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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기연을 만나다 명주 구슬은 엷은 남색을 띠고 있었고 희뿌옇게 영롱했다. 그렇게 강 렬하진 않았지만 전체의 동굴 안을 그 빛으로 가득 채워 놓고 있었다. 고검남은 어릴 적부터 혈수천마를 따라 중원 천하를 떠돈 경험이 있 었다. 북으로는 몽고까지 갔었고 남으로는 남해에 이르렀으며 서로는 서장, 그리고 동으로는 황해까지 가보면서 적지 않은 보석들과 골동품 을 구경했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이와 같은 명주를 본 적이 없었 다. 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네 알의 명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게 바로 야명주(夜明珠)로구나!] 고서의 기록에 의하면 구슬에는 야명(夜明), 읍진( 塵), 벽화(壁火), 벽수(壁水) 등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물기보(神物奇寶)는 다 만 책에 기록되어 전하여 올 뿐 그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다. 고검남은 예전에 잡성고적(雜星古籍)에서 몇 가지의 보주(寶珠)에 관 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즉시 눈 앞의 네 알의 거위알만한 구슬이 무엇인지 알아 본 것이었다.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아! 혹시 이 네 알이 야명, 읍진, 벽수, 벽화의 네 알인지도 모르겠구 나...] 이때서야 그는 동굴 안에 물 한 방울도 들어오지 않는 이유를 깨달 았다. 그의 눈길은 그 네 알의 보주에 쏠리게 되었고 잠시 후에는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기의 가슴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이미 모조리 사라진 것을 느낀 것 이었다. 마치 그 한 가닥 은은한 향기가 폐부에 가득 차자 그 통증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 향기가 나는 곳을 눈으로 쫓던 그는 다시 두 가지의 놀랍고 이상 한 일을 발견했다. 그 오른쪽의 석벽 움푹 들어간 곳에 수레바퀴 크기 의거북이 등껍질이 놓여 있었다. 언제쯤인가 그 거북이가 동굴 안으 로 들어왔다가 그곳에서 죽어 그토록 커다란 등껍질을 남긴 모양이었 다. 그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어째서 거북이의 등껍질에서 이토록 그윽한 향기가 나는 것일 까?) 그는 놀라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해서 몸을 일으켜 거북이 등껍질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그는 놀랐다. 그 등껍질의 크기가 실로 컸으며 그윽한 향 기는 더욱 짙어져 갔던 것이다. 그는 참을 수 없어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쳐서 그 등껍질의 무늬를 더듬어 보았다. 그런데 그의 손바닥이 막 그 등껍질에 닿자마자 놀랍 게도 손가락이 달라붙는 것이 아닌가? 그는 깜짝 놀라 재빨리 손을 움츠렸다. 그 등껍질 위에는 자신의 손 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무척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상하구나. 어째서 멀쩡한 거북이의 등껍질이 이토록 말랑말랑 해져 있을까? 마치 엿가락 같이 말랑말랑하고 찐득찐득하지 않은가?) 사람이란 정말 이상한 동물이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떠올리게 되 는데 이와 같은 식욕은 시각에서 촉발되는 것이었다. 고검남은 엿가락을 떠올리자 자기가 오랫동안 굶주리고 있었다는 사 실을 상기했다. 이른 새벽에 길을 달려오면서 혈도인마와 함께 절령황곡(絶嶺荒谷)에 서 한차례 건량을 먹었을 뿐, 지금까지 꼬박 하루가 지날 동안 한 조 각의 음식이나 한 방울의 물도 입에 넣지 못했던 것이다. 자기가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할수록 배가 고파져 왔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도저히 참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은밀한 동굴 안에 먹을만한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이미 말랑말랑해져 엿가락처럼 변해 버린 거북이의등껍질 외에는... 