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하버드> 4화. 환상의 나라, 미국 + <법정> 24화. 그 눈매들
내가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쯤 아버지는 언니와 나를 위하여 초호화판(어린 나에게 알맞은 표현이다) <동아백과사전>을 구입해 주었다.
그때부터 언니와 나는 매일 적어도 10킬로그램 정도로 무겁고 크게 느껴지던 그 백과사전들을 낑낑대며 한 권 한 권 들춰보았다. 그리고 곧 매료되었다.
어린 나로서는 눈으로 보지 못하고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던 곳들이 너무나 많았다. 특히 미국에 관심이 많았던 우리는 미국이란 나라에 관해서 읽어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하나의 취미가 되었다.
어느 사이 미국은 천국 다음으로 완벽하고 환상적인 곳으로 느껴지기 시작했고, 모든 아름다움과 풍요함의 상징이며 어느 누구에게나 무한한 기회를 제공하여 어떤 꿈과 목적이라도 달성할 수 있게하는 그런 지상 낙원으로 생각되었다.
한 질의 백과사전이 내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백과사전이 나와 어느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장래에 대한 꿈과 호기심을 충동하여 그것을 표면으로 밀어 내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인생은 참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한 편의 소설과도 같다. 만일 내가 혼자서 글을 깨우치지 않았다면 부모님은 초등학교 입학도 먼 어린아이를 위해 그토록 많은 책들을 매일 사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인형과 소꿉장난 놀이에 몇 년 동안 심취했을 것이고, 여느 아이들처럼 반나절을 유치원에서 보냈을 것이다. 또 다른 아이들과 뛰어놀기에 정신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아이들과 장난감 가지고 즐겁고 재미있게 놀며 어린 시절을 보내는 것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학문적이던 나의 건조한 어린 시절보다 나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성인이 된 지금 되돌아보면, 아이들은 그 나이에 맞게 뛰어놀도록 하는 것이 정서적 안정이나 사회 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에 도움을 주는 현명한 일이라 생각한다.
요즘 과다한 조기 교육 붐으로, 사회 생활을 하는 어른들만큼이나 부담스럽고 바쁘게 지내고 있는 한국 어린이들을 볼 때 한 번쯤 신중히 고려해 볼 문제다.
인간에게는 각각 다른 인생 경로가 마련되어 있다. 나에겐 좀 별다른 어린 시절이 선물로 내려진 것 같다. 다른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놀 때, 나는 집에서 음악 레슨을 받았고, 위인전기, 명작소설에서 백과사전까지 손이 잡히는 대로 책을 읽으며 장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네 살 때 나의 장래 희망은 미장원 아줌마였다. 아마도 지독히도 숱이 없고 일 년 내내 깎지 않아도 자라지 않는 내 머리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용사가 되면 숱이 많고 긴 머리를 만질 수 있기 때문에 아마 대리 만족감(vicarious satisfaction)을 느끼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꿈은 좀더 야심만만한 직업인 의사로 변신했다. 언니는 마음의 아픔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변호사가 되고, 나는 육체의 아픔을 해결해 주는 의사가 되었으면 하는 아버지의 바람이 적지 않은 영향을 주긴 했다.
그러나 나 자신도 한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의사란 직업이 참 고귀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 후부터 나는 내 꿈의 실현을 위해 바로 실습에 들어갔다. 우리집의 유일한 장난감이자 언니의 어렸을 적 친구였던 오래 된 인형이 내 단골 환자가 되었다. 비록 머리카락이 3분의 2쯤 빠져 나갔고 팔다리마저 온전치 못한 처참한 꼴의 인형이었지만 나는 정성껏 엉덩이에 주사도 놓아주고 청진기로 정기 검진도 해 주었다.
얼마 후, 살색이었던 인형의 엉덩이는 내가 주사로 사용했던 파란 볼펜 자국으로 온통 시퍼렇게 변해버렸다.
어린 나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그냥 웃어 넘긴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장래 희망은 참으로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한 발 더 나아가 나는 외과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 결심은 수술 현장을 직접 지켜본 뒤 한 것이다.
어느 날 친척 오빠에게서 급히 연락이 왔다. 급성맹장염인 것 같아 병원에 가야 한다고. 어머니, 아버지는 오빠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의사는 수술이 시급하다고 했다. 수술을 준비하는 와중에 나는 아버지한테 수술 과정을 구경하고 싶다고 보채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도 입학 안 한 어린아이가 맹장 수술을 구경하고 싶어하니, 아버지는 물론 담당 의사까지도 놀란 것은 당연했다.
몇 분간의 실랑이 끝에 나는 결국 수술 가운과 마스크를 덮어쓰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 때의, 맹장을 제거하는 수술 과정과 피투성이가 되어 세심하고 노련한 칼질을 하던 의사를 옆에서 뚫어지게 쳐다보며 느낀 신기로움과 경이로움, 그리고 짜릿한 흥분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피라면 당장 줄행랑을 놓거나 메슥거림으로 기절할 정도인 우리 가족은 그 때부터 나를 돌연변이라고 했다.
