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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이문열의 <선택>에 나타난 Anti-feminism에 대한 고찰
- '이 땅의 딸들은 들어라'에 대한 여성학적인 반론을 중심으로 -
권 대 근
(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
I. 서 론
여성은 우리 문화의 모든 산물, 특히 예술 작품에서 주요한 위치를 점해왔다.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소설, 영화, 노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아직도 이들 예술 작품의 생산자는 대부분 남성들이다. 여자는 남자의 상상력 속에, 그들이 만들어 낸 예술작품 속에, 그들의 일터와 집, 즉 남자의 모든 시간과 장소에 존재한다. 페미니즘 논쟁이 가열되고 있는 이쯤에서 문화 재현물을 둘러싸고 존재하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참모습을 찾아 나서는 작업은 상당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얼마 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중견 작가 이문열의 이라는 소설에 대해서 불필요할 정도로 heated argument가 있었다. 필자 역시 썩 잘 쓴 작품이 아닌 이 소설에 대한 논쟁에 일조할 수 없다는 우려에서 이 작품에 대한 coment를 접어왔으나, 펜을 들지 않으면 안 될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함에 따라 불가피한 ‘선택’을 하게 되었음을 밝혀 두고자 한다. 조선일보는 Culture21면에 '페미니즘 큰 논란'이란 제하의 페미니즘 찬반 논쟁을 실었는데, 방송인 전여옥은 이문열을 무차별 공격하면서, 이문열이 쓴 아주 잘 쓴 잡품인 이 여성에 대한 성폭력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현모양처의 길을 택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장씨 할머니는 매춘부와 다를 바 없다며 이문열 씨를 상업 문화의 앞잡이로서 이중인격적인 글 기술자로 표현한 바 있다. 이 책은 상업주의에 편승한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언론의 관심으로, 작품의 문학성에 걸맞지 않게 많은 논쟁과 경이적인 판매부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문열은 누가 뭐래도 우리 시대 최고의 작가임에 틀림없다. 50대의 남성 작가로서 현재도 왕성한 문필 활동을 벌이고 있는 현역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문화예술계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의 일인으로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보수주의적인 색채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는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위치도 최고 수준의 대접을 받는 중견 작가요, 한때 유명세로 인해 고졸 출신으로서 대학 강단에 서기도 한 우리나라 대표적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다.
위의 측면에서, 우리는 그가 지식활동을 통해 그려내는 여성상은 한국 남성 지식인들의 여성관을 상당 부분 대변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가 그려내는 여성은 누구이며, 왜 무엇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는가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필자는 이 작품의 반 페미니즘성에 반론을 펴 나가면서도 어디까지나 이 작품이 작가의 사상을 드러내는 논설문이나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하는 수필이 아니라 허구를 바탕으로 하는 소설 작품이라는 점을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작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사람이므로, 자기의 생각과 주의에 반한다고 해서, 작가의 인격을 모독하는 표현은 적절한 비평의 태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본고의 중점은 작품 속에 나타난 작가의 사상을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비판하는 데 있다.
II. 본 론
I. 페미니즘에 대한 메일 쇼비니즘의 분노
이 작품은 조선시대 정부인 장씨의 삶을 되돌아보며 여성들의 가치관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으며, 여성으로서의 재능을 접어두고 자손을 많이 낳아 후손을 번창시키는 현모양처형이 지고지순 인양 정부인을 통해 현대여성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있는 '이 땅의 여성들은 들어라'는 많은 여성 논객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맞고 있고, 여성의 참된 인간화를 갈구하는 많은 여성 독자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작가는 에서 조선시대 정부인 장씨의 이야기를 통해 딸, 어머니, 아내, 큰어머니로서의 여성의 일생에 걸친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동시에 장씨 부인의 편지를 통해 여성의 자기 성취, 이혼, 정조의무, 가사노동, 이상적인 남성상 등 페미니즘에서 중점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자신의 강한 메일 쇼비니즘을 나타내고 있다.