그는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한 조각의 등껍질을 움켜잡고 입 안에 넣었다. 다행히 한 조각의 거북이의 등껍질은 약간 쌉쌀한 맛 외 에는 그렇게 삼키기 어렵지 않았고 거기다가 그 향긋한 냄새가 식욕 을 돋구기에 충분했다. 그는 잇따라 대여섯 조각을 먹었다. 어느덧 뱃속에서도 허기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별안간 그의 귀에 귀를 즐겁게 하는 부드러운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그 노래 소리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하면서도 유쾌한 기분을 담고 있 었다. 고검남은 멍청해져서 우두커니 서서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그 자신 의 신명이 그 부드럽고 아름다운 노래 소리 속에 어우러지는 것만 같 았다. 노래 소리는 귓가에서 넘실거리며 오랜 시각이 흐른 후에야 멎었다. 곧이어 한차례 은방울을 굴리는 듯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검남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 천하에 이토록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구 나. 옛 사람들이 말하는 요량삼일(繞梁三日)이라는 말이 틀림 없구나. 노래 소리가 이미 멎었지만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돌고 있는 것 같군.) 또 다른 생각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이 노래 소리는 어디에서 들려 오는 것일까? 이 호수 밑바닥의 은밀 한 동굴 안에서 어떻게...)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돌렸다. (이 은밀한 동굴에는 출구가 있거나 빈틈이 있어서 밖으로 통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이 동굴이 이토록 맑고 시원할 리가 없을 것이 다...) 이 때 웃음소리도 이미 멈추어져 있었다. 고검남은 기억을 더듬으며 그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걸어갔다. 겨우 두어 걸음 옮기게 되었을 때, 땅바닥에 놓여 있는 네 알의 명주 구슬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되돌아와 그 네 알의 명주를 집어들었다. 두 손으로 명주를 받쳐 들자 한차례 시원한 느낌이 손에서부터 온몸 으로 번져 나갔다. 매끄러운 명주 구슬을 어루만지니 참으로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아버지가 전화위복으로 내가 이와 같은 명주 구슬을 얻었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지 모르겠구나.) 불쌍한 고검남은 아직도 무림에 명성을 떨쳤던 부친이 이미 암산을 당해 죽고 말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구슬의 빛은 무척 맑고 윤기가 나며 영롱했다. 그는 석벽을 따라 천 천히 동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조금 전 그가 막 깨어나게 되었을 적에 그는 이 호수 밑의 동굴이 얼마나 깊은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안으로 걸어 들 어가게 되자 동굴 안이 매우 넓고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구슬의 빛을 빌어 동굴 안으로 걸어갔는데, 열 예닐곱 걸음을 걸어가자 동굴의 끝에 이를 수 있었다. 이때 등뒤에서 물소리가 철썩 철썩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조금 전 마치 물로 이루어진 발처럼 동굴 입구에 드리워졌던 호수가 이때는 그를 따라서 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수정 으로 만들어진 병풍과 같은 호수 물은 그의 등 뒤 석자 정도의 간격 을 두고 보석의 빛에 저지를 당해 더 이상은 안으로 흘러 들어오지 못했다. 고검남은 재미있게 생각했다. (아마 천하에서 이와 같은 광경을 본 사람은 나 말고는 없을 것이다.) 그는 장난을 하듯 앞으로 두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수정으로 만들어 진 물병풍은 다시 두 자 정도 뒤로 물러났다... 