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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의 위임식
제사장의 위임식에 대한 규례는 출애굽기 29장과 레위기 8장에 있으며 레위기 9장은 제사장의 취임식에 대한 규례이다. 출애굽기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에 거룩하게 하신 백성의 대표를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그의 봉사를 받으시고 함께 교제하시는 내용이며, 레위기는 회막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백성의 대표로 아론과 그 아들들을 거룩하게 하셔서 거룩한 하나님 전에 두시며, 아론의 제사장 취임과 축복에서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자기를 나타내시고 그들의 예물을 기뻐 받으심을 말씀하신다.
1- 9 제사장 직분을 위임할 아론과 그 아들들을 거룩하게 하는 일
제사장의 위임식은 제사장으로 위임할 아론과 그 아들들을 거룩하게 하는 일과 제사장이 봉사하는 단을 거룩하게 하는 일이다. 단의 거룩은 회막의 거룩이다. 거룩하게 하는 일은 제물을 드리는 것과 아론과 그 아들들을 씻기고 제사장의 의복을 입히고 관유와 피를 바름으로 이루어진다.
이 일을 집행하는 자는 모세이다. 모세는 옛 언약 체결의 중보자이다. 새 언약의 체결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로 말미암아 세우셨다. 그리스도 예수가 새 백성의 대표인 그의 제자들에게 새 언약을 체결하신 하나님이시다. 제사장의 머리인 아론은 먼저 관유로 기름 부음을 받았고 나중에 그의 아들들과 함께 제단의 피와 섞인 관유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첫 언약의 대제사장은 씻김을 받고 관유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새 언약의 대제사장인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출생하시고 충만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가 죽음을 맛보시고 그의 백성의 대표로 생명의 성령으로 부음을 받으셨다. 관유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충만한 생명 곧 성령으로 충만케된 것을 의미한다.
10-14 제사장의 속죄제
속죄제의 수송아지의 머리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안수하는 행위는 제물과 자기를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단 뿔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단 전체를 속하는 것이다. 단 뿔은 단을 대표하며 뿔은 힘과 권세를 의미한다.
죽인 바된 제물의 피를 뿌리거나 바르거나 쏟으는 것이 속하는 행위인 것은 새로운 생명이 거기 나타났기 때문이다. 첫 언약의 단과 제사장은 속죄 제물의 피로 속할 필요가 있었다. 새 언약의 단과 제사장과 교회는 영원히 거룩한 교제를 누린다.
거룩하게 된 단에 제물의 모든 기름을 불사르는 것은 힘이 충만한 생명을 여호와께 드리는 행위이며 이것을 목표로 단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속죄한 제물의 고기와 가죽과 똥은 진밖에 불사른다. 옛 언약의 제사장을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는 자로 거룩하게 하는 속죄제의 제물은 먹어서는 안되고 그 모는 것을 부정한 곳에서 불살라야 했다. 새언약의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영문밖에서 죽으심을 당하셨으나 그는 자기 백성인 교회에게 자기의 피와 살을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15-18 제사장이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
번제는 제물의 씻어 그 전체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단에 불살라 드리는 제사이다. 여호와께서 옛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대표로 아론과 그 아들들을 속죄의 제물로 거룩하게 하시고 여호와께 전 생명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도록 복을 주셨다. 그러나 옛 언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생명의 봉사는 죽이고 씻기고 불로 사르는 과정이 필요한 가나안의 생명이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 언약의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신령한 제사장이다.
이런 부분들을 여러분이 자세히 읽어야 좋을 것이다. 먼저는 성경에 문단을 나눈 대로 문단을 나누어서 거기서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을 적었다.
1- 9 제사장 직분을 위임할 아론과 그 아들들을 거룩하게 하는 일
여기서는 제사장 직분을 이렇게 위임해라. 거기 보니까 제물을 가져오고 옷을 입혀라. 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그래서 29장1절을 보면 직분을 위임하여 그들로 거룩하게 할 일이 이러하니 그런 말이 나오고 그리고 9절 제일 끝에 보면 위임하여 거룩하게 할지니라 그런 말로 끝나고 있다. 그래서 제사장 직분을 위임해서 거룩하게 하는 일에 대한 근본적인 여기 있다.
10-14 제사장의 속죄제
그리고 10절부터는 1-9절까지 있는 것을 더 풀어서 위임식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1-9절을 보면 쭉 가져오는 제물이 있고 그 다음 옷 입히는 두 일로 되어 있다. 그것이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10절 이하에는 그 제물을 어떻게 드리는가? 또 옷을 입히고 그 옷을 어떻게 거룩하게 하는가? 그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제일 끝에는 보면 이제 제사장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매일 제사를 드리고 항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교제할 것인가? 하는 제사장의 봉사하는 목표가 문단 제일 끝에 있다.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일은 속죄제를 드리고 번제를 지내고 특별히 제사장을 위임하는 위임식 수양을 드리는 제사에서 제사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위임식 수양에서 모세와 아론이 취하는 몫이 있고 그리고 아론을 뒤 이어서 제사장이 되면 아론의 옷을 계속 이어 받으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아론과 그 아들들이 위임식의 제물을 거룩한 곳에서 먹고 또 칠일 동안 위임식을 행하라 그렇게 되어 있다. 이런 문단의 흐름이 전부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그 의미를 따라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속죄제를 지내고 번제를 지내고 위임식 수양을 드림에 있어서 제사장 직분의 특성이 나타나 있는데 거기는 모세와 아론에게 주신 분깃이 있고 이 제사장 직분은 아론의 아들 대대로 이어 갈 것이다. 그리고 이 제사장 위임식을 행하고 위임식 예물을 거룩한 곳에서 먹는다. 그런데 이 위임식은 칠일동안 행하고 칠일동안 단을 정결케 하면 그것이 거룩한 단이 되고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아침 저녁에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은 거기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고 친히 통치하시고 함께 하실 것이다.
그 문제가 지금 29장의 내용이다. 언제든지 그 개별적인 것을 해석하기 전에 전체적인 흐름 구조 그런 것을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만 부분들이 해석이 된다.
제사장의 위임식에 대한 규례는 출애굽기 29장과 레위기 8장에 있으며 레위기 9장은 제사장의 취임식에 대한 규례이다. 출29장에는 취임식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레위기는 취임식에 대한 것이 9장에 있다. 그러니까 출29장하고 레9장하고 맞춰 보면 거의 엇비슷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차이점들은 무엇인가? 출애굽기는 근본적인 성격이 언약 체결이 출애굽기의 성격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하는 언약의 교제 그것이 출애굽기가 기록하고 있는 목표다. 시내 산에서 나라를 조직하고 하나님이 그들 중에 강림해서 함께 계시겠다. 그것이 출애굽기다. 레위기는 그것보다도 함께 하신 하나님과 어떻게 교제의 생활을 하는가? 하는 것이 레위기의 중심이다. 그러니까 제사장에 대한 위임식과 취임식도 그런 성격에 조절되어 있는 것을 알수가 있을 것이다. 거의 같아도 약간 씩 차이들을 봤을 때 그런 차이점들이 조절되어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에 거룩하게 하신 백성의 대표를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그의 봉사를 받으시고 함께 교제하시는 내용이며, 레위기는 회막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백성의 대표로 아론과 그 아들들을 거룩하게 하셔서 거룩한 하나님 전에 두시며, 아론의 제사장 취임과 축복에서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자기를 나타내시고 그들의 예물을 기뻐 받으심을 말씀하신다.
출애굽기는 나는 너희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다. 한 집에 살자 한 집에 사는데 어떻게 하는가? 백성의 대표를 자기 집에 두시면 한 집에 사시고 함께 말씀하심이 될 것이다. 그것이 출애굽기의 내용이다. 그런데 레위기는 그런 문제보다도 29장 제일 끝에를 보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 중에 거하시려고 애굽에서 건져냈느니라 내가 거기서 너희들을 만나리라. 그런 말로 출29장이 끝나 있다. 그런데 레위기는 함께 대면하고 말씀하시고 교제하신다 그런 말씀보다도 다른 것이다. 이제 레위기에서 제사장 위임식은 엇비슷해도 특별히 취임식을 보면 차이점이 확실히 드러나는데 제사장이 취임하면 거기 누가 나타나냐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백성은 자기 백성의 대표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복 주는 대리 기관으로 있다.
이 제사장 안에서 백성과 하나님은 연합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실 때 축복하고 올라가신 기사는 누가복음 제일 끝에 있다. 제사장 축복은 레위기에 있는 이야기다. 제사장이 취임하면 제사장의 취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제사장이 축복에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난다. 왜 제사장이 백성의 대표로 취임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처럼 연합적인 생명의 교제 관계가 레위기의 중심이면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백성 삼으셔서 함께 거하신 언약 체결 문제가 출애굽기의 내용이다.
1- 9 제사장 직분을 위임할 아론과 그 아들들을 거룩하게 하는 일
제일 처음에는 아들들을 거룩하게 그렇게 되어 있고 또 34-35절 제일 끝 문단을 보면 단을 거룩하게 그렇게 되어 있다. 제일 앞에는 제사장을 거룩하게 할 일이 이러하니라. 그렇게 되어 있고 제일 끝문단에는 칠일 동안 단을 거룩하게 하는 일이 이러하니라. 단에 대한 거룩 문제를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는 제사장과 단을 거룩하게 하는 일이고 더 풀어 설명하면 회막과 단과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일이다. 그렇게 결론지어져 있다. 제일 끝이 항상 결론인데 44절에 보면 내가 그 회막과 그 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 이것이 거룩하게 하는 일이다.
그러면 왜 그런가? 45절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이 하나님이 되리니 내가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줄을 알리라. 이것이 성막에서 제사장을 세우는 일에 나타나 있다 그 말이다. 그래서 그 단도 거룩하게 하고 제사장도 거룩하게 해서 하나님이 거기 임하시면 거룩한 단과 거룩한 제사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교제하신다. 언약 교제 그 문제가 출애굽기의 중심이다. 항상 앞과 뒤를 보면 중심을 잡기 좋다.
제사장의 위임식은 제사장으로 위임할 아론과 그 아들들을 거룩하게 하는 일과 제사장이 봉사하는 단을 거룩하게 하는 일이다. 단의 거룩은 회막의 거룩이다. 왜냐하면 단이 곧 회막을 대표한다. 하나님은 단에서 자기 백성을 만나신다. 거룩하게 하는 일은 제물을 드리는 것과 아론과 그 아들들을 씻기고 제사장의 의복을 입히고 관유와 피를 바름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다.
이 일을 집행하는 자는 모세이다. 성막을 지을 때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무엇을 가져와라 가져온 것으로 지었다. 그런데 제사장 취임식에는 가져와라 그런 말은 없고 모세한테만 네가 이렇게 해라 전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공급하는 것처럼 되어 있다. 이 일을 집행하는 자는 모세다. 모세는 옛 언약 체결의 중보자이다.
새 언약의 체결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로 말미암아 세우셨다. 그리스도 예수가 새 백성의 대표인 그의 제자들에게 새 언약을 체결하신 하나님이시다. 제사장의 머리인 아론은 먼저 관유로 기름 부음을 받았고 나중에 그의 아들들과 함께 제단의 피와 섞인 관유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첫 언약의 대제사장은 씻김을 받고 관유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새 언약의 대제사장인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출생하시고 충만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가 죽음을 맛보시고 그의 백성의 대표로 생명의 성령으로 부음을 받으셨다. 관유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충만한 생명 곧 성령으로 충만케된 것을 의미한다.