3백년 전 장씨 부인의 입을 빌리긴 했지만 이 작품은 작가 이문열이 동시대 여성들에게 직접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작가 역시 절대성이 없이 상대성에 따라 진리나 의미가 변하고, 실체 파악이 각 개인에 따라, 겪어온 체험에 따라 변형 왜곡되어 진정한 실체를 볼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의 한 사람이자, 사회적 공인으로서 확고한 자아를 가진 작가로서 확산되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그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필연의 이유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문열이 자신의 입을 통해, 일부 잘못된 여성해방론자들이 이혼을 절반의 성공이나 훈장처럼, 간음을 황홀한 반란으로 미화시키고 있는 데 대해, 자신도 그들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서, 궁극적으로는 여성의 위대성, 진정한 페미니즘이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 이 글을 집필했다는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이문열이 왜 이 장씨 부인의 삶을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가 결코 반여성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오늘날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 3백년 전에 죽은 여자의 혼을 무덤에서 꺼집어내어 부활시켰다는 점에서, 장씨 부인의 메시지는 현대 여성이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닌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무려 300년 전 시대에 살았던 한 여자의 삶이 어떻게 오늘날 여성의 삶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프랑스 대혁명 이후 100년이 넘는 동안 전 세계 여성들은 낡은 신분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했던 차별과 억압을 위해 끈질기게 노력해 오고 있으며, 이런 시기에 전근대적 봉건 시대의 현모양처가 나타나, 과거의 관점에서 남녀평등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여권주의와 그 한 경향을 흐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질타하는 것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이라면, 누구나 분노할 것이다.
그들은 이혼의 경력을 무슨 훈장처럼 가슴에 걸고 남성들의 위신과 이기와 폭력성과 권위주의를 폭로하고 그들과 싸운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이혼은 절반의 성공쯤으로 정의되고, 간음은 황홀한 반란으로 미화된다. 그리고 자못 비장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외친다.
너희 괴로운 부르짖음은 내게는 성난 외침만큼이나 걱정스럽다. 내가 살았던 시대와 견줄 수는 없지만 지금 너희 몸은 그 어느 때보다 배부르고 따뜻하며 너희 주거는 안락하고 문명의 여러 이기들은 옛적 수십 명의 노비가 하던 일을 대신해 주고 발달한 사회 제도는 미래까지도 일부 보장해 준다. 거기다가 대가족의 중압이 없고 남존여비에서 오는 차별도 거의 철폐되었다. 그런데도 너희 괴로운 부르짖음이 지금처럼 이 땅에 높게 울려 퍼진 적이 없었다.
위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작품 을 통해서 드러난 작가의 여성관은 남성중심주의의 가부장적 사고의 전형처럼 고리타분하다는 점이 드러난다. 부활한 장씨 부인이 오늘날 여성은 남녀차별도 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다고 진단한 점에 대해서 먼저 반론을 펴 보겠다. 물론 옛날과 비교하면 오늘날 여성은 엄청나게 그 지위가 향상되고 생활도 윤택해졌고, 행동도 자유로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까지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사상적 저류는 유교적 가치와 질서이며, 이 속에서 살고 있는 대다수의 여성들이 낡은 보수적 관념과 제도 속에서 아직도 진정한 인간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유교 이념의 본질이란 근본적으로 남존여비 사상의 바탕에서 인간의 윤리와 도덕의 질서 체계인 것이다. 오늘날 가정에서 주부는 보통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동시에 남편의 상대가 되어주고, 자식을 낳고, 그 뒷바라지를 다 하고, 유아교육까지 시켜야 하는 1인 4역의 짐을 지고 있다. 이러한 일은 명백히 노동이라 할 수 있다. 여자들의 이러한 노동이 다만 집 안에서 일어나는 개인적 노동이라는 이유로 인정되지 않음으로 해서 오늘날 여성은 남편들로부터 놀고 먹는 존재로 취급되고 있으며, 남편은 가장으로 그리고 주인으로 부인과 자식은 그의 수하 쯤으로 생각되고 재산은 남편의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인데도, 그가 이 여성 억압적 그림자를 부인하고 있다는 점 또한 문제로 지적된다.
