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의식으로 발화되는 시편 혹은 몸짓들
----전금란 시집 {벚꽃 칸타타의 시세계
권혁재
전금란의 시세계는 무거우면서 가볍고 차가우면서도 따뜻하다. 그의 시선은 사물과 사건에 대한 인식에서 자아를 성찰하고 뱀이라는 특정의 대상으로부터는 자의식과 더불어 그로 인한 독특한 몸짓으로 삶을 통찰함과 동시에 자아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그의 이런 부단한 관심은 시를 통해 주조되는 감각과 시편들로 발화된다. 이를 자의식으로 발화되는 시편 혹은 그 몸짓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전금란이 시를 운행하는 방식이 어두운 유화 속에 감춘 밝은 수채화 같은 기술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의 시세계에는 다양한 시적 기술의 실험적 표현이 곳곳에 산재한다. 이를테면 "벚꽃, 대나무, 고목, 감나무, 동백" 등의 식물적인 것과 "개, 통닭, 거미, 산양, 잠자리, 사슴, 뱀" 등의 동물적인 것에서 개별성을 확장하여 자의식으로 시편을 발화해낸다. 전금란의 시는 사물과 사건에 대한 자의식과 "뱀"이라는 특정의 대상에 대한 두 부류의 자의식이 내재하는 특징을 지닌다.
여타의 시인들이 산문적인 상상력에 기반을 둔 시작법에 치중하였다면, 전금란은 다른 시작법을 시도하려는 초점에 무게를 두고 그만의 세계를 서서히 다져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은유의 과도한 낭비로 인해 시 속을 보지 않고 시 밖만 핥아 온 "과잉 표현"의 시가 있는 반면에 그의 시작 태도와 상상력의 집중은 두꺼운 유화를 걷어낸 순수한 서정의 한 장면으로 일관되게 다가온다. 이 순수한 서정 속에는 일상 속에서 되새기는 자아와 삶에 대한 끝없는 상상력으로 발화하는 자의식이 내장되어 있다. 이러한 자의식은 위안부로 끌려가 "잔뜩 움츠린/ 소녀의 알몸"(「꽃댕기」)이나 "바람이 불 때마다/ 한들한들 흔들리는" "목선이 가느다란 여자아이"(「코스모스 소녀」), 또는 "나뭇가지에 시간을 걸치는 거미"(「거미 DNA」)나 "사진 속에 갇혀 자라지 않는 아이"(「감나무에 걸린 전화기」) 등에서 존재론적 탐색을 하며 드러낸다. 더 나아가서는 "멀어지고 나서야 보이는 뱀의 미끄러운 몸매"(「사랑은 허물을 벗는다」)에서 헤어진 첫사랑을 "등 돌린 낮달"로 파헤쳐내어 늦게나마 깨닫게 되는 "빈 허물"로 아련하게 추적하기도 한다.
창가를 통해 보는 꽃밭
유언을 말하는 아내처럼
꽃잎 입술이 바람에 떨린다
자궁을 닮아 부푼 씨방
노랗게 익은 씨앗 주머니
큰기침 한 번에
사방으로 튀어나간
사리 알 같은
작은 씨앗
마당에 핀 봉선화처럼
움직임이 없는
병실의 아내
여름과 가을
계절 옷을 갈아입어
봉선화 씨앗 주머니가 터지듯
아픈 아이들에게
씨앗을 나눈 꽃씨 여인
내 사랑
꽃씨 여인 떠난 뒤,
내 머리카락에 서리가 내려 하얗다
- 「꽃씨 여인」 전문
전금란은 "마당에 핀 봉선화"에서 "병실의 아내" 그리고 "내 머리카락에 내린 하얀 서리"의 정경을 존재론적 시선으로 자의식을 잘 정치하여 빚어낸다. 특히 "유언을 말하는 아내"에서 "자궁을 닮아 부푼 씨방"의 부분에 이르러서는 아내의 병이 위중함을 의식하게 해준다. 머지않아 아내는 "봉선화 씨앗 주머니가 터지듯" 떠나갈 것이고 화자는 그런 "꽃씨 여인"을 바라보며 삶의 존재를 새삼 되새기는 자의식의 내면과 마주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가치관이나 사유하는 세계가 다른 데서 관계가 깊은 연유에서다.
