이해관계를 능동적으로 추구한다. 이중 기준에 남자의 이해관계만 반영된 것이 아니라 여자의
이해관계도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가부장제 이론가들이 진화 심리학자들을 비판할 때 여자를 수동적
존재로만 본다고 이야기하는데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오히려 (적어도
여성 운동이 시작되기 이전의 시점까지는) 여자를 당하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로 보는 것은 가부장제 이론가들이
아닐까?
이덕하
2012-02-12
첫댓글 너무나 맘에 드는 글입니다.
연애하고 싶은 이성, 결혼하고 싶은 이성 - 으로 나누는 심리가 위에 다 나와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