인간은 성별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평등하게 대접받아야 하는 존재이므로 불평등에 대항하는 아픈 몸짓의 하나인 이혼이 무조건적으로 배척당해야 하고 비난받아야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남편의 폭력과 외도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여자를 노비나 창녀로 여기는 극단적 쇼비니즘의 한 형태로서 깨어있는 여성들에겐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불평등이 아닌 하늘의 섭리나 자연의 이치쯤으로 생각하는 장씨 부인의 주장은 여성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할 정도로 논리적 모순과 어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은 여자와 관계를 맺고 살고 있다고 어중이 떠중이 누구나 떠들 수 있는 무엇이 아니란 것이다. 그리고 여성의 분노는 여자가 지배자로 올라가서 남자를 짓밟자는 것이 아니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할 인간관계가 성별에 따라 불평등하게 나눠지고, 남녀의 관계가 지배와 복종으로 일그러진 사회를 차별이 없는 사회로 만들자는 운동이며, 불평등한 남녀관계를 평등한 관계를 만들자는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여성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만들어 양성 관계의 변혁을 꾀하는 다양한 사회이론이며 동시에 정치적 실천이라 볼 수 있다. 작가 이문열은 여자로서의 삶을 경험해 보지 않았으며 페미니즘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진지하고 공부하지도 훈련받지도 않는 사람이다. 그가 다양한 변종의 페미니즘의 이상에 대한 명석한 이해 없이, 페미니즘을 잘 모르는 보수적 시각을 가진 남성에게 피부적으로 느껴지는 페미니즘의 단상을 장씨 부인의 연설문에 적용한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소설의 기본적 요소는 인물과 사건이다. 인물과 사건은 밀접히 관련하여 갈등과 해결을 반복하면서 결말에 이르는 구성을 가지는 것이 소설의 특성이다. 그러나 이문열의 선택은 작가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그가 부활시킨 장씨 부인을 통해 자신의 페미니즘에 대한 강한 불만을 그럴듯한 논리로 독자들에게 설득시키려 하다보니, 소설의 기본 요소인 사건이 소홀히 다루어졌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이란 소설 한 작품 속에 평소 마음에 안 들었던 페미니즘 운동의 전반에 대해 코멘트를 하다보니, 쉽게 흥분되었고 또 독자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논리의 사슬에 빠지다 보니 말이 길어져 작품의 구성이 제대로 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장씨 부인의 입을 빌려, 여성들에게 훈계를 하면서 행동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교조적인 수법은 작품성을 극도로 떨어뜨리는 것으로, 한국 대표적 작가로서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된다. 시종일관 주인공이 보여주는 태도는 가부장제도를 옹호하는 전형적인 유교적 여인상이다. 작가의 여성관은 시대착오적이며 복고적이라는 점에서 고리타분하고 완고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페미니즘의 사상이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긍정적으로 기여했음에도 작가는 페미니즘의 가장 극단적 사상을 선택하여 페미니즘이 가정을 파괴하고, 페미니스트를 '자유로운 성관계'를 실천하고자 하는 도전적인 불순분자로 취급하는 것 같이 보인다. 알고 보면, 페미니즘이 급진적인 여성과 도전적인 여성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페미니즘은 평등사회를 위해 분투하는 모든 인간에 대한 것이다. 페미니즘 철학에 대한 이해없이 대충 들어서 알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페미니즘을 죽이려는 시도였기에 큰 화를 입고 있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은 이런 측면에서 작가 이문열의 오만함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속내를 조선조 여인의 점잖은 어법 속에 감춘 채 문학이라는 외피로 포장했다는 점에서 교활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굳이 그가 중앙일보 특별대담에서 이 반페미니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그의 이런 주장은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보면 페니니스트에 대한 무지의 소치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문열이 3백년 전의 죽은 혼을 불러들이면서 까지 사수하고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위대한 삶의 한 모형을 선택하여 보여주려 했다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가 쓴 ‘선택’ 안으로 들어가 보자
2) 여성성 그리고 모성
이문열이 ‘선택’에서 일관되게 그리고 있는 여성은 어머니로서의 여성이다. 그는 "어머니란 인간을 생산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머니란 이름을 떠나 성취될 여성의 위대함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여성의 유일한 운명이며 존재 이유로 들고 있다. 어머니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선택이며, 여성이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인간의 인권을 무시하는 남성중심의 사고로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세상의 남자들이 믿고 싶은 신화일 뿐이다. 어머니가 될 권리와 안 될 권리는 여성에 의해 선택되어질 문제라 생각된다.