그 당시 내가 결정한 ‘나의 인생 계획’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6년 동안의 초등학교 생활, 또 6년 동안의 중 · 고등학교 교육 과정, 그리고 4년 동안의 미국의 일류 대학 생활, 의학과 음악을 복수 전공한 뒤 최고의 의과 대학원을 4년에 마치고 독일로 음악 유학을 간다. 그 후 결혼은 때와 사람을 보아서 스물여덟이나 아홉쯤 천천히, 그리고 자식은 한둘쯤 두는 것이 좋겠지. 의사 생활을 하며 어려운 사람을 공짜로 진료해 줄 거야. 또 종종 음악 연주회를 열어 멋진 음악을 선사해야지…….’
<법정> 24화. 그 눈매들
썰렁한 이 겨울의 마루턱에서 오던 길이 되돌아보이는 세모(歲暮). 어쩔 수 없이 또 한 해가 비슬비슬 자리를 뜨려고 한다. 우리들 생애로 허락받은 그 한해가 사라져가는 것이다. 갈 길은 아직도 먼데 해가 저물고 있다는 나그네의 안타까운 감회가 따른다.
지난 한해 동안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어둡고 궂은 일은 말고 밝고 좋은 일만을 떠올리고 싶다. 눈을 감는다. 선뜻 몇가지 눈매들이 떠오른다. 그렇다. 나는 이 눈매들로 하여 옆구리께가 허전해지려고 하는 1973년을 채우리라. 떠나가는 그에게 등을 툭툭 치면서 잘 가라고 안녕을 보내리라.
얼마 전 서울대학교 불교학생회 동계 수련대회가 전남 송광사에서 있었다. 한주일 동안 새벽 세 시에 기상하여 밤 아혼 시 취침 시간까지 승가의 일과에 따라 정진하는 수련이다. 그러니까 기한부로 출가하여 수도생활을 하는 것. 하루 다섯 시간 좌선을 하고 오전과 오후로 강론을 듣는 것이 일과의 중심이었다.
비기한부 출가승에 못지않게 진지한 자세로 한결같이 정진하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속으로 크게 감동했었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사는 오늘날 불교와 사회의 단절 현상을 어떻게 연결시켜서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불식시키고 사회 정의의 구현에 기여할 것인가에 있었다.
안개 속에서 묻혀 깨어날 줄 모르는 기성 불교도인 우리로서는 참괴(慙愧)의 염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들의 티없이 맑은 그때 그 눈매들을, 슬기에 찬 그 눈매들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러한 눈매는 깨어 있는 인간 정신의 증표일 것이다.
수련기간중 타대학의 교수와 학생 간부들이 날마다 그곳을 지나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똑같은 이 사회의 교수와 학생들인데 ‘산업시찰단’인 그들의 눈에서는 밝고 슬기로운 빛을 볼 수가 없었다.
수련대회에서 돌아오는 도중 나는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눈매를 보았다. 그것은 시골 장터에서 목격한 어질고 선량한 농사꾼의 눈이었다. 올망졸망 보따리와 광주리를 이고 나와 장을 보고 있는 그들의 눈매에서 까맣게 잊어버린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닛적 눈을 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도시의 횡단보도나 버스간에서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은 성스러운 눈이다. 그러한 눈들은 자기 허물밖에 모른다. 수탈을 당하고 가난해도 자기가 복이 없어 그런 줄 알지 구조적인 측면을 넘어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하늘을 우러르고 흙을 소중히 여기면서 사는 그들은 오직 대지의 신의를 믿을 뿐이다.
한 할아버지께서 길을 물었더니 어찌나 친절히 가리켜주는지 묻는 쪽에서 미안할 지경이었다. 도시인에게 길을 물어보라. 외마디로 대답하거나 ‘몰라요’ 하고 싸늘하게 돌아서버린다. 이런 이들이 세련된 현대인이라고 자처한다. 오늘의 도시인은 마땅히 시골에 찾아가 잃어버린 눈을 받아와야 할 것 같다. 그토록 어질고 선량한 눈매를 보고 어떻게 비리를 행할 수 있을까. 과보(果報)가 있지, 천벌이 있지.
또 하나의 눈매. 그것은 불타는 눈이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열정의 눈. 지난 26일 밤 민족학교 주최로 대성빌딩 강당에서 ‘항일문화의 밤’이 열렸을 때, 거기 와본 사람이면 다 알겠지만 복도건 연단이건 입추의 여지없이 꽉 들어찬 그 많은 청중들, 거기 하나같이 타오르던 그 눈매들. 그것은 증오의 눈이 아니라 사랑의 눈이었다. 조국애에 뜨겁게 달아오른 사랑의 눈이었던 것이다. 어느 일터에서고 우리는 요즘 그러한 눈을 볼 수가 없다. 수초(水草) 그늘에서 몽롱하게 졸고 있는 어안(魚眼)은 많아도, 안에서 생명이 연소되며 내뿜는 불타는 눈은 보기 드문 세태이기 때문이다.
1973년! 돌아볼 것도 없이 우리 이웃들 모두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아온 그러한 한해였다. 그같은 세모의 착잡한 길목에서 이대로 주저앉아버릴 수 없는 것은, 맑고 선량하고 불타는 그 눈들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맑고 선량하고 타오르는 눈은 굳이 ‘한국적인’ 눈일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이면서도 본질적인 눈이다. 이 보편적인 눈이 인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를 당당하게 직립보행(直立步行)케 하지 않을까.