그는 속으로 무척 재미나서 잇따라 몇 번이나 앞으로 나아갔다가 뒤 로 물러서곤 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또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이 끌려 그와 같이 유치한 장난을 멈추었다. 조금 전 그는 동굴의 앞부분에 있었지만 지금은 뒤쪽에 있었다. 아마 도 그 여자 애가 놀고 있는 곳과 가까운지 웃음소리가 비교적 뚜렷이 들렸다. 그는 나이 어린 계집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싫어. 매번 너와 놀 때마다 너는 언제나 억지를 쓰더라. 분명히 내가 팔백 번을 뛰었는데 너는 한사코 두 번 덜 뛰었다고 하는구나.] 곧이어 다른 한 치기 어린 남자 어린아이의 음성이 들렸다. [너는 칠백하고도 구십여덟 번을 뛰었을 때 지팡이가 줄에 걸렸어. 너 는 한사코 두 번 더 뛰었다고 억지를 부리는데, 이번에는 내가 이겼 어!] 여자에는 뾰족한 음성으로 반박했다. [정말 뻔뻔스럽구나. 질 때마다 억지를 쓰더라. 앞으로는 너와 놀지 않을래.] 남자애는 크게 반발했다. [퉤! 너야말로 뻔뻔스럽다. 이길 줄만 알고 질 줄은 모르는 억지쟁이, 고집쟁이, 거기다가 문문(雯雯)은 절름발이!] 고검남은 그들 두 사람이 입씨름을 하는 것을 듣고 무척 흥미 있게 느꼈다. 그는 그 좁고 기다랗고 비스듬히 오르게 되어 있는 빈틈을 따 라 주춤주춤걸어 나가 그 두 아이가 놀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기어오르면서 여자에의 뾰족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못된 영영(英英), 너를 때려 죽이고 말겠다.] 한 차례의 웃음소리 속에 그 남자아이는 앞쪽으로 달려가는 것 같았 고, 그들 말소리는 갈수록 멀어지는 것 같았다. [억지쟁이, 절름발이, 문문은 절름발이다!] 고검남은 비스듬히 기어 나갔다. 대략 십여자 정도 기어 나가게 되었 을 적에, 앞쪽의 틈바구니 사이로 한 가닥 엷은 별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 매우 기뻐서 재빨리 네 알의 명주 구슬을 품속에 갈무 리하고 그 틈바구니에서 불어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속도를 빨리해서 기어 나갔다. 달빛이 그의 몸에 뿌려지게 되었을 적에 그는 동굴 밖으로 기어 나 갈 수 있었고, 사면에 절벽이 우뚝우뚝 서 있는 산골짜기 안에 이르러 있었다. 이 골짜기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으며 곳곳에 석순(石筍)이 불 쑥불쑥 솟아 있었는데 높다란 석순은 이장도 더 되었고 작은 것도 다 섯자 이상은 되었다. 그 돌 그림자가 땅바닥에 드리워지자 그 모양은 한 자루 한 자루의 장검을 연상시켰다. 고검남이 자세히 이 골짜기를 살펴보기도 전에 한 가닥 나직이 흐느 끼는 울음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왔다.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니 삼장 밖의 높다란 석순 위에 기다란 머리카 락을 어깨에 드리운 남색 옷을 걸친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그 여자아이가 어떻게 일장 남짓한 석순 위로 올라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검남은 그녀의 겨드랑이에 두 자루의 지팡이가 끼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두 발 역시 제대로 걸음을 옮겨 놓지 못하 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그 여자애를 올려다보며 놀라고 말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녀의 두 발 역시 나처럼 병이 있는 모양인데, 저처럼 높은 석순 위에 올라가 앉아 있다니! 그녀는 그 뾰족한 석순 끝에 엉덩이가 찔리는 것도 두렵지 않은가?) 그 여자애는 무척 상심되어 한참이 지나도록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고검남은 참을 수 없어 몇 걸음 옮겨 놓으며 불렀다. [이것 봐. 이제 그만 울어.] 그 말소리가 떨어지자 그 여자애는 후딱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바라보 았다. 엷은 달빛 아래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마치 한 마리의 작은 새 처럼 그 높다란 석순 위에서뛰어 내렸다. 고검남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눈앞이 번쩍 하더니 그 여자아이는 어 느덧 그와 여섯 자도 되지 않는 곳에 와 있었다. 