여기 제일 첫 문단에 보면 아론을 거룩하게 하는 일이 쭉 기록되어 있고 관유로 붓도록 되어 있다. 7절에 보면 관유를 가져다가 그 머리에 부어라. 그리고 그 아들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이렇게 해라 그것이 거룩하게 하는 일이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을 집행하는 자는 모세다. 모세가 모든 것을 공급을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백성이 무엇을 가져온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주신 다는데 더 강조 점이 있다. 하나님이 자기 거룩한 거처로 지은 집에 거룩하게 된 제사장을 백성을 대표해서 세우셨다. 그가 거룩하고 또 단이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거룩한 거처가 된 것이다. 하는 문제가 이 내용이다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백성이 무엇을 가져왔느냐 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는 가로 되어 있다. 왜 모세에게 이렇게 해 주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이 일을 전부 집행하는 자는 모세고 아론은 전부 수동적인 위치에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옛 언약을 모세를 통해서 이런 제물과 옷을 입혀 주시고 또 피를 뿌리고 기름을 부어서 자기 백성의 대표자를 거룩하게 해서 자기 앞에 두시고 하나님이 친히 거기 거하셔서 함께 만나시고 말씀하고 교제하셨다.
그런데 이 은혜의 일을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에서 완성하셨는데 새 언약의 중보자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아들을 세우셨다. 이 아들이 모든 것을 주시는 중보자다. 그런데 처음에 모세를 통해서 세우신 대표자는 물로 씻고 영광스런 옷을 입히고 그리고 나서 관유를 부었다. 이 대제사장의 기름 부음은 자기 아들들과 함께 기름 받은 것과는 다르게 되어 있다. 자기 아들들과 함께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은 21절에 있다. 단위의 피와 관유를 취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과 그 옷에 뿌려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아론을 관유를 가져다가 머리에 바르고 그 때 아들들은 기름 부음 받음이 없다. 거기는 아론만 그렇게 되어 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이 함께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 21절에 있다.
그러니까 이 대제사장은 보니까 거룩한 관유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기름 부음을 받았냐? 물로 씻고 영광스런 옷을 입고 관유로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이다. 성경에서 기름 하는 것은 항상 충만한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가령 간에 덮인 기름 콩팥에 덮인 기름 또 감람 기름 또는 요리도 전부 기름 요리다. 중국집 비슷하게 되어 있다. 완전히 튀김 요리다. 그런데 이 기름은 무엇이냐? 기름진 것은 생명의 충만함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보니까 아론은 기름 부음은 받았어도 피하고는 상관이 없다. 일단 씻기고 기름을 바른 사람인데 이제 새 언약의 중보자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해서 언약 체결을 하셨다. 구약 때는 여호와가 모세를 통해서 이 언약을 체결하셨는데 신약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서 언약을 체결하셨기 때문에 아들이 언약 체결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와 새 언약을 세우노라. 이것은 새 언약의 피니라. 자기 자신이 언약의 주체로 나타나고 모세처럼 되어 있지는 않는다. 그것이 구약과 신약의 큰 차이점들이다. 그러니까 비슷하게 유형으로 맞춰서는 안 맞다. 내용상 맞아야 되지 모세를 예수님께서 막 맞춰서는 안된다. 왜 예수는 모세처럼 종이 아니라 언약을 시행하시는 하나님 자신으로 그 아들을 세우셨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내가 새 언약을 세우노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모세는 물로 씻고 영화로운 옷을 입고 기름 부음을 받아서 그렇게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씻김을 받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렇다. 그는 본래 성령으로 출생하셨고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를 부할시키셔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 그러니까 첫 언약과 둘 째 언약을 그렇게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제 대제사장의 아론과 그 아들들이 아론에게 참여하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 관계와 더 관계가 있다. 그래서 아론이 어떠하면 그 아들들이 어떠하다. 그것은 온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것이다.
특별히 아론의 한 아들은 아버지의 옷을 계속 물려받을 것이다. 왜 아론은 영원히 살이 있는 제사장을 나타내기 때문에 아론이 죽으면 그 아들이 이어받고 특별히 민20장에 보면 아론이 죽었는데 호르산 높은 꼭대기 올라가서 죽었다. 그런데 그 아들 엘르아살이 함께 올라가서 거기서 옷을 물려받아 입고 내려왔다. 그 죽음은 백성의 눈에는 가리워저 있다. 그렇게 해서 그 제사장은 히브리서 말대로 하면 그들이 다 죄 아래 있어서 죽음의 권세 아래 있어서 많은 제사장이 필요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죽지 않는 분이시다 했는데 구약 때는 많은 수가 필요했는데도 죽음이 없는 것은 어떻게 했는가? 아버지를 아들이 계속 상속받도록 하고 그 옷을 계속 아들이 입는다. 그렇게 해서 그 직무다 영원하다 한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처음에 보니까 아론을 거룩하게 하는 일이 쭉 기록되어 있고 아론이 끝나면 아들들을 짤막하게 넣고 있는데 아론과는 약간 달라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제사장이 거룩한가 옷을 입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냄으로 거룩하게 된다. 이것은 제사장의 거룩일 뿐만 아니라 제일 끝 문단에 보면 단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라. 단과 제사장의 거룩을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왜 동일한 피를 단에도 뿌리고 제사장에게도 뿌린다. 그러니까 제사장의 거룩일 뿐만 아니라 단의 거룩이다. 그러니 둘다 거룩하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 그렇게 되어 있다.
10-14 제사장의 속죄제
속죄제의 수송아지의 머리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안수하는 행위는 제물과 자기를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안수하는 의미는 내 죄는 짐승에게 넘어가고 죄만 넘기는 것이 아니라 일치시키는 것이다. 자기와 안수한 것을 일치시키는 행위다. 손을 통해서 죄만 넘어가고 제물에게 있는 의로운 것은 내게 다 돌아오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연합시키는 것이다. 단 뿔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단 전체를 속하는 것이다. 단 뿔은 단을 대표하며 뿔은 힘과 권세를 의미한다. 단 주변에다 피를 뿌리고 피를 바르도록 되어 있다.
죽음 하는 것은 죄 때문에 죽음이다. 그런데 죽고 나면 피는 단의 뿔에 발라지고 단에 뿌려진다. 그러면 이것은 거룩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거기 나타나서 너희들을 만나리라 그렇게 되어 있다. 여기는 새로운 생명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제사는 그냥 법정 적으로 내가 죄를 지어서 죽게 되었으니 하나님 나를 보지 마시고 이 피를 보시고 피로 화장한 것처럼 피를 보시고 용서하시라는 그런 법정 적인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질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드리는 모든 제물은 가나안 땅의 예물이다. 가나안 땅의 밀가루고 가나안 땅의 짐승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은 단 먹을 수 있도록 된 것은 아니고 일부만 먹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도 스스로 죽어 버리면 먹지 못한다. 왜 아직 이 죄의 권세가 있기 때문에 생명이 온전하게 되어 있지 않다. 죄의 권세가 아직도 생명을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죽으면 먹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상에서 자기 집에서는 먹을 수 있는것인데 성소에서는 그것을 먹을수 없다. 그중에서 또 고르고 골라야 하나님의 상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세 제도의 원수된 것 간격들을 아직도 죄가 지배하는 시대 가운데서 하나님이 여러 간격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에 있는 제물은 죄가 있으니까 하나님 죄를 용서하시라고 피를 보시고 좀 봐 주시라고 그런 심판하는 처소가 아니라 생명의 질서의 교제를 주시는 곳이 항상 성소의 의미다. 가나안 땅은 이방 땅이 누리지 못하는 교제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누리는 성소고 또 이스라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지 못하는 생명의 교제를 성소에서는 대제사장 가문이 누리고 또 레위 지파는 성소 뜰에서만 봉사하면 제사장 가문은 성소 안에까지 들어간다. 거기 까지가 제사장의 교제의 처소다. 이런 생명의 교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 구약의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너희 중에 거하시려고 오셨다는 의미지 내가 오기는 왔는데 내가 화나니까 죄를 갚아라 갚으기 전에는 들어오지 말아라. 이렇게 죄를 심판하고 갚아 버린 재판장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복으로 주신 것인데도 그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구별되어 있었다. 그것도 스스로 죽으면 먹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상에 들어가는 것은 또 골라야 되고 특별히 하나님의 상에 놓을 것은 기름만 올라간다. 기름은 불태워 드리고 고기는 제사장이 먹는다. 그러니까 기름은 전부 내것이니 백성은 먹지 말아라. 기름과 함께 피는 먹지 말아라. 그렇게 되어 있다. 피는 제단에 부어야 되지 자기가 먹어서는 안된다. 전부 하나님의 단에 뿌려야 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생명이 온전히 나타남은 피와 기름에 있다. 그래서 피와 기름이 백성은 먹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고 그것은 하나님만 취할수 있는 생명이다. 그것이 구약에서 말하는 방식이지 재판해서 너는 죽어야 돼 그것이 아니다. 죽음은 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 흘림 그 죽음에 의미가 있는것이지 피를 어떤 단에다 뿌리거나 바르면 그것은 새로운 생명의 교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 심판이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다.
심판이 나타나면 하나님은 거기 나타나지도 않고 백성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단지 죽음의 심판이 있고 그리고 죽음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피가 뿌려지는 것은 오히려 죽음을 이긴 새로운 생명의 관계를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에서 제사하는 근본 내용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것을 전부 법정 적으로 이해를 하니까 하나님 앞에 안 죽고는 못나간다 해 가지고 하나님 내가 피를 흘렸으니까 내 피 흘린 것을 보시고 봐 주시라고 그런 것이 아니고 새로운 피가 나타난 것은 새로운 생명이 나타난 것이다. 가령 특별히 출애굽기에 유월절 제사를 보면 집에다 피를 바르고 그 피를 바른 집안에서 먹으면 심판의 천사가 그 집을 심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거기 새로운 생명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피를 바른 제단에 나타나서 내 백성의 봉사를 받겠고 내가 거기서 너를 대면하고 말하리라 하는 말이다. 이미 거기는 심판이 끝나 있다. 왜 죽음을 통해서 심판이 끝나 있다. 죽음을 통한 피는 항상 부활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새로운 교제이기 때문에 죽음의 천사가 그 집을 손댈 수 없는 것이다. 항상 구약의제사는 유월절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반복되는 제사법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법정적으로 너는 죄 지었으니까 내앞에서 죽어라. 내가 너의 피를 보면 화가 좀 풀려서 너를 좀 봐주마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말라 그 말이다.
그래서 수송아지 머리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안수하는 행위는 제물과 자기를 일치시키는 것을 말한다. 안수함으로 일치시키지만 다른 의미로는 그것이 그들이 먹는 가나안 땅의 생명의 복이다. 그들은 그 생명의 복으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서 하나님의 상에 드리고 함께 먹고 마시는 교제는 나누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에 예배다. 그러니 신약의 예배도 성찬식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 말이다. 단 뿔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단 전체를 속하는 것이다. 뿔은 항상 권세를 표시한다. 뿔은 단을 대표하며 힘과 권세를 대표하기 때문에 그렇다.