a. 이어지는 세상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남기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니 그 이상 아내로서 이 세상을 유지하고 어머니로서 보다 나은 다음 세상을 준비하는 것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b. 어머니는 여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이름이다. 여인의 가장 중요한 생산은 자녀이며 가장 위대한 성취는 그 양육이다.
c. 하지만 이 시대의 여인들이 어머니되기를 기피하는 것은 우리는 누리기 위해서 태어났으며 이 세상은 몇 가지 문제점만 해결하면 살만하다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세태와 인상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인 것 같기 때문이다.
d. 회임과 분만을 자랑과 기쁨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내가 먼저 주목한 것은 우리가 몸두고 사는 세상의 본질이다.
e. 그런 뜻에서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세상의 바탕을 이룩하는 일이 되고 그 한 가지 만으로도 출산의 가치를 부인하는 천만 가지 교묘한 논리를 대적할 수 있다. 세상을 있게 하는 일, 지금 여기 있는 모든 것에 이름을 매기고, 뜻을 두고, 값을 셈하는 존재로 만드는 일, 그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f. 하나의 세상인 생명을 나는 몸 안에 품고 낳으려 한다. 그 일에 수고롭고 뼈나 살이 떨어지건 어찌 마다할 수 있으랴
이문열은 장씨 부인이 "성취가 있었던 학문과 재예를 스스로 버리고 부녀의 길을 선택했다"고 쓰면서, 위의 b와 같이 말한다. 어머니가 되는 일, 자녀의 생산 즉 출산과 양육에 가치를 부여하는 데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으나, 그것을 여성에게 최고의 가치로 몰아부쳐 전문적인 일을 하면서 자아실현의 길을 걷고 있는 많은 여성을 모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회임과 분만이 인류역사를 이어주고 세상을 있게 하는 이유로 해서 여성에게 그것을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기에, 이런 주장의 이면에 숨어 있는 가부장제의 논리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 능력에 근거를 둔 이 생물학적 설명은 여성들 자신에게도 끈질기고 강력한 신화다. 모성은 여성의 경험이다. 여성들은 모두 어머니가 되는 생리적인 특성을 지녔지만 - 그건 남자들이 어떤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되는 특성을 지닌 것과 마찬가지다. 오늘날 여성이 어머니가 되고 안 되고는 순전히 '선택'의 문제다.
