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창하는 우주 외 2편
권민경
우리는 공간과 사귀는 법을 배워야 해요 아니면 자신과 처음 만난 것처럼 새로 사귀어야죠 오리엔테이션은 언제나 어리둥절해요 다과를 차려놓고 둘러앉아볼까요
나와 공간과 나
처음엔 귓속말, 다음엔 얼굴을 마주보고 말하죠 그러나 점점 크게 소리를 쳐야 들리는 곳까지 멀어져요
종이컵 전화라도 만들 걸 그랬어요 벙긋거리는 입으로, 뭐라고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요?
모래사장이 펼쳐져요 집은 멀어지고 나는 자꾸 나에게 돌아가려 애써요
애초에 목소리는 없어요 우리의 혀는 색을 잃었죠 말은 어둠 속에 잠기지만 표정이라도 보이는 곳에 있어줘요
벌써 저기 멀어진 당신
등뒤의 얼굴이 낯설어요 우리 사이엔 발자국이 어지러워요
그곳에 내 문자가 도착이나 할까요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문학동네, 2024.
이 동그라미에 대해
권민경
우리에게 꽉 막힌 결말이 있기는 할까요
저는 가끔 행방불명이 되고 싶습니다
짧게 써야겠지요 선생님
영원히 살아 있는 채로 있고만 싶어요
하지만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떠올리고 다정과 다정에 따른 가능성 같은 것을 생각합니다
저는 죽어도 선생이 되지 못할 모양이지만
선생님은 영원히 선생님 선생님이 원하지 않아도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스승으로 둔 제자로서
오늘 아침을 맞습니다
글은 어째서 자기 전에만 찾아오는지
선생님은 아십니까 늘 예언의 지점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는데
저는 너무 늦되고
게으르고
사랑을 모르고
헛된 소리만 늘어놓습니다
그 헛된 소리가 모여 피지 같은 죄의식을 만들지만
선생님 선생님
늘 일말의 다정함 무의식적인 친절들이
저에게 들어와 뼈와 살이 되고
이제는 없는 장기들 대신에 몸에 들러붙어 기능합니다
그러니까 가끔 내 장기가 뛰고 있는 걸 의식하는 것처럼
가끔 선생님을 떠올리고
친절에 답하지 못했던 것 같아 슬퍼집니다
내 몸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마음 또한 그러니까
짧게 써야겠지요 선생님
그걸 못해서 이 모양입니다 이상하게 결론 내려는 것 같 지만
저는 행방불명이 되고 싶습니다
애타는 가족들 뒤로한 채
이기적으로 영생하고 싶습니다
그 영생의 에너지원
비확정의 책임에 당신도 들어 있으므로
선생님은 선생님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호칭인지요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문학동네, 2024.
돔구장의 콘서트
권민경
엄마 아빠는 일하면서 라디오를 들었다
소리, 시간, 불과 물과 시끄러운 기름,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다.
짜장면집 주방 문간에 기대어 내가 부르던 노래.
소란 속에서야 진정한 고독을 느낄 수 있다.
국민학교 1학년.
‘다시는 울지 않겠다’란 가사.
용필 형님.
어떻게 해야 울지 않을 수 있나.
절대 불가능을 선언하는 가사에 가슴이 메이다.
국민학교 1학년.
멜랑꼴리는 누가 물려준 유전인가, 버려둔 유적인가.
부서진 짜장면집을 헤매다 고대 문자를 발견한다.
미래엔 새 문명이 들어섰다.
해독 불가.
보물인지 괴물인지가 저장된 장소에, 기다릴 것인데.
알지? 거기가 여기는 아니다.
세상이 우리를 괴로움에 몰아넣어.
내 것이 아닌 고통이 전이되고 자주 내 몸이 나를 공격하네.
그러니까, 누가 물려준 SHIT인가.
줄줄이 같은 병으로 죽은 조상들은 자신의 병명도 몰랐을 것.
모르는 게 나은 경우가 더 많다.
이어지는 암의 연대기는 내 대에서 끝난다.
대들보 아래에 지도를 묻었다.
해석되지 않는 말.
한발 앞선 유행어.
태어나지 못한 아이가 노래한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
태어나지 않아서, 영원한 우상.
도래할 수 없는 것이 도래하는 날, 괴물과 보물이 동시에. 깨어난다.
미래. 미래. 미래.
세 번 말하는 것은 버릇이니 토 달지 말 것.
초현실적인 미래. 미래. 미라이.
흥미롭지만 결국 엉터리일 것.
싸구려 공상과학 잡지같이, 조악한 그림이 미래.
섣부른 예언이다.
6공화국의 시작.
나는 너무 어렸고 소중한 시절을 보냈다.
무너진 짜장면집.
바퀴벌레들은 잘 탈출했을까?
지금도 바퀴벌레가 출몰하는 집에서 산다.
미래. 미래. 더 퓨처.
그건 백지라기보다, 먹지다.
아무 말이나 갈겨쓰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훨씬 더 먼 미래, 미래, 미래의 연약한 몸에 새겨지네.
꼭 닮은 병과 유사한 슬픔.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대 동전을 쥐고 달려간다.
엄마 백 원만. 엄마 오십 원만
50주년 콘서트.
많은 것이 묻혀있는 내 몸 위에서 열린다.
우천 중지 없이.
-『 문장웹진_콤마 』, 2023, 8월호
1982년 서울 출생
2011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시집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
산문집 『등고선 없는 지도를 쥐고』 등
고산문학대상 신인상, 김춘수시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