죽인 바된 제물의 피를 뿌리거나 바르거나 쏟으는 것이 속하는 행위인 것은 새로운 생명이 거기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제물은 백성이 자기 공로로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신 예물이다. 그러니까 더구나 공로 적인 것은 아니다. 또 그들이 가지고 나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 주신 생명의 것으로 가지고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공로 적인 것은 없는 것이다.
첫 언약의 단과 제사장은 속죄 제물의 피로 속할 필요가 있었다. 새 언약의 단과 제사장과 교회는 영원히 거룩한 교제를 누린다. 영원히 거룩하게 된 하늘의 단이 있다. 하늘의 단에 담대히 나아간다. 다시 죽임을 받을 제물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담대히 나간다. 거룩하게된 단에 제물의 모든 기름을 불사르는 것은 힘이 충만한 생명을 여호와께 드리는 행위이며 이것을 목표로 단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
이제 발라졌으면 새로운 관계가 열렸다. 새로운 생명의 관계가 열렸다. 이제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수가 있다. 그런데 처음에는 속죄 제물을 드릴 수가 있다. 그러면 속죄제물은 나중에 레위기에서 드디어 해석이 될것인가? 그럴 필요가 없다. 물론 그렇게 되어 있다. 그렇게 해석은 해 오지만 레위기는 한참 뒤에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레위기는 레위기로서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고 출애굽기 다 끝난 뒤로 그 다음 레위기 이렇게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레위기에 이런 제사법이 쭉 있지만 이미 출애굽기에서 그런 제사법을 미리 말하고 있는 이유는 출애굽기는 출애굽기로서 언약 교제의 처소에 대한 문제를 말하려니가 레위기 언어를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 레위기가 없으니까 출애굽기만 봐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그러고 있으면 안된다 그 말이다. 레위기 제사 법들을 보면 더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먼저 하나님 앞에 드리는데 그냥은 안된다. 반드시 속죄 제물을 드려야 되는데 이 속죄제물은 죄를 속하는 것이 중심이다. 먼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것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속죄제물이 드려진 것이다. 그러니까 먼저 죽임을 받아야 되고 이 피가 뿌려지고 발라지는 곳 까지가 하나님께서 유월절 피를 바르면 새로운 교제의 처소가 된것처럼 하나님의 단이 새로운 교제의 처소가 되는 것이다.
여기다 제일 처음 드린 제물은 속죄 제물인데 이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교제의 처소가 되었다. 이 단은 하나님의 임재하신 자리요 하나님의 상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상에 무엇을 드리냐? 기름을 전부 불태워 드린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 그런데 이것은 죄 때문에 드린 것이라 기뻐 받는다 그런 말은 기록이 안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기쁘지 않다 그 말이 아니라 죄를 속하는데 강조 점이 있기 때문에 기뻐 받는 제물이 된다 그런 말은 없다. 그래도 그 기름을 태워 드리는 것은 다른 모든 제사법에서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제사가 되고 그렇게 설명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속죄한 제물의 고기와 가죽과 똥은 진밖에 불사른다. 옛 언약의 제사장을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는 자로 거룩하게 하는 속죄제의 제물은 먹어서는 않되고 그 모는 것을 부정한 곳에서 불살라야 했다. 새 언약의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영문밖에서 죽으심을 당하셨으나 그는 자기 백성인 교회에게 자기의 피와 살을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무슨 말이냐면 본래 진밖에 다가 불사라는 속죄 제물은 하나님의 성소에 피를 가지고 간 것은 진밖에서 불사른다. 그리고 하나님의 번제단에 피를 뿌리는 속죄제물은 실은 먹는다. 그런데 제사장의 거룩을 위해서 하나님 번제단에 피를 바른 이것은 제사장의 봉사 거처가 본래 성소 안이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는 그 제물을 진밖에다가 불살라야 한다. 그런데 전부 불사른다. 있는 것은 기름과 피만 하나님의 단에 드렸고 나머지는 전부 불사른다.
레위기를 보면 전부 불살라 드리는 번제까지라도 가죽은 제사장이 갖는 것이다. 그러면 제사장은 전부 모피 옷을 입어서 좋은가 아니다. 왜냐하면 순전히 튀김 요리만 먹으면 요새 식으로 하면 빨리 죽겠지요? 이것은 요리법으로 이해하면 안된다고 그랬다. 구약 개념을 가지고 설명을 해야 되지 구약 백성의 생명의 풍성함은 기름이다. 그것은 영양학적으로 기름은 산성화 된 것이기 때문에 나쁘다. 그런데 구약 개념으로는 기름이 생명의 풍성함이다. 기름으로 윤택하게 한 것 젖과 꿀이 흐르는 것 지금은 꿀은 고혈압 환자에게는 나쁘겠지요?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구약 개념을 항상 도입해야 되지 지금 같은 영양학 개념이나 그 시대의 요리법 개념을 가지고 들어오면 안된다.
항상 구약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명을 주시는가가 근본적인 문제로 그렇게 설명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속죄 제물은 죄를 속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 아니다. 그런데 보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죄를 깔고 있다. 그대로 둬서는 교제의 처소가 되지를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속죄제물을 허락하셔서 그들의 죄가 죄대로 남아 있지 않고 죄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단도 거룩하게 되고 백성의 대표자도 거룩하게 되서 내가 그 단에 임해서 너를 만나리라 하는 교제를 가질수 있는 거룩한 곳이 된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모세를 만나셨던 것처럼 그 단에서 만날 것이다. 그런 말이다.
제사장을 거룩하게 해서 백성을 만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것은 죄 중에 함께 하신 것인데 그 죄가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끊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속죄 제물의 제도를 주셔서 그들이 죄를 해결하시고 그들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새로운 거룩한 교제의 길을 열어주셨끼 때문에 그렇다. 그것이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속죄제물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죄에도 불구하고 자기 앞으로 나오게 허락하신 생명을 속하는 길인데 어떻게 하면 되냐면 이 제물을 기름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피를 뿌려져도 고기는 아무도 먹지 못하고 특별히 제사장을 속하도록 한 것은 아무도 먹지 못한다. 이 제물을 하나도 먹지 못하고 제물을 진밖에 버리는데 똥을 진밖에 버리라고 했다. 성경에서 진밖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거처밖이 진밖이다. 민수기에 그렇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진 안에 거하시고 진박은 부정한 곳이다. 거기는 똥을 불태우는 곳이다. 시체를 불태우는 곳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부정한 고기로 불살라라.
그러니까 이것은 속죄 제물은 보면 제사장이 먹는다. 임자는 못 먹고 제사장이 먹는다. 제사장이 먹으면 왜 먹냐면 백성의 죄를 속하는 일을 감당케 하려고 먹게 했다. 그것이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누리는 생명이다. 죄를 속하는 속죄 제물을 하나님은 기름과 피를 받으시고 제사장은 그 고기를 먹어서 그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명의 교제가 제사장에게 있다. 만일에 제사장이 이 고기를 먹을 수 없으면 그 속죄의 제사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 그도 제물을 먹지 못하니까 제사장도 제물밖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제사장을 속하는 죄가 그렇다. 이것은 실은 제사장의 거처는 성소 안을 정결케 하는 의미다. 왜냐하면 성소 안에 제사장이 봉사하는 거처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그 제물을 진밖에 불사르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아직도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해서 자기 집으로 나오게 했을 때 그 교제는 온전한 생명의 교제로 아직 나온 것은 아니다. 왜 하나님은 기름과 또 피를 받으시지만 죄를 속함을 받는 제사장은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다. 그것이 지금 문제다.
만일에 모세라도 일부를 먹을 수 있으면 그것은 큰 희망이 있는데 아무도 먹지를 못하고 진밖 부정한 곳에서 불사르라고 했다. 그러니까 아직 생명의 거처로 속함을 받기는 받았는데 그것으로부터 백성이 먹는 생명의 것이 없으니 요새 식으로 하면 수찬 정지 비슷한 것이다. 자기가 먹을 수가 없다. 그것이 구약 때 교제 방식이다. 이것이 먼저 드려야 할 제사다. 그러나 이것으로만 끝나면 안될 것이다. 이것은 죄를 속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나서 이제 하나님 앞에 번제를 지낼 수가 있다. 아 이 문제도 예수와 관계가 무엇인가? 설명을 해 버려야 마무리가 되겠지요? 그러면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제물이 되신 것은 어떤 것인가? 예수 자신도 그도 부정한 자로서 예루살렘 성밖에서 죽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죽음을 죽으신 것이고 율법의 저주를 완성한 죽음이다. 율법의 저주는 이 반복된 피흘림에다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해마다 대속죄일이 되면 속함을 받은 제물의 제물을 진밖에 불살라야 한다. 바로 그 저주를 완성하는 자로서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는 예루살렘 성밖에서 죽으셨다. 그것은 부정한 곳이다.
그런데 구약에 속죄 제물은 이렇게 죽기는 했어도 아무것도 주지를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죽으심을 통해서 죽으시기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살과 피를 주노라. 새 언약을 체결하셨다. 구약의 대표자는 주지 못한 것을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해서 주신다. 그 아들은 참으로 우리의 속죄 제물이요 또 속죄 제물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속죄제물이다. 그 자신을 부정한 자로 버림을 입었지만 그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얻도록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죄로 삼으셨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러면서도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그렇게 신약 성경이 말씀하신 이유다. 화목제물은 먹는 것이 특징이다.
또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은 그냥 유형적으로 이것은 구약의 속죄 제물 이것은 화목 제물 그렇게 일일이 하나하나 줄긋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 모든 것을 함께 채우는 것이지 이 부분은 속죄 제물 이 부분은 화목제물 이런식으로 줄긋기를 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신령한 제사장이요 신령한 속죄제물이요 그는 신령한 우리의 양식이시다. 그분안에서 모든 것이 성취되기 때문에 그냥 예수의 무엇을 따로따로 나누어 가지고 이 부분 까지는 제사장 이 부분까지는 언약 체결 자 이 부분 까지는 뭐 그런식으로 분리해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속죄제물은 항상 화목제물과 항상 연결이 되어 있다. 그 문제를 위임식 제사에서 볼수가 있을 것이다.
15-18 제사장이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가 있다. 이 번제는 18절에 보니까 향기로운 냄새며 그렇게 되어 있다.
번제는 제물을 씻어 그 전체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단에 불살라 드리는 제사이다. 이것을 가지고 여기 보니까 수양의 각을 뜨고 장부와 다리는 씻어 각 뜬 고기와 그 머리와 함께 두고 그렇게 되어 있다. 이것은 각을 뜨고 각을 뜬것을 씻으라는 말은 없다. 또 다리는 씻으라고 했다. 이런 말은 요리법이라 이렇게 나누고 씻어서 깨끗하게 하려고 자르는 것이다. 그런 것이지 발도 씻고 손도 씻고 폐도 씻고 심장도 씻고 그래 가지고 너의 전부를 깨끗하게 해라. 너는 어느 구석에 똥이 있느뇨? 이렇게 설교하라는 그런 말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성경을 적용하기를 환경을 같이 맞춘다. 구약과 우리를 같은 상태로 맞추고 구약에서 이렇게 치료했으니 우리도 이렇게 치료한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예수는 우리의 구주가 안되고 우리는 구약 백성이다.
