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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칼럼] 영화 ‘컴온 컴온’ - 2021년 감독 마이크 밀스
마음의 귀로 들으세요!
아이들에게 삶과 가족, 미래에 대해 물어봅니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에 화가 나고, 무엇에 행복해하는지. 정답은 없습니다. 있다면 “나만 옳다.”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겠지요. 어른들은 아이들이 세상을 잘 모르고, 느낌이나 생각도 모자란다고 말합니다. 착각입니다. <컴온 컴온>의 라디오 저널리스트 조니(호아킨 피닉스 분)는 미국 곳곳의 아이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이를 확인합니다.
그가 만난 아이들은 어른 못지않게 삶과 미래를 다양한 감수성으로 상상하고 고민합니다. 자신과 다르다고 틀린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는 아이도 있고, 누군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때 두렵다는 아이도 있고, 오염된 지구를 걱정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여동생의 부탁으로 조니가 잠시 맡은 아홉 살의 조카 제시(우디 노먼 분)처럼 누구도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질문만 하던 조니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있는 제시의 하루하루는 쉽지 않습니다. 서로 마음의 문을 닫고 있기에 당연합니다. 조니는 “왜, 엄마와는 그동안 소식을 끊었나요?” 같은 당혹스러운 제시의 질문들에 답을 피합니다. 제시는 “내 마음은 내 속에 있는데 삼촌이 어떻게 알아요?”라면서 이따금 고아인 것처럼 행동하고 자연의 소리에 열중합니다.
마음에 귀가 있어야 마음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들어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우리가 친교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해야 하는 첫 봉사는 경청이며,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는 것이 애덕의 첫 번째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아이와 어른 사이라고, 가족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제시가 “서로 사랑해도 엄마는 저의 모든 걸 알 수 없고, 반대도 그래요.”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아이들의 스스럼없는 감정 표현을 막고, 말하기를 점점 어렵게 만드는 것은 어른들입니다. 둘의 마음의 문도 결국은 조니가 먼저 ‘어쩌고 저쩌고’의 변명을 대는 대신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제시의 마음에 귀 기울여 아이의 감정에 의미를 찾아주면서 조금씩 열립니다. 이를 위해 <컴온 컴온>은 ‘듣고(경청) 말하고(표현)’를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지지 않게 반복합니다.
이렇게 슬픔과 위로와 치유를 주고받으면서 조니는 제시에게서 어른보다 깊고 넓고 날카롭고, 어른들은 잊고 있던 ‘삶과 세상’의 지혜까지 인터뷰의 대답으로 듣게 됩니다. “미래에는 예상했던 일들은 안 일어날 거예요. 그보다는 생각 못한 일들이 일어나겠죠. 그러니까, 그냥 하면 돼요. 해요! 해요!(Come on, Come on)” “당신에게 꼭 필요한 것은 원하는 것이 뭔지 아는 것이에요. 당신 자신을 편안하게 발견하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제시의 말처럼 아이들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어른들은 좁은 공간에서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그곳에서 벗어나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내 감정을 알고,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생각 못한 일이라도 해보고, 그 일에 감사하면서 기도로 평화와 안식을 찾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요. <컴온 컴온>의 아홉 살짜리 꼬마가 “사람은 모두 같아요.”라고 말합니다.
[영화칼럼] 영화 ‘파워 오브 도그’ - 2021년 감독 제인 캠피온
개들의 발에서 구하소서
‘파워 오브 도그’는 시편(22,21)의 한 구절입니다. 가톨릭 성경은 ‘개들의 발’로 번역합니다. 개의 세력이라고 하든, 개의 입이라고 하든 삶에서의 공포, 목숨을 위협하는 악의 세력이란 의미입니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에서 그 개는 주인공 필(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입니다. 1920년대 미국 몬태나주 서남부의 광활한 목장을 동생 조지(제시 플레먼스 분)와 함께 경영하는 그는 거칠고, 독선적이고, 강인합니다. ‘삶에 난관이 있어야 열심히 살게 된다.’고 믿는 그는 그렇게 살지 않는 인간들을 경멸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조지와 결혼한 미망인 로즈(커스틴 던스트 분)와 그녀의 아들인 열여섯 살 소년 피터(코디 스밋 맥피 분)도 당연히 그 대상이 됩니다. 작은 식당 겸 술집을 운영하던 가난한 로즈를 재산을 노린 ‘꽃뱀’ 취급을 하고, 종이꽃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창백하고 섬세한 피터를 여자애 같다고 조롱합니다. 두 사람에 대한 증오와 억압은 집요하고 영악합니다. 필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상대에게 잔인한지 알고 있습니다. 상스러우면서도 약점을 찌르는 날카로운 언어, 차갑고 오만한 행동으로 의사였던 로즈 전남편의 자살, 로즈의 음주, 피터의 신체적 허약함을 멸시합니다. 로즈와 피터에게 그는 입을 벌리고 맹렬히 달려드는 개와 다를 바 없습니다.
