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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기준으로 / 열왕기상 2:13-46
우리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지만, 인간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일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악한 이들도 있지만 선한 뜻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원수들이 밤에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고 말하지만, 가라지 밭에 밀을 뿌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암담했던 시절에, 기독교 청년집회에서 자주 불렀던 노래가 떠오릅니다.
1. 이 세상 어딘가에 남이야 알든 말든, 착한 일하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 마음이 밝아진다
2. 이 세상 어딘가에 탐욕과 분심 눌러, 얼굴이 빛나는 이 있는 걸 생각하라. 마음이 밝아진다
3. 이 세상 어딘가엔 청빈을 감수하고, 덕행에 힘쓰는 이 있는걸 생각하라. 마음이 씻기운다
4. 이 세상 어딘가에 하늘을 예경하고, 이웃을 돕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 기뻐서 눈물난다
박희진 작사, 한태근 작곡의 이 노래는, 너무 착해서 어두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도, 이 노래는 고난의 시대를 건널 힘을 주는 노래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닙니다. 땅에 심은 씨가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조용히 확장되고 있습니다.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사람은 시간과 더불어 변하게 마련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얼굴에 주름이 잡히고, 흰 머리가 느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겠습니다만,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도 바뀌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변화의 방향입니다. 더 인간적이고, 따뜻하고, 품이 넓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월이 갈수록 더 고집스러워지고, 탐욕스러워지고,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 있는 곳을 걸어가다보면, 얼굴빛이 환하고 온유한 노인을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제 얼굴도 저렇게 변해갔으면 좋겠다는 꿈 말입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인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의회에 끌려가 심문을 받을 때,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고 합니다. 죽음이 예기되는 순간에도, 그의 영혼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내적 고요함의 외적 발현’이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며 개인이든 사회든 변화의 물결을 타지 않을 수 없는 데, 그 변화의 방향을 잘 잡지 않으면,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아니 삶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묻기보다는, 과연 삶의 기준이 세워져 있는가를 물어야 할 듯싶습니다. 현대인들의 문제는 삶의 기준이 될 무엇인가를 세워두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기준이 없습니다. 기준이 없기에 자신에게 유익되면 받아들이고, 유익되지 못하면 거부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내 마음에 들면 옳은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옳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삶의 기준이 없기에, 성도라고 하면서도 성도로서의 삶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에 의해서 살 자를 살리시고, 죽을 자를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결국 자기식대로 살아가는 것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천국이 어떤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지를 알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한다면, 결국 천국이 거부하는 자로 살아가면서도, ‘나는 천국 간다’고 고집하는 것 밖에 더 되겠습니까? 천국은 내 고집으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나 같은 사람이 천국 못가면 누가 가겠나?’라고 우긴다고 해서, 천국이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천국은 천국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기에, 그 기준에 합한 자들에게만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그 기준은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다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 죽인 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살펴보면 답이 나올 것입니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에, 아도니야와 요압과 시므이를 죽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면서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을 때, 그 편에 섰던 아비아달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하고, 쫓아 버립니다. 결국 이들 네 사람은 솔로몬에게 버림을 받는 사람으로 등장하지만, 실상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들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므로 이들 네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살펴본다면, 이들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지 못하고, 천국이 거부한다는 것을 분명한 기준을 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적당히 교회 출입했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영생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겠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영원한 사망에 처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서 구원 받는 것이 영생입니다. 세상 모두가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는데, 그들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총이 단지 교회에 출입했다고 해서, 주어지는 가벼운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심으로 영생을 소망하면서, 하나님께 나오는 분들이라면, 교회에 출입하는 자신을 보면서, ‘천국 갈 것이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자에게 천국을 허용하셨는가를 살핌으로써, 그것을 기준 삼아 자신을 살펴야 할 것이고, 앞으로도 그 기준에 의해서 자신을 점검하면서,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솔로몬에 의해 죽임을 당한 세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먼저 아도니야가 등장합니다. 아도니야는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고 해서, 죽인 것이 아닙니다. 곧 솔로몬이 정치적 보복을 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16-17절 “이제 내가 한가지 소원을 당신에게 구하오니, 내 청을 거절하지 마옵소서. 밧세바가 이르되 말하라. 그가 이르되 청하건대 솔로몬왕에게 말씀하여, 그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왕이 당신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 곧 아도니야는 밧세바를 찾아와서, 솔로몬 왕에게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내로 삼게 해달라는 청을 넣어달라는 로비를 합니다. 솔로몬 왕이 어머니인 밧세바의 청이라면, 들어주지 않겠느냐는 계산을 한 것입니다.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청을 승낙하게 되고, 솔로몬에게 가서 아도니야 얘기를 합니다.