가령 예수님이 시험받은 기사도 예수님이 시험을 받았으니 너희에게도 이런 시험이 똑 같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심해라.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잘 외워서 이겼으니까 너희들도 잘 외웠다가 잘 써먹어라. 그러면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에게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이렇게 설교하면 여러분 마음에는 잘 맞아 들어간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계속 시험이 찾아오는 것 같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하면 나도 이길 것 같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고 그렇게 환경을 똑 같이 맞춰 가지고 그 환경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런 해결사 노릇을 하신 것이다. 이렇게 줄긋기를 하면 안되는 것이다 그 말이다.
그러면 예수는 우리의 구주가 아니고 우리는 여전히 또 싸워야 한다. 만일에 우리에게 그런 싸움이 반복되면 우리는 구원받은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가 구주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그 시험을 받았지 경건한 개인으로 시험을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자기 백성의 대표로 이 일을 한 것이지 단순히 우리보고 한 모델을 보고 싸우라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이다. 비디오 게임이 아니라 그 말이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승리자가 되셨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기는 새 백성으로 지어졌다는 승리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이지 너희들에게도 동일한 시험이 있으니 눈 잘 뜨고 있다고 예수님이 쓰신 방법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 너희들도 이겨라 그런 말이 아니라 그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러니까 구약 본문도 그래도 우리에게 연결시켜 가지고 네 발로 어디 다녔냐. 발도 씻고 또 모세보고 발에 신을 벗으라고 했지않아요? 그 발로 어디 어디 다녔냐?
전도사 노릇하다가 배고프니까 예라 그 신 신고 어디 가면 또 돈벌겠지요? 그렇게 하니까 깡통을 차고 다니고 두 마음을 품으니까 목회를 안한 것이다. 그러니까 깡통도 밟아 버리고 신도 벗어버리고 그냥 제대로 공부를 해라 이런 식으로 하면 전도사 마음에 좀 적용이 되지요? 배가 고프니까 생각이 왔다갔다한다. 졸업하려면 아직 멀었고 그러니까 일반 신약 교가 일반 대학처럼 6년 안에 졸업해라 그런 것도 없거든. 그러니까 이렇게 좀 해볼까 또 피아노 친 마누라나 얻어 볼까 이런 저런 궁리를 하는 것이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전도사들한테는 잘 적용이 된 듯하다. 아 발에 신을 벗어야 되겠구나. 보니까 하나님이 내 심장을 청소하면 더러운 데가 깨나 있거든. 여기 보니까 각을 뜨고 장부를 쪼개고 전부 깨끗이 씻어 가지고 물로 잘 헹구어야 되겠지. 똥 묻은 것 하나님 앞에 드리면 안되잖아요? 그렇게 깨끗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것이다. 어떻게 우리를 드릴 것인가? 이렇게 자꾸 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직접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요구하지 우리 개인으로 직접 대면해서 요구하지를 않는다. 이 제물을 그런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는 똥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깨끗하라 그런 말이다.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냥 제사 드리는 법이다. 하나님 앞에 흠 없는 것을 드려야 할뿐만 아니라 똥 묻을 것을 드리면 안되고 깨끗하게 드려야 된다. 그렇게 해서 말하자면 우리한테 청결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 다음에 전부를 불살라 드리면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제물이 된다. 여기 보니까 임자가 먹을 것이 없지요? 이처럼 처음에는 전체를 진밖에 불살라라고 했는데 그 다음에 드리는 제물은 전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이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개인에게 도덕적으로 깨끗하라 그런 말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는 생명에 대한 문제다. 이 모든 예물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서 주신 제물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복으로 준 것이다. 그것을 전체로 하나님 앞에 태워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제물에 안수를 했다. 제물을 드림으로 자기 생명을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단을 깨끗게 하면 이 제물 안에서 하나님 앞에 전체를 헌신하는 그런 봉사의 길을 허락을 하신 것이다.
번제는 제물을 씻어서 그렇게 전체로 하나님의 단에 향기로운 냄새로 불살라 드린 제사이다. 여호와께서 옛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대표로 아론과 그 아들들을 속죄의 제물로 거룩하게 하시고 여호와께 전 생명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도록 복을 주셨다. 이것은 영해 해서 전 생명이 아니라 그들의 먹고 마심을 전체를 태워 드리니까 전 생명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옛 언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생명의 봉사는 죽이고 씻기고 불로 사르는 과정이 필요한 가나안의 생명이었다. 가나안 땅에 주신 풍성한 생명을 죽여야 되고 물로 씻고 불로 태워 드리면 하나님 앞에 드디어 향내가 되는 것이다. 죽임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없고 불에 태워드리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요리법이 아니다. 여러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항상 물과 불로 세례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물과 불을 통과하면 완전히 정결케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님의 세례는 마지막 불 세례로 마태복음은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는 것은 다 죽이고 씻기고 불로 사르는 과정이 필요한 그런 생명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 언약의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신령한 제사장이다.
그 안에서 물과 불의 정결함은 끝났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렇다. 그 분 안에서 죄의 세력을 끝났다. 예수님이 죽고 난 뒤로 목욕했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은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다. 그는 흠없는 자기 몸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드렸고 하나님은 그 아들의 죽으심 안에서 영원한 죄를 제거하셨다. 이제는 그분이 나아가신 보좌가 곧 영원한 생명의 교제의 거처여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과 함께 보좌 우편에 앉았다. 왜 그분이 나아가는 자리가 곧 교회가 나아가는 자리다. 구약 때 제물의 피를 뿌리는 곳이 백성이 나아가는 것처럼 우리의 새로운 생명이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아가셨는데 그분은 죽음을 맛보신 분이요 그리고 그가 성령으로 보좌 우편에 오르셨다.
거기다 자기 백성이 나아가는 자리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에 계시는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봉사하는 이 신령한 예배는 이제는 물고 씻고 물로 태우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 완전한 예배의 거처가 된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신령한 제사장으로 거기 계신다. 그분이 새 언약의 중보자로 거기 계시고 그가 신령한 제물로 거기 계신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영원히 죄는 끝났다. 휘장의 가리움은 끝났고 땅의 성소 제도는 끝났다. 이제 하늘이 성소가 열렸다. 이제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 교회가 나간다. 예수님의 봉사로 교회가 봉사한다. 왜 주님의 몸으로 이제는 성령으로 봉사하는 새 시대가 열렸다. 진짜 교회에서 온전한 봉사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구약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면 분명히 구약 당시의 의미를 본 것이다. 어떻게 가나안 땅의 생명이 성화 될 것이고 죽음을 통해서 새롭게 될 것인지 어떻게 하나님의 거처가 피 뿌림으로 새롭게 될것인지 그 당시 구체적인 의미를 말하고 여기서만 머물러서는 이것은 구원의 책이 아니다. 휘장밖에 책은 되어서 하늘 성소의 책은 안되는 것이다. 구약 백성의 책도 안된다. 신약 백성의 책은 더욱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아들안에서 완성시키셨다. 이 아들은 모세 같은 중보자가 아니라 우리에게 모든 생명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중보자시고 그분이 언약을 체결하신 언약 당사자이고 그분이 친히 자기 백성에게 속죄제물이 되셔서 자기 자신을 주시고 번제로 자기 자신을 주셔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이제는 죄는 영원히 정결케 되고 하늘이 성소가 정결케 되고 그분 안에서 영으로 봉사하는 새로운 인류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그것이 교회가 그런 말씀이다.
그 문제를 구약에서는 이렇게 은혜의 제도를 주신 것이다. 이것은 공로 적으로 나오라 그 말이거나 재판 받고 나오라 그런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아들을 통해서 죄를 제거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의 생명의 교제로 함께 하시는 은혜의 일들을 모세 제도 안에서 집행시켰던 것이다. 여러분이 나아가는 자리가 그곳이다. 우리는 지금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라 그렇게 되어 있다. 여러분의 도덕성이 먼저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새롭게 될 때만 도덕적인 관계가 새롭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때문에 그의 지체로 그의 영으로 온 몸을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거기서 도덕적인 문제는 나타나는 것이다. 도덕적인 문제로 직접 접근하면 안된다. 생명의 새로운 관계로 접근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구약 언어 개념을 가지지 않고 신약을 해석하면 그것은 성경 해석이 안된다. 모든 신약의 의미들은 구약의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서 기본적인 의미와 사상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다. 또 구약 자체에서도 하나님의 모든 단어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에서 언어의 의미들을 가지는 것이다. 단어 풀이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아론만 제사장이 아니라 대제사장 아론 안에서 그 아들들이 함께 거룩하게 된 것처럼 우리들도 신령한 제사장으로 새롭게 지으심을 입었다. 이제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낼 수가 있다. 구약 때는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낼 수가 없다. 어린 아이를 어른처럼 행동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어른으로 성장했을 때 어른으로 행동하라는 요구가 주어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그 복이 주어진 것이다. 이제 위임식을 드리는 제사에서는 더 잘 나타날 것이다.
항상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먹고 마실 것을 주시면 그것과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종교는 사변적인 것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먹고 마시는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먹는 것이 아니면 생명이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것이 이원화 되었냐면 종교 개혁 때부터 그렇게 된 것 같다. 천주교 신부들이 밀가루 주고 포도주 주면서 이것이 예수님 진짜 살이라고 하니까 보니까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기념 설이다. 영적 임재설이다. 많은 이야기를 한다. 왜냐하면 구체적으로 먹고 마심하고 분리시키려는 것이다. 왜 천주교가 일치 시켜 버리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런 것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천주교처럼 분리 안 시킨 것이 아니라 구약 언어 개념 때문에 분리를 안시킨 것이다. 구체적으로 가나안 땅의 먹고 마시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질이고 생명의 질이다.
그런데 지금은 떡과 포도주를 주면서 이것이 예수님 살이고 피냐?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 예수님 말씀이 네 살과 내 피다 하는 구약 언어 개념을 가지고 온다. 무엇이 우리가 먹고 마시는 구체적인 떡과 포도주가 그것을 소위 영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생명으로 주님께서 와 계신 것이다. 그것은 떡과 포도주로 해석하라 그 말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주어졌는가 하는 구약 언어 개념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먹고 마시는 생명이지 그것을 소위 영해 시키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의 구체적 삶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예수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즉 완전한 생명의 교제에 참여하는 생명으로 먹어라 그것이 교회가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의 삶이다. 그것이 소위 영적 임재다. 영적 임재는 소위 물건과 반대된 정신 그런 것이 아니라 보좌에 취임하신 주님 안에서 먹고 마시는 영적 임재다. 땅에서 모세 제도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육적 임재면 보좌에 계신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그런 의미로 영적 의미지 물건과 반대된 정신 그런 의미로 영이라는 말은 성경은 모른다.
그러니까 항상 모세 제도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만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새로운 교제가 무엇인지 모세 언어로 설명되는 것이다. 그것은 물건과 정신을 이원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교회에서 떡과 포도주에 참여한 것을 여러분 가정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먹을 때만 부정한 자로 먹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자로 먹는 것이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대면해서 사는 것이다.