그녀는 서 있다기 보다는 그녀의 옆구리에 끼워져 있는 지팡이가 그 녀를 지탱하고 있었다. 치마 밖으로 드러나 있는 붉은 꽃을 수놓은 신발은 가볍게 드리워져 있었고 땅바닥을 딛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검남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그녀의 어깨까지 드리워진 머리카락은 마치 내리 꽂히는 폭포 같았다. 그리고 동그란 행안(杏眼) 과 오똑하고 뾰족하게 선 콧날,약간위로 치켜진 듯한 입술을 지니고 있었다. 겨우 열두 살 정도였지만 영락없는 예쁜이였다. 더군다나 두 뺨에 아직도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은 무척 측은하다는 느낌을 안겨주고 있었다. 고검남은 속으로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하늘은 정말 불공평하구나. 이토록 예쁘게 생기도록 만들어 놓고, 어 째서 다리를 못쓰게 만들어 놓았을까?) 그는 이제 걸음을 옮겨 놓을 수 있었으나 자기가 예전에 움직이지 못했던 고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동병상련의 느낌에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너는 왜 울었니?] 여자애는 그토록 아름다웠으나 뜻밖에도 성질은 무척 못돼먹어 동그 란 눈을 부릅뜨며 큰 소리로 물었다. [누가 날보고 울었다고 그러디? 나는 울지 않았어!] 고검남은 어리둥절해졌다. (눈물이 두 뺨에 흐르고 있는데 어째서 울지 않았다고 말할까?)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 여자애는 다시 매서운 어조로 다그쳤 다. [이 냄새나는 녀석아. 누가 너보고 이 단장곡(斷腸谷)으로 들어오라고 했니? 어떻게 들어왔니! 말해 봐!] 그녀는 한마디 한마디 던지는 질문이 무척 흉악했다. 질문을 받은 고 검남은 흠칫 놀랐다. 잠시 후에야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이봐, 나이 어린 아가씨. 너무 그렇게 흉악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 지 않니?] [누가 어린 아가씨야? 나는 문문이야!] 고검남은 웃었다. [아! 네가 바로 그 머슴애에게 억지쟁이라고 욕먹은 애였구나!] 문문이라는 여자아이는 노한 어조로 다그쳤다. [네가 감히 나를 억지쟁이라고 부르다니?] 왼쪽 지팡이로 땅바닥을 집고 온몸을 허공에 날리더니 오른손의 지팡 이를 번개처럼 비스듬히 휘둘러 고검남을 내리쳤다. 고검남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왜 이래?] 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피할 수가 없었다. 겨우 세 걸음을 물러섰을 때, 어느덧 지팡이에 왼쪽 팔을 얻어맞고 말 았다. 그 여자아이는 나이가 많지 않았으나 힘은 무척 강했다. 그 지팡이가 팔에 닿는 순간 퍽! 소리가 나면서 고검남의 몸을 옆으로 다섯자 밖으 로 날아가 나뒹굴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단장곡 안으로 뛰어든 소년이 무공을 할 줄 모르는 것을 보자 어리둥절한 표정이엇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노여움이 가시지 않은 듯 침을 뱉더니 중얼거 렸다. [퉤! 고소하다. 누가 너같은 냄새나는 사내애보고 이 단장곡 안으로 뛰어들라고 하더냐? 죽으면 더욱 더 고소하게 되지!] 고검남은 지팡이로 얻어맞자 왼팔이 무척 아팠다. 그가 막 몸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 갑자기 몸안의 기혈이 마구 끓어 오르고 단전에 도사리고 있던 현천도장이 억지로 주입한 내공이 갑자 기 높은 열에 피어오르는 김처럼 끊임없이 위로 솟아올랐다. 대뜸 온몸이 터져나갈 것 같았고 뼈마디가 흩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 나 금방 만년이나 묵은 얼음 구덩이 속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찾아들 엇다. 그러더니 또 다시도가니 속에 던져진 듯 뜨거워졌다. 극심한 추위와 극심한 열기가 번갈아 가면 엄습해 오자 죽기보다 괴로웠다. 그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땅바닥을 데굴데굴 그르며 입에서 연신 신 음 소리를 토해 냈다... 그 문문이라고 불리는 소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는데, 고검남이 갑자기 신음 소리를 내뱉자 놀랍다는 듯 몸을 돌렸 다. 