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열왕 19,4-8; 에페 4,30─5,2; 요한 6,41-51
+ 오소서, 성령님
연일 지속되는 무더위에 지난 한 주간도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제가 언젠가 운전해서 경기도 광명시에 갈 일이 있었는데요, 거의 다 와서는 이정표가 하도 많아서 헛갈리는 바람에 광명으로 가는 도로가 아니라 서울로 가는 도로를 타고야 말았습니다. 어찌어찌 돌다가 다시 그 길이 나왔는데, 또 잘못 탈 것 같아서 오늘 입당 성가로 부른 ‘광명으로 이끌어주소서’ 이 성가를 부르며 운전을 했더니, 무사히 광명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내가 갈 길을 알지 못하니, 한 걸음씩 이끌어 주소서.”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매달리니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 같습니다.
파리 올림픽 폐막을 앞두고 있는데요, 경기 중계 보신적 있으세요? 저는 양궁 결승전을 제 심장박동수를 체크하면서 보았고, 탁구 여자 단식 신유빈 선수의 8강 전 중계방송을 보았는데요, 얼마나 사투를 벌였는지, 경기가 끝난 후 신유빈 선수도 울고, 상대 팀 일본 선수도 울고, 텔레비전도 울었습니다.
4년간 올림픽을 준비해 온 우리 선수들뿐 아니라, 상대 국가 선수들 역시 4년간 이 날을 준비해 왔고, 지면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 하니, 얼마나 필사적으로 경기에 임할까요? 그러니 팽팽한 경기가 끝나는 순간, 눈물이 쏟아질 법도 합니다.
그런데 경기 중간중간에 신유빈 선수가 간식을 먹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는데요, 먹을 것으로 긴장을 풀고 에너지도 얻는 모습이 애틋하게 다가왔습니다. 제게는 그것이 오늘 제1독서의 말씀처럼 다가왔습니다. 천사가 엘리야를 흔들어 깨우며 말합니다.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북이스라엘의 임금 아합과 이제벨 부부는 자신들은 물론 온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야훼 신앙을 저버리고 바알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하였고, 야훼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혼자 남은 엘리야 예언자는 목숨을 걸고 바알 예언자 450명과 카르멜산에서 대결을 벌였고,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당신께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백성들은 땅에 엎드려 “야훼께서 하느님이십니다. 야훼께서 하느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제벨은 이에 앙심을 품고 엘리야를 죽이려 합니다.
엘리야는 하룻길을 걸어 광야로 간 후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 “야훼여, 이것으로 충분하니 제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세상의 불의를 거슬러 하느님께 충실하고자 했던 예언자의 외로움과 고뇌가 느껴집니다.
엘리야는 싸리나무 아래에 누워서 잠이 듭니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나 엘리야를 흔들면서 말합니다.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갈 길이 얼마나 멀까요? 엘리야는 밤낮으로 사십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도착합니다. 호렙은 시나이산의 다른 이름으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이곳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첫마음을 되새기기 위하여 호렙산으로 왔습니다.
지난 주일 제1독서에서 탈출기의 말씀을 들었는데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투덜거리자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너희 조상들에게 만나를 내려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라고 말씀하시고, 당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예수님은 하느님 말씀으로서 생명의 빵이시고, 성체로서 생명의 빵이십니다.
구약성경에서, 지혜와 율법은 자주 참된 양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율법의 완성이시라는 의미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은 그런 예수님을 두고 수군거립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여기서 ‘저 사람은’(οὗτός, 후토스)이라는 말은 ‘이 친구는’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데요, 경멸의 어조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수군거렸다’(Ἐγόγγυζον, 에공귀존)는 표현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하느님께 불평하고 대들었을 때 사용된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지금 그들은 조상들이 광야에서 하느님께 대들었던 모양 그대로, 하느님께서 주신 참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다시 그분께 대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40일간 밤낮으로 광야를 걸어 호렙산으로 간 것은, 우리의 삶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도 우리 삶의 목표이신 하느님을 향해 삶이라는 광야를 걷고 있습니다. 이 길 위에서 우리는 말씀과 성체라는 두 가지 양식으로 힘을 얻어 걸어갑니다.