22-23절 “솔로몬 왕이 그의 어머니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그는 나의 형이오니 그를 위하여 왕위도 구하옵소서. 그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을 위해서도 구하옵소서 하고,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의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죽입니다. 아도니야는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한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는 청을 한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 청이 죽임을 당해야 할 이유였을까요? 수넴 여자 아비삭은 다윗을 수종들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달라는 것은, 어떻게든 다윗의 권세를 자신에게서 계속 이어보려는 욕망인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왕의 첩을 차지한다는 것은, 왕의 권력에 동참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아도니야는 다윗의 왕위를 이어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기준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선택하신 자만이, 왕위를 이을 수 있음을 알지 못하고, 수넴 여자만 차지하면 다윗의 권세를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곧 왕이란 하나님이 주셔야만 받을 수 있는 권세인데도 불구하고, 아도니야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 방법을 동원하여 왕의 권세를 얻고자 한 것이, 죽임을 당해야 할 이유였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으로 갈 수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힘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그런 자는 거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자격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곧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런 일을 했으니, 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에서 거부 받은 자일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자에게 합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26-27절을 보면, 솔로몬이 제사장 아비아달을 파면하고 쫓아 버립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고자 했을 때, 아도니야 편에 섰던 것이 이유입니다. 아비아달은 제사장으로서 제물의 희생의 피로 말미암은 죄 용서, 곧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증거하면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사장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갈 길은 오직 이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비아달은 제사장으로서 가야 할 길보다는, 아비아달이라는 새로운 권력에 눈을 돌립니다. 곧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이 살 수 있고, 제사장이라는 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아달은 아도니야 편에 서는 것이, 그 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만이 힘입니다. 하나님만을 힘으로 여기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힘을 바라보고, 그 힘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힘이시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자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아비아달이 솔로몬에 의해 파면을 당하고,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요압은,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뿔을 잡습니다. 왜냐하면 요압 자신도 아비아달처럼 아도니야를 따랐기에,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챈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왜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쳐, 제단 뿔을 잡는 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출애굽기에 있는 하나님의 규례를 요압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출 21:13-14절 “만일 사람이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넘긴 것이면, 내가 그를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죽여야 할 자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곳으로 도망을 하면, 그를 죽이지 말라는 규례입니다. 여기서 말한 하나님이 정한 곳은 성소이고, 14절에서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제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요압은 하나님의 규례를 이용하여, 목숨을 구하고자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고의로 이웃을 죽인 자는,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제단 뿔은 제물의 희생의 피가 뿌려지는 곳이고, 용서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제단 뿔에는 회개와 용서가 있어야 마땅한데, 요압은 자신이 살 수 있는 방법으로, 제단 뿔을 이용한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 없이,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이용하여, 자신이 살 길을 구축하는 것이야 말로 악한 것이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을 저주한 자였지만, 처음부터 죽이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시므이를 죽이지 않은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36-37절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 그런데 시므이는 도망간 종을 찾기 위해, 솔로몬의 말을 어기고 예루살렘을 벗어나게 됩니다. 시므이가 살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라는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산다는 것이 솔로몬의 약속이었습니다. 결국 시므이의 죽음은 솔로몬의 약속보다는, 종을 찾는 일을 더 크게 여긴 것 때문입니다. 곧 십자가의 언약의 피의 은혜 아래 거하며 살아가는 것보다, 세상의 것을 챙기는 일을 더 크게 보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입니다. 우리는 이 기준으로 자신을 살피면서, 십자가의 은혜를 벗어나지 않는 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용서 아래 있음을 깨달으며, 그 기쁨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만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우리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400년 동안 이방에서 객이 되어, 이방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후에 큰 재물을 안고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죄악과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떠나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70년 후에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더니, 정말로 70년 후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끊임없이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더니,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메시야로 보내주셨습니다. 독생자를 메시야로 보내주신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영광을 받는 자리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멸시를 받으셔야 하고, 고난을 받으셔야 합니다. 이 땅에 오신 메시야 예수님은 인간에게 배신을 당해,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에게도, 그리고 예수님에게도, 그것은 엄청난 고통이고 희생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기에 오늘 우리가 이 예배의 자리에 와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예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약속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 구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다는 것이 고통이고, 너무 힘이 들기 때문에, 그 약속을 파기하고, ‘약속을 없던 일로 하자’ 그러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지옥 백성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약속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께 한 약속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신앙생활해 오면서,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까? 혹 우리 가운데 하나님과 한 약속이 없다고,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씀할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최소한 한 번쯤은 약속을 했습니다. 세례 받을 때에 ‘모든 죄악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본을 따르기로 서약’했고,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며, 교인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바르게 행사하기로 서약’ 했습니다. 기억이 납니까? 혹 잊지 않았습니까? 그 약속대로 잘 살고 있습니까?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직분을 받을 때에도 약속을 했고, 새해가 되면 새 마음으로 결단하면서,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종종 하나님께 서원하면서, 약속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도 우리는 자주 약속합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얼마나 지키며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약속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신뢰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 약속이 중요하겠거든, 하나님과 한 약속은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께 한 약속을 조용히 회상해 보십시다. 하나님과 한 약속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하려는 의지가 없던 사람일 것이고, 아니면 하나님과 한 약속을 별거 아닌 것으로 여긴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기신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고통을 당하고, 희생해야 하는 순간에까지도 말입니다. 우리 주님 역시, 우리와 하신 약속을 늘 지키십니다. 그 약속을 우리가 믿기에, 우리는 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며, 담대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께 약속을 지켜야 할 차례입니다. 하나님 앞에 신실한 성도의 모습은, 우리의 약속을 기억하고, 그 약속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한 약속 가운데 지금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까? 내게 손해가 될지라도 지키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손해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아니 우리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당한 손해보다, 몇 곱절 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사람과의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때로 우리에게 손해가 될지라도, 하나님과 한 약속, 사람과 한 약속을 잘 지키는, 신실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모두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실수와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 죄를 용서해주시고 십자가 구속의 은혜로 구원해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내 생각과 내 마음의 뜻에 따라서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평강이 머무는 사람은 영원한 평화의 도구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여호와로 말미암는 평강, 여호와의 선물인 평강이 늘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머물고, 이 평화를 세상에 전달하는 평화의 도구로 사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살아가면서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을 세어 보고 감사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주신 것을 인하여 의롭게, 또 복음을 위하여 사용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