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야 새야 파랑새야 에 얽힌 이야기 ◎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아랫녘 새는 아래로 가고 윗녘 새는 위로 가고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손톱 발톱 다 닳는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위요~ 위요~ 위요~ 위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윗 논에는 차나락 심고 아랫 논엔 메나락 심어
울 오래비 장가갈 때 찰떡 치고 메떡 칠 걸
왜 다 까먹느냐 네가 왜 다 까먹느냐
위요~ 위요~ 위요~ 위요~ 위요~ 위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마라
1894년 11월8일 우금치에는 겨울을 재촉하는 싸늘한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날 우금치는 이전만큼 춥지 않았다.
동학군, 즉 농민들의 거친 호흡과 피범벅이 되는 뜨거운 땀방울을
예견하고 있었으니까.
한여름보다 더 뜨거웠던 우금치 전투! 어쩌면 그것은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 학살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독일에서 현대전을 배운 일본군,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조선 관군 앞에서
동학군은 솔개 앞의 병아리떼와 같았을지도 모른다.
신식 서양 무기와 전술로 무장한 일본 주력군 앞에서
죽창이나 농기구가 무기의 전부였던 농민들은 사격장의 표적지와 같은
신세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조선 관군의 어느 지휘자의 보고에 따르면 시체가 산을 이루고
그 피가 강을 이루었어도 농민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했다고 한다.
얼마나 그 모습이 장엄했고 무서웠는지 그 지휘자는 그들이
악귀와 같았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동료의 시체를 밟고 피의 강을 건너며 전진하는 농민들은
더 이상 아무래도 좋을 무지렁이들이 아니었다.
아마 더 이상 살육을 원하지 않았던 농민 지도부가 후퇴를 결심하지 않았다면,
그날 우금치에서 살아서 돌아갈 농민들은 한 명도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순하디 순한 농민들을 이런 전사로 만들었던 것일까.
물론 그것은 동학(東學)의 가르침이 그들을 자유인으로 각성시켰기 때문이다.
“인내천(人乃天)!” 그렇다. 사람 한명 한명이 모두 하늘처럼 존귀하고,
그러니 자유롭다는 가르침이다.
그 누가 그들의 존엄성과 자유를 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스스로를 주인으로 자각한 사람들을 그 누가 다시
노예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주인으로 죽을지언정
노예로 살기를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 바로 그들이 차가운
우금치를 한여름처럼 뜨겁게 만들었던 우리 조상들이었다.
우금치의 열정으로 우리는 직접 민주주의 라는 뜨거운 이상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고 표현할 수 있을 때에만
간신히 가능한 제도다. 지금 나는 ‘간신히’라고 말했다. 그렇다.
민주주의는 누군가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인으로 당당히 서 있으려고 할 때, 오직 그럴 때에만
존재할 수 있는 법이다...
이 곡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 대한 설명을 넣어보겠습니다.
이 곡은 원래 구전으로 내려오던 '만가(輓歌)'라고 합니다.
만가란 죽은 이를 애도하는 것으로 상여꾼들이 부르던 곡이라고 하네요.
전봉준 (全琫準) - 1854~1895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전봉준을 '녹두장군'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전봉준이 어린 시절 녹두콩만큼 작다고 하여 '녹두'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동학군이 되어서도 애칭으로 불리웠던 것이죠.
그리하여,
'녹두밭'은 전봉준이 이끈 농민군을,
'파랑새'는 농민군의 적인 외국군대를,
'청포장수'는 동학군이 이기기를 바라는 당시 민중들을 상징한다고 하네요.
채동선 (蔡東鮮 1910~1953).
작곡가. 전남 보성군 출생. 3ㆍ1운동 관련 문제로 경기고등보통학교
(현 경기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1924년 와세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18년경에는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1924년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로 유학,
베를린의 슈테르쉔음악원에서 리하르트 하르처에게 바이올린을,
빌헬름 클라처에게 작곡을 배웠다. 1929년에 귀국하여 수 차례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하고, 최호영, 이혜구 등과 현악4중주단을 결성하는 등
활발한 음악활동을 펼쳤다.
1933년에 작곡된 대표가곡 <고향>은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나,
분단 이후 이은상 시 <그리워>, 박화목 작사 <망향>으로 가사만 바뀌었다.
1937년에는 첫 작곡집을 발간하였으며,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조선 창작곡 발표 대음악제에서 <환상곡 d단조>를 발표하였다.
전통음악에도 관심을 보여 <서울 아리랑> 등을 편곡하고 <별유천지(別有天地)>
등을 채보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주로 작곡에 전념하였으며 고려음악협회를
결성하여 회장을 맡고 한국문필가협회 부회장,
고려작곡가협회 회장, 서울시 문화위원, 예술원 위원,
국악원 이사 등을 지내면서 음악계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50년부터 서울대 상과대학, 숙명여대 교수로
재직하다 1953년 부산 피난 중에 5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는 동학 농민운동 때 불렸던 민요다.
민족주의 작곡가 채동선(1901~1953)이 채집해 합창곡으로 다듬은 작품이다.
그가 부산 피란 시절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내가 악보를 건넸다.
1절 가사만 알려졌던 노래인데 채 선생은 6절 가사까지 채집했다
절박했던 민초들의 아픔이 담겨 있어 부를 때 눈물이 나온다.
이 노래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
만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동학 농민 운동(1894) 때에 일본군이 푸른색 군복
을 입어 파랑새는 일본군을 뜻하며 전봉준이 녹두장군이라 불리었던 점을 보
아 녹두밭은 전봉준을 상징하고 청포장수는 백성을 상징한다는 것이 유력하
다. 또 다른 설로는 팔왕설이 있는데, 전봉준은 전(全)자를 파자하여 팔(八)왕
(王) 이라고도 불리었고 이것이 변형되어 파랑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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