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향”
박화목 시, 채동선 곡
꽃 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
내 맘은 푸른 산 저 너머로
그 어느 산 모퉁길에
어여쁜 님 날 기다리는 듯
철 따라 핀 진달래 산을 넘고
먼 부엉이 애를 끊이잖는
나의 옛 고향은 그 어디런가
나의 사랑은 그 어디멘가
날 사랑한다고 말해 주려마
그대여
내 맘속에 사는 이 그대여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정들 것일래라
이 노래를 나한테 가르쳐준 사람은 50년쯤 전 목포에서 살았던, 어쩌면 아직도 거기 살고 있을지도 모를 한 여인이었다. 나는 나한테 노래를 가르쳐준 사람의 얼굴은 좀체 잊지 못한다. 그 이유는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는 멋진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 일이었으니 1970년도가 틀림없다. 과 친구 서너 명이 작당하여 목포로 우루루 몰려갔다. 목포가 고향인 한 친구는 우리들을 자신의 사촌 누님 집으로 끌고 갔다. ‘그 여인’의 집이었다.
친구가 올려놓은 악보를 보며 여인은 천천히 연주를 해나갔고, 빙 둘러선 우리들은 한 소절씩 따라 불렀다. 서너 차례, 혹은 너댓 차례. 마냥 즐겁고 행복했던 한 순간이었고, 그렇게 배운 노래가 바로 “망향”이었다.
세월이 그렇게 빨리 흘러갈 줄 누가 알았나? 40년이 훌쩍 지난 뒤 우린 모두 60대 중반이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목포 친구와 나는 소주 한 잔 나누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망향”을 듣게 되었다. 내가 그때 일을 떠올리며 그 누님은 잘 계시냐고 묻자, 친구는 웃으며 이렇게 놀렸다.
“오냐, 네놈이 그 누님을 그토록 못 잊고 사모해왔던 모양이구나. 내 이번에 목포 내려가면 누님한테 꼭 그렇게 전하마.”
그날 우리는 2차하고 노래방까지 갔었는데, 그 친구가 내 앞에서 마지막으로 불렀던 노래는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였다. 그후 얼마 안 되어 친구는 폐암으로 사망했고, 운명할 때까지 가족을 제외한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게 벌써 7년 전 일이다. 그 세월 동안 “백만 송이 장미”는 나의 애창곡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나로서는 불가피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