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주 간의 일들: 가정사와 Dilkon 어린이사역, 그리고 그 외 (2016년 5월 21일-6월 3일)
제법 빡센(빡빡한 일정의) 두 주였다.
이 게시글이, 잠시나마가 되겠지만 그래서 중요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방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전반은 집안일이고 후반은 사역이다.
집안일은 뉴저지에서 큰딸 부부가 두 살짜리 딸과 9개월짜리 아들을 데리고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했던 것이고...
(어린 손자는 생후 처음으로 만났다. 일정을 잡은 이후 정말 그 날이 오기나 할까 했는데 결국 다녀갔다. 과.거.형!)
사역은 보호구역 중남부(이곳에서 동남으로 백마일 거리)에 위치한 델칸(Dilkon)에서 열린 All Churches Camp Meeting에서의 어린이사역이 바로 그것이다.
작년 8월에 도와달란 부탁을 받고 대책 없이 기다리던 중 다행히 (당연히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역을 지원해줄 선교팀이 등장해서 이 사역에서는 물론 이런 종류로도 처음 시도한 사역이다.
사역의 내용이 특별한 건 아니다.
성인집회와 동시에 어린이사역을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 상황은 일반 개교회에서 하는 VBS와는 천양지차다.
야외에 천막을 치고 거기서 치러지는...
그것이 가지고 오는 변수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체로 사역자들을 힘들게 하는 변수들이다.
또한 그것을 무릅써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기도 하다.
하긴 어린이사역은 변수의 호악에 따라 좌우될 수 없는 필수사역이기도 하지만.
이박삼일로 현장에 도착하여 사역 후 일박이일로 귀가해야 하는 선교팀의 왕복 노고만으로도 보통일이 아님이 확실하다.
그런데 삼박사일의 사역도 주최측에 초상이 나는 바람에 어린이 집회를 위한 천막과 시설이 미처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 노천 땡볕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천막은 주최측에서 곧 준비했고 앰프, 컴퓨터 등의 기자재들도 둘째 날부터 자체적으로 보완되었다.
게다가 사역도중 강풍, 흙먼지는 기본이고 그 외에도 수많은 변수들이 없을 수 없다.
이 모든 악조건들을 극복하고 사역해주신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그에 대한 현지 사역자와 지도자들의 사례는 말할 것도 없이 최고수준이다.
원주민들이 사례하는 그 이상으로 하나님께서도 영광 받으시고 기뻐하셨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발전을 위한 사역자들의 자평도 나름 필요하겠지만 어쨌거나 원주민들의 가식적이지 않은- 가식적일 수도 있으니까- 진실한 반응만큼 중요한 평가는 없다고 본다.)
이번 사역은 풍성한 공작, 이발봉사 등의 여타 활동들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아주 간단한 찬송들과 십계명의 반복교육으로 집중되었다.
그것은 목요일 마지막 저녁에 성인집회에 참석하여 발표회를 하고 현지에서의 지속적인 어린이 신앙교육을 격려하기 위하여 찬양CD, (66권 성경책 이름들, 주기도문, 십계명, 복음의 기초, 암송구절 등의) TTP 학습자료 다섯 가지, 그리고 선교팀의 지원으로 대금이 지불된 365 Read-Aloud Bedtime Bible Stories를 40여 명의 어린이들과 기타 교회 지도자들에게 선물하고, 그 어린이들과 짝을 이룬 (조)부모들을 각 가정교회로 파송하고 격려하는 축복기도로 절정을 이루지 않았나 싶다.
지금까지 아이들을 위하여 천막이라도 쳐주는 대단한(?) 성의를 보이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관심이나 지속적인 사역의 대책이 전무한 현지의 일반적인 행습에 비한다면 이곳 보호구역 안에서의 어린이사역에 큰 걸음을 내딛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자평을 해보든지, 혹은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아직도 먼 귀로에 있을 선교팀의 건강하고 안전한, 그리고 즐거운 귀가가 되기를, 또한 선교로 헌신한 당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하나님과 이웃들, 그리고 원주민들과의 영적 교감을 풍성하게 나누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이번 사역에서는 우리를 초청한 현지 목사님 교회에서 숙소를 제공했는데 올여름에는 사역지와의 거리문제로 때론 야외일 수도 있는 현장에서 지내야 할 경우가 있을 거 같아서 경험삼아 비록 실내이긴 하지만 준비한 천막을 설치하는 예행연습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또한 그 와중에 가까이 지내는 원주민 목회자의 부친께서 (당 교회를 개척하신 선임 목사님이신 셈이다.) 소천 하셔서 수요일(2일) 사역지와 상당한 거리에 떨어진 곳에서 장례식이 진행되었지만 다행히 참석할 수 있었다.
그나마 고인을 3주전 기도회에서 뵙고 인사를 드린 것이 나름 개인적으로 위로가 된다.
나는 어디서 죽을까?
내 장례식은 어디서 하게 될까?
내 장례식에는 누가 올까?
내 시신은 어떻게 처리될까?
과연 현지인의 장례식답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길게) 진행되는 장례식을 지켜보며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죽음은 현생을 담은 병에 마개를 덮어 그 삶을 완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순간...
잘 죽어야지.
사역과 장례식에서 많은 구면을 보았는데 내가 일정상 5월치(3월치도) 문서사역을 하지 못한 것을 들어 내 문서사역에서 자긴 제명된 것이냐고 묻는 분들이 있기에 “당신이 제명된 게 아니라 나의 사역이 빠진 것이랍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지금 연방정부 소속의 학교 부속건물(관사)에서 사는 관계로 학교 측에서 신원조회서(Background Check)를 제출해야 한단다.
그런데 그걸 해야 하는 장소가 이곳에서 동쪽으로 160마일 떨어진 Window Rock, 그것도 월, 수, 금 일주일에 세 번, 하루에 25명씩만 한단다.
그동안 벼르다가 마침 그 중간거리에 있는 Dilkon에서 머물게 된 참에 금요일 아침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시선을 가로막는 아침햇살과 외통차선 공사구간을 통과하여 허위단심 90여 마일을 달려갔더니 건물 밖에 줄 선 사람들이 벌써 삼십이 넘었다.
지난 월요일은 Memorial Day로 휴무였고, 수요일(2일)은 1868년 6월 2일 나바호족이 미국 연방정부에 귀속되는 조약이 이뤄진 후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먼 길을 걸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많은 인명을 잃은 것을 기억하고자 하는 Navajo Memorial Day로 휴무하여 밀린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린 것이었으니... (아니면 평소에도 그렇게 많은 것인가?)
마침 일차적인 절차를 마치고 나오는 지인이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기에 도대체 이곳에 몇 시에 왔기에 벌써 하고 나오냐고 물었더니 새벽 여섯 시에 도착을 했단다.
아닌 게 아니라 잠시 후에 직원이 나오더니 현재 밖에 줄 선 사람 중에서 열 명 외에는 오늘 처리가 안 되니 돌아가라는 것이다.
정말 조금 과장하여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지만 유타에서도 이 일로 왔다가 돌아가야 하는 사람도 있다 하니...
이것도 현지적응의 한 과정인가 싶기도 하지만 이곳의 행정이 좀 더 발전되기만을 바랄 뿐... 달리는 답답한 마음을 피할 수 없었다.
게시물을 올린지가 꽤 오래된 거 같아서 글이 써질지 약간 궁금했는데 어찌 써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써지긴 써진 모양이다.
이번 대회의 주관자인 헨리 목사님의 뜨거운 기도가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