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숲에 던져진 아이 2 바리데기
어쩌다 보니 멀리 서양에서 전해 온 이야기부터 먼저 시작했네요. 하지만 나는 저 이야기가 '서양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편적인 재미와 감동을 주는 '인류 모두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이는 우리나라에서 전해지는 옛이야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또한 온 세상에 널리 통할 만한 힘과 가치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지요.
백설공주와 꽤 달라 보이면서도 비슷한 면이 있는 우리나라 공주 이야기를 해볼게요. 민간 신화로 이어져 왔고 민담으로도 전해져 온 이야기 <바리데기>입니다. <바리공주>라고도 하지요.
처음에 나는 바리데기가 백설공주하고 아주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둘 다 공주이지만 백설공주가 예쁘고 귀엽고 화려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데 반해 바리데기는 소박하고 초라하며 처량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지요. 공주로 사랑을 받기는커녕 딸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무참히 버려진 아이가 바리데기였습니다. 나중에는 자기를 버린 부모를 살리기 위해 서천서역 저승까지 가서 약수를 구해 오는 힘든 일을 떠맡아서 하게 되지요. 후에 신이 돼서도 죽은 영혼의 슬픈 넋을 달래고 인도하는 구실을 맡게 됐으니 정말 고생으로 시작해서 고생으로 끝나는 삶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생각해 보니까 따지고 보면 저 백설공주도 바리데기와 처지가 그리 다르지 않지 뭐겠어요. 어린 몸으로 어느 날 갑자기 죽으라고 버려진 신세였으니 말이에요. 그렇게 버린 사람이 따지고 보면 부모였고요.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두 인물을 더 자세히 비교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났지요. 이제 백설공주에 견주어서 바리데기 이야기를 해볼게요. '숲'(실제로는 '산`)에 초점을 맞추어서요.
옛날에 오구대왕이 불라국이라는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오구대왕은 길대부인을 배필로 얻었는데, 바라고 바라는 자식이 생겨나지 않았다. 갖은 정성을 들인 끝에 길대부인이 나이 마흔에 비로소 아기를 잉태하자 대왕은 뛸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대를 이을 아들을 바라는 마음과 달리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다. 대왕은 첫딸이 살림 밀천이라며 고운 이름을 지어 주고 고이 키웠다. 그 뒤 길대부인이 내리 딸만 여섯을 낳으니, 오구대왕이 거두어 키웠으나 아들을 고대하는 마음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길대부인이 다시 아이를 잉태하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대왕은 그 아이가 아들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또 딸이 태어나자 대왕은 크게 실망해서 아이를 내다 버리라고 명령했다. 길대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아기를 버리러 나설 때에 들도 냇물도 여의치 않아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억석바위에 아기를 놓고 돌아서자 커다란 호랑이가 물고서 굴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버림은 어떤지요? 앞의 백설공주는 그래도 궁궐에서 살다가 철들 무렵에 버림받았는데 이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자마자 버림을 받습니다. 최소한의 준비도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넓고 거친 세상에 훌쩍 던져진 셈이지요. 참으로 가혹한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어찌 저럴 수 있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사람들의 인생을 반영한 서사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누구라도 어머니 배 속에서 나오는 순간 혼자가 되는 법이지요. 거친 세상을 어떻든 제 힘으로 혜처 나가야 하는 게 사람의 운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구체적인 상황은 다르지만, 어린 바리데기가 홀로 산속에 버려진 상황은 백설공주가 숲 속에 버려진 상황과 본질 면에서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적 숙명 같은 것이 거기 반영돼 있다고 볼수 있지요.
조금 앞서 나간 것 같기도 하네요. 깊은 숲 속에 버려진 바리데기가 어떻게 됐는지, 그가 어떻게 그 숲 속에서 움직였는지, 이 부분을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커다란 호랑이를 보내서 바리데기를 굴속으로 물어 오게 한 것은 산신령이었다. 산신령은 그날부터 바리데기를 맡아서 기르기 시작했다. 바리데기는 낮이면 낮별을 보고 밤이면 이슬 받고서 병 없이 탈 없이 자라났다. 바리데기가 다섯 살이 되니까 산신령은 온 산천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바리데기를 가르쳤다. 한 해 가고 두 해가고 십 년을 공부하니 바리데기는 못할 일이 없게 됐다. 세상 이치에 통달하고 갖가지 일을 다 배웠다.
