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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살펴본 東ㆍ西 의 애증(愛憎)
【펌】: 아래의 내용은 한반도 동서의 갈등과 화해속에서 걸어온 역사를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에 기록된 일반적인 내용의 핵심을 요약, 객관적으로 기록한 내용입니다.
... 김부식의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시조의 성은 박(朴)씨요 휘는 혁거세(赫居世)다. 前漢孝宣帝 五鳳 元年(※기원전 57년) 4월 15일에 즉위하니 명칭이 거서간(居西干)이요 나이는 13세였다. 국호를 서라벌(徐那伐)이라 하였다.
그후 22대 지증왕때 여러 신하의 의견이 신(新)은 덕업(德業)을 일신(日新)한다는 뜻이고, 라(羅)는 사방을 망라(網羅)한다는 뜻으로 국호를 신라(新羅)라 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에 기록하기를, 부여왕 주몽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은 비류(沸流)요 다음은 온조(溫祚)라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찾아와 태자가 되자 비류 온조는 태자에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남으로 떠나 온조는 하남위레성(河南尉禮城=지금의 경기 하남시)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였다가 형 비류가 죽고 그 백성이 온조의 위례성에 합쳐지므로 국호를 백제(百濟)라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신라는 한반도 자생국가이며 백제는 고구려에서 왕자가 이주하여 세운 국가로 볼 수 있다.
... 신라 백제 고구려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을 계속하였다. 그 후 신라가 당(唐)과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또는 제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고도 전해지는 궁예(弓裔)가 철원에서 태봉(泰封)국을 세웠으나 전제군주로서 횡포가 심하여 개성 사람 왕건(王建)에게 나라를 빼앗긴다. 태조(※877~943) 왕건(王建)은 국호를 고려(高麗)라하고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으며 신라와 후백제 후고구려등 삼국을 통일하였다.
북쪽은 지금의 평양에서 함흥을 연결하는 천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거란과 여진에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한반도는 남북으로 양분된다.
... 고려 태조 왕건은 26년(※943) 4월에 신임하던 신하 박술희(朴述熙)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주면서 후왕(後王)들에게 전하여 귀감으로 삼도록 하였다.
그 전문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후에 훈요십조는 태조 왕건의 고려의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가 남긴 10가지 조항에서 가장 문제가 된 조항이 바로 영ㆍ호남 갈등의 근거로 작용하는 제8조이다. 동아대학교 고전연구실이 번역한 正史 高麗史의 내용중 “훈요십조(訓要十條)”중 제8조를 참고로 옮겨 놓는다.
高麗史 世家一 第一 太祖二, (1권 65페지~69)
『계묘(癸卯) 이십육년 여름하 4월에 내전에 거동하여 대광 박술희(朴述希)를 불러 친히 훈요(訓要)를 주어 말하되 “짐이 듣건대 대순(大舜)은 역산(歷山)에서 농경을 하다가 마침내 요(堯)의 선양을 받았고, 漢 高祖는 패택(沛澤)에서 일어나 드디어 漢나라 제업(帝業)을 일으켰다고(중략)----
그 8조에 차현(車峴:차령산맥) 이남과 공주강 외는 산형(山形)과 지세(地勢) 함께 배역(背逆)으로 달리니 인심도 또한 그러한지라 저 아래고을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 국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를 변란케 하거나, 혹은 통합된 원한을 품고 거동하는 길을 범(犯)하여 난(亂)을 일으킬 것이며, 또 일찍이 관사의 노비와 진역(津驛)의 잡척에 속하던 무리가, 혹은 권세에 붙어 이면(移免)하고, 혹은 왕후궁원(王侯宮院)에 붙어 언어를 간교(奸巧)하게 하여 권세를 농하고 정사를 어지럽힘으로써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벼슬자리에 두어 일을 보게 하지 말지어다”』
이 훈요십조중 8조는 역사 속에서 호남 차별 논리의 원인 제공이 되어 왔다.
그 갈등은 사회 곳곳에서 부작용을 일으키며 우리 사회의 국론 통합과 정서 순화에 장애가 되어 왔다. 그리고 지금도 역사학자들 간에 8조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다.
... 1392년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마감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니 한반도에서 최초의 통일국가인 조선왕조 500년이다.
... 백두대간으로부터 내려온 태백산맥은 인체에 비유한다면 척추 뼈와 같다.