단지 교회에서 그 예식을 행하는 것은 교회가 새로운 가족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교회에서 그 예식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의 식탁에서까지라도 그런 의미를 가지고 먹어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 출애굽기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집을 거룩하게 한다. 어떻게 하냐면 제사장의 옷을 입히는데 성소의 아름다움으로 옷 입힌다. 제사장은 누군가? 성소의 영광을 덧입은 자다. 그렇게 백성의 대표자가 존귀하게 된다. 앞으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한 것처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옷 입혀 줄 것이다. 그 대표자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처는 피로 깨끗게 해야 한다. 단과 그리고 거기 나타날 제사장을 거룩하게 해야한다. 단은 하나님이 임할 자리다. 그 피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만나신다. 왜냐하면 피가 새로운 관계 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그 피는 그냥 예수를 지시한다고 해석하면 안되고 가나안 땅에 주신 생명의 풍성함이 그 피다. 그 생명의 관계를 새롭게 해 주실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거기서 만나신다. 그런 관계로 함께 계신다. 그것이 하나님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으로 함께 하자 한 시내 산 강림이고 성막을 짓고 있는 은혜다. 그것이 출애굽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데도 예수님은 신령한 성소요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고 그분은 새 언약의 중보자요 언약 체결 자여서 내가 새 언약의 피를 주노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고 그는 자기 백성의 속죄제물이시요 화목 제물이시오 그가 자기 백성의 신령한 포도주요 신령한 떡이다. 예수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앞에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으로 거룩하게 되었다.
구약은 이렇게 안되고 백성의 대표자만 이렇게 하였다. 우리는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고 자기 전 생명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 구약과 신약은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분명히 통일되어 있으면서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제가 구약을 읽어 놓고 눈을 지긋이 감고 예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을 읽고 분명히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지오? 또 구약의 구체적인 그들의 먹고 마시는 삶을 그 언약 제도로 분명히 해석을 하지요? 이 관계를 예수님께서 완성하셨다는 말이다. 구약 의미를 빼 버리고 예수님께서로 뛰어 넘어 버리면 절대로 안된다. 구약 그 당시의 은혜를 이야기 해 줘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그들 중에 교제하시는가? 어떻게 생명을 새롭게 하시고 성화 시키는가? 그 관계를 예수님께서 온전케하셨다. 그렇게 했을 때 구약은 옛 본문으로 휘장을 가리운 그런 본문이 아니라 이제는 하늘의 성소로 휘장이 영원히 열려졌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오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을 읽는 방식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그 당시의 생명으로 해석을 하지 않고 법정 적으로 영해를 시켜버리니까 죄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 죽어서 갚아야되고 하나님 나를 보지 마시고 이 피를 보시고 봐주십시오. 이런식으로 법정적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언어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위임식의 수양을 드리는데서 제사장의 위임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 위임식의 수양의 피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의 엄지와 오른발의 엄지에 바르고, 그 피를 단 주위에 뿌리고, 단 위의 피와 관유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려서 거룩하게 한다.
오른 쪽은 대표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위임식의 제물의 피를 오른 쪽 손과 발의 엄지에 바르고 오른 쪽 귀에 바른 것은 온 몸에 바른 것과 같다. 또한 제단에 뿌린 피와 관유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리는 것은 온 몸과 옷을 피와 관유로 거룩하게 한 것이다. 위임식 수양의 피는 아론과 그 아들들과 단에 바라지고 뿌려져서 서로를 한 피로 연합시켰다. 마치 시내 산에서 언약을 체결할 때에 제물의 피의 반은 백성에게 뿌려지고 나머지는 단에 뿌려진 것과 같다.
위임식 수양의 모든 기름과 우편 뒷다리와, 무교병 하나와 기름 바른 과자 하나와 전병 하나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손에 들려 여호와께 요제를 드린다. 요제물에 번제물을 더하여 여호와께 불살라 화제로 드린다. 이것은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화제이다.
이전의 제사는 모세가 주관자요 아론과 그 아들들은 제물에 안수함으로 제사에 참여하였다. 이제 위임식 수양의 제사에서는 모세가 준비하고 주관하지만 아론과 그 아들들이 위임식 수양의 모든 기름과 우편 뒷다리와 함께 기름 섞은 무교병을 여호와께 요제로 드렸다. 이 요제는 다른 번제물을 더하여 모세가 단에서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로 여호와께 화제로 드렸다. 아론과 그 아들들의 요제는 번제와 함께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었다. 드리는 방식과 제물을 먹는 것을 보면 위임식의 제사는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이다. 화목제는 함께 먹는 친교가 제사의 중심이다.
26-28 모세와 아론과 그 아들들의 분깃
모세가 위임식 수양의 가슴을 취하여 여호와께 요제로 드리고 그것은 모세의 분깃이 되었다. 아론과 그 아들의 위임식 제사에서 언약 체결의 중보자인 모세가 이후 아론과 그 아들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장인 것처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제사장이다. 위임식의 요제 곧 가슴과 넓적다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돌릴 영원한 분깃이요 거제물로서 거룩하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여호와께 드리는 거제물이다. 이러한 분깃을 취하는 자는 가장 귀하고 힘있는 부분을 여호와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대리자로서 백성에게서 또한 백성의 대표로서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29-30 아론의 뒤를 잇는 아들들의 위임
아론의 거룩한 옷은 아론 후에는 그 아들들에게 돌려서 그들이 그것을 입고 기름 부음을 받아 제사장으로 위임을 받게 한다. 아론을 이어 제사장이 되는 아들은 성소에서 섬길 때 칠일 동안 그 옷을 입는다.
이것은 아론 계통의 제사장 직분이 영원하며 온전한 것을 말한다. 민수기 20:23에서 아론이 호르산에 올라가 죽을 때에 아론을 이을 엘르아살도 함께 올라갔고 아론의 옷을 입고 내려왔다. 백성의 눈에 아론의 죽음은 가려졌고 영광스럽게 되었다.
31-34 아론과 그 아들들이 위임식의 제물을 먹음
위임식의 수양은 회막문에서 아론과 그 아들들이 위임식 광주리의 무교병과 함께 먹는다. 속죄물 곧 그들을 위임하며 거룩하게 하는데 쓰인 것을 그들이 먹되 타인은 먹지 못한다. 그것은 아침까지 남았으면 불살라야 한다. 이는 그것이 위임식의 식사로서 거룩하기 때문이다. 가슴과 뒷다리를 분깃으로 취하는 문맥에서는 위임식 수양을 화목제라 칭하였고, 거룩한 곳에서 먹는 문맥에서는 그것을 속죄물이라 칭하였다. 제물에서 분깃을 취하고 거룩한 곳에서 먹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거룩한 친교와 생명을 의미한다.
35-37 칠일 동안 위임식을 행하여 단을 거룩하게 함
위임식은 칠일 동안 행한다. 매일 수송아지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고, 또 단을 속죄하여 정결케 하고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한다. 칠일 동안 단을 속죄하여 거룩하게 한다. 그리하면 지극히 거룩한 단이 되어 단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칠일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완성 곧 안식을 의미한다. 칠일 동안의 속죄로 단이 지극히 거룩하게 되어 거기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이 모든 일을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생명의 교제로 온전케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체결자이시요 대제사장이 시요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제물이시다.
출29장은 제사장의 위임식인데 출애굽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중심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 중에 거하시는가? 하는 언약 적인 관계를 말하려는데 모든 특징이 있다. 그러니까 똑 같은 제사 법이 있고 똑 같은 성소 제도가 있어도 레위기와 출애굽기의 강조 점이 다르다 그 말이다. 출애굽기는 어떻게 그들 중에 거하셔서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봉사를 받으시는가? 하는 언약의 나라 설정 문제고 레위기는 어떻게 거기서 생명의 교제를 나누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가? 하는 것이 레위기의 강조 점이다. 그러니까 비슷해도 차이가 나는 것은 그런 것이다.
29장의 위임식에서는 제물을 가져오고 그리고 제사장을 물로 씻고 옷을 입히고 관유로 부어서 거룩하게 해라. 이처럼 예물과 제사장 의복을 입혀서 거룩하게 하는 일과 그리고 10절 이하에서는 구체적으로 그 예물로 무엇을 하는가 하는 문제였는데 첫 째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한 속죄제를 지내고 그리고 두 번째는 아론과 그 아들들이 번제를 지내고 그것이 지난 시간에 배웠던 것이다.
오늘 19절 이하를 배우면 이 앞에 것의 의미도 더 잘 드러날 것이다. 먼저 주보를 읽으면서 설명을 하겠다.
19-25 위임식의 수양
위임식의 수양을 드리는데서 제사장의 위임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 위임식의 수양의 피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의 엄지와 오른발의 엄지에 바르고, 그 피를 단 주위에 뿌리고, 단 위의 피와 관유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려서 거룩하게 한다. 그것이 위임식 제사 드리는 한 순서다.
오른 쪽은 대표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위임식의 제물의 피를 오른 쪽 손과 발의 엄지에 바르고 오른 쪽 귀에 바른 것은 온 몸에 바른 것과 같다. 또한 제단에 뿌린 피와 관유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리는 것은 온 몸과 옷을 피와 관유로 거룩하게 한 것이다. 위임식 수양의 피는 아론과 그 아들들과 단에 발라지고 뿌려져서 서로를 한 피로 연합시켰다. 마치 시내 산에서 언약을 체결할 때에 제물의 피의 반은 백성에게 뿌려지고 나머지는 단에 뿌려진 것과 같다.
그러니까 여기 보면 위임식 제사는 어떻게 지내는가? 첫째 그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오른 쪽 귀 또 오른 쪽 엄지손가락 오른 쪽 엄지발가락에 바른다. 그리고 그 피를 단에 뿌리고 단에 뿌린 피와 관유를 아론의 옷에 뿌리면 거룩하게 된 것이다 그 말이다. 이처럼 피를 바른다 그 말은 피와 연합시킨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어디에 피가 나아가면 그것은 거룩한 생명이 나아가는 것이어서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그것이 유월절 제사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 있다. 피를 바른 집은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의 거처가 되어서 그 피가 그들의 생명이고 그 피가 그들의 양식이어서 유월절 양고기를 먹을 수가 있었다. 거기는 심판의 천사가 심판하지 아니했다.
그런 관계가 여러 모양으로 확대되어서 반복되는 것이 이 모세 제도의 제사 법이다. 그래서 피를 신체의 대표적인 곳에 바른 것은 전체에 바른것과 같고 몸 전체를 피로 거룩하게 한 것이다 그 말이다. 성경에 보면 오른 뺨을 치면 외빰도 돌려대고 하는 것은 마태복음 이야기고 이 쪽 뺨을 치면 저 쪽 뺨도 돌려대도 하는것는 누가복음 이야기다. 그러니까 오른 뺨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특징적인 언어다. 왜 오른 쪽은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이 쪽 뺨을 치면 저 쪽 뺨도 대라 그 말이지 오른 쪽 왼 쪽 그런말은 안한다. 또 오른 눈이 범죄하면 네 오른 눈을 빼고 그리고 천당가는 것이 좋다. 그러면 왼 쪽 눈은 범죄를 안하고 왼 쪽 눈을 빼면 상관이 없냐? 오른 쪽 것이 대표 기관이기 때문에 그렇다. 마태복음의 특징이 그렇다. 그런데 요새는 역사 실증주의적 해석법 해가지고 그 당시 오른 뺨을 친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한참 문학작품을 연구를 해 보는 것이다. 아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오른 뺨을 친 것이 가장 수치스럽게 뺨을 치는 것이다.