모성은 여성의 성욕과 상관없이 여성의 육체에서 일어나는 한 과정으로 이해된다. 어머니는 여성의 여러 모습 중의 한 단면이며 모성을 선택한 여성에게도 어머니란 아이를 임신했다 낳은 사람이란 '관계'를 의미할 뿐이다. 관계는 본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본질을 대치할 수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여성의 본질은 인간이다. 아이가 어머니일 수 없고 어머니가 아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어머니는 더 이상 이성의 전 존재를 투항하게 하는 제도일 수도, 일생에 걸친 구속일 수는 없다고 하겠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에서 가부장제는 성의 생물학적 불평등에 뿌리박혀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남녀간의 불평등의 원인은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재생산의 역할이 "생물학적 특성에 기초한 사회 지위의 차별의 패러다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계급의 근원이 된 최초의 분업으로" 인도했던 사실로 돌려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여성 억압의 뿌리가 생물학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여성해방은 생물학적 혁명을 필요로 한다고 결론지었다. 무산 계급이 경제적 계급체계를 타파하기 위해서 생산 수단을 장악해야 하는 반면에, 여성은 성적 계급체계를 파타하려면 출산의 수단을 장악해야 할 것이다. 이는 여성의 선택을 강조하는 말과 같이 헤석된다. 페미니즘 혁명의 궁극적 목표는 양성의 사회에서 성의 구별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자녀출산의 생물학적인 현실들이 극복되는 순간 어떤 사람은 womb이 있고 또 penis가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문화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역할이라는 용어를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을 양육하고 돌보는 관계"로까지 확장시킨다면, 한 개인은 사회적 어머니가 되기 위해 반드시 생물학적인 어머니가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 사회는 아기를 낳은 어머니가 그 아이를 키우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또 출산의 문제에 있어서 남녀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현대의 밎벌이 부부에게도 "타고난 신체의 구조나 성향에 따른 자연적인 분배가 있다."며 여성들의 가사노동 분담요구를 부정한다. 그는 왜 3백년 전의 노비를 되살려 오늘날의 남성들에게 교육받지 말고 훌륭하게 상전을 모시며 그대로 살라고 말하지 않을까?
여성의 생명창조 능력에 대한 선망과 경외,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남성들은 계속적으로 여성의 다른 창조적인 측면에 대해 일종의 증오를 보여왔다. 여성에게 어머니의 역할에만 충실하라고 명령할 뿐 아니라 여성의 지적 창조물이나 예술적 창작을 하찮게 폄하하고 그들을 남성과 같이 되려는 수치스러운 여자로 경멸한다. 또한 그들이 결혼과 육아라는 성인 여성의 진정한 역할에서 도망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3) 정조의무와 순절예찬
이문열은 『선택』에서 여성들의 분열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의 분열까지도 조장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남성들까지 분열시키고 있다. 그가 여성을 종류별로 구분하는 잣대는 정조의무인 것 같다. 그는 시종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해방과 성적 방종을 혼동하고 있다."고 질타하며 요즘 여자들의 "미화된 간음보다 전시대 남성들의 뻔뻔스런 반칙이 더 정직해 보인다."고 말한다. 여성해방과 성적 방종은 동의어가 아니다. 작가는 그것을 동의어로 이해하고 있다. 그 악의적인 오해는 바로 『선택』같은 작품에 의해 유포되고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정조 의무에 대한 그의 강조는 "그릇된 이념화의 희생이라도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일은 아름답다"는 순절예찬으로 이어진다. 작가의 순절 예찬은 페미니스트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생명은 어떠한 가치보다도 앞서야 하는 것이다.
어떤 고귀한 가치를 위해 죽는 것보다 비굴할지라도 살려고 하는 인간이 성숙한 사람이라는 어느 심리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스스로 생명은 버리는 것은 결코 예찬될 성질의 것이 못된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따라 죽어야 하는 것은 야만적 계율이 아닐 수 없다. 생명의 문제는 결코 가벼이 다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순절이 예찬되고 있는 것은 장씨 부인의 당대에도 적합치 않은 논리로 여겨진다. 박씨 부인의 순절을 묘사한 그의 글에서는 비장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이 풍겨 나온다. '위대한 소설가'라는 찬탄이 절로 나온다. '그릇된 이념화의 희생'이라는 평가를 받더라도 이문열 같은 작가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던지며' 여성들을 감동시키는 장면을 기대해도 좋을까? 그는 페미니스트들이 "소수의 서러움에서 벗어나고자 있지도 않은 이상의 남성상을 만들어 놓고 이 세상의 남자들을 난도질"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런 남성은 "아첨으로밖에는 여성의 호감을 살 길이 없는 못난이나 그런 여성이 있어야만 한몫 보는 바람둥이뿐"이라고 주장한다.