태백산맥을 중심축으로 한 영남의 지세는 척추이다. 그래서 영남의 기질을 척추뼈 기질이라고 한다. 척추는 몸의 기준이 되고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 충청과 호남의 기호지방은 들판이 넓고, 먹을 것이 풍부하였다. 우리 몸의 가슴과 하복부에 해당한다. 하복부에는 창자를 비롯한 내장기관이 들어 있다. 복부는 나라의 먹을 식량의 창고 역할을 하는 영양 공급처이다.
척추가 인체의 기준 축이라면 가슴과 아랫배는 포용과 인체의 영양인 정기(精氣)를 공급하는 곳이다. 이렇게 동서(東西)는 지리적으로 균형을 이루어 왔다.
... 이러한 동서의 지세는 사람의 기질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지세로 인한 기질은 집안의 가풍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동안 종합적인 자료는 영남의 명문가에는 청빈과 강직한 이야기가 많은 반면, 기호지방의 명문가들은 남에게 베풀었던 적선의 일화가 상대적으로 많다.
... 경북 안동에 있는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의 고택에 걸린 편액에는 "오가유보물(吾家有寶物) 보물유청백(寶物唯淸白)"이라는 글귀가 걸려 있다.
'우리 집안에 보물이 있는데, 그 보물은 오로지 청백(淸白)뿐이다'라는 뜻이다. '청백(淸白)이야말로 가장 큰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자존심이 보백당 집안에 500년간 내려오는 가풍이다.
고성 이(李)씨 저택인 임청각(臨淸閣)에는 “생치(生雉) 다리”라는 생 꿩고기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온다. 손님이 왔는데, 밥상에 올릴 반찬이 없어서 하인에게 꿩을 잡아오게 하였다. 이 꿩의 다리를 불에 굽지 않고, 날 것 그대로 손님 밥상에 올렸다는 일화이다. 만약 꿩 다리를 구워서 올리면 그 손님이 먹을 것이고, 먹고 나면 다음 손님 대접할 반찬이 없어진다. 그래서 생꿩 다리를 그대로 올릴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가난하지만 체면과 격식을 차린다는 자존심이다.
경주 최 부잣집은 12대(약300년)에 걸처 만석꾼을 지낸 집안으로 흉년에 남의 땅을 사지 않고 창고 주변 100리 안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는 가훈으로 유명하지만, 기호 지방의 부자들의 도덕적 인심 또한 이에 뒤지지 않는다.
... 충청도 청원의 경주이씨 집안에서는 거지에게도 밥상을 차려주었다. 밥 먹던 거지가 놋쇠 밥그릇을 훔쳐 달아나자, 그 안주인이 하인에게 나머지 밥그릇 뚜껑마저 거지에게 갖다 주라고 했던 이야기는 유명하다.
...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雲鳥樓)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으로 조선 영조 52년(1776년)에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胄)가 세운 집이다. 누구나 뒤주를 열어 쌀을 퍼갈 수 있다는 의미의 타인능해(他人能解) 글귀를 새겨 넣은 뒤주를 만들어 가난한 사람은 마음대로 이 구멍을 열어 쌀을 퍼 갈 수 있다’는 뜻이다. 만일 뒤주에 쌀이 남아 있으면 “우리집안이 인심이 나쁘니 쌀을 가져가지 않는다”고 식구들을 야단쳤다.
이런 것을 볼 때 국가 공직자들은 영남집안을 견학하여 청렴함을 배우고, 부자들은 호남지방을 둘러보아 가난한 사람을 감싸 안는 선덕(善德)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이다.
... 경북 안동 출신 退溪 李滉은 정주학(程朱學)을 근본으로 한 성리학(性理學)의 세계적 대가이다.
맹자(孟子)의 공손추(公孫丑)상편에 나오는 사단(四端)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측은지심), 자신의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남의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수오지심), 양보하는 마음(辭讓之心=사양지심), 잘잘못을 분별하여 가리는 마음(是非之心=시비지심)의 네 가지 도덕적 감정』과,
예기(禮記)의 예운(禮運)에 나오는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두려움(懼) 사랑(愛) 미움(惡) 욕망(欲)』의 일곱 가지 인간의 자연적 감정인 칠정(七情)이 있다. 이것을 이기(理氣) 심성론(理氣心性論)에서 사단칠정(四端七情)이라 한다.