화자는 "창가를 통해 보는 꽃밭"에서 봉선화를 보고 있지만 "꽃잎 입술이 바람에" 떨리고 "큰기침 한 번에// 사방으로 튀어 나간/ 사리알 같은" 불안한 징조에 직면하게 된다. "움직임이 없는/ 병실의 아내"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픈 아이들에게/ 씨앗을 나눈 꽃씨 여인"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은 머리카락에 서리가 내릴 정도로 이타적인 자의식으로 가득 차 있기까지 하다. 이러한 자의식은 "계절 옷을 갈아"입고 "씨앗을 나눈 꽃씨 여인"에서 "내 사랑/ 꽃씨 여인 떠난" 것으로 각인시켜 내고 있다.
바람에 떠는 꽃잎 입술, 노랗게 익은 씨앗, 아픈 아이들, 내 사랑, 꽃씨 여인 등의 이미지들은 화자가 지적하고자 한 궁극적인 자의식의 내면이다. 떨리고, 터지고, 튀어 나간 작은 씨앗 등은 개별성을 가진 자의식으로 화자의 본모습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과 동떨어지지 않는 실제적인 모습이라는 점에서 이 시가 풍기고 있는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바닥에 닿는 순간 야생마처럼"(「사랑은 봄비처럼」) 튀는 봄비 소리나 "빨갛게 터져버린 나팔꽃"(「아가미가 꽃으로 핀다」)을 통해 전봇대를 타고 오르는 생명의 살랑거림을 응시하는 행위나 혹은 "캔버스 안에서 살랑거리는/ 키 큰 가을 상형문자"(「코스모스 소녀」)에서 수채화처럼 활짝 피어 한들한들 흔들리는 코스모스의 몸짓을 통해 일상적인 삶의 장면을 환기시켜 자의식에 대한 깊은 성찰과 비애를 감각적으로 들춰내고 있다.
이번에 상재 한 전금란의 시집 『벚꽃 칸타타로 떨어지는 봄을 본다』는 타나토스나 코나투스 중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잘 맞춘 위치에서 자의식을 인식한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시세계는 비관적이나 부정적이지 않고 그가 지닌 개별적인 자의식으로 시를 더 깊고 내밀하게 한다. 화자나 시인이 이러한 세계관이나 사유하는 인식의 폭에 따라 시를 대하는 방식이나 방향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전금란의 시에서는 세상의 모습이 문명의 이기나 폐해로 얼룩지는 면도 없지 않게 지적하고 있으나 거개의 작품은 화자로 전이된 대상을 통해 살갑고 진정성 있는 내밀성으로 통찰하기도 한다. 그 일례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 「어머니 항아리」이다.
어머니 돌아가신 날부터
매일 항아리를 닦는다
함박꽃 무더기 옆 장독대
외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주신
씨간장을 품은 항아리
안개와 뒤엉킨 먼지 묻은 표면
알몸의 항아리 아침마다 닦으면
떠오르는 어머니 얼굴
투박한 손등 같은 뚜껑을 열자
항아리 속 깊은 눈매
동그랗고 새까만 눈동자
어머니 눈동자와 마주친다
어머니 눈동자가 '간장 주랴'라고 말한다
- 「어머니 항아리」 전문
화자가 바라보는 "어머니 항아리"는 안타까운 외할머니의 죽음과 매일 항아리를 닦는 어머니 사이에서 비롯되는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사람이 사람과 맺는 관계는 많은 대화와 몸짓에서 우러나는 소통에서 이루어진다. 시는 시인의 감각과 정서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화자의 메시지나 코드를 독자에게 전달하여 감동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자나 사물에서 비롯된 사유를 획득하는 기능을 갖게 해준다.
전금란의 시에서는 시의 미학보다는 정서나 사건으로 인한 비애나 회한을 자의식으로 잘 걸러내고 있다. 「어머니의 항아리」는 시의 슬픈 전개가 애잔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시 속의 이미지를 진지하게 그려내어 배치시켜 놓는다. 그런데 이 시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머니"가 중의적인 의미로 존재하는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어머니는 어머니의 어머니인 외할머니이고 다른 하나의 어머니는 화자가 부르는 어머니이다. "어머니 돌아가신 날부터/ 매일 항아리를 닦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화자는 어머니의 어머니인 즉, 씨간장을 어머니에게 주신 외할머니를 떠올린다. 그리고 "안개와 뒤엉킨 먼지 묻은 표면"을 아침마다 닦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외할머니의 얼굴과 어머니의 얼굴을 동시에 연상시킨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와 사유는 항아리 뚜껑을 열자 "동그랗고 새까만 눈동자/ 어머니 눈동자와 마주"치는 장면에서 정점을 찍는 정경으로 나타난다. 머지않아 잠재적인 어머니가 될 화자 자신의 눈동자와 어머니의 눈동자가 마주치는 서정을 아슬한 자의식으로 잘 획득해낸다.