살짝 때려도 기분이 몹시 나쁘다. 이것을 예수님이 하고 있는 말이구나 이렇게 도입하지 말라 그 말이다. 구약 언어 개념을 가지고 해석을 해야 되지 그 시대의 오른 뺨을 치는 것이 무엇인가? 해 봤자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옛 언약의 완성이지 그 시대의 어떤 사상을 고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오른 뺨 하는 것은 구약에 보니까 전부 오른 쪽은 대표 기관을 가르친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은 오른 쪽은 양이고 왼 쪽은 염소다. 전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언어 개념이다. 그래서 오른 귀 오른 손 엄지손가락 오른 쪽 엄지발가락에 바른 것은 온 몸을 피로 바르는것과 같다. 제단 뿔에 바른 것은 그 뿔이 제단을 대표하는 권세다. 온 제단에 바르는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위임식 이 양의 피가 제단과 아론의 몸과 옷에 전체에 뿌려진다. 그러니까 이 위임식 제사 안에서 제단과 아론이 전체로 한 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위임식 제사에서 이 제사장 제도를 위임하는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다 그 말이다.
위임식 수양의 모든 기름과 우편 뒷다리와, 무교병 하나와 기름 바른 과자 하나와 전병 하나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손에 들려 여호와께 요제를 드린다. 요제는 흔들어 드리는 제사인데 가슴을 그렇게 흔들어 드린다. 그런데 요제와 거지는 거의 같이 언급되니까 구별이 안될 때도 있다. 요제물에 번제물을 더하여 여호와께 불살라 화제로 드린다. 이것은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화제이다. 이것이 그 다음에부터는 먹는 것이다. 앞에 것은 단에 피를 어떻게 드릴것인가? 단과 아론의지체에 발라라 하는 것은 첫 단계로 그 다음에는 먹는것인데 하나님의 몫이 있어야 겠지요? 그래서 모든 기름 그리고 광주리에 있는 기름섞은 과자 그 하나씩 그렇게 해가지고 우편 뒷 다리 그것을 하나님 앞에 흔들어서 요제물로 드리고 또 이 제물은 불살라 드린다. 그런데 요제는 번제와 함께 드리라고 되어 있고 레위기를 보면 항상 번제 기름위에다가 화목제물을 태우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든 향기로운 제물로 드린다 하는 것은 번제적인 성격이고 또 전체로 태워 드린다 하는 것도 번제적인 성격인데 다 태워 드리면 임자가 먹을 것이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께는 기름과 우편 뒷다리를 그리고 기름과자를 드리는 것이다.
이전의 제사는 모세가 주관자요 아론과 그 아들들은 제물에 안수함으로 제사에 참여하였다. 이제 위임식 수양의 제사에서는 모세가 준비하고 주관하지만 아론과 그 아들들이 위임식 수양의 모든 기름과 우편 뒷다리와 함께 기름 섞은 무교병을 여호와께 요제로 드렸다. 레위기를 보면 다른 제사는 임자는 안수하고 죽이기만 하고 각을 떠서 씻고 피를 뿌린 것은 전부 제사장의 일이다. 그런데 화목제물도 레위기에서는 임자가 하나님 앞에 와서 흔들지 않고 제사장이 흔든다. 그런데 백성의 대표자로 제사장을 위임시키는 제사에서는 아론과 그 아들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고 그것을 주관하는 사람은 모세다. 그러니까 모세가 예물도 주고 보니까 모세가 이 모든 제사들을 집행하고 아론과 그 아들들은 안수하는 것 뿐인데 여기 위임식 제사에서는 아론과 그 아들들이 요제물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와서 흔들어 드려야된다. 그러면 다음에 보면 백성들은 화목제물을 드릴 때 흔들지 못하고 제사장이 흔드는데 여기 보니까 아론은 와서 흔든다.
그러니까 아론은 일반 백성들과 다른 위치에 있고 또 모세가 아무리 중보자여도 아론이 백성보다는 올라서 있다. 그래도 어떻든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에 직접 참여하는 의미로는 위임식 제사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이제 아론과 그 아들들이 위임식 수양의 모든 기름과 우편 뒷다리와 기름 섞은 과자를 가져와서 여호와께 드린다.
이 요제는 다른 번제물을 더하여 모세가 단에서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로 여호와께 화제로 드렸다. 아론과 그 아들들의 요제는 번제와 함께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었다. 드리는 방식과 제물을 먹는 것을 보면 위임식의 제사는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이다. 화목제는 함께 먹는 친교가 제사의 중심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제단에는 양쪽피가 연결되어 버렸다. 그전에는 피를 가져다가 제단 뿔에만 바르면 되는데 여기 보니까 제단 뿔에만 바른 것이 아니라 아론의 몸에도 발라 버린다. 제단에 뿌린 것만 아니라 아론의 몸에도 뿌린다. 이렇게 해서 완전히 피로 연결을 시키고 먹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기름과 뒷다리고 그리고 이 제사를 지낼 때 기름과 뒷다리는 누가 가지고 오냐면 아론과 그 아들들이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흔들어 드린다.
그러니까 이것은 레위기의 감사제로 드리는 화목 제물을 드리는 방식이다. 이렇게 드리고 나면 하나님의 몫은 기름과 우편 뒷다리였다. 그러면 여기서 보면 모세의 몫도 있고 아론의 몫도 있다.
26-28 모세와 아론과 그 아들들의 분깃
모세가 위임식 수양의 가슴을 취하여 여호와께 요제로 드리고 그것은 모세의 분깃이 되었다. 아론과 그 아들의 위임식 제사에서 누가 제사장 역할을 하냐 언약 체결의 중보자인 모세가 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이 일반 백성처럼 안수하고 그 정도밖에 아니었다. 그런데 위임식 제사에서는 아론과 그 아들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장인 것처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제사장이다. 무슨 말이냐면 지금 아론과 그 아들들은 백성처럼 되어 있고 모세가 제사장처럼 되어 있다. 그러면 이 관계는 어떤 관계냐? 나중에는 어떻게 되는가? 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과 그 아들들이 백성에 대해서 모세와 같은 직분을 하고 또 백성들은 아론과 같은 위치에 있다. 그러니까 이 언약 체결은 아론이 대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체결하는 중보자가 따로 있다. 모세다. 모세 아론 백성 이런 단계다.
새 언약의 체결에는 모세는 없다. 물론 아론도 없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과 언약 체결을 하시는데 거기 있으면 자기 백성을 대표하는 열두 제자가 있지 토대로서 열둘이 있지 그 중에 장자가 따로 있고 그런 것은 없다. 그것이 신약에서 언약 체결의 특징이다. 제가 지금 그 말을 하고자 한 것인데 여러분이 제가 한 의미로 쭉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그런데 이제까지 제사에서 여러분이 보면 모세의 몫이라는 것이 없다. 모세가 아무리 제사를 집행해도 모세의 몫은 없는 것인데 여기는 모세의 몫이 있다. 하나님 앞에 요제로 드리면 하나님이 그것을 잡수시니까 하나님의 몫이 있고 그것을 중계하는 모세의 몫도 있고 그러면 이 위임식은 한 번 행하는 것이고 다음에는 모세가 행하지 않는다. 그러면 다음에 위임식은 누가 하느냐? 그런 위임식은 없고 이제 아론 그 후에는 아론의 아들이 여기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랬을 때 그 다음 모세의 몫은 누가 먹을 까요? 없다. 나중에는 가슴과 등 뒷다리는 누가 먹냐면 제사장 가문이 백성을 대표해서 먹는다. 그러니까 아론이 드리는 이 예물은 말하자면 온 백성을 대표해서 드리는 예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 위임식 제사에서만 보니까 피도 양쪽에 발라진 것이 아니라 제물도 보니까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의 몫도 있고 제사장 몫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아직도 먹지 못할 것이 있다. 타인은 먹지 못하고 제사장만 먹는다. 그것이 구약에서 가지고 있는 간격들이다. 지금은 언약 백성이 누구나 먹을 수 있다. 아이들은 저리 가라 했다가 우리들은 바꿨다. 누구나 먹을 수 있다. 그런데 구약 때는 보니까 아론과 그 가문만 먹을 수 있고 타인은 먹지 못할지니라 이렇게 되어 있다. 이것이 위임식 제사의 특징이다.
위임식 제사를 보니까 한 피로 연합이 되어 있고 한 상에서 먹는다. 그것이 위임식 제사다. 그것도 가슴과 든 뒷다리는 소가 오른 다리를 드냐 왼 다리는 드냐 하는 그런 축산법으로 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들어서 드리는 제사라 그 말이다. 이것은 항상 오른 다리다. 오른 쪽이 항상 대표 기관이기 때문에 오른 다리를 항상 하나님 앞에 들어서 드리고 가슴은 흔들어서 드린다. 흔들어서 드리면 요제 들어서 드리면 거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온 땅에 계신 하나님 또 높이 계신 하나님 이런 식으로 흔들어 드리고 또 들어서 드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든 다리다. 그런데 나도 어려서 소를 먹여 봐서 소다리 사이로 고삐가 들어가면 발들어 하거든. 그래서 이것이 오른 다리를 든댜냐 왼 다리를 든댜냐 그러면 오른 다리를 들기가 쉽다. 왜냐하면 소 고삐는 오른 쪽에 달렸거든. 그래야 탁탁 때리기 좋으니까 고삐를 뺄려면 오른 다리를 들겠는데 그러니까 자기 경험으로 읽어 들어가면 안된다 그 말이다. 이것은 제사 법에서 든 다리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오른 다리 다른 데서는 든 다리 했을 때 든다 그 말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들어서 드리는 제사 예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는 것이 병이라고 소좀 뜯겨 봐서 든 다리가 오른 다리 하는 것이다. 얼마큼 무식한가 모르겠다. 하여튼 예수 처음 믿고 개 고기 안 먹었다. 목매어 죽인 것은 먹지 말지니라. 아 이것은 개구나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닭을 잡을 때로 목을 비틀어 죽이지 않고 칼로 잘라 죽였다.
그전에 기도원에 가면 선배들이 염소를 낸다. 염소 입에다 소금을 넣어서 죽이면 냄새가 안 난다면서요. 그런데 항상 칼로 찔러 잡는다. 피 다 뺀 것이 중요한 관심사다. 왜냐하면 피를 먹지 말라고 했으니까 피를 먹으면 큰일이다. 그러니까 신약 성경을 배워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행15장에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멀리 할지니라. 그러니까 아하 이것은 신약 성경에 있으니까 구약하고는 다르구나. 해 가지고 도축 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사슴피는 좋다고 둘러 마시네. 그러니까 성경을 모르면 그렇게 어리석게 되어 버린다. 하여튼 대학교 나온 사람이 물건보고 절하면 종교적인 영역이 얼마나 어둠의 권세가 큰지를 알아야 한다. 제일 어두운 것이 기독교 영역이다. 여기는 진짜 마귀가 어둡게 하는 곳이다. 불량품이 제일 많은데 가 기독교다. 개혁 교회다. 천주교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종교적으로 잘못되면 그렇게 어두운 것이다. 그것은 대학을 천개 나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예수 믿고는 개고기는 안 먹었다. 그런데 그것도 눈치 봐서 먹어야 한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먹는 사람인지 안 먹는 사람인지 보고 먹어야지 먹지 못한 사람 앞에서 먹으면 야 저 목사 개목사구나 하고 그 다음부터 나를 먹기를 탐하는 자로 알고 내 말을 안들을 것이 아닙니까? 어려운 조항이다.