사단칠정(四端七情)에서 사단(四端)을 이(理)라하고 칠정(七情)을 기(氣)라하는데
퇴계 이황의 주장은, 사단(四端)은 이(理)에서 나오므로 순수한 선(善)이고, 칠정(七情)은 기(氣)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선(善)과 악(惡)이 공존한다. 이러므로 사단(四端)은 이(理)에서 나오는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나온다. 이것이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며 주리론(主理論)이다. 이에 대하여 전남 나주 출신인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은, 칠정(七情)외에 사단(四端)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인 사단(四端)에 감정(感情)이 있고 감정 속에 사람의 마음이 같이 있기 때문에 이(理)와 기(氣)는 같은 소속이므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여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하였다.
이 두 사람의 주장을 성리학(性理學)의 이기(理氣) 심성론(理氣心性論)의 사칠이기논쟁(四七理氣論爭)이라 하는데, 퇴계 이황의 성리학(性理學) 논리에 대하여 고봉 기대승이 다른 이견을 제시하고 나온 것이다. 두사람이 편지로서 주고받으며 논변(論辯)을 진행한 기간이 무려 8년 이었다. 이때 퇴계의 나이는 58세 고봉의 나이는 32세로서 무려 26년의 차이가 있었고 퇴계는 성균관 수장인 대사성(大司成)이었고, 고봉은 이제 막 대과에 급제한 촉망받는 신예학자였다.
張基權이 쓴 퇴계집에 기록하기를 사칠이기논쟁(四七理氣論爭)으로 8년간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퇴계는 26년 년하인 고봉에게 예의를 다갖추고, 고봉도 퇴계를 스승대접의 예를 잃지 않았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비록 학문적으로 길은 달리 하여도 두 사람의 고매한 인품을 짐작 할 수 있다.
사단칠정을 둘러싸고 끝내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서로의 주장을 조금씩 양보하는 선에서 끝났으나 그 과정의 학문적 성과는 한국 유학의 이론을 풍부하게 했다. 그리고 학문토론의 좋은 본보기를 남겼는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 후손들이 두 선인의 훌륭한 본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조선 중기에는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에 의하여 경기도와 호남 호서 지방을 중심으로 결성된 기호학파(畿湖學派)와, 고려 말 조선의 왕조교체에 불만을 품고 강원도 영남지방에 은거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단의 학자군과, 조선 중기에 퇴계 이황이 배출되면서 결성된 영남학파(嶺南學派)가 성립되므로서 조선은 학문적 사상이 동서로 양분된 형국이 되었고 조선 후기의 사칠이기논쟁(四七理氣論爭)은 그 양분된 맥을 이어간 것이다.
... 전남 나주 금성산의 대곡동에 경현서원(景賢書院)이 있다.
처음에는 대곡서원(大谷書院)이었는데 나중에 고친 서원이름이다. 대곡서원은 호남과 영남의 끈끈한 인연의 역사 유적이다.
퇴계 이황을 중심한 영남학파 후계의 큰 줄기는 학봉(學峯) 김성일(金誠一)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다. 이중에서 학봉(學峯) 김성일(金誠一)은 퇴계학파의 계승 과정에서 적통으로 인정되었다.
영남학파의 거두인 김성일(金誠一)이 3년간 전라도 나주목사를 지냄으로써 전라도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그가 나주목사로 재직하던 1584년에 이 지역 선비들과 합심하여 나주 금성산의 대곡동에 대곡서원(大谷書院, 나중에 景賢書院으로 개명)을 세웠다. 대곡서원은 나주에 세워진 최초의 서원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이전에는 호남에는 서원이 없었고 대신 누각과 정자가 발달하였다. 이것으로 호남이 문학과 예술의 고장임을 알 수 있다.
대곡서원을 세움으로써 영남의 철학, 즉 퇴계의 철학이 전라도로 들어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호남의 가사문학(歌辭文學)과 영남의 퇴계철학이 직접적으로 만나는 장이 바로 대곡서원이었다.
대곡서원에 처음 배향된 5명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등 영남학파의 거유들과 후에 호남출신인 기대승이 추가로 배향되었고, 또 100여 년 후에 학봉 자신이 배향되었다. 이로 인하여 김성일(金誠一)은 호남지역 선비들과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된다. 이렇게 경상도 출신인 학봉이 객지인 전라도에서 영남학풍의 근거지인 대곡서원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나주 나(羅州羅)씨 집안 사람들의 협력 덕분이었다고 한다.
... 호남에는 고(高) 기(奇) 박(朴)의 세 명문가(名門家)가 있다. 전하는 말로는 이 세 성씨와 혼인하기를 제일 바라는 가문이었고 한다.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눌재(訥齋) 박상(朴祥)을 말한다.