고검남이 고통에 휩싸여서는 데굴데굴 구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고 의아한 표정으로 고검남을 주시했 다. 그와 같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처절하리만치 무서운 모습을 그녀는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째서 지팡이에 한 대 얻어맞고 미치광이로 변했을까?) 이거야말로 백 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비록 성질이 급하고 편격(偏激)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지만 담력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만큼은 가슴속에서 한기가 치미는 것을 금치 못했 다. 잠시 서 있다가 그녀는 지팡이를 디디고 고검남이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고검남이 얼굴에 서려 있는 고통스러운표 정을 볼 수 있었다. 얼굴의 힘살은 일그러져 조금 전의 그 준수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머리 위에서 뻘뻘 땀을 흘려 흙먼지까지 묻어 있었다. 그리고 잔돌이 깔려 있는 땅바닥에서 마구 뒹구는 바람에 옷이 찢어져 기이 한 몰골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연민의 정을 느꼈으나 곧이어 잔인하고도 유쾌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어릴 적부터 가르침을 받은 편격된 것들이 그녀를 비정상적 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타고난 연민의 정과 인자한 본성 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고검남의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보고 착잡한 감정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그녀 자신도 아리송하게 느끼고 있었다. 마치 고검 남이 금방 추위를 느꼈다가 금방 더위를 느끼는 것처럼, 그녀의 마음 속 역시 금방 인자한 연민의 정을 느끼는가 하면 금방 잔혹하고 흐뭇 한 기분에 젖어들곤 했다... 그녀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주저앉아 고 검남의 지팡이에 맞은 왼팔을 만져 보려고 했다. 그녀의 그 눈처럼 희고 부드러운 손이 천천히 뻗쳐가 고검남의 팔에 닿는 순간, 즉시손을 움츠리고 말았다. 그녀는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이 냄새나는 머슴애의 몸에 얼음처럼 차가운 것일까? 혹시 그 는 죽은 것이 아닐까?) 고검남이 여전히 신음 소리를 내뱉는 것을 보자 자기의 생각을 부인 하고 재차 다시 손을 뻗쳤다. 그런데 이번에 그녀의 손가락이 고검남 의 팔에 닿게 되었을 적에는 뜨거운 불길처럼 화끈거리는 것이 아닌 가? 마치 불에 달군 듯 뜨거워 재빨리 손을 움츠렸다. 그녀는 그만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일까? 혹시 나의 손가락이잘못된 게 아 닐까? 사람의 몸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가 불길처럼 뜨거워질 리는 없는데?) 고검남은 현천도장이 한평생 쌓은 공력을 강제로 주입 당한 후에, 다 시 남방지정(南方之精)으로 여물게 된 주과(朱果)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그와 같은 두 성질이 몸안에서 섞여 단전에 갈무리되 어 있다가 하나의 활화산처럼 언제라도 터져 나오게 되어 있었다. 다행히 그와 같은 뜨거운 열기는 그의 몸안에 도사리고 있던 한기가 억제하는 바람에 터지는 시간이 늦추어졌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 면 온몸의뼈와 살은 내화(內火)에 새까맣게 타고 말았을 것이다. 이번에 그는 호수 밑바닥으로 떨어진 후에 공교롭게도 소용돌이에 휘말려 벽수주(壁水珠)가 있던 동굴 안으로 흘러 들어오게 되었고, 극 한(極寒)의 천년교구(千年膠龜)를 먹은 것이었다. 이 두 가지의 극한(極寒)과 극열(極熱)을 대표하는 물건이 그의 체내 로 들어가 충돌을 일으킴에 따라 단전에 갈무리되었던 그 한 가닥의 진기를 건드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고검남은 불타는 것같기도 하고 오장육부가 얼어붙는 것같기도 하며, 뼈마디가 흩어지고살갗이 터지 는 듯한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그 문문이라고 불리는 계집애는 멍하니 고검남을 바라보며 해답을 얻어 보려고 열심히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별안간 고검남은 목에서 나직한 울부짖음을 토해 내더니 두 손으로 땅바닥을 푹 쑤셨다. 