<파워 오브 도그>는 “아버지가 죽고 나서 나는 엄마가 행복하기를 바랐다.”는 피터의 독백으로 시작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영화가 피터의 소망대로 ‘엄마의 행복’으로 끝날 것이란 사실을 압니다. 비록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필이지만, 마지막 주인공은 소년 피터가 될 것이란 예상도 합니다. 궁금한 것은 ‘언제, 무엇으로, 어떻게’입니다. 필이 저속한 언어, 노골적인 적대감, 싸늘한 침묵으로 로즈와 피터를 벼랑 끝으로 몰아갈수록 더욱 조급해집니다.
피터의 선택은 ‘억압과 혐오’가 빚어낸 악행에 대한 은밀하고 완벽한 ‘복수’의 여정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때를 위해 피터는 의대에 진학하고, 피터에게 동질성을 발견한 필의 눈빛에 증오가 사라지기를 기다립니다. 피터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의학적 재능과 묵직한 책과 학교에서 배운 사실(탄저병)로 달려드는 개의 먹잇감을 만듭니다. 그리고 자기감정과 오만과 착각에 빠진 개는 그것을 덥석 뭅니다.
필은 피터에게 “장애물을 없애가는 게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장애물은 동생을 빼앗아 간 로즈이지만, 피터에게 장애물은 사랑하는 엄마의 행복을 빼앗으려는 필입니다. 이제 그 개는 죽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피터가 죽였습니다. 시편에서의 소망대로 피터는 가장 소중한 엄마를 ‘개의 발’에서 구했습니다.
피터는 복수나 심판이 아닌 ‘어떤 희생’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오히려 더 무섭게 들립니다. 과연 그 희생으로 엄마가 실존적 구원과 행복을 찾을까요. 영화도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하고 뭉뚝한 침묵으로 끝냅니다. 피터 역시 증오와 복수에 매달린 또 다른 ‘개’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로마 12,17.19)
[영화칼럼] 영화 ‘로스트 도터’ - 2022년 감독 매기 질런홀
‘어머니’ 되기와 ‘나’로 살기, 선택일까요?
모성애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일까요? 여성에게 아이는 정말 신의 축복일까요?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어머니 역할을 다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고 인생일까요?우리는 모두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고,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을 먹고 자랐기에 어머니란 존재가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과 축복과 선택을 거부하거나 피하려는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무조건적 희생만을 강요하면서 한 인간으로서 삶을 존중하지 않는 세상이 어머니의 존재를 점점 더 고통과 절망 속으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로스트 도터』의 주인공인 마흔일곱 살의 대학 강사인 레다(올리비아 콜먼 분)도 그랬습니다. 스물셋과 스물다섯 살의 두 딸이 헤어진 남편에게로 가버린 후 혼자 해변으로 여름휴가를 온 그녀가 회상하는 모성애는 마냥 숭고하고 아름답고 희생적이지 않습니다. 어린 딸을 두고 늘 도망쳐버리겠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그녀는 절대 그런 어머니를 닮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내 몸 안에 있는 생명체를 격렬하게 사랑’하고, 아이가 태어나자 헌신적으로 돌봅니다. 그런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나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고집하고, 자신과 다른 모습에 혐오하고, 아이 기르기를 자신에게만 맡기는 남편의 이기심에 절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진정한 내 모습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아서’, ‘나의 삶을 위해’ 어머니는 말로만 했던 ‘도망’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사랑과 고통의 미묘하고 대립되는 모성의 이중성을 레다는 “아이보다 나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면서 자신을 해변에서 만난, 어린 딸을 돌보느라 지쳐가는 젊은 니나(다코타 존슨 분)에게 투영시킵니다. 