金誠一은 광주 무등산의 명문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집안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신동아 2000년 3월호 “내앞종택”에서 소개한 글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0세 노인 고경명(高敬命)은 아들 셋 가운데 두 아들 삼부자가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다. 금산 칠백의총(七百義塚)이 그 유적지다. 그리고, 셋째아들인 고용후(高用厚, 당시 16세)만큼은 안동의 김성일 집으로 피신을 보내 高씨의 대를 잇도록 했던 것이다. 그만큼 고경명과 김성일은 인간적인 신뢰가 깊었던 모양이다. 이때 고경명의 셋째아들을 비롯한 高씨 가족 50여 명을 받아들여 수년간 보살펴준 사람이 김성일의 부인과 아들들이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절박한 시기에 학봉의 가족들과 제봉의 가족들은 동고동락을 한 것이다.
... 조선 후기 200년 동안 권력을 잡은 당파는 기호(畿湖)에 기반을 둔 노론(老論)이었다. 기호학파가 서울을 점령한 것이다. 반면에 정권투쟁에 패해서 지방으로 몰린 당파는 경상도에 근거를 둔 남인(南人)이다. 경상도 남인, 즉 영남학파는 안동을 비롯한 경상도 산촌에서 대략 200년 동안 고픈 배를 부여잡고 살아야 했다.
... 1904년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노일 전쟁의 목적으로 건설된 경부선 철도의 영향으로 광복 이전까지 한반도에서 영남쪽에는 공업이 발달했고 호남에서는 농산물이 가장 풍부한 지역이었다.
이렇게 동서의 역사를 요약하여 볼 때 정치적으로는 갈등이 있는 반면 인간적으로는 끈끈한 유대를 이어왔다. 일상생활에서 호남사람과 영남사람 사이는 개인적으로나 혹은 친목모임에 참 잘 지내고 있는데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큰소리가 나오고 서로 얼굴을 붉힌다. 자기출신 지방 정치인을 비판하면 마치 자기 형제나 되는 것처럼 핏대를 세우고 옹호를 한다. 정치인들에게 세뇌가 단단히 되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름다운 애향심이 저질의 정치인 어용으로 유치한 모습이 된것이다. 정치인들은 경상도 전라도 사람들이 이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울에 살면서도 대부분 자기 고향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하는 것이다. 앞으로는 자기 고향에 사는 사람을 국회에 보내야 한다.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이유 불문하고 자기지방 출신에게 투표한다.
우리자신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이것은 정치가 국민의 마음을 갈라놓은 불행한 유산으로 애향심도 나쁜 방향으로 흐르게 한 것이다.
... 신라와 백제의 승자와 패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훈요십조(訓要十條)중에 충남 호남인의 관리등용 차별, 성리학을 통한 기호학파(畿湖學派)와 영남학파(嶺南學派)의 대립, 조선말의 기호(畿湖)에 기반을 둔 노론(老論)과 영남에 기반을 둔 남인(南人)과의 권력갈등 그리고 박정희와 김대중을 중심한 영호남의 정치적 대결로 요약 되는 역사의 흐름이 동서의 갈등이 된 것이다.
... 한반도의 종교분포도 동서로 갈렸다.
동쪽은 불교가 많고 서쪽은 기독교가 많다. 매일경제가 통계청이 실시한 1985년~2005년 인구조사를 토대로 만든 `종교 지도와 신자 증가율을 비교 분석한 결과 소백산맥을 경계로 불교와 기독교의 동서 양분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기독 천주교 불교
경인-(67.28%) (31.15%)
호남-(67.06%) (28.77%)
충청-(55.54%) (43.01%)
영남-(31.31%) (66.77%)
강원-(47.50%) (50.90%)
제주-(34.10%) (63.71%)
앞의 요약된 역사적 내용을 볼 때 동서의 인간관계는 정치에 이용당한 부산물이었다. 예를 들어 고향모임인 향우회를 가보아도 결국에는 정치인들이 고향모임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도 “같은 지방 사람끼리는 말이 잘 통한다”는 의식이 잠재되어 있다. 끼리끼리 모이는 것을 좋아한다. 같은 지방 사람끼리 모이면 타 지방 흉을 보기 마련이다.
결론적으로 동서의 갈등은 정치가 만들어 놓은 불행한 유산이다. 그 불행한 유산을 물려받은 우리 후손은 그 더러운 유산을 빨리 버려야 한다. 그러면 정치를 어떻게 하면 동서가 화합할 수 있겠는가? 그 답은 자기 지방출신의 정치인을 냉정히 판단하는데 달려 있다 하겠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