싹! 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문문은 고검남의 두 손이 마치 무쇠로 만들 어진 송곳처럼 땅속으로 움푹 들어가 팔꿈치까지 파고드는 것을 보았 다. 이에 문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단장곡의 밑바닥은 암석(岩石)으 로 이루어져 있는데 손을꽂아넣다니... 별안간 다시 호통 소리와 더불어 두 손을 땅바닥에서 뽑은 고검남이 몸을 훌쩍 솟구치며 그녀에게 일장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파공성이 일며 그 일장에 실린 힘이 미처 들이닥치기도 전에 그녀의 두 어깨에 드리워졌던 기다란 머리카락이 모조리 뒤로 날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손목을 재빨리 돌려 상반신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오른손의 지팡이로 마주쳐 갔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지팡이와 손이 마주쳤다. 고검남의 그 일장은 지팡 이를 후려쳤는데 그 일장은 마치 예리한 검처럼 그 지팡이를잘라버 렷다. 한줄기의 엄청난 힘이 몸에 전해오자 문문은 뾰족한 비명을 내지르 며 연약한 몸은 뒤로 날아가 이장 밖의 땅바닥에 나가떨어졌다. 그녀는 십 년 동안 무공을 익혔으며 허공에서 천근추의 신법을 펼쳐 서 몸을 아래로 내려뜨릴 수 잇엇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일장의 힘은 엄청나게 막강하여 그녀의 몸을 뒤집어버렸고 냅다 석순 쪽으로 부딪 쳐 가도록 만들었다. 놀란 소리를 내지르는 그 순간 그녀는 기혈이 끓 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한 모금의 선혈을 울컥 토해내며 기절하고 말았다. 싸늘한달은외롭게 막다른 계곡을 비쳐주고 있었고 밤바람은 나직 이 맴돌면서 부엉이의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거기다가 칼날처럼 우 뚝우뚝 서 있는 석순이 어우러져 이 골짜기는 으시으시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고검남은 끝내 천부적인 본능과 꿋꿋한 의지로 체내의 그 파도처럼 세차게 후려쳐오는 고통을 억눌렀다. 이 때 그는 정말 낭패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온몸은 땀으로 젖었고 그 땀에 흙먼지가 가득 묻었으며, 옷자락은 모두 잔돌에 찢겨지고 살 갗에도 상처가 나고 말았다. 거기다가 머리카락이 헝클어져정말 거지 보다도 못한 몰골이 되었다. 그는 땅바닥에 드러누워 하늘에 떠 있는 차가운 달과 총총히 박힌 별들을 바라보며 한동안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리고 나서야 가까 스로 평정을 되찾았다. 조금 전 심신 양면으로 겪었던 고통은 그야말로 악몽과 같았다. 한동 안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에게 있어서는 지옥으로 들어가 만겁(萬劫)의 고통을 겪은 것 같았다. 하늘을 우러러 달과 별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자기의 심정이 일찍이 느낄 수 없었을 정도로 차분해진 것을 느꼈다. 마치 세찬 파도가 요동 치는험난한여울에서 격류와 세찬 파도를 지나쳐 한 평탄하고 잔잔 한 수면 위로 나서게 되어 양쪽 언덕에 꽃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수양 버들이 나직이 가지를 드리우고 흐느적거리는 곳에 다다른 듯한 느 낌... 그는 마음이 무척 시원하고 흐뭇해져 가쁜 숨을 몰아쉰 후에 막 몸 을 일으키려고 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문아! 문문아!] 고검남은 속으로 놀라고 말았다. (그 계집애는 아직도 가지 않았나?) 바로 그때 파공성이 들리며 검은 그림자가 우뚝 버티고 서 있는 석 순뒤쪽에서 유령처럼나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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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