장씨 부인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오늘을 사는 현대여성들이 좋아하는 이상의 남성상이 엄청나게 변한 것만은 사실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좋아하는 남자는 사랑하는 여성에게 정절을 지키며, 개인이든 집단이든 여성들이 당하는 불이익을 참지 못하고, 남성의 부당한 기득권은 포기할 수도 있는 그런 남성이라고 한다.
페미니스트와 바람둥이 남성의 관계에 대한 이씨의 시각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페미스트들은 바람둥이 남자를 지금까지 비판해온 여성들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랑 없이 사창가에 드나들며 결혼 후에도 딸 같이 어린 여자를 찾으며 향락업소를 전전하는 바람둥이 남성들을 비난하고 공격해왔다. 여성들은 최근까지도 남성들의 성적 요구에 대해 '노우'라고 말할 권리가 없었다. 여성의 '싫다'는 '좋다'로 받아들여졌으며 심지어 치한이나 적에 의해 강간을 당했어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정조를 지켜야 했다.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원하지 않는 성에 '노우'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찾아주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4) 자궁을 가진 여자
장씨 부인은 아버지의 뜻대로 상처한 홀아비의 재처로 들어가 여섯 아들과 딸 하나를 낳고 일곱 아들과 딸 넷을 길렀다. 이문열이 장씨 부인을 통해 강조하는 여성상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어머니로서의 여성이다. 바꿔 말하면 이문열은 여성을 자궁을 가진 존재로 파악한다. 여성의 자궁은 여성의 성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결혼을 거부하거나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여성, 혹은 이혼녀의 성은 부인된다. 아버지의 아이를 낳는 어머니로서의 자궁은 인정되지만, 그녀 자신의 성적 욕망에 따른 독자적인 성은 거세된다. 작가는 출산과 양육이 아닌 여성의 창조를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육체와 정신을 분리시키고 있다. 여성은 어머니가 되기 위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녀가 아닌 일상인으로서의 여성은 욕망을 가질 수 없는 이문열의 여성관은 과거의 여성관이지, 개인의 가치가 중요시되고, 개인의 인권이 보장되는 오늘날의 여성관이 될 수 없다. 작가는 오늘날의 여성들에게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궁을 가진 여자이지만 동시에 욕망이 거세된 여성이기도 하다.
5) 가사노동과 자아실현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은 어떤 뜻으로든 여성의 자기 성취에서 가정에서의 성취가 제외된다는 점이다.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기르는 일은 여성이 가장 오랫동안 해왔고, 또 가장 효율성이 높은 분야인데도 대중적으로 자기 성취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뒷전으로 밀려버리고 만다. 지금껏 훌륭하게 자기 일을 해온 중년의 자랑스런 주부를 갑작스런 허망감과 무력감 속으로 밀어 넣는 해괴한 논의이다. 자기의 일을 가져라. 자아를 되찾아라. 남편과 아이들로부터 벗어나라, 가정에서 해방되라. 그런데 내게는 그런 권유들이 마치 자기 성취를 원하는 여성에게는 가정은 잘못이고, 남편은 폭군이며, 아이들은 족쇄라고 외치는 것처럼 들린다. 현모양처란 무능과 불행의 다른 이름이고 내조와 양육은 허송세월의 동의어인 듯하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여성스러움을 가정적인 거의 동일시하도록 교육받았으며, 여성의 지고의 행복은 주부가 되어 자녀를 잘 기르고 남편을 내조하는 현모양처가 되는 데 있다는 주부신화, 현모양처의 상을 깊이 내면화하게 된다. 문제는 가사가 자아성취의 조건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 주부들은 가사노동에 대해 주부의 희생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살림만 사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다. 