바닥에 널브러져
깊은 잠에 빠진 닭 무더기
자면서도 악몽을 꾸는지
어떤 부리는 꽉 다물고
어떤 부리는 혀를 내민 채 굳어 있다
깃털 옷 대신
양념 옷을 수의처럼 입고
멈춘 울음은 기름 속에서 튀겨진다
화장을 한
남은 알갱이 위로
양념이 뿌려지고
소중히 싸매진 은박지
포장된 상자 틈으로 환청 같은
닭울음이 새어 나와
상자를 들썩인다
달구어진 영혼 온도가 식을까
운구를 싣고 재빠르게 떠나는 오토바이
멀어져가는 오토바이 꽁무니로
붉게,
도로에 쏟아져 내리는
통닭집 전화번호
- 「통닭 장례식」 전문
위 작품은 현대 문명의 이기에 잘 포장된 "통닭"을 통해 "바닥에 널브러져" 잠을 자거나 "혀를 내민 채 굳어"가는 생명에 대한 경시와 부정적인 세계를 "포장된 상자 틈으로 환청" 같은 울부짖음을 하는 닭들의 몸짓을 장례식 분위기로 어둡게 지적하고 있다. 작년 닭고기 소비량이 1인당 16.5kg으로 해마다 그 소비량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무게로 환산하면 1억 톤이 육박하고 개체수로는 700억 마리에 가깝다. 닭고기는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육류이며 치킨과 더불어 치맥이라는 문화를 새롭게 형성해낸 대상이기도 하다.
이런 "닭 무더기"들이 "양념 옷을 수의처럼 입고" 기름에 튀겨져 은박지에 싸매진 채 재빠르게 오토바이에 의해 배달지로 멀어져가는 모습은 사람들이 지닌 삶의 고통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붉게,/ 도로에 쏟아져 내리는/ 통닭집 전화번호"에서 화자 자신의 자의식을 "수의"나 "은박지"로 잘 포장하여 상징화하여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다른 측면에서 헤아려보면 닭고기를 먹는 사람들 수만큼 각자의 자의식으로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절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시의 미래나 자의식의 유형도 밝고 투명한 쪽으로 많이 생성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전금란의 시가 갖게 해준다. 다시 말해서 통닭을 먹는 사람들의 욕구와 통닭집 전화번호를 붉게 쳐다보는 화자의 욕구가 서로 상충하는 것을 극복할 수 있을 때, 시를 가로막는 어떠한 기제라도 자의식은 절제된 형태로 시로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시가 추구하는 본질이 삶의 혁신과 자아의 확립이라면 그것이 가능할 것 같은 단상 아닌 단상이 「통닭 장례식」을 통해 작은 계기를 마련하는 단초를 그가 제공해주고 있는 셈이다. 전금란의 시에 나타난 그런 일면에서 각박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이 가볍고 몸짓이 경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자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음성 언어도 없이 사람을 유혹하는 몸짓"으로 쇼윈도에 서 있는 "플라스틱 비너스"(「쇼윈도 앞에서」)의 모습이나 "블랙아이스 위에서 회전"하여 사고를 당해 "영원한 외출을 한 친구"(「고속도로 묵시록」)의 비정한 정경에서도 죽음을 장송곡으로 변주하는 자의식이 잘 드러난 작품들도 많다.
