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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숙 이야기(2) 죽으면 죽으리라 며칠 전, 동산교회 장로장립예배에 이한석 목사는 임직 자들에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말씀이 새겨진 기념패를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해 충성하라는 권고이다. 아울러 믿음의 선진들 이야기도 좋은 교훈이다. 나는 교회를 다니며 선진들의 미담을 소개한다. 거룩한 감동이고 역동적 도전이기 때문이다. 안이숙(1908-1997.10) 선생 이야기이다. 자신의 일사각오一死覺悟 순교신앙과 옥중생활을 간증한 자서전 『죽으면 죽으리라』에, 암송했던 성경말씀과 찬송으로 믿음을 지켰고, 견디기 어려운 불안과 환란에서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녀에게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있었다. 어머니는 처음 믿을 때, 선교사에게 성경을 배우고, 성경학교도 다녔다. 교회생활은 행복했다. 주일이면 찬양대원(소프라노)으로 헌신했다. 주일이면 이웃을 찾아다니며 구제비나 좋은 약을 나눠주었다. 섬김과 나눔을 이렇게 배웠다. 그때 교인들은, 새 옷을 입어도 주일에 맞춰 입었고, 깨끗한 은전이나 지전紙錢을 보면 헌금봉투에 담았다. 햇곡식이나 햇과일을 거두면 교회에 드리거나 목사에게 먼저 드리기도 했다. 목회자들 ‘거룩한 하나님의 종’으로 섬겼던 것이다.
안이숙이 교사로 근무했던 보성여학교(평북 선천)는 1907년에 북장로교 선교사인 위대모(휘드모아)와 양전백 목사 등의 협력으로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예수교보성여학교’라 불렀다. 1942년에 일본의 탄압으로 경영권을 박탈당했다가, 남북 분단 이후(1950년 5월)에 서울(영락교회)에서 재건하였다. 그녀는 보성여학교(평북 선천) 교사(일본어, 음악)로 있을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체포하려는 형사들을 피해 제자들 집이나 신의주 사는 언니 집에 숨었다. 때로는 정처 없이 산골과 농촌으로 다니며 은신했다. 1939년 3월 24일. 삼엄한 일본 동경 제국의사당에서 외친 조선인의 고함. “에호바 가미사마노 다이시메이다!”(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이다). ‘성령의 사람 박관준 장로’의 울분의 외침이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경고였다. ‘조선 백성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상숭배 죄악이니 이를 철폐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와 동행했던 안이숙도 붙들렸다. 박 장로의 통역인을 맡았던 것이다. 안이숙이 박관준 장로와 만났던 사연이다. 어느 날 “평양성으로 가라”는 음성을 듣고 평양에 들어갔다. 군인들이 전쟁터로 나가고 있었다. 안 선생 눈에는 죽은 시신으로 보였다. 저 영혼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는데 일본 지도자들에게 그 어리석음을 누가 경고할 것인가 생각하며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 때 “네가 하라.”는 음성이 들렸다. “그렇다. 내 몸을 폭탄 같이 던져 일본인 지도자들에게 경고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죽어보자” 하는 결단을 했다. 졌다. 그리고 박 장로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박 장로는 일본으로 가서 교회를 핍박하는 제국주의의 패망을 경고하자고 했다. 그들의 일본행은 결정되었다. 출발에 앞서 최권능(최봉석)목사와 성도들이 모였다. 에스더 4장을 읽었다.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최 목사와 성도들이 "죽으면 죽으리이다.”를 반복해서 읽었다. 최권능 목사가 안 선생에게 한마디 하란다. 그녀는 엄숙하게 “죽으면 죽으리이다.”했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도 “죽으면 죽으리라.” 응답한다. 믿음 문제라면 담대하게 죽겠노라는 고백이 신실한 성도들의 일사각오 시낭 거룩한 결단이었던 것이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릴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대속代贖의 은혜에 감격하는 자라야 ‘죽도록 충성’, ‘죽으면 죽으리라’ 고백하지 않겠는가? 안이숙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헌신 결단이 이런 믿음이었을 것이다.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샘물처럼 솟구치고, 꽃향기처럼 피어오르는 찬송의 향기. 흰옷 입은 성도들의 신령한 노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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