니나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봅니다. 그래서 엄마에게만 매달리는 아이가 미워 인형을 훔치고, 도망쳐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고 니나를 설득하지만 실패합니다. 니나는 레다가 아닙니다. 그 순간 레다는 압니다. 자신의 선택으로 어머니로서 ‘아이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로스트 도터』는 이탈리아의 여성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페미니즘 소설이 원작입니다. 레다에게 ‘나’의 삶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레다는 ‘어머니로서 나’는 완전히 버릴 수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어머니는 인생의 소중한 선물이고, 삶에 대한 존중이며, 건강한 사회를 위해 인간적이고 종교적인 가치를 전해주는 헌신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두 딸과 남편을 두고 떠났다가 3년 만에 돌아왔을 때 레다는 “아이들과 함께할 때보다, 아이들이 없을 때 더 쓸모없게 느껴지고 더 절망적이어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딸들이 어릴 때 그렇게 좋아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해변에서 오렌지 껍질을 끊어지지 않게 뱀 모양으로 벗기며 행복한 미소를 짓습니다.
‘어머니 되기’와 ‘나로 살기’는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하는 선택이 아닙니다. 함께 가야 할 길입니다. 주님이 바라는 아름다운 삶으로 이미 성경 속에서 만나는 많은 어머니들이 보여주었습니다. 레다 역시 ‘잃어버린 딸’들을 다시 찾을 것입니다.
[영화칼럼] 영화 ‘더 골드핀치’ - 2019년 감독 존 크로울리
가끔은 틀린 길이 바른길이 아닐까?
‘더 골드핀치’(The Goldfinch)는 시의회 화약 폭발 사고로 32세에 목숨을 잃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대표작입니다. 사슬에 묶인 한 마리 황금방울새(골드핀치)를 강렬하고 면밀한 빛과 색채로 그린 이 그림을 소재로 미국 여성작가 도나 타트는 소설을 썼고, 아일랜드 출신의 존 크로울리 감독은 퓰리처상(2014년)까지 받은 그녀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위대한 그림은 모두 사실은 자화상’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림에는 그린 사람의 삶과 진실, 감정과 상상력이 스며있습니다. 화가의 비극적 죽음이 더해진 ‘황금방울새’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신을 투영해 어떤 느낌을 받고,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느냐는 감상자 각자의 몫입니다.
소설과 영화의 줄거리를 한 줄로 축약하면 ‘어머니의 목숨을 앗아간 미술관 폭발 사고 현장에서 13세 소년 테오(안셀 엘고트 분)가 의문의 노인으로부터 몰래 건네받은 명화를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돌려준다.’입니다. 감추고, 속이고, 훔치고, 빼앗는 사건의 연속이 단순한 추리나 긴장감을 넘어 삶과 예술, 시간의 본질을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그 과정에서 운명적으로 얽히게 되는 인물들의 행동과 심리, 관계 변화를 통해 선과 악, 불안과 죄의식, 상실과 집착, 선택과 운명을 성찰합니다.
고아나 다름없는 테오를 거둬준 골동품 가구 수리 전문가 호비(제프리 라이트 분)는 어떤 물건을 좋아하면 그 물건은 생명을 갖게 되고 우리에게 더욱 큰 아름다움을 알게 해준다는 철학을 깨닫습니다. 마약과 도둑질을 일삼았던 보리스(핀 울프하트 분)는 후회와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친구 테오에게 “우리의 악함과 실수가 우리 운명을 결정하고 우리를 선에 다가가게 만든다면? 어떤 사람들은 그런 길을 통해서만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면? 가끔은 틀린 길이 바른길이 아닐까?”라고 묻습니다.
<더 골드핀치>는 ‘선한 행동이 항상 선을 낳는 것은 아니고, 악한 행동이 항상 악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동하면서 내가 아는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테오와 보리스가 그랬으니까요. 그림을 몰래 숨기고, 그림으로 마약 거래를 한 악행을 저질렀지만, 예술과 사랑의 불멸성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황금방울새’를 세상으로 돌려보냈습니다.