그러니까 위임식 제사에서는 피도 양쪽에 발라졌고 또 꼼꼼히 발라졌다. 대표 기관에 전부 발라 버렸다. 또 양쪽에만 바른 정도가 아니다. 뿌리면 뿌린 피와 관유를 또 아론의 몸에 뿌려 버린다. 그러니까 양쪽에 거듭 발라 버린 식이 되어서 피로도 연합되어 있고 그 먹는 방식도 연합되어 있는데 모세가 지금까지 먹는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여기서는 모세의 몫도 있고 아론의 몫도 있다. 나중에 위임식 할 때는 모세의 몫은 없고 그것은 항상 제사장의 몫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제사장이 먹는 흔든 가슴과 오른 쪽 다리는 이스라엘 백성 대대로 그것은 아론 가문에 주어야 할 몫이다. 그가 제사장 직분을 맡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제사장에게 제일 소중한 것을 주신다. 하나님이 제일 기름진 것을 잡수신다. 그리고 제사장에게는 제일로 맛있는 갈비에다가 오른 쪽 다리를 준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여기 위임식에서는 아론 가문만 먹는다.
다른 화목제물은 임자도 먹는다. 화목 제물 드릴 때 가슴과 뒷다리는 제사장이 먹고 나머지는 임자가 먹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임자가 아론과 그 아들들이다. 자기 가문만 먹고 나머지 사람들은 못 먹는다. 그것이 구약 위임식의 한계점이다.
예수님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로 하늘로 올라갔을 때 그는 언약 체결 자가 되어서 내가 새 언약을 체결하노라. 이것이 새 언약의 피니라. 또 너희를 위해서 찢긴 새 양식이니라. 하면서 열두 제자에게 다 주었다. 그 열둘에는 가짜도 들어가 있다. 열둘에 관심이 있지 유다가 가까냐 진짜냐는 상관이 없는 문제다. 열둘에 관계된 문제다. 그래서 다 먹었다. 그것이 신 구약의 차이점들이다.
위임식의 요제 곧 가슴과 넓적다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돌릴 영원한 분깃이요 거제물로서 거룩하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여호와께 드리는 거제물이다. 이러한 분깃을 취하는 자는 가장 귀하고 힘있는 부분을 여호와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대리자로서 백성에게서 또한 백성의 대표로서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여러분이 문장 형식을 잘 보라 그 말이다. 이 본문은 분명히 모세가 예비하고 하나님이 주신다고 되어 있는데 그 뒤에 바로 이어서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줄 것이니라. 이렇게 맞추고 있다. 그 앞에는 분명히 하나님이 이렇게 이렇게 모세한테 말씀하신다. 이렇게 예물을 예비해서 이렇게 이렇게 주어라고 하셨다. 그 다음에 바로 이어서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줄 것이니라 그렇게 해 놨다. 왜 아론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매로 있다. 그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백성을 대할 뿐만 아니라 그리고 백성의 대표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특별히 이 제사장이 레8장에서 취임했을 때는 그가 손을 들어 축복하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불이 나타났다. 제사장의 축복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왜 그가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제사장 하면 우리 죄 때문에 발발 떨고 나아가는 것만 생각하고 있는데 구약의 제사장도 그렇게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는 분명히 백성의 대표인데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백성에게 복주는 축복의 사자다. 그 제사장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나신다. 그것이 레위기9장에 하고 있는 바고 또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은 성질 내고 있고 제사장은 성질 내고 있는 하나님을 어떻게 달래고 나가는가? 여기다 강조를 두고 있는데 여기 위임식에서 보니까 한 피로 연합되어 있다. 제단과 아론의 몸은 차이가 없고 제단의 영광과 아론의 영광은 차이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상에서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부분을 자기 종에게 주었고 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대표자에게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의 가문에 주어야 한다. 그것이 여기 위임식에서 나타나고 있는 내용들이다.
29-30 아론의 뒤를 잇는 아들들의 위임
아론의 거룩한 옷은 아론 후에는 그 아들들에게 돌려서 그들이 그것을 입고 기름 부음을 받아 제사장으로 위임을 받게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입고 기름 부음을 받아 제사장으로 위임을 받게 하는데 아론을 이어 제사장이 되는 아들은 성소에서 섬길 때 칠일 동안 그 옷을 입는다. 그러니까 위임식은 칠일 동안 한다 그 말이다. 이것은 아론 계통의 제사장 직분이 영원하며 온전한 것을 말한다. 민수기 20:23에서 아론이 호르산에 올라가 죽을 때에 아론을 이을 엘르아살도 함께 올라갔고 아론의 옷을 입고 내려왔다. 백성의 눈에 아론의 죽음은 가려졌고 영광스럽게 되었다.
구약에서 높은 산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다. 그런데 아론은 높은 산에 올라가서 죽었고 그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 가리워져 있다. 모세도 산에 올라가서 죽었는데 우리는 시체를 모르는데 유다서를 보니까 모세의 시체에 대해서 사탄과 다투고 있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만일에 모세가 죽었다고 시체가 공개되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구약 식으로 하면 의미가 별로 없다. 그런데 그는 가나안 땅을 보았는데도 그 시체는 백성의 눈에 가리워졌으면 그는 죽기는 죽었지만 유비적으로는 그는 영광스럽게 된 자다. 아론도 높은 산에 올라가서 죽었는데 백성은 죽은 것을 못 봤다. 그 아들이 그 옷을 입고 내려왔다. 마치 모세를 대신해서 여호수아가 그렇게 한 것처럼 아들이 그렇게 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아론의 직분은 영원하고 영광스럽다 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그 아버지가 죽으면 그 아들이 대대로 입는다. 그것을 히브리서에서 설명을 해주고 있다. 구약에는 많은 제사장이 필요했는데 죄 때문에 계속해서 죽어야 하니까 많은 제사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분은 죽음이 없다. 한 분밖에 없고 다른 분이 없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또 다윗 가문도 아버지의 왕위를 아들이 잇는다. 다윗의 보좌는 영원하다 하는 것을 상속 제도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론이 죽으면 그 아들이 옷을 입고 위임식을 행하는데 위임식을 행할 때 그는 성소에서 섬기는 위임식이다. 칠일 동안 행하는 것이다.
31-34 아론과 그 아들들이 위임식의 제물을 먹음
이 앞에서는 제물을 먹는 다는 이야기보다는 어떤 것이 자기 분깃인가 하는 이야기였다. 그 다음에는 먹으라는 이야기다.
위임식의 수양은 회막문에서 아론과 그 아들들이 위임식 광주리의 무교병과 함께 먹는다. 속죄물 곧 그들을 위임하며 거룩하게 하는데 쓰인 것을 그들이 먹되 타인은 먹지 못한다. 그것은 아침까지 남았으면 불살라야 한다. 이는 그것이 위임식의 식사로서 거룩하기 때문이다. 가슴과 뒷다리를 분깃으로 취하는 문맥에서는 위임식 수양을 화목제라 칭하였다.
거기 28절을 쭉 보면 화목제 희생 중에서 화목제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물론 레위기를 보면 화목제인 줄 그냥 알 것이다. 화목제로 언급하고 있다. 거룩한 곳에서 먹는 문맥에서는 그것을 속죄물이라 칭하였다. 여기 33절에 보면 속죄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앞과 뒤를 보면 위임이라는 말이 반복되어 있다. 곧 그들을 위임하며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데 쓰는 것은 그렇게 되어 있다. 속죄물 해도 소위 속죄제 그것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위임할 때 쓰는 모든 것이 속죄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죽음이 있으면 항상 속죄적인 의미로 말한다. 그러니까 속죄 제물은 속죄만 있고 화목제는 화목만 있고 그런 것이 아니다. 구약의 제물은 반드시 죽음이 있다. 가장 비참한 죽음은 영문밖에 불사르는 죽음이다.
그리고 속죄 제물도 임자가 먹으면 화목 제물 적인 성격이다. 물론 임자가 못먹고 그것을 담당한 제사장이 먹는다. 어떻든 먹는다 그 말은 생명을 교제하기 때문에 화목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제사는 어떤 의미만 있고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 마치 휘장이 여러 가지 직물로 다양하게 짜여진것처럼 제사법도 각 제사마다 강조점은 있어도 이 속죄제는 속죄만 있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 보니까 위임식을 31-34절 문맥에서는 속죄물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 앞에 문맥에서 가슴과 뒷 다리를 가져라 했을 때는 화목제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교리적으로 읽어 들어가지 말고 본문을 자세히 읽으라 그 말이다. 그 본문에서 문맥에서 의미들의 뉘앙스가 달라져 있으니까 잘 읽으라 그 말이다.
제물에서 분깃을 취하고 거룩한 곳에서 먹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거룩한 친교와 생명을 의미한다. 가장 소중한 것을 주고 또 하나님이 거룩한 곳에서 먹어라. 하는 것은 거룩한 친교를 말한다. 그 밖에서 먹으면 부정한 자다. 제사장이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곳은 성소 안으로 제한되어 있다. 그것이 제사장이 누리는 거룩한 영역이다. 그 밖에는 먹으면 그는 제사장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일반 백성으로서는 먹을 수 있어도 하나님 앞에 제사장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성소 뜰까지다. 그것을 넘어서면 아니다. 그것이 구약 때 누리는 거룩한 교제의 한계성이다.
지금도 우리들이 교회에서만 성찬식을 행한다. 그러면 집에서 먹으면 의미가 없냐? 집에서는 교회론 적으로 성찬식을 집행 안한다 뿐이지 여러분이 먹을 때는 성찬식을 먹는 방식으로 먹어야 그것이 거룩한 교제다. 만일에 그렇게 안 먹으면 부정한 자로 먹는 것이다. 가령 지금도 여러분이 지금도 피와 기름을 안 먹으면 구약 백성으로는 먹어도 신약 백성으로는 안 먹는다 그 말이다. 그러면 여러분이 구약 백성으로는 거룩해도 신약 백성으로는 거룩하지 않다 그 말이다. 즉 신약 백성에 속하지 않는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도 기름과 피를 구약 때문에 안 먹으면 제대로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여러분이 구약 백성은 되어도 신약에 예수 믿는 백성은 아니다. 성소 밖에서 사망 가운데 갇혀서 어둠 가운데서 먹는 사람은 되어도 예수의 영광의 빛 가운데서 부활 자의 상에서 먹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먹는 의미다. 그러니까 여기 보니까 거룩한 곳에서만 먹어라. 그러면 이 거룩한 친교는 아직 일반 백성에게는 확대된 것이 아니다.
그 뜰까지만 생명의 교제가 있고 그 뜰을 벗어나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날에만 먹으라고 되어 있다. 왜 그것은 그날 위임식으로 거룩하지 다른 일상 양식으로 거룩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다음날 아침에 해가 뜨면 불살라 버려야 한다. 새로운 날의 양식은 아니다. 그러니까 위임식의 양은 하루 양식이고 뜰에 제한 된 양식이다. 그것이 먹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생명이 많이 제한되어 있다.