구리선으로 된 뱀
여러 겹 겹쳐져
전기 신호를 보내는 밤
노트북은 스스로 켜져
나타난 파란 눈빛 뱀
이진법 숫자로 된 혓바닥을 날름거려
커서로 깜빡깜빡
최면 신호를 보낸다
포트에 꽂힌
리더기를 물어버린 입
메모리까지 독니 박히기 전에
핏발 선 눈동자 따라
비행모드를 켜버린 손가락
지문에서 풀린 백신이 닿자마자
파란 이빨이 빠지고
떨어져 나간 머리
가죽이 벗겨져
분해된 뼈마디
파열된 내장이 떠도는 모니터 안
01010101
무선의 뱀들이 이진법으로 흩어져버린다
- 「해킹」 전문
전금란의 일관적인 자의식은 "구리선으로 된 뱀"이라는 개별성에서도 꾸준하게 추려내려는 자세를 취한다. 그가 뱀을 통해 드러내는 자의식은 "파란 눈빛 뱀"이고 파열된 내장이 떠도는 모니터 안에서 01010101 무선의 이진법으로 흩어지는 뱀으로 신선한 환기를 일으키며 다가온다. "해킹"을 끈질기게 응시하고 파란 눈빛 뱀으로 주조해낸 그가 소름 돋게 느껴진다. "혓바닥을 나름"거리는 이미지나 메모리까지 독니가 박히는 장면은 정말로 섬뜩하게 다가온다. 더욱이 "핏발 선 눈동자"가 "지문에서 풀린 백신"으로 옮겨가는 과정은 해킹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사실적인 실감으로 불러일으키게 한다. "파열된 내장이 떠도는 모니터 안/ 01010101/ 무선의 뱀들이 이진법으로 흩어"지는 결구에서는 고조된 긴장을 가라앉히는 자의식으로 해킹에 대한 "최면 신호" 같은 심정을 끝없고 막연한 이진법의 시간 속으로 던져 넣는다.
시는 사건이나 사물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내면을 들춰내는 행위의 결과물이다. 보고 싶거나 보고 싶지 않은 것들, 뜻하고 있거나 뜻하지 않은 것들, 아니면 간절하거나 간절하지 않은 것들이 서로 비벼대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전금란의 시에 나타나는 자의식의 내면은 어둡고 부정적이기보다는 뜻하지 않거나 새로운 것들에 대한 두려움과 섬뜩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두려움과 섬뜩함 속에는 존재의 의미를 되새겨주는 자의식을 갖고 있다는 뜻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이러한 시사적인 자의식은 "물결에 흔들리기만 하는/ 주검 같은 침묵"(「사월에는 깊은 잠수를 한다」)에서 세월호 참사를 "해킹"의 연장선으로 끌어오기도 하고 「포커페이스」에서는 "허물 벗듯 날아오르는 연기"나 "불신이 가득 찬 눈동자"에서 끌어내는 각기 다른 욕망을 좇는 속물적인 근성을 지닌 사람들이 맞는 "쓸쓸한 기일"의 장면에서도 잘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동거」나 「어떤 잡채」를 통해 "허락도 없이 들어온 달빛"이 "덤불 같은 어둠 속으로 기어가는" 풍경에서 어머니의 인정과 밥상을 반추하는가 하면, "흑백사진 한 장 같은 외할머니의 기억"이 노을처럼 물드는 "잡채"에서는 음식으로 평등을 기원하는 외할머니의 손맛을 유년의 회상으로 짚어내는 자의식도 엿볼 수 있다.
흔적이 들킬까봐
알에서 나올 때부터
'ㅣ'모음 모양으로
다리를 잘라버린 뱀
물낯을 건너는 듯
흙냄새를 맡는 듯
알파벳 'S' 모양 굴곡으로
읽어 내려가는 맨몸 독서
태생부터 한 획으로
글자 그 자체인
머리부터 꼬리까지 유연한 획수
지면을 핥을 때
혓바닥은 두 갈래로 갈라져
바퀴가 저지른 속독에 의해
완독하지 못한 길 위에서
납작하게 박제가 되어도
장소를 가리지 않는 독서광
몸의 문장을 지우려는지
허물마저 벗어 던진 채
빛바랜 하얀 낙관을
아스팔트에 엎드려 찍고 있다
- 「뱀 독서법」 전문
전금란은 뱀이 지닌 특성과 자신의 자의식과 상상력으로 한층 더 고조시켜 시편을 주조해낸다. 다시 말하면 뱀이라는 개별성을 가진 대상을 통해 사유와 맞닥트리게 되는 세계에서 다른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능력과 시를 엮어내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금란의 시집에 등장하는 60편의 작품 중에 뱀이 시제목이 되거나 제재가 된 것은 20여 편에 이른다. 그만큼 뱀은 그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거대한 물줄기이자 하나의 거대한 통로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