페미니즘은 자아실현에의 욕구를 갖고 있으나 현모양처신화에 빠져 무력감을 느끼는 중산층 여성이 직업이나 예술 활동, 봉사활동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형성토록 도와주고자 하는 여성 운동이며, '가정에서 해방되라'는 것은 여성들이 스스로가 보다 창조적 자기를 갖고 매사에 주체가 되라는 의미다. 반페미니스트들은 해방이란 말을 탈선이나 양육의 포기, 가정의 파괴란 말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주부가 가정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주부병' 즉 알 수 없는 무력감, 허무, 좌절감을 치유하는 방법으로서 이것은 흘러가는 시간을 관성의 법칙에 따라 그냥 무의미하게 소비하는 게 아니라, 자기 정체성이란 보다 큰 목적을 위해 시간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길이다. 가정을 가지고 사랑을 하면서 자기를 계발하여 가정 나아가서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노력하는 일은 마땅히 권장되어야 할 일이다. 작가는 가정의 일이 자아실현이 될 수 있다고 했으나, 일의 대가가 주어지지 않은 무임금의 일은 사실상 자아실현의 가치를 가진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문열의 자아관은 보수적 시각에서 나온 편협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III. 결 론
이 작품이 열 가지 이유로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문학평론가들로부터도 비난을 받고 있다. 그 이유를 결론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 ‘선택’은 작가가 자신의 완고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강변하려다 사건을 소홀히 다룸으로써, 인물과 사건이 기본적 요소인 소설의 골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소설로서의 구성이 완벽하지 못하다.
둘째, ‘선택’은 여성을 가부장 제도의 숙명론으로 몰고가 모성이나 출산 등 여성의 고유한 가치를 절대화함으로써, 여성의 인권인 자기 권리의 을 봉쇄하였다. 자궁을 활용하지 않는 독신자, 불임 여자 등의 홀로서기를 부정하였다.
셋째, ‘선택’은 남편이 죽은 뒤 아내가 따라 죽는 순절 예찬으로 생명경시의 풍조를 조장하고, 여성의 생명을 남성에 종속된 것쯤으로 보는 오류를 범했다.
넷째, ‘선택’은 가정이 참된 자아실현의 장소가 되지 않는데도 자아실현의 장소로 적합하다고 강변함으로써, 여성의 자아찾기를 통해 건강한 가정을 복원하려는 의도에서, 여성을 가정의 굴레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페미니스트의 인간해방의 참뜻을 왜곡하였다.
다섯째, ‘선택’은 300년 전의 현모양처를 등장시켜, 오늘날의 여성을 훈계하려 한 점에서 소설로서의 역할과 기능에 충실하지 못했고, 진리와 가치의 역사성을 부정하였다.
여섯째, 그는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페미니즘의 겉만 가지고 페미니즘의 본질을 잘못 난자하여, 페미니즘에 큰 상처를 주었다.
일곱째, 이문열은 분명히 반페미니즘적 시각을 가지고 가부장제의 논리를 옹호하고 있으면서 자신은 결코 반여성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비겁함이 더욱 페미니스트의 분노를 사고 있다. .
여덟째, 작가는 현존 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성에 관한 이중적 잣대, 남녀불평등을 간과하고 있다.
아홉째, 이문열이 인구의 절반인 여성의 권익을 옹호하고 있는 요즘 유행하는 페미니즘을 자기의 반박 논리로 접근하여 문제를 일으킨 것은 책의 판매부수를 늘이고자하는 고도의 상술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열째, 생물학적 숙명론으로 여성의 구속적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작가의 가부장적 보수성이 너무 견고하다.
그러나 ‘선택’으로 인해 페미니즘이 관념의 옷을 벗고 생활 속으로 파고 들 수 있었다는 것에는 긍정적 평가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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