요새 아이들이 좀 크면 현관에 가서 아버지 큰 구두 신고 다닌다. 아이들이 좀 컸다 하면 어쩌냐면 나도 어른 되었다고 담배부터 핀다. 어렸을 때 그것을 먹지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아직 먹으면 건강에 치명상이 있으니까 먹지 못하게 했다. 이제 다 컸다는 표시가 술 담배를 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 먹으면 버린 자식이고 커서 먹으면 어른 됐고 요새 식으로 커서 술 담배 못 먹으면 어야 자네 아인가? 여러분이 예수 믿은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그 말이 이해가 잘 안가지요? 우리는 안 먹는 것이 너무도 정상적이니까 그런데 안 믿는 세계에 가면 어야 자네 여자여 술 담배도 못하게 아 요세는 여자들도 먹으니까 안되는구나. 말하자면 좀 덜돼 먹었다 그 말이다. 그런 식이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구체적인 실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먹을 때는 뜰에서만 먹고 하루만 먹어야 된다. 새로운 날의 양식은 되지 못했다. 그런데 서원 예물이나 자원해서 드린 예물은 이틀까지 먹는다. 제 삼일 째는 불살라 버려야 한다. 안식일 만나도 이틀을 먹는다. 다음 날에 되면 썩어 버린다. 이틀까지 먹는 것이 안식일의 만나다. 그러니까 서원과 자원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특별한 생명으로 교제하신다는 의미가 확대되어 나타나 있고 함께 먹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모든 제사의 목표점이다.
이 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교회론 적으로는 여기서만 행하지만 여러분이 믿으면 여러분의 가정에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분 자기 백성을 위해서 몸과 피를 주신 분이 바로 이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그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생명으로 복 주셨다 하는 믿음안에서 먹을 때만 여러분은 거룩한 자로 먹는것이고 그냥 여름에 더우니까 속옷 차림으로 라면만 얼른 마셔버리고 어야 자네 혼자 밥먹소 나 갈깨 그렇게 칼로리로만 취한 사람은 이방인으로 먹고 마시는 자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렇게 먹어야 한다. 여러분의 먹고 마시는 모든 삶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교제를 의식하고 누려야 된다. 그래서 소위 성찬과 애찬을 연결시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여기서 밥 먹으면 뭐 얼마나 좋겠어요? 딱딱한 밥에다가 그리고 또 여자 분들 중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하면 밥을 잘 못잡순 분들도 있다. 자기 집에 아이들 없는 사람은 더 그런다. 우리 아이들은 얌전하니까 별로 태가 안 나지만 그래도 아이 없는 사람은 그것이 느껴진다. 그러면 그것이 별맛 있겠어요?
그러면 왜 교회에서 애찬을 먹느냐 하면 밥 먹고 정들자 그 말도 아니다. 세상 이야기도 아니다. 성찬과 애찬이 연결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냥 우리가 성찬식을 행하면서 그 때 같이 공동 식사를 하는 것이다. 식사 기도를 이것을 주님께서 주셨다는 의미로 성찬 기도로 한 것이 제일 좋다. 그런 의미로 우리가 함께 먹자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런 일에 더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여튼 주일날은 믿는 식구끼리 먹자고요. 왜 예수님 재림하시면 믿는 식구끼리만 먹을 것이다. 그래서 주일날은 안 믿는 식구는 혼자 잡수게 하자 그 말이다. 왜 새로운 가족 공동체가 모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도 회개하고 믿고 같이 먹자 그 말이다.
35-37 칠일 동안 위임식을 행하여 단을 거룩하게 함
위임식은 칠일 동안 행한다. 매일 수송아지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고, 또 단을 속죄하여 정결케 하고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한다. 칠일 동안 단을 속죄하여 거룩하게 한다. 그리하면 지극히 거룩한 단이 되어 단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칠일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완성 곧 안식을 의미한다. 칠일 동안의 속죄로 단이 지극히 거룩하게 되어 거기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앞에는 제사장을 정결케 하는데 강조 점이 두어져 있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단을 거룩하게 하는데 강조를 두고 있다. 이 앞에 보면 분명히 단과 제사장이 연결되어 있는데 그래도 강조는 보니까 제사장의 옷에다 뿌리고 거기다가 강조가 되어 있는데 뒤에 보니까 똑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단에 대해서 강조가 주어져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임하시는 단과 거기 나가는 제사장을 같이 거룩하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단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칠일 동안 한다. 그러면 지극히 거룩한 단이 되어서 무엇이든지 거기 접촉하면 그 거룩이 다른 것을 거룩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니까 완전한 거룩을 주겠다 그 말이다. 그래서 칠일 동안 하고 제사장도 칠일 동안 뜰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니까 제사장 위임식은 제사장과 단을 동시에 칠일 동안 거룩하게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지극히 거룩한 것이 되어서 제사장이 정결 예식을 행하면 정결하게 된다. 구약의 제사장이 무엇을 만지면 부정을 탄다는 말이 없다. 다른 사람은 부정탄다 그런 말을 해도 단지 이런 말은 있다. 그에게 기름 부음이 있어서 거룩하니 자기 아버지가 죽을 지라도 나가지를 말아라. 그렇게 하고 있다. 부정탄다는 말은 직접으로는 안한다. 단지 지극히 거룩한 기름 부음이 있으니 나가지를 말아라. 아직도 구약의 제사장은 죽음을 정결케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모든 부정을 정결케 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어도 죽음을 정결케 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모든 부정한 자는 제사장에게 나와서 예식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단에 나오면 거룩하게 된다. 그것이 구약에서 칠일 동안 거룩하게 하면 지극히 거룩하다. 칠일은 하나님의 거룩을 반복해서 완성시킨 것이다. 왜 이것은 거룩을 칠일 동안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창조 칠일이 창조의 완성이고 안식인 것처럼 거룩을 일곱 번 반복하는 것이어서 그것이 거룩의 완성이다. 이것이 완성됐기 때문에 거기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임하신 자리다. 29장 끝에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이 모든 일을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생명의 교제로 온전케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체결자이시요 대제사장이 시요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제물이시다.
한꺼번에 전체를 묶었다. 물론 문단마다 기독론적인 해석을 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런데 제일 뒤에서 한꺼번에 묶어서 했다. 여기서는 모세가 따로 필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모세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 신약에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이니까 아론이 따로 필요 없다. 신약에는 예수님이니까 제물이 따로 필요 없다. 그렇게 되어 있다.
예수님 안에서 열린 것은 땅에 제단을 거룩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제단을 거룩하게 했다. 그 제단을 하나님이 친히 임하신 곳이기 때문에 거기는 생명이요 죽음은 없다. 그러니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완전히 정결케 되고 완전한 생명의 교제를 누리지 칠일 동안 어떻고 그런 문제들이 아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정결케 된 대제사장이요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는 완전히 정결하게 된다. 예수 안에서 죽음도 거룩하게 되었다. 죽음의 권세가 예수와 함께 하는 거룩한 교제를 끊지를 못한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우리는 가슴과 뒷 다리만 먹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피와 살을 받았끼 때문에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얻은 것이다. 그가 우리의 대표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그가 얻으신 모든 것을 우리의 대표로 축복해서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받았따. 그것이 신약 교회가 누리는 거룩한 교제다.
이것은 하루만 먹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하늘에 양식이다. 그것이 교회가 누리는 복이다. 이 영원한 대제사장을 주셨다는 것이 신약의 복음 선포다. 구약에 교제를 알겠지요? 이것은 여러분을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하는지 절대로 설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영원한 대제사장을 주셨고 바로 이 영원한 대제사장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곧 여러분의 생명이기 때문에 거기는 어둠이 전혀 없고 완전한 정결이다. 완전한 피와 생명을 받았다. 오른 쪽 든 다리 뜰에서만 먹어라 한 정도가 아니라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기 때문에 떡과 포도주를 살과 피라고 이야기를 한다.
구약처럼 성소에서 먹는 제물만 아니라 가나안 땅의 젖과 꿀이 흐름은 그들이 너무 너무 포도주를 많이 마시니까 눈이 빨갛 것이고 우유를 많이 마시니까 이가 하얄 것이고 구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 복을 주신 의미다. 떡과 포도주로 특별히 요한 복음은 보리떡이다. 보리떡을 먹어 놓고 내가 생명의 양식이니라 그렇게 말씀하신다. 좋은 밀가루 떡이나 주었으면 모르겠는데 보리 떡 줘 놓고 내가 생명의 양식이니라 그러신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삶을 주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삶으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세움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거룩하게 하셨다. 그가 우리의 속죄 제물이셔서 그의 죽으심 안에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새롭고 산 구원의 길이 열렸고 그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린 헌신의 길 때문에 우리가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영원한 봉사의 길이 열린 것이다. 모든 제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으로 성취된 것이다. 바로 이 교제 관계가 여러분을 거룩하게 한다. 바로 이 교제가 여러분을 거룩하도록 결심 시킨다. 그러니까 항상 여러분이 주님을 믿으시고 의지하기를 바란다. 그것만 여러분으 유일한 거룩이다.
이렇게 나누어서 설명을 해도 제일 좋은 방식은 본문을 그대로 순서대로 여러 번 읽는 것이다. 그러면 본문이 그렇게 아름답게 묘사를 해 놓고 있다. 단지 저는 알기 쉽게 짚고 있는 것뿐이지 여러분이 이렇게 읽고 또 본문을 읽으면 왜 이것은 앞에 두고 뒤에 두었는고 똑 같은 말을 좀 바꿔 놓았는고 보면 단과 거기 봉사한 제사장을 함께 거룩하게 한 의미들을 잘 알게 될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그 단에서 제사장이 봉사하는 것과 향단에서 제사장이 봉사한 봉사에 대해서 말하면 이 언약 관계는 일단 끝나고 그 다음 30:11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 새로운 단락이 또 시작되는 것이다. 여전히 제사장의 물두멍과 기름 부음이 있어도 여기서는 또 다른 이야기다.
우리가 성경을 들을 때는 이렇게 만족하고 성경을 다 안다고 생각을 한다. 예수님을 완전하게 알고 사랑한다고 느끼는데 우리 신자들이 요새 여자들 비슷하다. 둘이 만나서 사랑한다고 그러고 음악회가 가고 그러면 이 남자가 진짜구나 그러고 어디 출장 가서 일주일 동안 전화 안하면 변했다냐 그러고 그렇게 느끼면 안된다. 여러분에게 구체적으로 말씀이 임하고 일이 형통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느끼고 여러분을 혼자 두신 것처럼 두시면 하나님이 변한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이 변한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진짜다냐 가짜 다냐 하고는 이웃 사람을 기웃거린다. 왜 나만 이렇고 하면서 그러면 안된다 그 말이다.
이분은 영원히 살아 계시고 변치 않으시고 아론은 주지 못하는 것을 주시는 권세 자다.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몸에 죽음을 당하신 대제사장이시다. 그런 대제사장은 구약에 없다. 이처럼 우리가 영원한 대제사장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 그분을 믿으세요. 그러면 여러분이 많은 고난을 당할지 모르지만 세상이 위로 못하는 빼앗지 못하는 평안을 여러분이 누릴 것이다. 외부 사람이 오면 가난하고 고생한 사람인데 그 자신이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있으면 그것은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사람한테는 세상이 감당을 못한다.
세상에서 이런 저런 일이 되고 안되고는 눈한나 꿈적 할 일이 아니다. 괜히 옆에서 보기에 불안하게 보인 것이지 눈 하나 꿈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 된다. 천당 가는 것은 확실히 믿는데 땅에서 조그만 일만 생겨 버리면 정신이 혼미하고 큰일 나 버린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내가 여기 있지 않냐? 방금 보리떡으로 오천명을 먹이신 분이 여기 있는데 풍랑에 빠져 죽겠다고 달달 떨고 있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가짜라 그 말이 아니다. 그분이 여기 계시는데 적용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