2시간 30분이란 시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설명 없이 시간을 자주 건너뛰면서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와 행동과 관계 변화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그래서 <더 골드핀치>는 소설도 읽어야만 한 장의 그림이 우리에게 시간을 초월하여 대화를 나누게 해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테오는 ‘황금방울새’에서 작은 심장박동, 모든 존재를 서로 단절시키는 외로움, 움직이지 않는 시간, 빛 한가운데 갇혀서 꼼짝도 하지 않는 자그마한 죄수, 다른 포로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포로를 발견했습니다. 동시에 존엄성과 자그마한 용감함, 두려워하지 않고 절망조차 하지 않고 물러나기를 거부하는 새도 보았습니다.
[영화칼럼]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 2018년 감독(국내 개봉 2022년) 하시모토 나오키믿고 싶구나!
여덟 살 소녀 사야카(닛츠 치세 분)가 후세(오이다 요시 분)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할아버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나요? 누군가도, 무언가도 좋아요.” “뭘 기다리나요?” “할아버지는 기적을 믿나요?” “하느님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소녀가 이렇게 묻는 이유는 후세 할아버지 역시 누군가를, 무언가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물어보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무언가는 뭘까?” “믿고 싶구나.”라는 할아버지의 대답은 소녀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재일 동포 출신의 나오키상 수상 작가인 이주인 시즈카의 단편소설이 원작인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죽음과 상실, 이별과 기억, 위로와 공감의 영화입니다. 사야카는 얼마 전 반려견 루를, 작은 재즈 카페를 운영하는 이웃의 후세 할아버지는 40년 전에 어린 아들 고이치로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소녀도, 할아버지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절대 죽지 않았어.” “멀리 가서 돌아오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사야카는 여전히 루가 옆에 있는 것처럼 말하고 걷고 뜁니다. 건널목에서 루가 가장 좋아했던 붉은 색의 전철이 지나가기를 눈을 지그시 감고 기다리고, 둘만의 비밀 장소인 바닷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공터의 풀밭을 뒹굽니다. 세상의 모든 반려견이 그렇듯 사야카에게 루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사야카는 파양 당해 버려진 루에게서 자신을 보았습니다. 루와 평생 함께 하기로 약속했고, 혼자서 바라보거나 느끼던 것들을 함께 했습니다. 영화는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그 순간들을 앙증맞고, 순수하고, 당돌하고, 사랑스럽고, 눈과 가슴 시리도록 따뜻하게 담았습니다.
그런 시간을 겨우 1년만 보내고 떠난 루. 찾아야 합니다. 그 ‘기적’을 위해 사야카는 후세 할아버지에게 “어딘가로 가요. 기다리지만 말고 우리가 먼저 찾으러 가요.”라고 제안합니다. 후세 할아버지가 임시로 돌봐주는 또 다른 유기견 루스와 함께 바닷가로 간 그들은 아들과 루를 만납니다. 상상이면 어떻고, 꿈이면 어떻습니까. 그들은 다시 만났고, 영생을 보았습니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에서 역은 하늘나라로 가는 전철을 타는 곳입니다. 병이 깊어 죽음을 앞둔 후세 할아버지는 그 역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고, 아들과 루와 함께 그 전철을 타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사야카는 그 역이 어디인지, 그 전철이 어디로 가는지, 왜 함께 타기로 약속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공터의 낡은 철로로 열차가 들어오고 후세 할아버지와 고이치로, 루가 떠납니다. 사야카도 “제발 나도 데려가 줘.”라고 소리치며 달려가지만 탈 수 없습니다. 아주 긴 세월이 흘러야만 탈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기차가 도착하는 곳에서 루도 다시 만나겠지요.
그때까지 루는 사야카의 마음속에 살아있습니다. 소중한 존재이니까. 어쩌면 루스가 루의 다른 모습일지 모릅니다. 소중한 존재와의 작별과 그 의미, 기적과 하느님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사야카가 “루 고마워.”라고 하면서 루스와 함께 힘차게 산책을 다시 시작하는 것을 보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