어느 날 바리데기가 삼강오륜을 배울 적에 '부자유친'이라는 글을 보고서, 산신령인 줄도 모르고 스승에게 물었다. "글에 부자유친이라 했는데, 아들이 있고 딸이 있으면 부모가 있는 법인데.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그러자 신령님은, "야야. 내가 가르치는 글만 꼬박꼬박 배우면 어머니도 나타나고 아버지도 만나리라" 이렇게 답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신령님은 바리데기에게 이제 자기와 이별할 때가 되었다면서 곧 어머니와 만나게 될 거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신령님이 사라진 뒤 길대부인이 산속에 나타나 울면서 바리데기를 찾았다. 모녀지간임을 확인한 길대부인과 바리데기는 서로를 껴안고서 엉엉 울었다.
숲 속에 버려진 바리데기의 모습은 위와 같이 이야기됩니다. 어떤가요? 좀 싱겁지 않은가요? 나도 처음에 그리 생각했었지요. 산신령이 즉각 아이를 거두어서 고이 지켜 주고 보살펴 주면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부까지 다 시켰다니 이 정도면 좀 '호사' 같기도 합니다. 삼강오륜까지 산신령이 다 가르쳤다니 완전히 다 챙겨 준 셈이지요.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외롭게 살아가는 아픔이 있었지만, 이 또한 산신령이 어느 정도 해결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언젠가 부모님과 만날 거라는 사실을 알려 줄 뿐 아니라, 어머니와 상봉하기 직전까지 바리데기를 보살펴 주니 말이에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여러 번 보다가, 어느 순간 아차!' 하면서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저 산신령의 서사적 상징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지요. 저 산신령이란 어떤 존재일까요? 이야기는 그를 마치 '사람'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정말로 그러할까요? 깊은 산중에 어찌 딱 저런 사람이 있어서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를 챙겨서 먹이고 입혀서 키웠을까요? 저 산신령은 그보다는 말 그대로 산의 정령, 또는 대자연의 기운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바리데기가 산신령의 보호 속에 자라나면서 배움을 얻어 가는 모습이란 바리데기가 대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나타낸다는 해석입니다. 바리테기가 산신령 아래서 삼강오륜을 깨쳤다는 것은 그가 숲 속에서 삶의 큰 이치를 깨쳐 나갔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바리데기가 자기를 세워 가는 모습입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신세를 슬퍼하면서, 이른바 '저주받은 운명'을 한탄하면서 힘없이 주저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항아'가 될 수도 있었 겠지요. 하지만 바리데기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를 물으면서 길을 찾습니다.
앞의 이야기에 보면, 바리데기가 산신령에게 묻습니다. 우리 부모는 누구냐고요. 언제 만날 수 있냐고요. 그러니까 산신령이 대답합니다. 때가 되면 만나게 될 거라고요. 나는 이 질문과 대답이 그가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고 대답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바리데기가 거친 숲속에서 자기 존재와 대면하면서 스스로 묻습니다. "우리 부모는 누구지? 나는 부모를 만날 수 있을까?" 그러자 답이 들려옵니다. "너는 부모가 있어서 이렇게 존재하는 거야. 부모님은 너를 버리고 싶어서 버린게 아니야. 넌 꼭 부모님을 만날 수 있어." 저 깊은 밀바닥에서 들려오는 대답이었지요.
앞서 백설공주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에 나오는 숲(산)도 세상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한입에 아이를 덥석 무는 곳, 이렇게 혐한 곳이 바로 세상이지요. 그 거칠고 험한 세상에 홀로 던져진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오히려 더욱 굳건하게 자기를 세운 사람이 바리데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한테는 못 해낼 일이 없었지요. 그가 아무도 갈 수 없다고 하는 서천서역 저승을 찾아가 생명수를 길어 온 힘은 이와 같은 '자기 세우기'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는 큰 신이 된 것도요.
어때요? 얼핏 보기에는 꽤 달라 보이는 두 공주 이야기에서 하나의 뜻깊은 접점을 볼 수 있지 않나요? 둘은 이미지가 무척 달라 보이지만 '숲'으로 표상되는 거친 세상에 훌쩍 던져진 상태에서 스스로 자기 길을 찾고 자기 삶을 세운 존재라는 점에서 서로 속 깊게 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 만났다면, 할 얘기가 정말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어떤 표정으로 어떤 얘기를 나누었을지 한번 찬찬히 상상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왜 주인공은 모두 길을 떠날까? 중에서
신동흔 지음
첫댓글 스스로 깨우친다는 바리데기 교훈을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