저는 신학교에 입학한 후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왔는데요, 제대를 하니까 아버지께서 ‘신학교에 복학할 거냐’고 물으시더라고요. 당연한 걸 왜 물으시나 싶어서 ‘예’라고 대답했더니, 아버지는 “지난 5년간, 네가 언제 신학교를 그만두나 하고 기다려왔는데, 군대를 다녀와서도 마음이 변치 않았다니, 5년 전에는 겉으로 허락하는 척만 했는데, 이제 사제의 길을 가는 것을 정말로 허락한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제가 입학할 때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듣지 않으니까, 아버지 형제들과 상의를 하셨는데, 큰아버지께서, ‘애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거니까 일단 허락해 주고 군대 제대하면 다시 설득해 보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어쩐지 제대할 즈음 저에게,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을 많이 보내시더라고요?
저는 복학해서 신학교로 돌아갔고, 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재학생들과 함께 개강 피정을 하였습니다. 피정 지도 신부님께서 “왜 이곳에 다시 돌아왔느냐?”는 주제로 묵상을 하라고 권하셨습니다.
신부님은 강의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 수 있어야 하는데, 여러분은 과연 그럴 자신이 있습니까?” 입학 때 이 질문을 받았다면, “예, 자신 있습니다.”하고 대답했을텐데, 군대를 다녀와서 이 질문을 마주하니 대답하기 어려웠습니다.
‘밑바닥’이라는 단어를 듣자, 군대 이등병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또, 제대 후에 알바를 몇 개월 했는데, 식당에서 서빙을 하면서 손님에게 모멸감을 느꼈던 때의 일과, 공장에서 일할 때 조장에게 무시당했던 일이 떠 올랐습니다. 그때에는 이것이 지나갈 체험이기에 참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가장 밑바닥에서 살겠다는 각오로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스스로 질문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저는 그럴 자신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럴 자신이 없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따라 사제의 길을 간다는 것이 가당한 일일까? 저는 제가 추구하고 있는 이상과 제 속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고, 이 질문을 해결하지 못한 채 이 길을 계속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피정 기간 내내 마음으로 고민했지만,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마지막 강의 시간이 되었을 때, 저는 마음속으로 ‘주님, 제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저 신부님을 통해서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강의를 마치신 후 신부님은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더니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성소의 길을 가면서 어려운 순간이 찾아올 때,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너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너를 불렀다. 네 힘에 의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너는 내 안에 있는 나를 드러내기만 하면 된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신부님은 일어서시더니 성큼성큼 걸어 나가셨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그때 제게 해 주신 말씀이라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먼 길을 가고 있습니다. 삶이라는 광야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양식이 되고 힘이 됩니다. 때론 그 말씀을 잊고 또다시 내 힘에 의지하여 살아가려고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신 말씀은 성경 말씀일 때가 많지만, 때로는 다른 사람을 통해 그 말씀을 하시기도 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서로 너그럽게(크레스토스) 대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서로에게 그리스도(크리스토스)가 되어 주십시오’라는 말과 똑같이 발음됩니다. 서로 너그럽게 대하는 일은 서로에게 그리스도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말씀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셨고, 어둠에서 광명으로, 우상에서 참된 하느님이신 당신께로, 헛된 것으로부터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어떠한 말씀으로 나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주셨는지 되뇌어 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다른 사람을 통해 그 말씀을 하셨다면,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당신 말씀을 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사랑으로 진심 어린 말을 해 줄 때, 그에게 그리스도가 되어줄 때, 하느님께서는 나를 통해 당신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 내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귀를 기울이며, 그분께서 우리의 말과 입을 사용하시도록 내드리려 노력하는 귀한 한 주가 되시기를 빕니다.
“광명으로 이끌어주소서. 주 예수여.
어두운 밤 먼 길을 떠나와 지친 이 몸.
내가 갈 길을 알지 못하니
한 걸음씩 이끌어주소서.”
https://youtu.be/eFgl9bJzzTs?si=awRpJv8FNNpdGOlG
가톨릭성가 26번 "이끌어주소서"
디릭 바우츠(Dieric Bouts), 광야의 엘리야, 1464-1468년 경
출처: File:Dieric Bouts - Prophet Elijah in the Desert - WGA03015.jpg -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